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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흩어진 가족들
심문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병재는 역시 간질이 맞다라는 확고한 표정이 되었다.
“무엇 때문에 제가 간질에 앓았다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병재는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일단 심문이 끝나고 몸의 피로가 확 오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거야 힘든 일을 하면 그런 거 아니요?”
“그 것과는 다릅니다. 일단 잠깐 잠깐 의식을 잃었던 기억이 있지 않나요?”
심문관은 병재의 말에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허.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전문가의 눈빛이라고 이야기해두죠.”
“아 아까 당신이 그 한의사라고 했던데, 의사라는 것은 진짜인가 보군요.”
“예. 일단 그건 접어두고 간질의 증상을 보아하니 지금까지 겪지는 않았군요. 그런데 최근 가슴이 답답하다든지 아니면 발작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지 않나요?”
“거참 신기하군요. 그 전문가의 눈빛이라는 거 가지고 싶군요. 당신의 말이 다 맞습니다.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증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치료를 할 수 있다는 말 같은데 맞나요?”
병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침통을 하나 꺼냈다.
“그건 뭐죠?”
“당신에게 설명했던 한의사라는 일을 할 때 필요한 의료기구라고 설명하겠습니다.”
심문관은 침통의 침들을 보더니 찡그리며 말했다.
“그거 주사바늘처럼 꽂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그만하겠습니다.”
심문관은 그 말에 괜한 오기가 들었다. 더욱이 간질이라는 것을 치료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주사바늘처럼 꽂는 침들이 심리적인 거부를 불러왔지만 심문관은 그걸 참았다. 일단 효과 없으면 뭐라 하면 될 것이다.
“해보세요. 그 침이라는 거 놓아주세요.”
심문관의 의심스러운 눈빛에도 병재는 차분히 침통의 침들을 꺼내고는 말했다.
“편안히 있으시면 금방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침으로 머리 여기저기를 놓았다. 심문관은 신체에 침이 들어가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 것이 따갑다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자연히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병재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지금처럼 이상한 기분도 차츰차츰 사라졌고, 지쳤던 몸들이 활기를 되찾았다.
‘허 효과는 좋네.’
침들에 대해 심리적인 거부감을 느낀 심문관조차 효과만큼은 인정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뇌 속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막혀있던 것들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꼈다.
‘엄청 시원하군.’
심문관의 얼굴에 의심을 넘어서 행복감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재는 이미 일이 끝났는지 침들을 뺏다.
“끝났습니다.”
심문관은 편안함에 눈이 감긴 것을 병재의 소리를 듣자마자 번쩍 떠졌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병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병재는 빼낸 침들을 골라서 침통에 다시 가지런히 넣어 정리하고 있었다.
“허 이거 신비한 경험이군요.”
아까의 답답함과 몸에 도는 활기가 심문관은 신기하고도 기쁜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했으니 간질로 고생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군요.”
“의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심문관은 병재의 직업의식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일단 당신도 나가보시오. 밖에 병사가 안내해줄 것이요.”
병재는 그 말에 심문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심문관은 아까 작성해둔 서류를 찬찬히 보면서 자기 일을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력 좋은 의사군. 이거 전통의사라고 무시만 하면 안 되겠군.’
심문관은 서류 중 병재의 명세서를 뽑고는 직업란에 전통의사라는 부분을 지우고 의사로 다시 적었다.
한편 병재는 병사를 뒤따라 정필중을 비롯한 일행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병재는 정필중을 보자마자 포옹을 했다. 병사는 그 광경을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시오. 무슨 일 생기면 부를 것이오.”
한창 정필중과 포옹을 했던 병재는 병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난 볼 일이 있어서 그만...”
병사는 그 말을 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시간이 지나 병사의 모습이 점처럼 보일 때, 병재는 정필중에게 말을 걸었다.
“정형, 이제 우리도 살아남은 거요?”
“그래! 우린 살아남았어. 살아남았다고.”
정필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정필중 뿐만 아니라 노송규, 김강연, 채병호들은 정필중처럼 탄성을 지르지 않았을 뿐 역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내 기쁨을 온 몸으로 만끽한 다섯 사람은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그리고 정필중이 병재에게 무언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병재 자네, 영어도 할 줄 알았나?”
