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잘나가니 몸값도 상승한다. 거기에 다음 시즌에도 출연료 상승이 약속되어 있었다. 물론 단서 조항이 붙긴 했지만, 드라마의 흥행 성적이나 민경의 연기력을 생각하면 문제없다.
“그럼, 나머지는 대본이 완성되면 바로 보내드리죠.”
“기다리겠습니다.”
계약을 했지만, 촬영 시작은 6개월 후였다. 이제 막 방영을 끝낸 드라마가 새롭게 준비하는 시간까지 생각해야 했다.
계약 업무가 완료된 뒤, 오랜만에 주명진과 그 딸을 만났다.
“왔어?”
“이야, 이제는 살 만한 집이 됐네요.”
“뭐, 그렇지, 여기서 최소 4년은 살아야 하니까.”
“걱정 마세요. 딱 10년 채워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안 한다. 나도 노년에는 한국에서 살고 싶어. 머나먼 타향에서 살고 싶지 않다.”
“자식들 때문에 미국에 계속 계셔야 할 건데요.”
“아들은 유학해도 난 돌아갈 거다. 남자는 알아서 잘 커야지.”
주명진은 뜻이 확고했다.
“그럼, 여기에 지내는 동안 후임이나 생각하세요.”
“민철이 있잖아. 여기서 몇 년 살다가 다시 한국 보내면 돼. 그사이에 여기 사업장을 확실하게 만드는 거고.”
“민철이가 여기에 쉽게 올지 모르겠네요.”
“올 거야. 지사장 한 번 해야지.”
지금 주명진은 지사장이지만 온갖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이제야 직원이 채용되고 관리하는 상태라서 처음보다는 사정이 나아졌다.
“근데, 여기에 보낼 한국 배우 리스트는 만들었어?”
“아직이요. 일단, 미국에 갈 배우의 의중을 물어보는 게 먼저겠죠.”
“뭐, 그렇겠지.”
스타라고 해도 한국에서 안주하는 사람이 있고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나중에 지원자 받아서 한번 오라고 해.”
“물론이죠.”
그때 민경은 주명진의 딸과 놀고 있었다.
“언니, 다시 봐서 너무 기뻐요.”
“요즘 학교는 어때?”
“음, 그냥 열심히 다니는 정도?”
“유학까지 와서 그냥 열심히 다니면 아빠가 참 좋아하겠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여기서 제대로 공부해서 한국에 가면 꼭 좋은 직장 구할 거니까요.”
“부모님 걱정 덜어드리게?”
“네.”
“생각보다 효녀네.”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금방 피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서 들어가서 쉬어. 내일 일찍 공항 가야 하잖아.”
“예.”
재석과 민경은 옆집으로 돌아갔고 주명진과 그 딸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국에 도착한 재석이 가장 먼저 접한 건 김조현의 인기였다. ‘해를 가진 달’의 인기는 그야말로 태풍과 비견될 정도였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시청률도 기록을 경신했다. ‘해를 가진 달’은 김조현을 진짜 스타로 만들어 줬다.
거기에 밀려드는 스케줄이 엄청났다.
“이제 진짜 스타가 됐어.”
재석은 김조현에게 마지막 스케줄이 끝나면 회사에 잠시 들르라고 전달했다.
김조현은 저녁 늦게 회사에 도착했지만, 그때까지 재석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김조현! 축하한다. 이제 진짜 스타가 됐어!”
“아닙니다. 전부 사장님 덕분입니다. 사장님 아니었으면 정말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간 연기 때문에 고생했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연기는 항상 도전이야. 그건 알지?”
“사장님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항상 열심히 할 겁니다.”
“그래, 그럼 됐다. 그렇게만 한다면 넌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을 거야.”
재석은 그렇게 격려했고 김조현의 계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조현아, 계약 조건 바꾸자.”
“네?”
“이제 스타가 됐으니 조건을 더 좋게 바꿔야지.”
“아닙니다. 아직 계약 기간이 좀 남았는데.”
“무슨 소리. 스타가 됐으면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지. 그리고 일본 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스타가 되어야지.”
