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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흩어진 가족들
윈스턴 처칠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노년의 남성, 병재는 그에게서 중후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그가 진짜 영국의 수상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동시에 병재는 의문이 불쑥 튀어올랐다.
‘하지만 왜? 왜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재생치료센터의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병재를 따로 주미영국대사관으로 초청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그가 이 자리에 오면서 병재를 만나는 것일까? 처칠은 병재를 바라보고는 말한다.
“조금은 의문을 가지는군. 내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것인가?”
그 말에 병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정체는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만?”
“저를 부르시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조금 의문입니다.”
처칠은 병재의 그 의문에 피식 웃는다.
“싱거운 의문이군.”
병재의 의문을 단 번에 일축시키는 처칠의 한 마디에 병재는 말을 잃었다.
“......”
“아직도 벙 찐 모양이군. 자네는 자네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가?”
“그야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 아니겠습니까?”
“의사라 단지 그 것뿐인가?”
“남들보다 조금 실력이 좋은 의사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음. 그렇군. 왠지 그 말에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말 같군.”
“한계라... 예.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칠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내 한 마디 해주지. 인간이라는 것은 말이야. 한계를 항상 느껴야 돼. 그리고 그 곳에 부딪치면 여러 가지 선택을 하는데. 끝도 없는 절망에 추락하는 인간이 있나하면 그 한계를 넘고자 천천히 전진하고 있는 인간도 있어. 그런데 더 골때리는 인간은 그 한계를 부정하고 억지로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이지.”
“그 말씀은?”
“유럽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나치독일의 히틀러도 그런 작자이지.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망상하면서 절벽에 뛰어드려는 인간 말이야.”
“......”
“그런 점에서 보면 자네는 한계를 인정하는군. 그리고 더 나아가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어. 보통 인간이라면 자네의 능력을 느낀다면 신으로 보일 정도이지. 모든 질병의 고통, 나을 수 없다는 절망 그 것을 온전하게 치료해주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인간은 교만을 하게 마련인데.”
병재는 교만이라는 말에 씁쓸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 때 방 안에 웨이터가 들어오더니 수레 위 요리들을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자 처칠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웨이터에게 준다. 병재 역시 마찬가지로 지갑을 꺼내 따라서 준다. 웨이터는 당연한 표정을 지으며 팁들을 받아 챙긴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간다.
요리는 상당히 맛있어 보이며 음식의 향미도 코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둘은 음식의 향미에 취하지 않고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다. 처칠이 먼저 말한다.
“우선 들지.”
그 말에 병재는 자신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가지런히 잘라 입에 넣는다. 지난 번 상류층의 가족을 치료하기 위해 왕진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때마다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식사예법이 서툴러서 많이 곤란해 있었는데 그 경험덕분인지 병재는 영국수상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먹고 있었다.
병재는 한 입 한 입 음식들을 조용히 먹으며 맛을 음미한다. 최고급 레스토랑답게 맛도 진풍경이었다. 온갖 맛의 조화들이 혀를 춤추게 만들어준다. 둘은 조용히 식사를 마친다. 처칠과 병재는 식사를 다 마친 후 냅킨으로 입을 닦는다. 식사가 마친 후 몇 분 뒤, 처칠은 병재를 바라본다.
“시장이 추천할 만하군.”
병재도 처칠의 감상에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후식은 맛있었습니다. 최고급 이라하던데 급수가 틀리면 맛도 틀려지는군요. 저를 이 식당에 초청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글쎄. 자네의 명성이라면 이 식당 같은 곳에 여러 번 불려나갈 것 같은데.”
병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평소에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병원에서 먹고 지내거든요.”
“으음. 그런가? 자넨 천성이 의사인가 보군. 자네 부모님이 의사인가?”
병재는 고개를 저으면서 처칠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스승님께 배운 것이죠.”
“스승? 아 학교의 선생님을 말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옛날에 있었던 도제관계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처칠은 그 말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잘 알겠네.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을 그 사람에게 배웠군.”
