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깨비 딸이 너무 귀여워 (7)화 (7/453)

7화

연남동, 한낮의 카페.

민완은 재영을 기다리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집에 범과 가비 둘만 남겨놓고 외출하는 일은 처음이다.

안 쓰는 공기계를 개통해서 두고 왔으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

‘…끝나는 대로 집으로 가야지.’

혹여 자신이 없는 사이 뭔 일이 생길까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약속 시간이 10분 지나서야 재영이 카페로 들어섰다.

“야, 도민완!”

“어, 재영아. 오랜만이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둘은 마주 앉았다.

서로 변했네, 안 변했네 하면서 간단한 근황을 나눈 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맨인블랙, 매각된 얘기는 들었다.”

재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 그렇게 됐네…. 그래서 말이야.”

솔직하게 말하자, 괜한 자존심이 더 없어 보였다. 수없이 다짐하고 나왔건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야, 뜸 들이지 마. 우리가 그 새벽에 같이 마신 술이 몇 잔인데. 어? 그리고 그 술값 거의 다 네가 냈었다. 아냐?”

“…그, 그랬나.”

그때는 민완의 가게가 가파르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술값이라 해봐야, 새벽시장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값싼 안주 하나에 소주뿐이었다.

술에 취해 장밋빛 미래를 함께 꿈꾸던 풋풋한 시절이 떠오르자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열심히 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 희망에 부풀었던 그때.

아니, 실제로 잘됐었다.

매출이 억 단위를 넘어가면서부터 눈덩이처럼 이익이 불어났다.

그 커다란 눈덩이가 절벽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것도 순간이었지만.

민완은 떠오르는 옛 기억들을 애써 지워냈다.

“재영아, 네가 하는 편집 숍에서 MD 구하던데…. 나는 어때?”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재영이 눈을 깜빡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민완은 조금 머쓱해졌다.

“아, 미안미안. 내가 그 생각은 못 했어.”

“……?”

“나는, 네가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할 줄 알았거든.”

“아….”

“너한테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을까 밤새 계산해본 내가 너무 민망하네.”

재영은 늘 솔직했다. 지금 하는 말도 빈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다시 못 받더라도 상관없는 금액은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

“언제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돈은 빌리고 싶지 않아.”

“그러게. 도민완이 어떤 인간인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뭐 어떤데?”

“어떻긴 인마, 너 옛날부터 센 척하고 가오 잡는 거 아주 꼴 보기 싫었거든?”

“내가?”

“어쭈, 모르는 척이냐?”

서로 눈이 마주치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 나 온라인 쇼핑몰 처음 오픈했을 때 생각나냐?”

“아아, 생각나지.”

“오픈하고 보름이 되도록 주문 건수가 열 개도 안 돼서 마음 고생할 때, 내가 너 붙잡고 엄청 하소연했잖아.”

“그랬나?”

“내가 너무 힘들다고 술 사달라고 했을 때 말이야.

네가 내 사이트 보더니 사진 다시 찍어라, 상세 페이지 구성 바꿔라, 그 옷 별로다. 엄청 팩폭했잖아.”

재영의 얘기를 들으니 어렴풋이 떠오른다.

술집에서 잔소리를 퍼붓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집으로 끌고 가 컴퓨터 앞에 앉혀놓고 밤새 수정 작업을 같이했다.

“이제야 내가 너한테 진 빚 갚을 때가 오네.”

재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맨인블랙 매각했다는 소식 듣고 고민 많이 했다. 괜히 네 자존심 긁게 될까 봐 먼저 연락은 못 했지만.”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민완은 코끝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크흐, 흠…. 망한 놈이 뭐 자존심이 있냐.”

“망한 놈이라니? 막말로 네가 ‘맨인블랙’ 매각했지만, 빚이 남은 건 아니잖아.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놈이 말이야, 기운 빠지는 소리 하지 마라. 어우~ 꼴 보기 싫어.”

“…그러게. 네 말이 맞네.”

왜, 미처 떠올리지 못했을까.

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지?

거짓말처럼 웃음이 났다.

“너 우리 가게 매출 두 배로 올려주기 전까지는 못 나간다. 알지? 도민완 감각이 아직 살아 있나 함 보자.”

정재영이 웃으며 민완의 어깨를 두드리고서야, 민완도 완전히 긴장을 풀고 농담을 던질 수 있었다.

“매출 걱정 말고, 보너스 두둑하게 넣을 준비나 해라.”

***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잔하자며 붙잡고 늘어지는 정재영을 뒤로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비야!”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비가 동그란 눈을 뜨며 도도도 뛰어왔다.

“하뺘아아아아앗!”

와락!

안겨드는 조그만 가비를 보니 안심이 된다.

“잘 있었어?”

