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설마요.”
“호호호, 그거야 모르지. 패션 쪽에서 성공하면 나이는 상관없어.”
민경은 주명희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져 재석이 찾아왔다.
“이제 자자, 명희도 내일 학교 가야지.”
“아, 아…….”
아쉬운 명희는 앙탈을 부렸다.
“그냥 조금만 있다 갈게.”
“안 돼. 너 건강관리 확인한다고 했어. 거기서 조금이라도 이상이 나오면 출연 곤란해진다.”
에휴, 어쩔 수 없네. 내일도 이야기하자.”
결국 미국 스타일의 세세한 계약 내용 덕분에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음에 꼭!”
주명희는 ‘꼭’이라고 했지만, 민경의 촬영 일정을 생각하면 만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저녁에 잠깐 집에 돌아왔을 때뿐이다.
민경의 촬영이 이곳저곳에서 장소를 바꿔 가며 찍는 탓이었다.
그나마 스튜디오 촬영에서는 괜찮았지만, 종종 있는 야외 촬영은 너무 먼 곳까지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경아, 자. 집에 도착하려면 시간 좀 걸려.”
“네…….”
재석은 민경을 조금이라도 쉬게 해야 했다.
일본이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가 붕괴되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해일로 인한 피해까지 겹치자,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이 충격적인 재난은 곧 전 세계로 방송됐고, 수많은 사람들은 후원을 보내며 재난 피해자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으로 여행 가길 꺼리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일본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일본은 관광객 감소로 인한 추가 피해까지 입게 되었다.
* * *
주유가 찍은 영화 독아니는 거대한 이슈를 몰고 왔다. 제대로 된 고발 영화의 개봉으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정계를 움직이게 했다.
재석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영화가 이슈화되면 경찰 쪽에 연락을 취하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직원은 그의 말대로 경찰에 접촉하여 주유가 성범죄 예방 홍보 대사로 임명되었다.
“후우, 힘들다.”
주유는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쉴 틈 없이 바빠졌다. 무려 5개 브랜드의 전속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까지 더해져 6개가 되었으니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까지 생각하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창식아, 한국 스케줄 끝나면 어디야?”
“중국 이틀 일정입니다. 그것도 꽉꽉 채워서.”
“아, 쉬고 싶다.”
“그러지 않아도 사장님이 미리 언질을 주셨는데, 이번 중국 일정 끝나고 일주일 정도 휴가 내셔도 된대요.”
“휴가?”
휴가라는 말에 주유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거 진짜지?”
“예. 미리 계획해 놓은 거라 취소는 없고, 스케줄도 휴가 일정 뒤로 만들었어요.”
“와, 역시 형님.”
주유는 재석이 소속 연예인 휴식까지 미리 계획해 놓고 일을 진행했다는 것을 알고 감탄했다.
“그럼 이번에 나 해외여행 가도 되지?”
“예, 근데 일본은 안 되는 거 아시죠?”
“미쳤냐. 지금 일본을 가게. 저 멀리 있는 유럽으로 갈 거야. 너는 휴가 있냐?”
“네, 저도 휴가 받았어요.”
“그럼 나랑 같이 유럽 가자. 비행기 삯은 내가 낼게.”
“진짜요? 그러면 당연히 가야죠.”
주유의 매니저는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휴가가 생기자 둘은 유럽으로 도망치듯 가 버렸다.
영어 회화를 익힐 것을 강조하는 제이이브이기에, 주유와 주유의 매니저는 둘 다 꾸준히 영어를 공부를 해 왔다.
덕분에 영어 회화가 능숙했고, 두 사람은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원활히 소통하며 유럽에서의 휴가를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었다.
한편 재석은 미국에서 촬영을 즐기고 있었다.
“후우, 미시시피 하류 지역은 참 따뜻하네.”
미시시피 강은 미국 초창기 시절에 가장 중요한 해상교역로의 연결점이었다. 지금도 남부 지역의 중요 거점이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더웠다. 겨울에는 눈도 내리지 않는 동네다.