“아. 그건 고향에서 영어교재를 구해서 따로 공부했습니다.”
정필중은 그 말에 놀라서 소리쳤다.
“허. 자네 참 대단하군. 의술도 그렇고, 거기 다 영어에, 무술에, 이거 완전 인재 중에 인재였군.”
정필중의 놀란 말투에도 불구하고 병재는 자조적인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인재면 뭐 합니까? 지금 신세가 이 모양 이 꼴인데.”
“그건 운이 안 좋았던 것이고. 그래도 우린 살아남았으니 된 거 아니냐?”
정필중의 긍정적인 말에 병재도 영향을 받은건지 호탕하게 웃는다.
“그건 맞는 말이지요.”
병재가 그렇게 말하고 난 직후였다.
“의사 없어? 군의관 없어?”
멀리서 미군들이 보이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군의관을 찾고 있었다. 병재를 비롯한 일행들이 미군들을 쳐다보니 금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아까...”
정필중도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그 미군들의 얼굴을 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드레드 일병, 조금만 참아. 본부야. 살 수 있어.”
헤이드 병장은 피가 줄줄 흘리는 바드레드 일병을 어깨동무 한 채로 전우애를 바탕으로 여기까지 후퇴할 수 있었다. 바드레드 일병을 보니 매우 참혹했다. 비록 응급처치를 했다고 하지만 오른 쪽 어깨 죽지가 잘라져 팔이 없어졌고, 목을 감싼 붕대도 피로 범벅이어서 생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헤이드 병장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군의관을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다가오는 군의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같이 후퇴한 브레이 소대장은 헤이드 병장과 같이 군의관을 찾고자 시선을 돌아봤지만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본부의 병사에게 물었다.
“군의관은 지금 어디 계시냐?”
막사의 병사는 갑작스러운 소대장의 질문에 어어어하다가 이내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 군의관님은 대대본부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뭐?! 그럼...”
브레이 소대장도 군의관이 이 중대에 파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급했다. 지금 바드레드 일병의 생명이 경각에 달해서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이다.
“안타깝게도 대대본부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지금 장난쳐!? 대대본부와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되는 것을 알고 있는데?”
헤이드 병장이 막사의 병사에게 대신 소리쳤다. 병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브레이 소대장은 역정을 내면서 소리쳤다.
“젠장! 그럼 대대본부로 옮겨야겠군.”
“아. 그건...”
“그건 또 뭐지?”
“지금 중대본부에서 쓸 수 있는 차들이 없습니다.”
“뭐야?! 지금 중대장님은 어디 계시지?”
“일단 진정하십시오. 브레이 소대장님. 지금 중대장님은 안에 계십니다만.”
“비켜! 중대장을 만나봐야겠어.”
브레이 소대장은 급히 병사를 밀치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헤이드 병장은 다시 시선을 돌려 바드레드 일병을 바라보았다. 바드레드 일병의 숨이 느껴져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것도 가빠지기 시작했다. 얼마 못가 숨을 거둘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창 서류를 정리 중이었던 심문관도 기지개를 펼 때,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를 들어 뭔가 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헤이드 병장 분대가 여기로 찾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심문관은 옆의 병사에게 사정을 물었다.
“아. 저 저기서 군의관을 급히 찾고 있습니다.”
심문관은 딱 보기에도 군의관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명의 경각에 달한 바드레드 일병의 모습을 보고 혀를 쯧쯧 찰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미국의 귀중한 젊은이 하나가 천국에 가겠군.”
그렇게 헤이드 병장의 분대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는 심문관이었다. 그러다 문뜩 생각했다.
“아 맞지. 그 내 질병을 치료해준 인간!”
심문관은 간질을 시원하게 치료해준 병재가 갑작스럽게 생각이 났다. 심문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생각되자마자 얼른 헤이드 병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급해 보이는 거 안 보이십니까?”
심문관은 자신에게 다급해보이고도 의아한 시선을 보이는 헤이드 병장이 적대적인 말투를 내뱉는 것을 보아할 때, 지금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진정하게. 지금 찾고 있는 군의관은 여기에 없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럼 뭐 하러 여기에 왔습니까?”
