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40화 (140/152)

서류상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재석은 이환진 감독의 다음 작품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이 감독을 여기서 꼭 잡아야겠어.’

“다음 차기작으로 저희 회사 작품을 생각하고 오셨군요.”

“예.”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다음 작품에 관련된 시나리오가 있으십니까?”

“네?”

“지금 제 말은, 여기서 계획한 영화 말고 감독님이 따로 구상해 놓으신 작품이 있으신가 해서요.”

“하나 있습니다. 근데 이 영화보다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요.”

“허허허, 감독님. 저희 제작사에서 만든 과속삼대, 그거 충무로에서 본전 건지면 다행이라는 이야기가 도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천만 관객 찍었고, 이익도 어느 100억짜리 영화보다 더 잘나갔습니다. 일단 말씀해 주시죠.”

결국 이환진 감독은 조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바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이야기인데요. 약간 코믹과 바보 아빠의 애정을 그리는 영화입니다.”

“흐음, 그거 저희랑 하시죠.”

“네?”

“저희랑 같이하시죠. 대략적인 내용을 들으니 괜찮아 보이네요. 감독님이 직접 쓴 각본을 가지고 다시 오세요.”

이환진 감독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직접 쓴 각본을 가져오라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재석은 이 작품이 크게 흥행하리라 알고 있었다. 그 유명한 ‘9번방의 선물’이 말이다.

재석은 감독들과 직접 만나 촬영 계획, 연출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신중하게 나누었다.

그들 중 한 명만이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제가 각색해서 더 멋지게 만들겠습니다. 그에 따른 내용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텐데요.”

“열심히 하겠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추구직 감독님.”

재석은 변경된 각본을 보면서 추구직 감독을 다시 봤다.

‘생각보다 좋은데.’

추구직 감독은 회귀 전 이 영화의 감독이다. 그때도 그는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걸 추구하고 있었다.

‘내가 고친 걸 보고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거군.’

아니면 재석이 한 게 마음에 안 들거나.

‘일단 내용은 더 좋아.’

추구직 감독의 절실한 마음이 좋은 결과를 낸 것으로 생각됐다.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결과는 다음에 알려 드리죠.”

“감사합니다.”

재석은 감독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다른 감독들과도 면담을 이어 갔지만, 다들 추구직 감독보다 부족했다.

결국 추구직 감독이 선택되었고, 각색 작업은 원작자와 같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사이에 캐스팅 문제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문제는 캐스팅하고 있는 배우의 몸값이었다.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배우는 이병진이었다.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배우. 직원들은 비싼 출연료를 걱정했지만, 재석은 영화의 성공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우가 원하는 만큼 지급해도 된다고 지시했다.

그렇게 그를 캐스팅하면서 일이 빠르게 진행된 터라 재석은 미국에 머무르며 일을 처리했다.

“오빠, 다시 한국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렇게 급하게 갈 일은 거의 없어. 대부분 결제는 메일로 하고 있고 지시 사항도 메일로 하고 있지.”

직접 서류에 싸인을 할 일이 없다. 재석은 어떤 상황에서도 온라인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바뀌길 원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팀에서 만들게 했고, 직원들에게도 온라인 업무는 일상이 되었다.

“어디 보자, 이건 잘되고 있고, 영화도 내가 손댈 부분은 많지 않고.”

그야말로 알아서 굴러간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제 결제만 하는 사람 된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

대표라는 자리는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빠르게 반응해야 한다. 아무리 회귀를 했어도 그 순간에는 긴장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계획하는 영화는 계속 확인해야 해.”

“거기 직원들 많잖아.”

“그래도 힘들어.”

얼마 후 봉도준 감독이 미국으로 찾아왔다.

“형님, 갑자기 무슨 일로 미국까지 찾아왔습니까?”

“미국에서 제안을 하나 받았네.”

“제안이요?”

“영화감독 제안이야. 근데 원작이 프랑스 책이라 걱정이야.”

“형님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안이 많이도 오네요. 거기에 프랑스 원작이라뇨.”

“흐흐흐, 나 바쁜 사람이야.”