“북쪽은 눈이 내릴 텐데 여기는 푹푹 찌네요.”
습도가 높은 지역이라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지만, 화면에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좀비를 피해 움직이느라 힘들어하는 걸로 보이니 말이다.
거기에 민경은 익숙한 연기였기 때문에 무리 없이 일을 해냈다.
이제 그녀의 영어 발음은 현지인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그래서 동료들도 민경에게 부담 없이 말을 걸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민경은 빠르게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었다. 말이라는 건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법이니 말이다.
대화가 통하자 민경은 자신감이 늘었고, 다른 배우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한국계 미국인인 스티븐 킴은 민경과 재석이 미국에 있다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한국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같이 출연해서 정말 좋아요.”
스티븐 킴은 대부분의 대화를 영어로 했다. 하지만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으면 한국어를 섞어 말하기도 했다.
“저도 그래요.”
“한국에서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정말요? 여기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당신이 아시아에서는 상당히 유명하니까요.”
스티븐 킴은 부모가 한국인이라 한국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호호호, 인기 있죠. 그래도 월드 스타들만 할까요.”
“당신도 충분히 월드스타입니다. 미국에서도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꽤 많아요.”
스티븐 킴의 이야기를 듣고 민경이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기가 생겼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민경은 그 인기를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 미국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니, 미국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보는지 전혀 몰랐다.
“흐음, 전혀 모르겠어요. 절 아는 사람도 못 봤고, 팬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지금은 적지만, 곧 많아질 거예요. 이번 시즌이 끝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스티븐 킴이 그리 이야기했지만, 민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인기를 느낄 새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경험할 일은 없겠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석은 홀로 생각에 빠졌다.
‘스티븐 킴의 말이 맞지만, 민경이 그걸 느낄 일은 없어. 다만 영화라면 느낌이 다를 거야.’
그녀가 미국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다른 경로를 거쳐야 한다. 아직 재석은 그 경로를 찾기가 어려웠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제작진의 말에 배우들은 본인의 위치에 자리했다.
“액션!”
촬영이 시작되었다.
늦은 밤이 되자 촬영이 끝났고, 재석은 민경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갔다.
“아우, 힘들어.”
“오늘 고생했어.”
재석은 피곤한 민경의 몸을 마사지해 주면서 피로를 풀어 주었다.
피로가 조금 풀린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재석을 침대에 눕혔다.
“이번에는 오빠가 마사지 받아야지.”
“응?”
재석은 민경이 자신의 몸을 주물럭거리며 마사지해 주자 깜짝 놀랐다.
“으으으, 왜 이렇게 시원해.”
“이거 다 오빠한테 배운 거야.”
민경의 손길은 의외로 숙련된 마사지사 같았다. 손가락 힘도 좋았고, 어디를 눌러야 시원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마사지를 받고 나니 재석은 온몸에 힘이 풀리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오빠, 자?”
“…….”
재석은 대답이 없었다.
“고마워, 오빠. 항상 날 위해 이렇게 고생하고.”
민경은 재석의 볼에 입맞춤했다. 그리고 이내 옆에 누워 같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재석은 김명진이 보낸 메일을 발견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작년에 이슈화되었던 ‘꼽등이 기생충’을 영화화하는데, 그 출연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슈라…….”
재석은 김명진의 성격이 이런 이슈에 맞춰 흥행을 노리는 배우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인기가 있어야 연기자로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는 건 변함없다.
“자신의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사람이야. 이슈로 흥행몰이를 하고 싶진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살이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석은 메일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고민하지 말고 출연해요. 거기에 출연한다고 해서 손해 볼 일 없으니까.
김명진은 재석이 보낸 메일로 고민이 깔끔하게 사라졌고, 곧바로 출연을 결심했다.
그 외에도 미국 촬영 중 한국에서 보고가 드문드문 올라왔지만, 대다수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 후 제작사 쪽에서 원작이 있는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 원작은 바로 광해군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거다!”