“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병재는 그 말을 하고 고향에 계신 스승 심의호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처음에 배울 때 짐꾼이라고 투덜거리며 구박했지만 지금까지 의학의 기본들을 모두 자상하게 알려준 스승이었다.
처칠은 가만히 병재가 생각하는 것을 놔두었다. 어느덧 병재의 눈빛은 회상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처칠이 그를 보면서 말한다.
“이제 식사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내겠네.”
병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처칠의 용건을 기다린다.
“내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듣기로는 자넨 미국과 계약을 맺었다며?”
역시 강대국의 수장이라서 그런지 미국 정부와 병재가 맺은 계약에 대해 알고서 물어보는 처칠의 말에 병재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미국과의 계약내용 그대로 우리 영국정부에게도 맺을 수 있겠나?”
“......”
병재는 처칠의 제안에 잠시 말을 잊는다.
“조금은 어렵나? 그럼 보고 결정하게.”
처칠은 탁자 위로 종이들을 꺼내더니, 병재의 앞으로 건네준다. 병재는 그것의 내용 차례차례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미국 정부와의 계약내용 그대로인데.’
병재는 잠시동안 고민한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재는 처칠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재생치료를 전수받는 데 기간이 걸리는 것 잘 아십니까?”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
“그렇다면 전수받을 사람은 생각하셨습니까?”
“후보들을 선정해야지. 걱정 말게 자네에게 해는 없을 테니 말이야.”
병재는 그 말에도 조금 안심이 안 된 모양이다. 결국 병재는 결정을 유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처칠에게 말한다.
“여기서 결정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조금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처칠은 시간을 주라는 병재의 말이 옳은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처칠은 명함을 병재에게 건네주고는 말한다.
“이건 주미영국대사관의 전화번호일세. 만약 결정을 한다면 이곳으로 연락을 주게나. 나는 그 쪽에 당분간 있을 테니 말이야.”
“그 때까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처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 알겠네. 그럼.”
처칠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단번에 계약되리라고 믿지는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처칠은 표정변화 없이 미소만을 남긴 채 먼저 자리를 뜬다. 처칠이 방 밖으로 나가자 병재는 자리에서 곧바로 뜨지 않고, 처칠이 남겨준 명함을 바라본다.
‘어떻게 할까? 그 사람에게 상담을 받아 볼까?’
병재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방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병재의 머릿속을 괴롭히게 만든 오늘의 점심시간이 끝이 났다.
병재는 레스토랑에서 처칠이 남겨준 차량을 타고 재생치료센터에 돌아왔다. 그리고 1층 안내사무원 신디를 찾아가 말한다.
“저 신디양?”
재생치료센터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병재가 자신을 보고 말하자 신디는 조금 긴장을 한 눈초리로 병재를 보며 반문한다.
“예. 선생님. 말씀하세요.”
“혹시 내일 저에게 할당된 환자들을 오늘 다 처리해도 될까요?”
“그게 무슨 소리죠? 갑작스럽게 왜?”
신디는 의아한 눈빛으로 병재를 쳐다본다. 병재는 그 눈초리에 흠흠거리며 이유를 말한다.
“내일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선생님께 일이? 선생님이 찾을 정도라면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불렀습니까?”
신디는 병재에게 부유층들이 왕진시킨 일을 상기시키며 따진다. 병재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고 신디에게 말한다.
“아 그 쪽 일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개인적인 일? 선생님이? 으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알겠어요. 선생님이야 휴가를 반납하고 계속 일을 처리해왔으니 이번 기회에 3일 휴가를 갖다 오는 것이 어떨까요?”
“3일간 휴가라. 으음 그 쪽에서는 곤란해 하지 않을까요?”
“요즘 선생님에 대해 혹사시킨다는 의견들이 많이 들어서 그래요. 이번 기회에 일은 잠시 잊고 정신건강을 위해 휴가를 가고 그래요.”
“으음. 알겠습니다. 일단 혹시 모르니 내일 저에게 할당된 환자들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그리해주시면 저희야 기쁜 일이죠.”
“그럼 알겠습니다.”
