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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혼란과 광기와 학살과 기회의 시대
병주의 귀에서는 ‘뚜르르 뚜르르’하는 전화 연결 음이 들릴 뿐이었지만 병주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그 인내심이 통했는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병주가 걸었던 전화의 상대방이 받았다.
-여보세요?-
“형님 접니다.”
-뭐야? 병주냐?-
“예. 형님. 잠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나보다 네 녀석이 더 바쁘지 않으냐? 그런데 무슨 일로 나에게 이렇게 전화를 다 해주었냐?-
“급한 것이 있으니 형님에게 전화를 드렸지 않았습니까? 사실 제가 염치불구하고 형님께 전화를 드린 것은...”
병주는 곧 자신의 후배인 박효영 대령이 말해주었던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병주의 설명을 들은 전화의 상대방의 말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냐...?-
“뭔가 방법이 없습니까? 형님께서는 이 박사님과 꽤 친밀하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병주의 간절한 말투에 전화 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전화 상대방이 한 마디 말한다.
-그런데 그 동북청년단의 배후에는 그 이 박사가 있는 것이 정말이냐?-
“형님께는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입니다. 형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휴우... 그런 일이 제주도에 일어난다고?-
“형님 말씀을 들어보니 뭔가 어려운 일입니까?”
-내가 이 박사랑 잘 알고 지내기는 하지만. 내가 그와 절친한 사이는 아니야.-
“그래도 이 박사님이 형님을 높이 평가해주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그런 셈이야. 그 사람에게 있어서 나는 쓸모 있는 존재이니 그렇게 대우를 해주는 편이지. 그건 병윤이 녀석에게 대해주는 경우와 동일하지. 설명을 들으니 제주도의 사태는 단단히 꼬인 것 같다. 최소한 동북청년단의 횡포를 막는 방향으로 내가 몰고 가볼 생각이다.-
“으음. 알겠습니다. 형님도 어렵다고 말씀을 하시는 군요.”
-그와는 상당히 미묘하지. 일단 ‘생구단’의 일원들을 그 쪽으로 파견해볼 생각이다. 그 동북청년단이 생각이 있다면 그 쪽 인원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야.-
“알겠습니다. 형님. 여러모로 부탁하는 일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군대 일로 바쁜 네가 오죽하면 이렇게 전화를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주도의 사태가 나락이라는 의미겠지.-
“그래도 이 아우의 부탁을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그게 사람으로서의 도리이겠지. 알겠다. 수고하고, 다만 확실한 것은 내 조치가 얼마만큼 효용성 있는지 알지는 못하겠지.-
“대비책이라도 만들어야 되겠군요.”
-여차하면 네 힘도 필요할 때가 올 거야. 그 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다 해줘.-
“알겠습니다. 비밀리에 제가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 끊어라.-
“예. 형님도 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상대방과의 전화가 끊어지자 병주는 송수화기를 다시 제 자리로 놓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 후 한숨을 푹 쉰다.
‘시간이 갈수록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군.’
이 일이 비록 자신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지만 간접적으로 꽤나 밀접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형님의 말대로 나 역시 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지.’
병주의 눈빛은 활활 불타오른다. 지금처럼 평온하게 사단을 지휘할 때가 아니었다. 병주는 곧장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다.
한편, 송수화기를 제자리로 놓은 병재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말을 듣는다.
“그래 무슨 전화인가?”
병재는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한다.
“몽양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몽양이라고 불리는 이, 즉 여운형이 병재를 바라보더니 대답한다.
“내 민세(안재홍의 호)에게 전화로 이야기를 들었는데. 상당히 심각하다고 들었네. 그래. 아까 자네에게 전화를 주었던 사람은...”
병재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한다.
“제 동생입니다.”
“동생이라? 동생이라 한다면 분명 산업왕이라고 불리는 작은 동생이겠군.”
“아닙니다. 군 쪽에 일하고 있는 큰 동생입니다.”
“호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를 찾아와서 이러고 있습니까?”
여운형은 그 말에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내가 사람 만나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몽양 선생님이 이러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여운형은 검지를 까닥대며 병재에게 말한다.
“아니지. 오히려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권장하는 일이야. 그런데 아까 전화 통화를 들어보니, 직접 이 박사에게 말을 할 생각인가?”
병재는 여운형을 응시하더니 묻는다.
“말을 들어보니 제가 그러지를 않기를 바라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여운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무래도 동북청년단의 횡포에는 이 박사가 있겠지. 그런 이에게 갑작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 들면 이 박사는 뭐라고 반응을 할까?”
여운형의 말에 병재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진다. 여운형은 그런 병재의 모습에 더더욱 적극적으로 밀어 붙인다.
“그래도 말없이 자네가 독단적으로 행동하기에는 그러하니 일단 이 박사에게 통보라도 하게나.”
“그 말씀은?”
“이 박사가 찔리는 것이 있다면 자네에게 전화를 주어 협상을 할 거야. 뭐 내 말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자네에게 달렸지만 말이야.”
병재는 그 말에 결정하기 어려운지 ‘으음’ 소리를 낼 뿐이다. 어느 정도 생각을 한 병재는 이내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렸는지 여운형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렇게 지낼 생각입니까?”
여운형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한 마디 대답한다.
“저번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그 말씀은?”
“일단 돌아가는 현실을 파악하니 분단은 어쩔 수 없어.”
그 말을 하는 여운형의 얼굴에는 아주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해방 이후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다 했건만. 결국 현실은 이리 돌아갔다. 그러나 여운형은 곧바로 평상시의 얼굴을 되찾고는 말한다.
