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현이 홀로 극을 이끌었던 영화다.
“당장 감독을 만나야겠어.”
재석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재석은 ‘은밀하게 대단하게’ 원작자를 만났다. 물론 이를 각본으로 만든 사람도 함께했다.
“신기합니다. 원래 만화와 영화 쪽 관계자들이 직접 만날 일이 없는데.”
“아, 그게. 저희 둘이 친구입니다. 둘 다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방향이 달라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로 뭉친 이유는 분명하겠죠?”
“물론입니다. 이번에 친구 덕을 좀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도박을 하셨군요.”
원작이 있는 영화는 대부분 제작사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검토한 후에 진행한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친구의 웹툰을 믿으니까요.”
나름대로 인기 있는 웹툰이다. 재석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상당한 작품이지.’
원작자에게 떨어지는 액수를 제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일단 계약하고 이 각본을 찍어 줄 감독을 구해 보죠.”
제이이브에서 감독을 찾는다는 말에 다시 여러 감독이 지원했다. 하나 이번엔 재석이 직접 만나 이야기하지 않고, 아래 직원들이 지원자를 만나 이리저리 협의한 끝에 한 감독을 선택했다.
거기에 재석은 이 영화 주연으로 김조현을 선택했다.
드라마 ‘해를 가진 달’로 일약 스타가 되어 버린 김조현에게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는 기대와 달리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면담 신청을 하러 올 줄은 몰랐네.”
“사장님,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드라마가 아닌 영화에서 주연을 주시다니 조금 놀랐습니다.”
“한 번쯤 겪어야 할 일이니까.”
“그래도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면 회사에 큰 피해를 주고 맙니다. 아직 저는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가 아니어서 더더욱 걱정입니다.”
“하하하!”
재석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아이고, 배야.”
“갑자기 왜 웃으시는 겁니까?”
“당연히 웃기지. 조현아, 너는 네가 지금 거기서 끝인 거 같냐?”
“네?”
“넌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다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당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죠.”
“그걸 아는 녀석이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어? 그 시간에 얼른 나가서 연기 연습을 더 해. 넌 그냥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회사 걱정은 네가 할 필요 없어.”
재석은 김조현을 바로 내쫓았다.
하지만 쫓겨난 사람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스스로 알고 있었던 답을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알게 된 거다.
‘난 아직 멀었어.’
김조현은 다시 돌아가서 이번에 받은 영화의 원작부터 볼 생각이었다. 그걸 토대로 캐릭터와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거다.
‘은밀하게 대단하게’의 준비는 아주 순탄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때, 재석에게 새로운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이게 뭐야?”
“뭐긴. 잘 봐.”
민경이 보여 준 건 초음파 사진이었다. 의학 지식이 전혀 없는 재석에게 이런 사진을 보여 줘 봐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의 촉이라는 게 발동하며 짐작했다.
“서, 설마, 이거 아기 사진?”
“맞았어요!”
처음이었다. 자신의 2세가 생긴다는 그 감정, 기쁨, 책임 등의 여러 가지를 느끼게 만들며 동시에 혼란이 찾아온다.
물론 그것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고마워.”
재석은 민경을 꼭 끌어안았다. 기대도 못 했던 일이었다. 특별하게 아이에 대해서 논한 적도 없었다. 그저 민경이 원한다면 가질 생각은 막연히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심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데 문제가 있어.”
“드라마 촬영?”
“맞아.”
아직 촬영 시작은 많이 남았다. 그때가 되면 좀비에게 쫓기는 역은 힘들어진다.
“걱정 마. 내가 그쪽에 가서 협의할게.”
계약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사태가 터질 수 있었다. 재석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 제작사 쪽에서는 축하와 동시에 우려를 표시했다.
“그럼 드라마에서 하차해야 하는 겁니까?”
“아마 드라마가 시작할 때쯤이면 배가 많이 불러 온 상황일 겁니다. 제대로 된 상태로 촬영할 수 없겠죠.”
“허허, 참.”
임신을 했다는데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일단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겠네요.”
영화 촬영 일정을 당겨 빠듯하게 진행하든, 아예 뒤로 미루든 해야 할 것이다.
“사정을 알았으니 이쪽에서도 대비를 하죠. 그래도 미리 알려 주셔서 다행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그리고 임민경 씨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 주세요.”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전달받은 내용은 다음 시즌에 1회 출연을 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임민경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좀비 때를 이끌고 도망치는 거였다.
“후우, 이 정도면 다행이지.”
도망치는 장면도 스턴트맨을 쓰기 때문에 민경이 실제로 연기하는 건 극히 일부였다.
“대충 얼굴만 비추면 끝이네.”
제작진이 정말 배려를 많이 해 주는 거였다. 나중에 날짜가 잡히면 민경이 촬영을 위해 잠시 움직이는 게 전부다.
미국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장모님이 집에 계셨다.
“아이고, 전 서방.”
장모님은 재석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반갑게 맞이해 줬다.
“장모님.”
“이야기 이미 들었네. 민경이 때문에 미국까지 출장을 갔다 오는 길이라고?”
“예, 미국 일은 잘 해결됐습니다. 일단, 자세한 내용부터 설명해 드리죠.”
재석은 세세하게 내용을 전달했다.
내용을 들은 민경과 장모님은 잘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임신한 몸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 확실히 부담되는 일이다.