병재는 신디에게 꾸벅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신디는 병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미스터 길의 개인적인 일이라? 여동생 때문에 그런가?”
신디는 그 생각에 빠져들면서 병재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 상상한다.
진료실로 되돌아온 병재는 방 안에 있던 간호사 메리에게 내일부터 3일간의 휴가라고 말하고 대신 오늘은 환자를 두 배 처리한다고 이야기한다. 간호사 메리는 그 말에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병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환자들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제 다리가 완전히 재생된 환자가 병재를 보고 감사인사를 한다. 병재는 좋은 미소를 띠고는 약을 건네준다. 그리고 병재는 다음 환자를 불러온다.
간호사 메리는 말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병재를 보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병재가 병원으로 되돌아오더니 오늘과 내일 할당된 환자들을 한꺼번에 처리한다고 했기 때문에 메리가 바라보는 병재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졌다.
“선생님. 오늘 점심시간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병재는 환자의 진료 및 치료를 끝낸 후 메리를 쳐다보고 말한다.
“별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내일까지 할당된 환자들을 오늘 급히 처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
병재의 일이라는 단어에 메리는 조금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간호사 메리는 병재의 일을 보조하면서 의문을 가슴깊이 묻어들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들의 퇴근이 끝나고, 병재의 강의시간도 끝난 시각, 병재는 1층의 안내 사무원 신디에게 말한다.
“저 사무적인 처리는 끝났습니까?”
신디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다행이군요.”
“예.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동의는 구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들은 미스터 길의 사정을 알고 순순히 허락해주었습니다.”
“휴. 책임감을 덜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저로서는 안심입니다.”
신디의 말에 병재는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다.
“전 그 기간동안 개인적인 일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3일 간의 휴식은 잘 해주시고, 휴가 끝난 뒤 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병재의 말에 조금 얼굴을 벌게진 신디를 뒤로 하고 병재는 발걸음을 옮겨 1층의 공중전화기를 든 다음 다이얼을 돌린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철컥!-
-여보세요?-
“예. 여보세요. 여기는 길병재라고 합니다.”
-아! 길병재 군이 아닌가?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다 하다니?-
전화기의 목소리는 한인동지회에 속한 김충호의 목소리였다. 김충호는 자신에게 전화를 건 상대가 길병재인 것을 알고 반가워한다.
“하하. 일이 지금 끝나서 말이죠. 제가 이번에 3일간 휴가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 박사님을 뵐 수 있나요?”
-이승만 박사님? 그 분은 왜?-
“조금 상담을 받을 것이 있어서 그래요.”
-으음. 허 자네가 휴가를? 박사님이 휴가라도 가라고 청해도 안 가는 인간이 웬일로? 음 알았어. 내일 워싱턴 D.C로 오게나. 주소는 잘 알고 있지?-
“예.”
-알았네. 그럼 전화 끊게나. 내가 직접 이승만 박사님에게 말하지.-
김충호는 그 말을 하고나서 전화를 끊었다. 병재는 송수화기를 재자리로 놓고 한 숨을 크게 쉰다.
“휴우. 안 될까 어쩔까 고민이 되었는데 말이야.”
병재는 그 말을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이보게 병재.”
갑작스러운 말에 병재는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목소리의 주인의 정체를 살펴보니 정필중이었다.
“헉! 갑작스럽게 정형이 서 있어서. 깜짝 놀랐네요. 무슨 귀신처럼.”
정필중은 병재의 깜짝 놀란 눈초리에 키득키득 웃는다.
“원 사람도. 내 몰래 자네의 전화소리를 들었네. 자네가 뭔 일로 전화를 다했는지 모르겠어.”
“개인적인 일입니다.”
“이승만 박사에게 상담을 받을 거라면서?”
“끄응. 그 것도 들었습니까? 내일부터 3일간 자리를 비게 두었습니다.”
“아까 점심시간에 신디 양에게 한 소리를 나도 들었지. 그러니 나도 말이야.”
정필중의 득의양양한 얼굴과 말에 병재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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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병재의 실망과 후회는 광복 후에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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