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매니저-144화 (144/152)

“그렇게 됐습니다. 안타깝지만 저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없다니요?”

재석은 그 말을 듣고 오기가 생겼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는 겁니까?”

“뭐요? 그렇게 말하면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법대로 하죠.”

재석이 제작사를 나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로펌이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는데 그게 엎어졌다?”

“예.”

“증거 자료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제작사에서 보내온 오디션 합격 통지서였다. 그것도 회사로 팩스로 도착한 걸 보여줬다.

“그런데 더 좋은 배우가 나타났다는 말에 바꿨다는 거군요.”

“예, 심지어 구두로만 통보했습니다.”

“아주 좋은 소송거리군요.”

로펌의 변호사는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소송 절차에 들어갔다.

미국은 소송이 흔한 나라다. 당연히 일방적 계약 파기 소송에 대한 판례도 많았고, 로펌도 해당 경험이 많았다.

곧바로 각종 피해 보상에 대한 내용을 더해 소송을 진행했고, 그에 상대방도 맞소송으로 응대했다.

그렇게 법적 절차에 따라 일이 진행되면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건 신지경이었다.

“지경아, 미안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사장님이 왜 죄송해요. 전 괜찮아요. 나쁜 놈들은 저쪽이지, 사장님이 아니에요.”

신지경은 이런 일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재석에게 확실히 보여 줬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일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음에 미국에 다시 도전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재석은 승소를 의심치 않았다. 판결 역시 상대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액수는 한국 돈으로 30억이나 되었다. 제작사 측은 큰돈이 나가게 되자 고민이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제작사 측에서 사과하며 다시 신지경을 출연시키겠다고 나왔다. 그 돈을 내는 게 너무 아까운 것이다.

하지만 재석은 그 말을 순순히 믿기 어려웠다. 계약대로 한 시즌만 끝내고 신지경을 치워 버릴 수도 있고, 계약 이외에 방식으로 불이익을 가할 수도 있었다.

‘고민이네.’

다크 애로우는 두 자릿수 시즌에 도달한 미드다. 그 미드에 출연한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일이다.

‘불편한 자리에서 신지경이 잘 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없었다. 연기자도 사람이다. 그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올 가능성이 낮다.

“거절합니다. 분명 당신들이 만든 드라마는 굉장히 인기를 끌 만한 드라마지만, 이미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피해 배상금만 받고 끝내도록 하죠.”

결국 제작사 쪽에서 돈을 지불해야 했다.

좋은 드라마지만, 사이가 틀어진 곳과 드라마를 찍을 이유는 없었다.

‘아쉽지만, 다른 드라마를 찾아야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지경에게 돈 때문에 다시 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매니저라면 배우가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 일은 해프닝처럼 지나갔지만, 그래도 의미는 있었다. 역시 미국은 만만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한 번 실패한 배우들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성공한 전례가 있었기에 가능성 있는 배역을 찾기 시작했다.

거기에 봉도준 감독은 장강호를 미국으로 불러 배역을 정해 줬다.

재석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미국 진출이 더 어려워지고 있어.”

재석은 아시아까지는 그나마 수월하게 진출했지만, 미국부터는 정말 막막한 상황이었다.

“어려워.”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모든 게 쉽지 않았다. 지사가 직원 몇 명에 그치는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우.”

그래도 민경이 계속 시즌을 이어가는 상황이라. 현재 상황을 유지할 명분은 있었다.

“다음은 이대로 안 물러선다.”

다음부터는 제작사가 이런 캐스팅 장난을 절대 못 치도록 할 거다.

“어디 보자…… 이 회사 다음 작품이 뭐였더라.”

재석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다크 에로우를 만든 지주회사를 떠올렸다.

“DD코믹스.”

핵심은 여기지만, 하청을 받아 움직이는 제작사도 있다. 여러 드라마 시리즈를 제작하니 한 회사가 전부 다 만들 수는 없었다.

“다음에는 다른 회사가 하겠지.”

