“사장님도 사모님 만날 때 말 안 했잖아요.”
“크흠, 그건 상대가 연예인이잖아. 비밀로 해야지. 근데 민철이는 아니잖아.”
“그것도 그러네요.”
“근데 반년 정도 만났으면 결혼 이야기로 결판이 날 거 같은데.”
“그렇게 쉽게 될까요?”
“뭐, 남녀 사이는 모르는 거니까.”
재석이 남녀 사이는 모른다고 말했지만, 그 모른다가 전혀 다른 형태로 충격을 주었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민철이 조용히 재석에게 청첩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
“저 결혼하게 됐습니다.”
“응? 전에 나한테 보여 준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청첩장부터 내밀다니 정말 못됐네.”
“그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제 송근석 만나서 이야기 들었는데 반년이나 됐다면서? 근데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었어.”
“큭!”
제대로 갈굼을 당하는 민철이었지만, 재석이 그 뒤에 한 말은 대단했다.
“결혼식장 잡히면 말해. 축의금 두둑하게 넣어 줄게.”
“예, 선배!”
재석은 최민철의 결혼식 날, 통 크게 축의금으로 300만 원을 냈다.
물론 그날 민철이 그걸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돈 계산을 할 때 전화가 왔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많이 주실 줄이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아닙니다, 선배님.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민철은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난 뒤, 신혼여행을 떠났다.
재석은 자리를 비운 민철을 대신해 회사의 대소사를 직접 총괄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와 매니지먼트 둘 다 관리하는 건 확실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래도 민철이 돌아와서 해 줄 일을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그래도 한동안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재석이 야근을 하던 그때, 민경이 그를 위해 도시락을 들고 찾아왔따.
“민경아, 힘들게 왜 왔어.”
“분명 밥도 못 먹고 일하고 있을까 봐.”
“고마워.”
잠시 후 일을 끝내고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어?”
“그래, 집에 가자.”
“민철 씨 언제 와요?”
“내일 출근이야. 그러니 나도 오늘로 끝이지.”
민철의 신혼여행 동안 해야 하는 일을 대신해 주었고 그것도 이젠 끝이다. 이제 다시 분업화된 일을 진행할 것이다.
“아이고, 이제 고생은 민철이한테 잔뜩 시켜야지.”
신혼여행을 다녀온 민철은 늦은 시간까지 그간 있었던 일을 파악해야 했다.
재석은 드라마 제작사에서 보내온 대본을 보면서 이제 때가 됐다고 인지했다.
“깊게 뿌리 내린 나무.”
굉장한 이슈를 만든 드라마였다. 극 중 배우들 모두가 영화, 드라마에 사방으로 출연했다. 인기 없는 배우에게는 인기를, 활동 없었던 배우에게 다시 활동하게 만드는 신호탄이 된다.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배우들에게는 더 큰 인기를 주었다.
“그래, 딱 맞게 왔네.”
재석은 이 드라마에 어떤 사람을 쓸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핵심 배우들까지.
“그래, 일단 들어온 배역은 두 개. 나머지는 흐음…….”
고민해 봤지만,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조연 자리나 노리자고 다른 배우들을 쓸 수는 없었다.
“급 맞추기 참 힘드네.”
재석이 보유한 배우들 대부분은 주연급이다. 미래의 주연급들도 있지만, 지금 당장 주연으로 쓰지는 못한다.
“어렵네.”
자신의 배우를 더 투입하고 싶지만,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냥 가던 대로 가야겠네.”
재석은 ‘깊게 뿌리 내린 나무’의 대본을 신지경과 도중기에게 보냈다.
두 사람은 제안을 승낙했다.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퓨전 사극에 관심을 보였다.
신지경은 사극을 해 봤기에 자신 있어 했고, 도중기는 조선시대 퓨전 사극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새로운 연기에 도전한다는 것이 꽤 괜찮아 보였다.
둘의 의사는 감독에게 전달되었고 감독은 만족스러워 했다.
감독은 따로 회사에 찾아와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이고. 감독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닙니다. 제이이브에서 어려운 결정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 제작사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실질적으로 두 배우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배우들로 보일 것이다.
“여기 주인공에 한중석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아, 알고 계셨군요. 사실입니다. 캐스팅에 성공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한중석이다. 이도 역으로 제대로 히트를 치면서 세종대왕 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가 되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분이 우리 회사에 왔으면 좋겠지만…… 어렵겠죠.”
“하하하. 사장님, 욕심이 많으십니다. 그렇게 유명한 배우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욕심을 더 내시다니요.”
“하하, 그렇습니까?”
재석은 웃으면서 그 상황을 넘겼지만, 솔직히 한중석에게 관심도 없다.
“그것보다, 캐스팅이 생각보다 순조로운 것 같은데 언제 촬영에 들어가십니까?”
“아직 준비가 덜 끝났지만, 7월 말에 시작할까 합니다.”
“흐음, 그 정도면 문제없을 것 같네요.”
“배우들 스케줄이 많은 모양이네요.”
“아니, 많진 않습니다. 다만, 저희 회사에서 미국으로 진출시키려는 배우들이 좀 있습니다. 이미 한 명은 성공했죠.”
“알고 있습니다. 아내분이 미국 드라마에 진출했고, 거기서 꽤 좋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걸요.”
워킹데스는 한국 방송 관계자들에게는 관심도 높은 드라마가 되었다.
“다른 드라마라…… 정말 기대됩니다.”
“뭐, 솔직히 기대는 안 합니다. 열심히 하겠지만, 민경이처럼 오디션 캐스팅이 될지 알 수 없는 게 걱정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캐스팅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시리즈물로 나온 드라마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그 시간 동안 얼굴을 내비치니까 말이다.