재석은 김조현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사장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의 마음가짐이라면 충분해.”
재석은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그리고 김조현은 열심히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사장님은 날 아시아의 스타로 만들어줄 거야. 사모님처럼.’
민경은 아시아를 넘어 미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버렸다. 정말 연예계에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일본 중국을 넘어 아시아로, 거기에 그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으로 가서 활동하고 있다.
장강호도 영어를 공부하고 발음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도 미국이란 곳에 한번 발을 디뎌 보고 싶은 거였다.
나이 든 배우들도 능력만 갖춰지면 미국에 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활력은 열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만큼 미국 시장은 배우들에게 목표이자 희망이었다.
며칠 뒤 재석은 소속 배우들에게 이야기했다. 미국에 지사를 세웠고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참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중국과 다르게 미국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알렸다.
민경이 드라마에 캐스팅된 것도 거의 복권 당첨 수준이라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 욕구는 식지 않았다.
“하아, 열심히 공부했는데 미국에 가서 오디션은 봐야지.”
그래도 도전은 해 보고 싶은 모양인지 일정을 알아봐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주명진은 덕분에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오디션 일정과 작품을 세세하게 알려 줬다.
일부 젊은 배우들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각자 스케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움직이네.”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전체 소속 배우 중 30퍼센트가 미국행을 결정했다. 물론 각자 가는 날짜는 다르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도전!-
나이는 관계없었다. 그 안에 딱 한 사람, 재석이 주목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지경.’
그녀는 미국에 도전하겠다며 나섰다. 재석의 회사에 아역부터 시작한 연기자이면서 내적 외적으로 굉장히 성장한 배우다.
‘내가 가장 가능성 높게 보는 연기자야.’
영어 실력도 최고 수준이고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 미녀는 아니지만, 신비한 매력이 있는 여배우임에는 분명했다.
‘흐음, 근데 정말 될까?’
몇몇 드라마는 기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이 많다.
“이제는 정말 운이지.”
미국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이다. 그곳에서 성공하면 계속 가는 거고, 실패하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거다.
재석은 생각과는 달리, 도전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드라마 단역이라도 따고 본다.’
실로 무서운 의지였다. 나름 연기에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고작 단역을 따기 위해 간 것이다.
물론 주명진이 건져온 일거리는 조연이다. 연기력에 하자가 없는 사람들이라 영어만 되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이동 후 여러 오디션을 봤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한 번에 붙은 사람이 없어서 일을 구해오는 주명진 조차 어이가 없었다.
“아직 아시아 사람들은 안 되는 건가…….”
민경이 운이 좋았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신지경이 엉뚱한 곳에서 배역을 따 버렸다. 그것도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곳에서 말이다.
“어떤 드라마?”
“CW 방송사에서 이번에 새롭게 추진하고 있는 히어로 영화입니다. 그 시즌1에서 주인공의 서포트 역할로 캐스팅되었다.”
신지경이 당당히 그 역을 따낸 것이다.
“어떤 히어로 드라마인데.”
“다크 에로우입니다.”
“다크 에로우?”
재석도 알고 있는 미드다. 시즌도 길고 시청률도 잘 나온 드라마다.
“내가 직접 그곳으로 가야겠어.”
신지경이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황당한 곳에 붙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히어로 드라마라니.’
히어로 드라마는 출연을 확정하면 반쯤 고정 상태가 된다. 물론 시즌마다 각자의 이유로 하차하지만, 신지경이 맡은 역할은 하차와 거리가 멀다.
“사장님, 역할도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돕는 배역입니다. 계약도 시즌1만 하는 걸로 되었습니다.
“시즌1만 계약이라니 무슨 말이야.”
재석이 알고 있던 정보와 달랐다.
“원래 시즌1만 하기로 한 역할입니다.“
“그래?”
재석이 알기로 신지경은 평범한 직장에 다니지만, 각종 전자기기를 다루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소유한 역할이다.
“당장 대본이랑 계약서 가져와.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재석은 미국 지사에서 보내온 드라마의 대본을 보고 정말 별것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철저하게 다음이 없는 캐릭터잖아.’