“여기에 군의관은 없어도 의사 선생은 하나 있네.”
그 말에 헤이드 병장은 반색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심문관에게 다급히 물었다.
“뭐?!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일단 진정해. 안 그래도 여기로 오라고 말 할 테니까.”
심문관은 옆의 병사에게 말했다.
“그 징용자들 중 영어 능숙한 사람 찾아오게. 지금 빨리.”
병사는 심문관의 말에 조금 생각하다가 아!하고 떠올리고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병사가 부리나케 사라지자 심문관은 시선을 돌려 헤이드 병장에게 말했다.
“일단 저 녀석을 침대에 옮기게.”
헤이드 병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대원들에게 눈빛을 보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바드레드 일병을 옮기게 했다. 분대원들은 그 눈빛을 받고 다급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근처 막사 안의 침대로 옮겼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심문관이 지시했던 병사가 한 사람을 데리고 막사로 들어갔다. 헤이드 병장은 심문관이 말한 의사 선생이 누군지 살펴보니 낯이 익었던 모습이었다. 바로 영어로 투항했던 병재였다.
“저 사람 포로 아닙니까?”
“원래 의사를 했던 사람이야. 실력은 내가 보증하지.”
심문관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헤이드 병장은 의심스럽고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심문관과 병재를 쏘아붙였지만 이내 이거라도 어디냐?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바드레드 일병을 바라보았다.
병재는 참혹한 바드레드 일병의 모습을 보고도 다급해보이지 않았다.
‘어깨는 잘라졌고, 목에 총탄이 박힌 것 같군. 일단 급해보이는 지혈부터 시작해야겠어.’
병재는 어떻게 바드레드 일병을 치료할 것인지 계획부터 짰다.
“치료를 부탁합니다.”
심문관이 그렇게 말하자 병재는 얼른 바드레드 일병 옆에 앉고는 예의 침통을 꺼내 침들을 빼내고는 그 침들을 바드레드 일병 몸 곳곳을 찔렀다.
“저건 뭡니까?”
헤이드 병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심문관에게 물었다.
“지켜봐.”
심문관은 헤이드 병장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병재의 치료모습을 집중한 채로 간단히 헤이드 병장에게 대답했다.
“제길.”
헤이드 병장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자기감정을 죽이고는 병재의 치료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침들을 넣고 빼내며 병재의 현란하고도 능숙한 팔의 움직임에 불만스러운 헤이드 병장도 속으로 감탄을 냈다. 그리고 바드레드 일병의 피가 멈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
급히 붕대로 감고 지혈했다지만 피가 계속 세어 나왔던 바드레드 일병의 상처에서 완벽히 지혈된 것을 확인한 헤이드 병장은 감탄을 조금 내질렀다.
병재는 바드레드 일병이 지혈된 것을 확인하자 심문관에게 말했다.
“깨끗한 물은 없습니까?”
“아 그렇지! 헤이드 병장 접시에 물!”
헤이드 병장은 심문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른 주위에 있던 그릇에 수통의 물을 채웠다. 수통의 물은 식수로 가능하니까 아마 깨끗할 거라 생각했다. 병재는 그 물이 채워진 그릇으로 손을 깨끗이 씻고는 손의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여기올 때, 같이 가지고 온 가방 속에서 그나마 깨끗한 헝겊을 감산 무언가를 꺼냈다. 병재가 헝겊을 차례차례 풀었다. 헤이드 병장이 그 것을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그 것은 메스였다.
병재는 메스에 소독제를 뿌려서 그나마 청결하게 했다. 그리고 심문관에게 한 마디 말했다.
“깨끗한 휴지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헤이드 병장과 심문관은 얼른 고개를 180도로 돌렸고, 곧 병재가 원하는 휴지를 찾을 수 있었다. 헤이드 병장이 그 휴지를 집고는 병재에게 건넸다.
병재는 그 휴지를 받고는 소독제 범벅인 메스를 조심히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스에 붙은 휴지조각들을 떼어낸 병재는 메스를 들고 바드레드 일병의 목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피로 범벅인 붕대는 조심스러운 병재의 손길에 얼른 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