봉도준 감독은 정말 바쁘다. 회사에 소속된 감독이지만, 영화제 시즌만 되면 심사위원을 요청하는 기관이나 단체들이 많았다. 영화 쪽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다.

발에 땀이 나도록 영화 찍어서 국제 영화제에 뿌리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재석 동생이 한번 해 볼 생각 있어?”

“흐음, 영화 제작 도전은 좋은데…… 원작이 프랑스면, 제작은 어디서 합니까?”

“미국 영화제작사에서 뛰어들기로 했어.”

“그럼 합작 영화가 되겠네요.”

“그렇지.”

재석은 봉도준이 말하는 영화가 뭔지 알고 있었다. 장강호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미국 제작사가 참여하면 제작비가 막대하게 들어갈 겁니다. 한국 제작사에서 뛰어든다고 해도 돈 버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나도 잘 알아. 손해 안 보면 다행이겠지.”

봉도준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익을 내기 위해 영화사, 스크린, 해외 판권 부분까지 쉴 새 없이 계약해서 확장해야 하는 영화였다.

‘한동안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하는군.’

사서 고생해야 하는 영화였다. 물론 발로 뛴 만큼 이득을 얻긴 하지만, 홀로 감당하기에는 영화 투자 비용이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저 혼자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다른 배급사와 함께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재석은 수익과 위험부담도 같이 나눌 생각이었다.

“재석 동생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영화 흥행이 힘들까?”

“형님, 영화야 문제가 없지만 미국이 끼어들었다면 자본이 문제입니다. 영화 한 번 제작하는 데 수백억이 그냥 깨질 테니까요.”

봉도준 감독은 고민했다. 미국 배우들 몸값을 감당하며 제작하는 영화다.

절대 만만하게 볼 영화가 아니라는 거다.

“그럼 내가 직접 메이저급 배급사에 이야기해볼까?”

“형님이 직접이요?”

“그래. 제이이브에서 만드는 영화인데 배급사를 찾는다고 하면 분명 같이하자고 하는 곳이 나올걸. 거기에 나도 있고 말이야.”

“아뇨, 한국 배급사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한 방에 해결해 보죠.”

그 말에 봉도준 감독은 궁금증이 생겼다.

“어떻게?”

“일단 전화부터 하고요.”

재석은 가장 먼저 전화를 건 곳은 머블 엔터테인먼트였다. 머블은 더즈니에 인수합병이 되면서 사명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모든 주식을 더즈니가 쥐게 되었다.

재석의 주식도 더즈니 주식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가치 상승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머블의 현 부회장 아이작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이고, 아이작 씨.”

(갑자기 무슨 일인가, 그동안 연락도 없더니.)

“한동안 너무 바빴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다름이 아니라 안부가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회사 합병되고 돈 좀 만지셨죠?”

(돈 좀 벌긴 했지, 주식도 조금 정리했고 그래도 경영 때문에 골머리 썩을 일 없어서 더 좋아졌어.)더즈니가 지금의 경영진을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어서 누군가 은퇴하지 않는 이상, 현 경영 체계를 밀고 나갈 거다.

“그럼 내일 시간 됩니까?”

(마침 시간이 비긴 하지. 저녁 어떤가?)

“좋죠.”

재석은 아이작과 약속을 잡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형님, 내일 머블의 아이작을 만날 겁니다.”

“머블 그 머블 영화사 말이야?”

“네, 히어로 영화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는 회사죠.”

재석의 말에 봉도준 감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재석 동생이 언제 그런 거물과 연락하는 사이가 됐어.”

“좀 됐습니다. 예전에 투자한 돈은 수익이 매년 잘 나오고 있죠.”

“부럽네. 부러워.”

재석은 손을 휘휘 저었다.

“이쪽 주식 전망이 좋아서 넣은 겁니다. 그리고 많이 오르기도 했고요.”

정말 많이 올랐다. 원래 주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기뻐했지만, 재석처럼 주식의 액면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 당연히 더 좋아했다.

“그럼, 내일 저녁에 움직이죠.”

재석은 한국 배급사를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 배급사는 막대한 돈을 투자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재석은 봉도준 감독과 함께 아이작을 만났다.

