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등급인생-24화 (2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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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흩어진 가족들

오늘도 작업하다 다친 인원이 나온다. 그러나 그 인원들에 대해 치료해줄 인원은 전무했다. 아니 오히려 그 인원을 챙길 인원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구타당한다.

일본군들에게 징용자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더 흔한 것이었다. 그들은 작업하다 죽거나 다친 인원이 있다면 그 인원들을 죽은 사람이라고 치고, 치울 생각부터 하는 인간들이었다. 그 인간들은 오히려 나약한 정신을 가졌다며 다친 인원들을 두들겨 패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죽을 거 같아도 움직여야 하고 티를 내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병재도 주어진 작업량을 시간에 맞춰 다 해냈다. 그리고 옆의 정필중의 작업을 도와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일이 다 끝나자 감독하던 일본군 한 사람이 집합을 건다.

“모두 집합!”

오늘도 버텨냈다는 생각에 징용자들은 속으로 한숨을 쉰다. 이 모질고 질긴 삶 언제 끝나는 것일까? 징용자들의 마음속은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생존 본능만 남아있었다. 처음 작업할 때와 달리 인원 몇 몇 자리는 비어있었다. 아마 작업을 완수할 수 없을 만큼 다친 인원일 것이다.

징용자들을 집합시킨 일본군 한 사람이 몇 몇 비어있는 자리를 보고 짜증난 표정을 짓는 것이 증거라면 증거였다. 집합시킨 일본군 한 사람 다나카 츠요시 일병은 징용자들의 우두머리들을 불러 모은다.

“우두머리들 집합해라.”

그의 짜증나고도 성난 말투는 눈치가 그나마 빨라 지금까지 살아남은 징용자들이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눈치 알아채기의 정점인 우두머리들 역시 징용자들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좆됐다는 심정이다.

우두머리들이 다나카 츠요시에게 다가가자 일렬로 서자 징용자들이 예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퍽! 퍽!-

고무 와이어를 들고 온 다나카 츠요시는 우두머리들의 어깨와 머리를 와이어로 채찍처럼 때렸다. 채찍처럼 쫘악 쫘악하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무라고 해도 그 고무 와이어는 그만큼 딱딱했기 때문이다.

“내가 인원 점검하랬어?! 안 하랬어?! 우리들이 괜히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감독하는 역할로 정한 줄 알고 있나?! 그런데 지금 이게 뭔가? 5명이 비었어. 5명 내일부터 다 작업에 불능이라고. 네 놈들이 제대로 해왔다면 어제 끝낼 토치카 작업도 오늘로써 끝날 예정이야. 그런데 네 놈들은 무슨 개같은 짓을 저질렀기에 왜 이리 늦는 거야?!”

다나카 츠요시의 성난 구타에 징용자들의 머리는 어느새 피가 흘러내렸다. 어느새 구타하다 지친 다나카 츠요시는 피묻은 와이어를 뒤로 넘기고는 경고했다.

“한 번도 할 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네 놈들은 모조리 총살이야. 네 놈들을 대신할 녀석들은 널리고 널렸어. 알았어? 이 버러지같은 쓰레기들아!”

얼굴을 피로 범벅된 우두머리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고, 얼굴이 찡그려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죽고싶지 않으면 참아야했다.

다나카 츠요시는 물러나는 우두머리들을 보고 건달처럼 침을 뱉고는 한 소리 내뱉는다.

“철수한다. 우두머리들은 자신이 맡은 징용자들을 살펴라.”

이윽고 모인 징용자들은 우두머리들에게 점검을 받은 뒤 이내 일본군 병사들의 움직임에 따라 작업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으아아! 아파! 아프다고!-

-하아... 하아...-

징용자들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자마자 병재는 자신의 작업 대신 본업으로 돌아갔다. 바로 의사일이다. 오늘 작업 중 다친 인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나마 신기에 가까운 침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기에 병재는 불편한 것이 없었다.