그래 봐야 세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있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체감 시간은 세 시간이 아니라 석 달쯤 되었다.

“하뺘빠야. 햐이후바야. 후이히뻠! 우와히야빠 햐햐히햐.”

민완의 얼굴을 조그만 손으로 조몰락대며 제 얘기 좀 들어보라는 듯 옹알대는 가비의 모습.

종알대는 그 조그만 입과 통실통실 흔들리는 발그레한 볼이 아무리 봐도 너무 귀엽다.

긴 속눈썹에 깜빡거리는 저 커다란 눈은 어떻고…….

“누가 보면 한 백 년은 헤어졌다 만난 가족인 줄 알겠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민완이 가비를 안아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민완의 입이 딱 벌어졌다.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바닥은 얼마나 깨끗한지, 발로 밟는 것이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감탄하며 집 안을 둘러본 민완이 뒤돌아 주방 쪽을 보았다.

식탁에는 갓 지은 쌀밥에 노릇노릇한 조기, 구수한 된장찌개 등, 정갈한 7첩 반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떠냐, 우렁이 솜씨 끝내주지?”

민완은 너무 감격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렁이, 아니 우렁 님이 눈앞에 있다면 그 발아래 엎드려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얼른 씻고 나와서 밥이나 먹어.”

민완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범이 가비와 놀아주었다.

씻고 나와 꽁냥거리는 아가와 고양이를 보며 맛있는 밥을 먹고 있으니, 눈물 나게 행복했다.

그래, 인생 2막!

이제부터 시작이다. 민완의 내면에서 힘이 마구 솟아났다.

“가비야, 아빠가 내일부터 돈 많이 벌어올게!”

“하뺘.”

“그래, 우리 가비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예쁜 옷도 사줄게. 나중에 장난감도 많이 사주고.”

“흐뺘이야호!”

가비가 통통한 다리를 들썩거리며 함성을 질렀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던 것뿐인데, 가비는 잠들기 직전까지도 민완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범과 놀다가도 민완이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이 쓰였다.

***

출근 첫날.

민완은 거울 앞에 서서 신중하게 옷을 골랐다.

재영이 운영하는 더블제이는 여성복, 남성복, 액세서리 등을 아우르는 캐주얼 편집 숍이다.

옷은 전체적으로 디테일을 최소화한 미니멈의 디자인이 주를 이루지만, 유니크한 액세서리가 많은 곳이다.

민완은 크림색 바지를 발목이 드러나도록 롤업해서 입었다.

그 위에는 톤 다운된 겨자색 티셔츠로 포인트를 주고, 외투는 품이 크게 툭 떨어지는 하늘거리는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흐음….”

일단 첫날이니 너무 힘주지는 말자.

전신 거울 앞에서 착장을 체크하는데 가비가 빤히 바라봤다.

“하뺘!”

저를 안으라고 양손을 내미는 가비를 번쩍 들어주었다.

“헤에헤헷.”

거울에 비친 민완과 자신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귀여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가비야, 여기 봐봐. 여기.”

그 소리를 듣고 범이 기웃거렸다.

“뭐 하냥.”

도도도 걸어 들어온 범이 거울에 비쳤다.

찰칵.

얼떨결에 셋이 함께 찍은 첫 사진이 되었다.

전신 거울 샷으로 보니 민완의 어깨에 매달린 가비가 더욱 쪼그맣게 보였다.

“어휴, 우리 가비. 주머니에 넣어 가도 되겠네? 응?”

“야, 얘가 어떻게 들어가냐. 나라면 몰라도. 헹.”

범이 냥냥거리며 민완의 코트에 매달려 주머니에 쏙 들어가더니 머리를 내밀었다.

“이것 봐봐. 난 들어가지!”

“이잉! 뻠!”

그 모습을 본 가비가 민완의 코트 자락을 붙잡고 한 발을 낑낑 올리며 매달렸다.

“…너도 들어가려고?”

“히잉.”

울상을 짓는 가비의 모습도 찰칵, 사진으로 한 장.

그러고도 아쉬워 동영상으로도 찍어뒀다. 일하다 가끔 꺼내 봐야겠다.

***

연남동 번화가에서 살짝 비켜난 골목에 자리한 2층 단독 주택 건물.

이곳이 더블제이다.

처음 오픈은 8평 남짓의 임대였건만, 3년 전에 확장 이전하면서 건물을 매입해 2층 규모의 숍이 되었다.

낮은 담벼락과 조그마한 마당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라 옷가게보다는 일반 가정집처럼 보였다.

지나가다 들르는 손님들보다는 온라인 판매를 중심으로 직접 착장을 원하는 손님들이 찾는 사무실 겸 쇼룸이다.

“일찍 왔네?”

건물 앞에 서 있는 민완의 뒤로 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첫 출근인데 지각하면 안 되잖아.”