“아무래도 지난번처럼 행동하다가는 안 되겠네. 아무래도 동료들을 찾아야겠지. 물론 자네가 나에게 와준다면 천군만마겠지만...”
그 말에 병재는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입장.”
“흠... 언제나 나에게는 입장이라는 핑계로 거절을 하는군. 이 박사는 알다시피 자네를...”
“네. 이용을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역시 이용을 하는 편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병재의 눈에는 뭔가 기이한 욕망 같은 것이 보였다. 여운형은 그 눈빛에 싱긋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자네의 눈은 위로 올라가는 욕구인가? 아니면 순순히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치기 어린 아이인가? 후후후. 자네를 볼수록 재미가 있어.”
병재는 그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생각을 한다.
‘나 역시 물들었는가? 무의식적으로 나도 욕망을 보이는 건가? 나도 인간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깨끗한 인간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병재이기에 마음 속이 복잡했다. 여운형은 만족스러운 눈빛을 내보인 뒤 일어서서 병재에게 말한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네. 아마 자네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거야.”
“제가 선생님의 행보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또 그럴만한 의지도 없습니다. 선생님의 인생은 선생님의 것입니다.”
“그 말 좋군. 하지만 동시에 말하자면 자네가 얼마만큼 나에 대해서 무관심한 지 알 수가 있군. 이거 너무 섭섭한 걸?”
병재는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싱긋 웃은 뒤 병재에게 마지막 말을 한다.
“하지만 나중에 난 자네와 또 다시 만날 거야.”
그렇게 말한 여운형은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간다. 홀로 방에 남은 병재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한다.
‘선생의 말씀이야 둘 째치고, 할 일이 있었지. 참.’
병재는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 연결을 시도한다.
같은 시각, 이화장의 한 방에서 앉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전화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때, 사람들 속에서 한 노인이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 절박한 시간에 무슨 전화인지 모르겠군. 받아보게나.”
그 말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리는 전화의 송수화기를 들어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댄다.
“여기는 이화장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주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 윤치영 비서실장님이십니까?-
“그 목소리는...”
-마침 잘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 쪽에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 때, 전화를 받은 윤치영의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비서실장. 지금 누구랑 대화하는가?”
그 말에 윤치영은 고개를 노인에게 돌리며 대답한다.
“아. 지금 길 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길 군? 아. 그 이군. 전화 좀 넘겨주게나.”
그 말에 윤치영은 즉시 전화기를 노인 앞에 대동시킨다. 노인은 송수화기를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말한다.
“병재군인가?”
-그 목소리는 박사님이시군요.-
“자네가 이 시기에 왜 이런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군. 요즘 따라 총선거에 바쁘지 않은가?”
-그건 동생 녀석이 전적으로 지원해서 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거참 부럽군. 그런데 요즘 대학 일과 질병에 대한 연구, 그리고 난치병 환자들의 치료에 시간을 투자하는 자네가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군.”
-생구단의 사람들을 제주도 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순간 이 박사라 불리는 노인의 얼굴은 굳어진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주도 쪽에 꽤 소식이 많이 들려서 그 쪽으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으음... 알겠네.”
-예. 이런 급박한 시기에 박사님을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송수화기를 제 자리로 갖다 놓은 이 박사는 곧 윤치영 비서실장을 바라보더니 한 마디 말한다.
“흠. 제주도의 일이 그의 귓가에 들렸군.”
윤치영은 그 말에 순간 깜짝 놀라며 그에게 되묻는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가 박사님께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생구단’의 인원들을 제주도 쪽으로 파견보내겠다고 말을 하더군.”
“예에?! 그게 사실입니까?”
이 박사는 그 말에 날카로운 눈빛을 윤치영에게 보내며 말한다.
“자네 왜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가?”
윤치영은 그 말에 순간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나발이고, 자네들이 동북청년단의 인원들을 잘 다스렸다면 애초에 이런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이 박사의 말에 윤치영은 고개를 숙이면서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래. 대책은 있겠지?”
“그 생구단 쪽을 배제시켜 버린다면...”
순간 이 박사는 윤치영을 째려보더니 한 마디 말한다.
“과연 그렇게 해서 잘 넘어갈 수 있는지 내 두고봅세.”
윤치영의 얼굴은 그 말에 사색이 되면서 순간 말을 바꾼다.
“아닙니다. 일단 동북 청년단들의 행동을 자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 박사의 얼굴은 조금 풀린다.
“생구단의 인력들이 그 쪽에 온다고 하니까. 동북청년단 쪽을 자제시켜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제주도의 일을 누가 저들에게 알려준 거지?”
그 말에 순간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 박사는 그런 한심한 모습들 때문에 속으로 욕을 해댄다.
‘이런 무능한 작자들.’
그 때, 윤치영이 이 박사를 바라보며 한 마디 말한다.
“그런데 박사님. 그 길 군에 대해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 박사는 그 말에 윤치영을 바라보더니 한 마디 말한다.
“뭐 어떻게 하다니?”
“이제 앞으로 박사님 세상이니까 그는 더 이상...”
순간 이 박사의 얼굴은 대차게 구겨진다.
============================ 작품 후기 ============================
이 박사와 병재 사이의 균열이 슬슬 시작되는 군요. 하지만 후기에 제가 미리 공언을 하듯이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은 1956년의 일입니다. 그 때까지는 이 박사와 병재는 런닝 메이트로 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