“나중에 미국에서 영화 제작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건 저도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쪽에 들어가는 돈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만약 하신다면 저도 한자리 끼워 주시죠.”
드라마 감독도 영화판에 뛰어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기회가 된다면 해 보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해 보죠.”
재석은 인사치레하고 그곳을 나왔다. 이제 이쪽은 그가 직접적으로 신경 쓸 일은 없다.
“그래도 배우들 쪽은 어떤지 한 번 보자.”
아직 계약서를 쓰기 전이니, 이들의 연기가 어떤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했다.
재석은 도중기에게 이번 퓨전 사극에 대해 물었다.
“주인공은 아니고 젊은 세종이야. 그것도 몇 화 하지도 않고 끝나는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제 뒤로 한중석 대선배님이 출연하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근데 실질적으로 만날 일은 거의 없어. 회차가 아예 다르거든.”
“그래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다음에 다른 작품으로 주연 자리를 꼭 만들어 줄게.”
“괜찮습니다.”
한동안 드라마 출연이 뜸했던 그였지만, 그사이 연기 연습을 맹렬히 했다. 감정적인 연기도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 줬다.
“그럼, 기대할게. 드라마에서 확실히 보여 줘. 과거와 다른 너의 모습을.”
“네, 사장님.”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이제부터 도중기는 입대 전까지 열심히 연기 활동을 펼칠 것이다.
‘군대 다녀온 뒤에도 봐야겠지.’
전역 후 새로운 작품은 대륙을 강타하며 새로운 한류스타로 활약하게 된다.
“드라마 촬영할 때 내가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때쯤이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 하니까.”
“괜찮습니다, 사장님.”
“그래, 잘해 보자.”
* * *
재석은 영화 제작사에서 올라온 정산 내역을 받았다.
“류태룡이 출연했던 영화 수익이 100억이 안 됐네.”
순이익은 약했지만, 배우들 출연료를 정산하고 나온 금액이다. 거기에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 ‘도적들’은 영화 개봉 일정을 재석이 원하는 시기에 맞추느라 내년으로 밀렸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어떤 영화를 제작할지 고민했다. 그때 상을 탔다는 신인 감독이 조심스럽게 시나리오를 전달해 주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영화제에서 상을 탄 감독이라고?”
“예.”
“어떤 영화제인데.”
“미쟝 단편영화제에서 대상 수상자라고 합니다.”
“대상 수상자라…….”
재석은 대상 수상자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약간일 뿐이었다.
한 번 흥행작을 만들었던 감독이라고 한들, 계속해서 모든 영화가 대박이 나는 건 아니었다.
그 유명한 봉도준 감독도 그동안 만든 영화가 모두 성공한 축에 속하기는 하나, 모두 대박이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어디 보자.”
재석은 시나리오를 보고 어떤 영화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하, 이 영화군.’
영화 울프보이였다.
‘도중기의 대박 작품. 반보영의 새로운 흥행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이 영화의 특징은 두 사람의 비주얼이 소년 소녀 같아서 영화 내용과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관객 반응도 좋았고 흥행 성적이나 투자금 비율상 꽤 좋은 기록을 남겼다.
‘이건 아주 착한 작품이지. 돈 적게 들고 대박 났던 작품.’
그런 감독이 자신을 어필하면서 내놓은 걸 보면 자신 있는 작품이라는 거다.
재석은 시나리오를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알던 내용이 아니야.’
700만 관객들이 봤던 내용이 아니었다. 처절하고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흐음, 이 감독 내일 볼 수 있게 연락 좀 넣어 봐요.”
“네, 사장님.”
다음날 재석은 울프보이의 감독 조진기를 대면했다.
“감독님, 반갑습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아, 솔직히 이 영화 시나리오에 대해서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말씀 주십시오.”
“결말이 너무 비극적입니다. 진행도 처절하고요. 이런 식은 관객이 좋아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내용을 좀 덜 처절하게 너무 비극적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아름다운 비극입니다. 슬퍼도 위안을 받을 수 있게요.”
“아름다운 비극…….”
“이건 요즘 사람들에게 안 먹힙니다. 제대로 된 상업 영화를 찍으려고 하신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고민해 주세요. 저희와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내용 수정은 필수로 거쳐야 합니다. 물론 감독님 손에서요.”
재석은 내용을 다 알고 있지만, 조언 선에서 멈출 생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을 댄다면 감독에게 반감만 살 뿐이다.
‘단편 영화제 대상을 받은 감독이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곤란하겠지.’
“그런데 아름다운 비극이라는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어려울 것이다. 비극을 아름답게 꾸며야 하니까. 하지만, 재석은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말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불쌍하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거죠. 모성애 많은 여자 캐릭터가 되죠.”
“모성애라…….”
조진기 감독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여기 책상 좀 잠시 빌릴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자리 하나 정도는 있으니까요.”
“그럼, 노트북으로 재작업하고 싶습니다.”
조진기 감독은 생각나는 걸 곧바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같았다. 재석은 자리를 만들어 줬고 그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작업을 시작했다.
‘퍼포먼스인가, 아니면 실제로 저런 건가?’
재석은 조진기 감독의 정확한 성격을 몰랐다.
내용이 얼마나 바뀔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전처럼 처절하게는 아닐 터.
“…….”
재석은 그가 작업하는 걸 놔두고 외근을 보러 나갔다. 미국을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퇴근할 때쯤 다시 회사로 돌아왔는데 조진기 감독은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사장님. 점심은 먹었고 저녁은 아직입니다.”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볼 수 있을까요?”
“예, 보시죠.”
감독은 선선히 자리를 비켜 주었고 재석은 그 내용을 읽었다. 영화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역시, 감각 있는 감독은 맞군.’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진기 감독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저희와 영화 작업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