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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인생-469화 (469/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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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혼란과 광기와 학살과 기회의 시대

TV화면에서 나오는 헌법의 발표식에 대해 병재는 결국 한 마디 말한다.

“우리 나라라...”

병재의 말 속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뭔가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회상한다.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 운명의 날이 되기까지는 그저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 동안에는 자기 나라라는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태어났던 땅의 국가는 일본이었을 뿐이다.

물론 시골 농촌이라서 그런 사실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그 때 당시에는 살기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병윤이 운명의 푸른 돌을 주운 이후부터는 병재 자신의 인생도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들의 가족이 잘 지내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자신들의 가족을 놓아주지 않았다.

푸른 돌을 줍기 전 날에는 효순이 돈을 벌겠다고 경성에 상경 갔지만 2년 동안 고생하다 위안부로 팔려나갔다. 그 때문에 자신의 누나를 찾겠다고 병윤이 가출해버렸고, 자신과 병주는 이런 사태 때문에 마음속이 들끓었지만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 때문에 참았다.

그러나 운명은 남은 가족들을 놔주지 않았다. 병재 자신에게도 그 암울한 운명이 닥친 것이다.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자식인 박출환 때문에 자신은 먼 태평양의 작은 섬에 징용에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처음으로 자기 나라라는 간절한 소망이 생겨났다. 나라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자 병재는 진저리가 났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섬에서 며칠을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거기서 운명의 동료들과 만나 같이 섬에서 탈출 미군에게 구출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병재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길남효에게 한 마디 말한다.

“우리 가족들이 이런 상황에 닥쳤던 것 자체가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그 물음에 길남효 역시 씁쓸한 얼굴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좋겠지.”

병주와 병윤, 그리고 효순 역시 편치 않은 얼굴을 짓는다. 지금까지의 기억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특히 효순은 그 지옥 같은 삶을 떠올리자 숨이 점차 가빠진다.

“허억... 허억...”

효순의 모습에 병재는 긴급히 효순의 등을 두들기며 말한다.

“또 그 기억을 떠올린 거냐?”

효순은 거칠게 숨을 쉬다 이내 진정을 하는지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효순의 기억과 가슴에 깊이 박힌 상처들은 지금도 그녀를 괴롭히는지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병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누나. 다 잘 될거야. 걱정하지마.”

병윤의 포옹과 눈물에 효순은 간신히 진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병재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아내인 메리와 또 놀란 표정의 부모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한다.

“마음의 상처는 어떤 의사가 와도 잘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부모 역시 씁쓸한 얼굴을 짓는다. 특히 길남효는 자신의 딸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지 죄책감이 얼굴 속에 보인다. 병주 역시 씁쓸한 얼굴을 하며 자신의 누나인 효순의 등을 토닥인다.

그 때, 메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남편인 병재에게 묻는다.

“평상시대로 활동하지만 역시 상처와 응어리는 마음속에 남는군요.”

병재는 메리에게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한다.

“효순의 상처는 시간이 약일 거야. 그리고 또 여보와 또 나의 아이에게는 그런 상처를 내지 않을 것이니 두고봐.”

메리는 그 말에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저렇게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 하여도 숨이 금세 가빠지는 효순의 모습에 한없이 걱정스러웠다.

한편, 같은 시각 일본 시모노세키의 어느 한 저택의 한 방 안에서 하카마를 입은 어르신은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숙인 젊은 청년을 바라보다 이 청년을 데려온 사람인 니시무라 유헤이를 바라보며 한 마디 묻는다.

“그래. 이 청년을 나에게 소개를 시켜준 이유가 뭐지?”

그 물음에 니시무라 유헤이는 어르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설명한다.

“일전에 동협 그룹 쪽에 파견할 첩자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르신은 그 말에 눈빛을 빛내며 말한다.

“그래서 자네가 데려온 이 청년이 그에 적합한 사내라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름은 ‘스즈키 하네’라고 합니다.”

“하네? 이름 한 번 이상하군. 날개라는 이름인가?”

니시무라 유헤이는 그 말에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이름처럼 첩자에 어울리는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어르신도 잘 알다시피 전 이름만 가지고 이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일본 어르신은 니시무라 유헤이를 한창 바라보다 이내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에 시선을 그 스즈키 하네에게 돌린다.