“어째 나만 더 일하는 것 같군.”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병재는 한숨 아닌 한숨이 담긴 말을 내뱉는다. 환자들이 있는 방은 징용자뿐만 아니라 일본군 병사 몇 명도 있었다. 군의관을 믿지 않는 병사들이 굳이 병재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그 병사들도 아픈 소리를 지르는 징용자들을 보고 기분 나빠한다든지 오히려 시끄럽다고 횡포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 돌팔이 같은 군의관에게 진료를 받느리 조금 시끄럽고 불결하지만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는 병재에게 치료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병재는 일단 중한 환자부터 치료하고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과 정확성으로 자신이 원하는 지점의 침을 놓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일본군 환자 몇 명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한다. 저 녀석이 왜 이런 징용자 무리 속에 갔는지 궁금해 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윽고 이내 고개를 젓고는 신경을 끈다. 이윽고 중한 환자들을 응급처치한 병재가 차례를 기다린 일본군들에게 묻는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왔습니까?”

꽤나 현지인 같은 일본어의 솜씨에 여기에 찾아온 일본군들은 흠흠 거리며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 녀석 신병인데 보니까 제대로 걸음도 못하거든. 그래서 발 상태를 보니 조금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찾아왔네.”

환자를 끌고 온 일본군들 중 가장 고참인 병장 마사오카 노부가 환자에 대해 설명해줬다. 병재는 그 말에 발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냄새와 함께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발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병재는 역한 냄새에도 내성이 있는지 아무렇지 않은 듯 이리저리 발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확신어린 목소리로 진단을 내린다.

“봉와직염이군요.”

“뭐? 봉와직염?!”

마사오카 노부는 병재의 봉와직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잘못 걸리면 죽는 질병 중 하나가 봉와직염이다. 그 걸 마사오카 노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걱정은 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환자의 발의 상태에도 병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연다. 마사오카 노부는 속으로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병재의 말에 집중할 준비가 되었다.

“준비할 게 뭐 뭐지?”

“우선 붕대랑 소독제 등이 필요합니다.”

“그 거면 되는 건가?”

“예. 그 것이면 됩니다.”

마사오카 노부는 뒤의 후임들에게 눈빛으로 얼른 챙겨오라고 지시한다. 그 눈빛에 후임들 몇 명이 후다닥 가지러 나간다. 병재는 그 모습들을 보고 마사오카 노부에게 말한다.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겠습니다.”

“으음...”

병재는 아까와 같은 신기로 발 여기저기를 침으로 찔렀다. 발이 움찔움찔 거렸지만 환자의 얼굴은 고통이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발에 오는 고통의 감각이 차단되는 현상에 신기해했다.

이윽고 병재는 몸 여기저기 침을 꽂기 시작했고, 몸 일부분을 이리저리 엄지로 문지른다. 달인 같이 보이는 병재의 솜씨에 마사오카 노부마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러니 아는 사람들만 여기를 찾아오지.’

꽤나 움직였는데도 병재의 얼굴에는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았다. 이윽고 마사오카 노부의 지시를 받았던 후임들 몇 명이 병재가 말한 준비물들을 들고 돌아왔다. 병재는 준비물들을 바라보고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시작하겠습니다.”

마사오카 노부와 그의 주변에 있는 후임들은 침을 꿀꺽 삼킨다. 어느새 병재는 메스를 들고 부어오른 발의 고름들을 째고 썩은 피를 뺐다. 병재의 칼솜씨는 꽤나 복잡하게 움직였는데 생살과 고름을 정확히 구분했다. 이내 고름들을 전부 빼낸 병재는 피가 나오는 것을 침으로 지혈하고 소독제로 발을 씻고 섬의 식물들을 파악해서 만든 약들을 바른 뒤 이내 붕대로 감았다.

“끝났습니다. 일단 한 시간정도 쉬어두면 작업하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 그런가?”

마사오카 노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신병은 언제 치료가 끝났는지 모른 채 어벙벙한 상태였다. 그리고 발에서 전달하는 고통이 나오지 않는 것에 깜짝깜짝 놀랐다.