“오오, 역시! 사장을 해봤던 친구라 사장이 뭘 원하는지 잘 아네.”

장난스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둘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탁 트인 높은 층고가 눈에 띄었다.

전반적으로 화이트 벽과 나무 장식장 등으로 구성되어 깔끔하고 따뜻한 인상을 준다.

톤별로 깔끔히 정리된 옷과 다양한 소품들, 과하지 않은 향수 냄새, 세심하게 곳곳에 비치되어 있는 거울과 조명.

민완은 가슴이 뛰었다.

오래전, 무작정 옷이 좋아 뛰어들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일단 모닝커피 한잔하면서 얘기 좀 나눌까? 오전 알바는 오픈 시간 맞춰서 출근할 거야.”

재영은 민완과 함께 숍을 둘러보면서 입점한 브랜드들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었다.

하나의 브랜드로 이루어진 단일 브랜드 스토어와 반대되는 개념이 멀티 편집 숍이다.

여러 브랜드의 옷을 직접 골라 구성하여, 브랜드가 아닌 스타일을 파는 곳.

그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이 편집 숍의 MD이며, 디렉터라고도 불린다.

민완은 매장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를 체크하면서 전반적인 매장의 스타일을 파악했다.

“사실 최근 1~2년 새에 매출이 야금야금 줄고 있어서 걱정이야.

나도 스타일리스트 팀을 꾸리면서 신경을 많이 못 쓰기도 했거든.

가게를 다른 곳에 넘길까도 고민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민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가게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이해가 되었다.

“스타일리스트 일은 어떻게 시작한 거야?”

“편집 숍에 단골로 오는 손님이 배우 이현이었어.

원래 자기 옷 사러 자주 와서 이것저것 추천해주고 얘기 나누다가,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서 스타일리스트를 부탁하길래 시작했거든.

그런데 이게 은근 재밌더라고. 조금씩 알음알음 다른 연예인도 소개받으면서 하다 보니, 어시 뽑아서 팀도 꾸리며 지금까지 온 거지 뭐.”

“재주도 좋네.”

재영은 워낙 성실하고 넉살이 좋은 친구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따가 오후 스케줄이 있어서 나가볼 거야. 오전 알바 1명이 오후까지 종일 있을 거고, 오후에 알바 1명이 더 올 거야. 둘 다 어린 친구들이니까 네가 잘 좀 봐줘라.”

뒤늦게 낙하산으로 온 자신이 잘 봐주고 말고 할 게 있을까.

어린애들한테 꼰대 소리나 안 들음 다행이지, 민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따 저녁에 환영식해야지.”

“어, 나 퇴근하면 바로 집에 가봐야 하는데….”

“야, 니가 집에 와이프가 있냐? 일찍 가봐야 혼자 밥 먹기밖에 더 해?”

“그… 내가 집에 딸이 있거든.”

“컥.”

재영이 마시던 커피를 뱉어냈다.

“뭐, 뭐가 있어?”

“딸.”

“너 나 모르는 새에 결혼했냐?”

“아니.”

“아니? 어…, 그래? 어, 그렇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

재영은 엄청 궁금했지만, 민완의 성격을 알기에 질문을 삼켰다.

민완이 핸드폰을 열며 말했다.

“사진 보여줄까?”

민완은 오늘 아침에 찍은 사진을 재영에게 내밀었다.

“뭐야, 완전 아기네?”

“두 살이야.”

사실 도깨비라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대략 12개월 정도라 치면 적당해 보였다.

산에서 처음 만난 날을 첫 번째 생일이라 치면, 가비는 이제 막 돌잔치를 치른 두 살이라고….

민완 혼자 정리해 버린 것이다.

재영은 민완의 품에 있는 아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쭈욱 확대해 보았다.

“…뭐, 뭐야. 아기 눈이 왜 이렇게 커? 누구 닮은 거야? 네 딸 맞아?”

“안 닮았냐?”

“야, 얘는… 아니, 다른 사진! 다른 사진 봐봐!”

재영의 재촉에 민완은 울상을 지으며 칭얼대는 가비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히잉. 하뺘빠이야앗!]

울망울망한 눈에 새하얀 찹쌀떡 같은 두 볼, 참새처럼 옹알대는 조그만 입, 소시지같이 짧고 통통한 다리를 동동거리는 모습.

“…얘 뭐야, 왜 이렇게 귀여워?”

“아휴, 참. 귀엽긴 뭐가. 이맘때 애들이 다 그렇지.”

하는 말과는 달리 민완의 광대가 감출 수 없는 우쭐함으로 솟아올랐다.

재영은 10초도 안 되는 영상을 다시 반복 재생, 반복 재생, 반복 재생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환영식은 너희 집에서 해야겠다! 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