“그래. 이번 일에 자네가 직접 자원하겠다는 말을 들었네.”

스즈키 하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어르신이 원하는 대로 그 쪽에 첩자로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겠습니다.”

그 말에 어르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 한 마디 말한다.

“그 것으로 부족해.”

그 말에 스즈키 하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르신을 바라본다. 어르신은 그런 그의 표정에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마디 말한다.

“정보 수집만으로 그 곳을 넘어뜨리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곳에서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통상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다 때가 되면 내부 폭탄을 설치하게 만들어야지.”

그 말에 니시무라 유헤이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어르신에게 말한다.

“사보타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르신은 니시무라 유헤이에게 미소를 짓고, 말한다.

“그래. 맞다. 외부에서 그들을 넘기기 힘들다면 내부적으로 폭파를 시킬 수밖에 없겠지.”

스즈키 하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아득하다는 감정이 나온다. 단순히 정보 탐지라고 말을 들었는데, 사보타주라니. 자신이 할 일의 정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넘어섰다. 그런 얼빠진 스즈키 하네의 얼굴에 어르신은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말한다.

“자네가 할 일은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 또 이 쪽으로 보고하는 것, 그리고 그 쪽의 약점들을 캐내어 그들을 내부적으로 폭파시키는 것이다.”

그 말에 스즈키 하네는 영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말한다.

“으음... 이런 일들을 제가 할 수 있을지...”

니시무라 유헤이는 그 말에 그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아니 자네는 잘 할 수 있어. 잘 해야만 할 거야. 자네만을 의지해 살아가는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스즈키 하네는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니시무라 유헤이의 가족에 대한 언급은 그에게 사그라지는 절박함을 확 끌어올린다. 아까까지만 하여도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을 지었던 스즈키 하네가 결연한 표정을 짓자 어르신은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즈키 하네에게 당부를 한다.

“자네가 알고 있듯 그 동협 그룹이라는 곳은 꽤나 단단한 곳이야. 나를 포함한 여럿 사람들이 그들을 상대하다가 다치거나 죽은 일들이 비일비재하거든.”

“으음...”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야겠지. 눈에 띄는 공작행위보다는 단순한 정보 수집 활동을 하다가 그 쪽의 약점을 캐내는 것이 자네의 임무야.”

스즈키 하네는 그 말에 고개를 결연히 끄덕거리며 대답한다.

“예. 알겠습니다.”

“자네에게는 대단하고 거창한 일은 바라지 않아. 그저 정보수집이 주 활동이야. 아마 그 쪽에서도 방첩 활동이 있겠지만 그들도 꽤나 많은 적들이 있더군. 단순한 정보수집만으로는 시선을 끌기 힘들 거란 뜻이지.”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좋아. 여기 있는 니시무라 유헤이가 자네를 그 쪽으로 입사하도록 도와줄 것이야. 다만 그 곳에 입사하는 것은 의외로 까다로워. 그 곳의 중추로 가기 위해서라면 꽤나 많은 것들을 공부해야해. 니시무라. 혹시 그 곳의 입사시험 유출지라는 것이 있는가?”

니시무라 유헤이는 그 물음에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현재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쪽에서도 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다만 입사시험 예상 문제집 같은 것은 있으니 그 쪽을 통해 이 인원을 공부시켜 투입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르신은 그 말에 ‘흐음’ 소리를 내며 스즈키 하네에게 말한다.

“뭐 이런 상황이지.”

스즈키 하네는 이런 말들을 듣고, 과연 그 곳에 성공적으로 침투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마음속에 들었다. 그런데 니시무라 유헤이가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지 스즈키 하네에게 한 마디 말한다.

“후후 왜 이런 것들을 자네에게 알려주는지 아는가? 첩자로 침투하는 일은 기상천외한 방법보다 의외로 정석적인 방법이 통한다네. 존재감이 띄지 않는 방법으로 침투하는 것이 자네가 오랫동안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그 때, 어르신은 스즈키 하네를 보고는 한 마디 묻는다.

“조선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지?”

“제가 한반도 출신이라서 조선어 정도는 익히고 다녔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조선인들을 상대로 거래하는 일들을 주로 하는지라 그들의 언어를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대를 이어 일을 하도록 하기를 원하는 눈치인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제가 익힌 것은 별 쓸모가 없었네요.”

“흠...”