마사오카 노부는 붕대로 감은 환자의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윽고 시선을 병재에게 돌린다. 그리고 깜빡했다는 듯 무언가를 병재에게 후다닥 건넨다.

“여기 부식이네. 잘 치료해줘서 고맙군. 그리고 남은 붕대와 소독제는 자네가 가지게. 그 것이 낫겠어.”

“감사합니다.”

병재는 마사오카 노부에게 꾸벅 인사한다. 마사오카 노부는 주위의 후임들에게 눈빛으로 이야기하고는 환자를 어깨동무하고 방에서 나갔다. 병재는 다시 시선을 돌려 환자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글들을 확인한다.

-축하드립니다. [의학]의학숙달의 숙련등급이 입신에 도달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의학]응급처치의 숙련등급이 궁극에 도달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의학]침술의 숙련등급이 입신에 도달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의학]수술의 숙련등급이 입신에 도달했습니다.-

병재는 자신을 기분 좋게 하는 글들에 미소를 짓는다. 이 개같은 징용 생활 중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그 것 뿐이었다. 병재는 기술 [의학]의학숙달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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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통] : 의학

[이름] : 의학숙달

[숙련등급] : 입신

[숙련도] : 0단 0%

[상세] : 의학 계통에 해당되는 기본 기술이다. 의학에 대한 계통의 기술들의 효과를 1000배로 증가시키고, 의학에 관련된 기술들에 대한 몸의 피로증가와 정신의 피로증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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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재는 생각했다. 자신이 행하는 의술의 효과에는 이 의학숙달이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평상시 회복에는 10일 있어야 되는 일에는 의학숙달을 거치면 분단위로 줄어든다. 사실 저 봉와직염을 치료하고 평상시 움직이는 회복 시간은 단 1분이면 된다. 그러나 병재는 일부러 1시간을 이야기했다. 사실 그 것도 짧았다. 보통의 회복시간에는 며칠이 걸린다.

‘사실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병재는 의학숙달의 상세설명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첫 기술인 재생의학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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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통] : 의학

[이름] : 재생의학

[숙련등급] : 입신

[숙련도] : 98단 57%

[상세] : 모든 생물은 재생할 수 있다. 다만 그 재생방법을 잊었거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생물의 모든 부분을 원래대로 재생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재생의학을 하는 데 과도한 대가를 없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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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재는 재생의학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치료를 하면서 재생의학을 조금씩 사용했기에 의학숙달을 넘는 숙련도를 가질 수 있었다. 병재는 자신이 가진 기술들을 확인하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곤히 자고 있는 중환자 외에는 자잘한 환자들은 없는 것 같았다. 방의 모습을 확인한 병재는 이제 자신의 본업이 끝난 것을 인지했다. 아무리 봐도 급한 환자는 없었다. 그래서 병재는 부식과 아까 받은 붕대와 소독제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오늘 일과를 끝냈다.

11월 7일, 오늘도 어제 같은 지독한 일은 없었다. 오늘도 재밌는 일을 기대했던 구로다 센죠는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구로다 센죠에게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징용자들에게 운이 없었는지 일은 곧 발생했다.

-빠직!-

곡괭이를 건네받은 징용자 한 사람이 받자마자 곡괭이의 자루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상태를 보아 오늘 내일 했다. 그러나 하필 지금 곡괭이의 자루는 부러졌다. 그리고 그 곡괭이를 받은 징용자는 바로 병재이었다.

병재는 자루가 부러진 곡괭이를 보자 당혹감이 팽배했다. 사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가 바로 당사자일 때가 문제였다.

‘젠장. 운이 안 좋군.’

병재의 생각처럼 정말 불운했다. 다른 때라면 그나마 나았다. 하필 사람 패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오장 구로다 센죠의 눈앞에 벌어진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병재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빠개졌군.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까지로군. 쩝. 어이 새 곡괭이 하나 없나?”