꾸준히 다음 작품이 나올 테니, 히어로 물에 개입할 이유야 충분했다.

*  * *

재석은 한국에서 새로운 드라마 대본을 접했다. 도중기 앞으로 온 드라마였다.

“도중기가 요즘 바쁜데……, 이게 오네.”

하지만, 무조건해야 하는 드라마였다. 시청률과 배역을 생각하면 절대적으로 해야 하는 역할이다.

“일단, 내용부터 전달해야겠지.”

재석은 도중기의 매니저를 통해 드라마, ‘멋진 남자’의 대본을 보냈다.

그리고 모두 읽은 뒤, 회사로 찾아오라는 지시도 같이 내렸다.

하지만, 도중기가 재석을 찾은 건 일주일 뒤였다.

“좀 늦었네.”

“준비하느라 늦었습니다.”

준비라는 말은 도중기가 재석이 뭘 원하는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준비해 온 게 뭔지 궁금한데.”

도중기가 준비한 건 연기였다. 그냥 연기가 아니라 그가 맡아야 할 캐릭터를 온전히 연구해 왔다.

“와우, 일주일이란 시간이 길지 않는데 대본까지 외워온 건가?”

“절반 정도입니다.”

“절반도 대단해.”

충분히 놀랄 만했다.

“그럼, 다음에는 감독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야기할 때군.”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굳이 갈 필요 없어. 할 일 많은 사람이 내가 일하는 곳까지 따라오는 것도 그렇지.”

도중기는 재석의 뜻에 따랐다.

며칠 뒤 드라마 제작사 측 사람과 만났다. 사무실에서 재석은 도중기가 준비됐다고 말했다.

“준비?”

“물론입니다. 제가 대본을 건네줬을 뿐인데, 일주일 뒤에 대사와 캐릭터 분석을 끝내고 연기로 보여 줬습니다.”

“오호, 저희 드라마 출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가 확실하군요.”

도중기가 보여 준 열정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그럼, 여기서 계약할까요?”

“일단, 출연료 협상부터 해야죠.”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네요.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금액은 회당 이천입니다.”

“흐음, 나쁘지 않군요.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수준도 아니고요.”

“이것도 많이 챙겨드리는 겁니다.”

“뭐, 그렇겠죠.”

도중기가 찍은 영화는 아직 개봉 전이다. 이미 스크린은 다 잡아 둔 상태라 드라마 방영 중에 영화도 같이 개봉할 예정이다.

‘좋아, 영화와 드라마 두 가지 모두 잡겠어.’

이 두 개가 한꺼번에 터지면 볼 만할 거다. 도중기라는 이름이 머리에 각인이 될 정도로 큰 화제성을 만들 것이다.

“조금만 더 쓰시죠. 준비가 잘된 배우인데 돈값은 충분히 할 겁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제작비에 한계가 있어요.”

제작사도 제작비 중 일부는 보험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그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후우, 그럼 다음에는 그 정도 출연료로 도중기 씨를 부려 먹을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물론이죠. 좀 더 높여드려야죠.”

제작사 측 사람은 백만 원 정도 인상을 예상했지만, 그것이 빗나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다.

‘이제 몇 개월 안 남았어. 도중기는 이 드라마만 열심히 하면 돼.’

계약이 성사되자 도중기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주연을 맡은 게 꽤 부담되었다. 그것도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이니 말이다.

“이번 드라마 좀 힘들 수 있어. 그래도 이것만 끝나면 당분간 편히 쉬어라. 그동안 열심히 달렸다.”

“아닙니다. 더 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좀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해. 이미지 소모도 있고, 그사이 부모님에게 제대로 알려야지.”

“부모님이 제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자주 보고 계셔서 걱정 없습니다.”

“보영이는?”

“헤헤헤.”

보영이 이름만 나와도 도중기는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둘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는 모양이다.

‘하아, 저 둘 언제까지 갈까.’

재석은 도중기가 보영이 아닌 딴 여자와 결혼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여자와 결과는 딱히 좋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이혼이란 낙인이 찍힌 거다. 세상 사람들은 돌싱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건 좋게 포장만 했을 뿐이다.