어르신은 생각을 하다 이내 니시무라 유헤이에게 묻는다.

“문경의 그 일본인 구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동협 그룹에 입사하는 편인가?”

그 말에 니시무라 유헤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 말은 일본인 마을에 사는 일본인이 동협 그룹에 입사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니시무라 유헤이는 그 말을 듣고, 어르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대답은 즉각적으로 나온다.

“예. 현재 그 곳에 사는 인원들 중 대다수가 동협 그룹에 입사하는 편입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 친구를 그 일본인 마을 쪽을 통해 입사시키면 문제 없을 것으로 보이는군.”

“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르신은 그 대답에 마음이 드는 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스즈키 하네에게 시선을 돌리며 한 마디 말한다.

“사실 자네를 금방 큰일에 쓸 생각은 없어. 아마 꽤 오랜 시간동안 그 곳에서 지내야 할 거야.”

“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습니다.”

“좋아. 이렇게 이야기가 되었으면 일을 시작하지.”

니시무라 유헤이와 스즈키 하네가 동시에 외친다.

-예. 어르신.-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누군가가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은 어딘가로 즉시 보내졌다.

1948년 7월 18일, ‘우리 집’의 병윤은 자신의 방 안에서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흠. 그 어르신은 꽤나 잠잠하게 지내다 또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군요.”

그 말에 고씨 남매 중 모시 한복을 입은 고경열이 설명한다.

“예. 그 쪽에서 동협 그룹 쪽으로 첩자를 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쳐냅니까?”

병윤은 그 말에 후후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바로 쳐내는 것은 재미가 없지요. 저 쪽에서 첩자를 보내어 이용하게 한다면 역시 우리들도 그를 이용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고경열은 그 말에 병윤을 보고 속으로 ‘버릇이 도졌군’이라는 말이 나온다. 고경열이 속으로 말한 병윤의 버릇이란 흔히들 이야기하는 맹수가 사냥감을 포박한 후에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것이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병윤은 그 말에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물론 그 말은 내비려 두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첩자는 양날의 검입니다. 이 쪽이 그 쪽을 찌르듯 그 쪽 역시 이 쪽을 찌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으음.”

“조용히 감시를 하되 내버려두십시오. 그 쪽에서 하는 일반적인 정보 수집을 가지고 이용하기에는 그들에게 타격은 기별도 안 가니 말입니다.”

그 말에 고경열은 병윤에게 한 마디 묻는다.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반간계’입니까?”

병윤은 고경열에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고경열이 말한 ‘반간계’는 적의 첩자를 이용하여 적을 친다는 계략이었다. 고경열은 한숨을 내쉬며 병윤에게 말한다.

“회장님의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일단 그 인원이 큰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감시하기만 하겠습니다.”

“현재 작전부대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현재 동협 그룹 대외 작전 부 염환균 부장의 지원에 따라 어느 정도 무장과 첩보 조직을 확충시켰습니다. 국내에서의 작전은 원활할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병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경열에게 말한다.

“부대의 확장은 계획적으로 할 예정이니 규모가 작다고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고경열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것보다 염 부장이 회장님에게 한 가지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소식이라는 것은?”

“요즘 따라 회장님을 포함한 회장님의 형제들에 대해 적개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 사람들이란?”

“한국민주당 쪽 사람들입니다.”

병윤은 그 말에 눈을 감고 생각하다 금세 그 적개심에 대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전에 아저씨가 내걸었던 그 공약 때문인 것 같군요.”

“예. 농지개혁은 아무래도 그들에게 있어서 죽으라고 말을 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입니다.”

병윤은 그 말에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살 길을 터주는 데도 저를 적대한다면 그들이 곤란할 텐데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병윤에게서 분위기가 확 발산되었다. 사람에게 있어 뭔가 항거할 수 없는 본능과 또 공포감이 두뇌 속에 감인되었다. 하지만 병윤의 분위기를 몇 번 맛을 본 고씨 남매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아니 그 분위기를 곧이곧대로 확산시키지 말지.’

분위기가 점차 잦아지자 고경열은 흠흠 거리며 병윤에게 말한다.

“그들에 대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만약 구체적으로 적대할 행동을 한다면 박살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그 대답을 들은 고경열은 속으로 ‘피바람이 불겠구나.’라고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휴우. 환절기라 그런지 비염이 날로 심해지는군요.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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