재석은 깜짝 놀랐다. 정말 신지경이 역할은 시즌1에서 끝이었다.
‘이걸 바꿨단 말이야?’
재석은 내용을 보고 깨달았다. 회귀 전 배우가 이걸 엎은 거였다.
‘이번에는 신지경이 됐으니 지경이가 뒤집어야지.’
엎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면 확실히 해야 한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시를 내렸다.
“미국 비행기 표 끊어 놔. 일주일 뒤에 출발할 거야.”
“그렇게 급하게요?”
“그럼, 안 급해? 신지경이 미국 드라마에 캐스팅됐어. 그것도 꽤 중요한 역할로 말이야. 그러니까 가서 확인해야지. 그리고 다른 곳에 문제는 없는지도.”
재석은 생각지도 못한 걸 따낸 신지경이 놀라웠다.
“진짜 오묘해.”
재석은 앞날을 알 수 없는 현재 상황이 이렇게 좋게 흘러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벌써 두 명이야. 둘 다, 이렇게 진출해서 당당히 일을 따낼 줄이야.’
결국 재석은 신지경이 살고 있는 미국 집으로 이동했다.
“지경아! 너 대단하구나.”
“네? 뭐가 대단해요.”
“뭐긴 오디션이지, 히어로 드라마의 배역을 따냈다면서.”
“뭐, 거의 운이었어요. 그리고 민경 언니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면서 그쪽 제작진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그럴 거야, 너도 민경이 못지않게 신비로운 아이거든.”
“신비로움이요? 그냥 신비주의가 아니라?”
“지경아, 넌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신비로운 느낌이 있어.”
“전혀 몰랐네요.”
“그건 됐고, 캐스팅된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예, 사장님.”
재석은 그녀의 대본을 들고 이 캐릭터에 대해 신지경의 생각이 어떤지 듣기 시작했다.
신지경은 자신의 맡은 캐릭터에 대해 재석에게 들려줬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경이는 이 캐릭터를 엉뚱하고 멍하지만, 호기심 많고 똑똑한 여자로 보는 거지?”
“네, 아주 뛰어난 해커죠.”
“그럼, 어떤 모습이 어울릴까?”
“흐음.”
캐릭터의 내적 분석은 끝났지만, 외적 분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옷을 촌스럽게 입으면 멍한 느낌을 살릴 수 있을까요?”
“아니, 오히려 잘 입어야 해. 패션 감각이 없다는 표현은 없었으니까. 거기에 회사에서 일하는 여자잖아. 가장 무난한 오피스룩을 해야겠지.”
“좀 해커처럼 보이고 싶으니 안경도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화장은 덜 진하게 하고……. 그리고 지경아, 이것도 내 생각인데 말이야. 시즌1만 하고 하차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냐?”
“솔직히 아쉽긴 해요. 민경 언니처럼 오래 하고 싶어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오래 하면 좋지. 시즌5까지 가도 좋고.”
인기 방영 드라마는 시즌이 길면 길수록 좋다. 출연이 길어지면 그에 따른 인지도 상승도 노릴 수 있다.
여러 시즌으로 이어지는 드라마에 길게 출연하면 할수록 그에 따른 인지도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
물론 재석은 그다음도 노리고 있었다.
바로 영화였다. 미국 영화에 출연할 수만 있으면 그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다.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에 더 쉽지.’
그이 목적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신지경의 합격은 예상 못한 일이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지경은 코믹스에 나온 다크 애로우를 확인했다. 물론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캐릭터의 모습도 같이 찾아보았다.
하지만 며칠 뒤, 신지경의 캐스팅은 엎어졌다.
“뭐 이런!”
재석은 소식을 듣고 바로 제작사로 찾아가 항의했다.
“아니, 정식 오디션에 통과되어 뽑혔는데 그걸 뒤집다니요!”
오디션에 합격한 사람을 바꾸는 경우는 없다.
“그게, 뽑기는 했는데 더 좋은 사람이 생겨서요.”
“아니, 그럼 애초에 뽑지를 말던가!”
재석은 계속 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