“아예 출연을 안 하는 방향은 아니네.”
“이것도 그쪽에서 최대한 신경 써 준 부분이야. 아마 새로운 사람을 뽑기 위한 오디션을 볼 수도 있어.”
“그렇겠지. 촬영은 언제야?”
“흐음, 아직 결정은 안 났어. 대본을 수정해야 하니까. 좀 더 걸리지 않을까?”
“여러 가지로 민폐를 끼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아니야. 다들 축하해 줬어. 이 소식을 회사에도 알릴까?”
“하지 마. 내가 알리고 싶은 몇몇에만 연락할 거야.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최대한 조심하랬어. 외부에 나가는 것도 적당히 할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재석은 민경을 아기를 다루듯이 대했다. 혹여 어디 부딪쳐서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생길까 봐 매사에 조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호들갑 떠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전 서방, 그만해. 그렇게 조심할 필요는 없어.”
“오빠, 그만해. 내가 무슨 유리야?”
두 사람이 잔소리하자 재석은 그제야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하하하.”
이때부터 재석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누가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든 너그러이 용서해 줄 정도였다.
매일 웃고 다녀서 민철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선배, 항상 웃고 다니시는데 요즘 좋은 일 있습니까?”
“아, 내가 이야기 안 했구나.”
“무슨 일 있군요.”
“나, 내년에 아빠 된다.”
민철은 크게 놀라면서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 사실을 다른 직원들에게도 알려야죠.”
“됐어. 알리지 말래. 그냥 친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하고 인사만 받고 끝낼 거야.”
“그렇게 하기에는 좀…….”
“나중에 돌잔치 할 때나 얼굴 비춰.”
“뭐, 태어나고 나서 해도 늦진 않겠죠.”
그리고 민경의 스케줄은 전부 취소시켜 버렸다. 어차피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아서 처리할 일은 많지 않았다.
민경은 그 뒤에 오로지 태교에만 집중했다.
친한 연예인들이나 재석의 지인들이 집에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나중에 출산하면 다시 찾아와서 아기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자, 민경이 거부했다.
“안 돼. 아기한테 이상한 바이러스라도 옮기면 큰일 나. 나중에 내가 부르면 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럴 거예요?”
“이럴 거다.”
벌써 엄마의 마음가짐을 갖춘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나중에 꼭 보러 올 거예요.”
민경의 친한 여자 연예인들 반응은 이랬다. 대부분 회사 소속 연예인이지만, 간혹 다른 회사 소속 연예인도 있었다.
재석은 의도적으로 퇴근 시간을 점차 당겼다.
퇴근이 빨라지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매일 민경에게 많은 애정 표현을 했다.
“그런데, 슬슬 배가 나오네.”
“아직 안 나왔어요.”
재석의 눈에는 민경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민경은 ‘아직’이라는 말만 계속했다.
“그런가? 내 눈이 이상한 건가…….”
“호들갑 좀 그만 떨어요.”
결국 혼났지만, 그래도 재석은 좋았다.
“히히히.”
바보처럼 웃는 모습이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역시 사장이었다. 내일 회사 일정과 계획에 대해 미리 찾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빠, 뭐 봐?”
“계약이 끝나가는 배우들.”
민경이 살펴보니 다른 회사에 속해 있는 배우들이었다.
“오빠, 새로 키우는 게 아니라 영입하려고?”
“응.”
제이이브에 오고 싶은 이는 많지만, 기존의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제이이브로 못 가게 막는 회사들도 많았다.
어떤 회사는 목숨 걸고 붙잡는 곳도 있다.
“쉽지 않을 건데.”
“알고 있어. 그래도 필요하긴 해.”
“으음, 내가 추천할까?”
“왜, 가능성 있는 사람 있어?”
“한 명 있어.”
“누구?”
“소간지 오빠.”
소간지를 자신 있게 꺼내 들었지만, 곤란하다.
“너무 비싸. 그리고 회사 이전 못 해. 지금 소속사에서 이미 최고 대우를 받고 있어서 이쪽으로 와도 별 감흥이 없어.”
“그건 곤란한데.”
민경은 잠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그럼, 효선이는?”
“공효선?”
“응.”
“그쪽은 나쁘지 않아.”
재석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선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건 지금 당장 가치가 싼 배우들이다.
“흐음.”
그러나 소속사를 옮겨 다닐 정도의 배우 중 가치가 싼 배우는 없다.
‘인지도가 상당히 쌓인 배우가 많다는 건데.’
이럴 때 노리는 건 하나다. 직접 발로 뛰는 것.
‘하지만 지금은 소속되어 있는 배우들 관리하는 것도 힘든데 말이야.’
그때, 한 매니저가 이번에 새로 데려온 연기자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음?”
보고에는 독립영화판에서 도중기급으로 취급받는 배우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직원이 직접 찾아가 확인 절차까지 마치고 사람을 데려왔다는 거다.
‘고요한.’
드라마 ‘미완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은 배우였다. 그 뒤로도 연기 실력을 탄탄하게 쌓으며 젊은 나이에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고요한을 데려오다니.’
생각보다 캐스팅에 재주가 있는 매니저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직원이 한 건 하다니.’
재석은 아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내가 배우를 직접 만나는 일만 남았군.”
직원이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사장이 하는 게, 이 사람을 확실히 잡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