아이작은 봉도준 감독과 구면인 듯,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시는 감독님 아닙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봉도준과 아이작은 두 손을 굳건히 잡고 악수를 했다.

아이작은 재석의 목적이 본인과 봉도준 감독의 만남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거 귀중한 시간을 남 소개 시켜 주는 데 쓰다니.”

“뭐, 어떻게 보내느냐의 차이겠죠.”

재석은 봉도준 감독을 보며 이야기했다.

식사가 나온 후 봉도준 감독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며 한국에서 찍은 영화에 대해 어필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아이작은 손을 흔들어 제재했다.

“내 주머니에서 돈 나올 일 없네. 보아하니 더즈니 관련 사람을 만나고 싶은 모양이군.”

아이작은 재석이 원하는 걸 빠르게 파악했다.

“그냥 바로 연락하지 그랬어. 그렇게 했으면 더즈니에 가서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만약 그랬다면 봉도준 감독은 메이저 배급사를 바로 찾아갔을 겁니다.”

“정말 찾아갔다면 문전 박대를 당했겠지.”

“그래서 아이작 씨를 찾은 겁니다. 그쪽 사람이 저희를 쫓아내지 못하도록.”

“아이고, 나한테 중요한 일을 떠맡겼네.”

아이작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재석의 소원 정도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 내가 연락해서 그쪽 관계자에게 연락해 주지.”

“감사합니다.”

“아니야, 어차피 그쪽에서도 자네는 꽤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는 재석과 봉도준 감독의 인상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며칠 뒤 봉도준 감독은 재석과 함께 더즈니 인물을 만났다.

“반갑습니다. 아아작 씨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우리 회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요.”

“예, 맞습니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입니까?”

“영화 이야기입니다.”

영화 이야기라는 말에 그는 한 가지를 물었다.

“혹시 전체 관람가가 가능합니까?”

더즈니 입장에선 아주 중요한 문제다. 더즈니는 그들만의 사업방침이 있었다.

“아쉽게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한번 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

“이거는 그냥 대충 통과 시켜 달라는 건데…….”

미국에서도 로비는 통한다. 물론 더즈니의 경우 영화에 관한 로비가 쉽지 않지만 말이다.

재석은 인맥을 통한 로비를 한 것이다.

“좋습니다. 이미 재석 씨에 관한 정보는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머블의 주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고, 인수 합병되면서 더즈니 주식을 가지게 되었더군요.”

“맞습니다.”

재석은 주식 상승의 달콤한 맛을 아주 잘 느꼈다. 영화는 승승장구하고 있고, 그에 따른 매출과 주식 상승은 더즈니를 즐겁게 만들었다. 더불어 재석도 즐거워졌다.

“주주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는 건 참 곤란한데 말이죠.”

“당신도 주주 아닙니까? 더즈니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주식 안 가지고 있는 사람 못 봤습니다.”

“크흠!”

더즈니 주식은 일평생 가지고 있어도 되는 주식이다.

“일단, 내용은 검토해 보죠.”

“전 검토가 아니라 투자를 원합니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형식상이지만, 거쳐야 할 건 거쳐야 합니다.”

“좋습니다.”

재석은 꾹 참았다. 그의 말대로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었다.

“그럼 결과는 최대한 빨리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돌아갔지만, 재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쉽게 되진 않겠어.’

봉도준 감독이 계획한 영화는 설원열차다. 지구에 다시 찾아온 빙하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멈추지 않는 기차를 개발했고, 모든 인류는 그 기차에서 생활한다. 조금 이상한 SF영화였다.

결과는 일주일 뒤에 도착했고 대답은 조건부 YES였다. 조건은 상업적인 내용의 추가였다.

“형님, 더즈니가 말한 대로 바꿀 수 있습니까?”

“한번 해 볼게. 원작과 내용이 좀 다를 수 있지만…….”

한국 출신 감독이 미국 메이저 배급사와 계약을 맺는 건 처음이다.

물론 이것도 재석이 인맥을 이용해 강제로 길을 뚫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는 봉도준 감독 몫이다.

봉도준은 상업적 요소를 갖춘 영화 각본을 만들 줄 아는 감독이다.

그러니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후우, 힘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