“차라리 내가 더 밀어줘?”

지금부터 둘 사이를 진하게 만든다면 도중기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래, 한번 시도해 보자.”

재석은 둘의 관계를 진척시키기 위하여 휴가를 내주었다.

하지만 반보영이 일본에서 잘나가는 연예인이 되어 버렸다. 한국 일정이 없으면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정을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바쁠 때는 전화만 하지만, 쉬는 날에는 직접 만나는 걸로 알고 있다. 생각보다 쉬는 날이 많다. 반보영이 의외로 한국 스케줄이 많지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러브콜이 많아서 역전 현상을 종종 겪고 있었다.

재석은 이참에 도중기를 일본에 보냈다. 반보영이 일본 스케줄을 하고 있는 와중에 몰래 그녀를 만나게 한 것이다.

“어머, 중기 오빠. 어떻게 왔어요?”

“사장님이 배려해 줘서 왔어.”

“진짜요?”

“그래, 요즘 사장님이 우리 사이를 팍팍 밀어주는 것 같더라니까.”

“아, 사장님이 잘해 주시면 우리야 좋죠.”

둘 다 방긋 웃었다.

“다음에 꼭 사장님에게 보답해야겠어.”

“물론이죠.”

둘의 보답은 간단하다.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거다. 그럼 재석은 만족할 것이다.

도중기는 ‘멋진 남자’ 촬영장에 도착해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많은 스태프들이 감독의 촬영 시작 신호를 기다렸다.

“준비됐지?”

“예, 감독님.”

“그럼, 시작하자고.”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액션!”

촬영이 시작되자, 도중기는 곧바로 자신의 연기를 펼쳤다. 그의 연기는 생각보다 많은 발전이 있었다.

거기에 도중기의 일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로 혼자 살기 시작한 것. 대단히 좋은 집은 아니지만, 스스로 번 돈으로 집을 구했다.

도중기는 촬영이 끝나고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톡톡!

메신저 앱이 나오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 피처폰을 쓰던 사람들이 남아 있지만,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톡톡!

인터넷만 되면 어디서든 메신저 앱으로 연인끼리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오늘 한국이라고?’

반보영의 일본 스케줄이 끝났기에,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유명인이 된 도중기는 연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은 당연히 재석이었다. 도중기는 그가 전달한 방법대로 반보영을 찾아갔다.

또한 두 사람은 휴무를 겹치게 만들어, 만날 수 있는 날짜를 늘렸다. 모두 재석의 배려였다.

한편 재석은 집에서 다른 일을 보고 있었다.

“오빠, 집에서도 일하고 싶어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미국 지사 일이 심각해.”

“일이 많아서요?”

“반대야. 생각보다 미국이 깐깐해. 일이 좀처럼 안 풀려.”

“음…….”

“민경이처럼 많은 미국인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배우가 딱 한 명이라서 그래.”

“뭐,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운이 좋았어요.”

“봉도준 감독의 힘이 컸지.”

“감독님은 미국에 있어요?”

“맞아, 여전히 세트장에서 촬영 중이지.”

민경이처럼 많은 인기를 얻은 경우를 제하면, 미국에서 출연 계약을 따내기란 쉽지 않았다.

드라마의 경우에도 출연 배우 중 아시아 배우는 겨우 한두 명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뚫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뚫어야 했다.

‘배우가 거부당하는 꼴은 절대 못 참지.’

잘해 놓고도 잘리면 그것만큼 억울한 게 없다. 신지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속으로는 재석만큼 억울할 거다.

“오빠, 일 그만하고 나 좀 봐.”

재석은 그녀가 눈앞에서 직접 말하자, 일을 손에서 놨다.

“그래. 집에 왔으면 좀 쉬어야지.”

“쉬기는 어딜 쉬어요. 나랑 놀아야지.”

민경은 재석에게 절대 휴식 따위는 줄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재석은 당황했다.

“뭐야, 나 쉬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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