영화 ‘광해, 두 명의 왕.’ 타이틀이 재석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원래 좋은 원작 중 몇 개는 정말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는데, 재석이 미국에 있을 때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재석은 당장 대본을 만들 작가를 모집했다. 원작자가 참여해서 작품 대본을 쓰게 만들었다.
그리고 완성된 1차 대본을 미국에서 받아 보았다.
“오빠, 이게 뭐야?”
“영화 대본.”
재석이 직접 대본에 관여해서 작품의 방향성과 내용 수정을 지시했다.
회사에서는 사장의 지시에 발 빠르게 내용이 수정되면서 2차, 3차에 걸쳐 대본이 완성되었다.
대본이 완성되기 무섭게 촬영 계획이 세워졌다. 촬영 장소도 확실하게 잡히면서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캐스팅에는 재석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원작대로 할지 아니면 새 사람을 꼽을지 고심했지만, 일단, 회귀 전 그대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메가폰을 잡을 감독 찾는 것도 일이었다.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사장님, 이거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충무로에 있는 감독 중 절반이 지원했습니다.)이쯤 되면 제이이브에서 작품을 하면 자연스레 유명 감독이 된다는 공식이 성립될 수준이었다.
“면접 전부 녹음해서 나한테 보내.”
(예, 사장님.)
마지막 검사는 재석이 직접 참여해서 내용을 완벽히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3주 정도 지나자 면접 내용이 담긴 CD를 받아 볼 수 있었다.
감독의 이름과 얼굴이 나왔다. 카메라 앞에 선 감독들은 대기업 임원 면접을 보는 것처럼 자신이 어떻게 이 영화를 찍을지 그 내용을 이야기했다.
개중에는 이름 있는 감독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신인들도 있었다.
감독도 두 부류로 갈렸다. 하나는 이대로 가는 쪽과 각색을 좀 더 하겠다는 쪽이었다.
각색한다는 사람은 정확히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대본을 고쳐보겠다는 것이다.
역사적 고증에 초점을 맞춘 이들도 있었고 소설로써 각색하겠다는 이도 있었다.
“흐음, 정말 각양각색이네.”
감독들의 이야기가 담긴 것들을 정말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재석은 몇몇 감독을 추려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국으로 갈 결심이 서자 재석은 민경에게 이야기했다.
“다시 한국으로 가?”
“응,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떨어지는 거 싫은데.”
민경은 재석과 붙어 있고 싶었다. 남편이 저 멀리 가는 게 싫은 거였다.
“걱정하지 마. 길게 있을 거 아니야.”
“아이, 그래도 갑자기 한국에 가니까…….”
민경은 살짝 투덜거림이 있었지만, 그래도 재석을 못 가게 하진 않았다.
재석은 그렇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몇 명의 감독들에게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해서 직접 면접을 하겠다고 전달했고 그에 따른 일정도 잡았다.
즉, 2차 면접을 하며 세세한 작업 내용을 듣고 싶다는 거였다.
감독들은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본다는 말에 ‘이번이 진짜구나.’라면서 그간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준비하며 제대로 된 연출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재석은 공항에 도착하기 무섭게 바로 회사로 이동했다.
“지금 감독들 오고 있어?”
“예, 사장님. 지금 약속 시각에 맞춰 오고 있습니다.”
“좋아, 오면 바로 내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해.”
“예, 사장님.”
재석은 바로 사무실로 들어갔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되었다.
‘내가 봤던 게 최고가 아닐 수도 있어.’
재석은 그 확인 작업을 하고 싶었다.
* * *
재석은 여러 감독들과 일대일 면담을 가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개중에 다음 작품에서 대박을 친 감독도 있어서 미리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환진 감독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환진은 재석의 환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충무로의 그저 그런 평범한 감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흐음, 메가폰을 잡으신 작품 중에 설탕이 있네요.”
“예, 말과 관련된 영화로…… 내용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봤습니다. 나름 흥행 성적이 괜찮았던 영화로 알고 있습니다. 뭐, 최근 작품 하나 하고 있으십니까?”
“예, 저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