바로 병재에게 도구를 건네주는 일본군 병사가 도구를 선선히 교체해준 것이다. 병재가 알고 보니 그 일본군 병사는 자신이 치료해준 병사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병재는 바로 그 병사가 어떤 환자였는지 기억했다.

‘그렇군. 그 죽을병인 열대성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살아난 병사이군.’

병재는 어제처럼 외과적인 것이 필요한 병을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열대성 풍토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열대성 말라리아였는데, 일본군 사정상 약은 터무니없을 만큼 적은데다 거기다 걸리면 죽는 병이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열대 밤이 아무리 덥더라도 소매 내리고, 모기 기피제들을 자는데 불편할 만큼 뿌리고 잤다. 그렇게 해도 걸리는 병사들이 있었다. 저 도구를 분배하는 병사가 대표적이었다.

아마 병재가 치료했을 때, 오늘내일 저승사자가 불려가는 그런 상태였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병재의 의료기술로 간단히 살려냈고, 그 병사는 완치되자마자 울면서 아무리 불편해도 소매는 다 내리고 자야겠다고 다짐한 웃긴 인간이었다. 어느새 그 병사는 병재에게 새 곡괭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남는 도구가 있으니 다행이군. 그러니 열심히 작업하라고.”

병재는 고맙다는 이야기 대신 고개를 진중하게 끄덕였다. 그러나 오장 구로다 센죠가 왜 악명을 떨쳤는지에 대해서 아직까지 그 둘은 몰랐다.

“거기 두 놈. 뭐 하는 짓이지?”

도구를 분배하는 병사는 자신을 지목하는 구로다 센죠의 말에 벌떡 일어섰다.

“예. 도구가 부러져서 마침 남는 도구로 다시 분배했습니다.”

그 말에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구로다 센죠는 그 병사를 비웃는다.

“뭐? 도구가 부러져서 새 도구를 줬다고? 자네 장난하나? 엉?”

구로다 센죠는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검지손가락으로 그 병사의 이마를 꾸욱꾸욱 찌른다. 그러나 그 병사는 그런 구로다 센죠의 조롱에도 공포에 얼어붙은 채 말을 못하고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이내 입을 열어 얼버무린다.

“그... 그게 상태 좋은 도구가 남아서...”

-짜악!-

구로다 센죠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병사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며 이야기했다.

“뭐 새 도구가 남아서 교체 해줬다고? 감히 너가 천황폐하가 하사하신 상태 좋은 도구를 그깟 징용자에게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 잘못했습니다.”

마치 겁에 질려 포식자의 자비를 바라는 초식동물의 울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구로다 센죠는 이내 시선을 병사에서 병재에게 돌렸다.

“그리고 너 버러지 새끼. 감히 천황폐하가 하사하신 도구를 부서 먹다니. 꽤나 간이 비대해. 암. 아주 비대하고말고. 네 까짓 놈이 그런 행위를 하고도 당당하게 교체 받는군. 아주 거슬러. 버러지 새끼가.”

구로다 센죠의 순 억지에 병재는 속으로 열이 받았지만 참았다. 그래서 얼굴표정을 도구를 분배하는 병사처럼 바꿨다. 하지만 그렇다고 잔악한 구로다 센죠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구로다 센죠는 주위의 병사들을 부르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출발해. 나는 이 버러지 새끼를 손봐주겠어.”

병사들은 병재의 모습을 보고 측은한 얼굴을 짓는다. 사실 징용자들에게 그런 표정조차 사치였지만 그나마 이 타라와 섬에서 유일하게 실력 좋은 의사인 병재가 재수 없게 그런 악질에게 걸리니 속으로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구로다 개자식. 군의관에게 돈이라도 받았나? 이런 미친 자식이 저 징용자를 건드리면 우리는 어디서 치료받으라고?’

오히려 속으로 불만에 불만이 거듭했지만 겉으로는 구로다 센죠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내 고개를 돌려 징용자들에게 시선을 향한다. 그러나 징용자들에게 가는 도중 병재의 귀에 귓속말로 한 마디 했다.

“잘 버텨요.”

병재는 일본군의 당부에 아리송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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