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옷을 입어보셔야 하니까, 패딩을 걸어 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손님의 패딩을 받아들자 안에 입은 옷이 훤히 드러났다.
하체보다 상체가 발달한 체형이다. 꽉 끼는 셔츠, 굽은 어깨에 살짝 거북목도 있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지만 조소 작업으로 인해 팔 근육만 발달했을 것이다.
“찬찬히 둘러보세요.”
민완은 조금 거리를 두고 다른 일을 하는 척하며 손님을 살폈다.
‘간결한 말투, 방어적인 태도. 분명 직원이 적극적으로 응대하면 뒷걸음질 치며 나갈 상이다.’
손님은 행거에 걸린 옷들을 한 번씩 살펴보면서도 시선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손님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 시선의 변화, 경직된 손가락 등이 보였다.
옷을 사는 일이 익숙지 않은 모양새였다.
셔츠나 바지는 몇 년 된 제품인데 패딩만 신상품인 것으로 보아, 군에서 전역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것 같다.
‘제대하고 머리를 조금 길렀다가 자른 거겠지.’
잘려나간 머리카락 길이나, 지금의 애매한 기장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평소에 멋 부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오늘은 작정하고 나온 것이다.
‘들고 있는 가방도 없고. 미용실에 갔다가 곧장 옷가게로 왔으니까, 나름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서 가장 좋은 걸 입고 나왔지만, 세 개의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도와 드릴까요?”
민완이 손님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네?”
적극적인 응대에 당혹스러워하지만, 호의를 딱 잘라 거절하는 타입도 아니다.
이 손님에게는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손님은 어깨 골격이 좀 둥글어서 이런 블루종 스타일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민완이 짧은 점퍼를 손님의 상체에 대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색상이 너무 밝은 건 부담스러우실 것 같으니, 이런 카키색은 어떠세요?
지금은 셔츠를 입고 계셔서 목이 좀 짧아 보이지만, 이런 옷은 안에 기본 라운드 넥 티셔츠에 입으시면 좋아요.”
손님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드러나게 만족스러운 티를 내지 않아도 민완의 눈에는 미묘하게 달라지는 눈꼬리가 보였다.
“이렇게 상의가 조금 둥그런 느낌으로 가시면 하의는 약간 핏하게 입으시는 게 좋고요. 신발은 로퍼나 더비 슈즈와 같이 매치하셔도 되고, 아니면 컬러감 있는 스니커즈를 신으시면 포인트도 주면서 학생 느낌이 더 많이 나죠.”
“아, 네.”
입으로는 간결한 반응이지만, 블루종 점퍼를 꼭 쥐고 있는 손에서 만족감이 느껴졌다.
“티셔츠랑 같이 입어보시겠어요?”
“그래도 되나요?”
“네, 이쪽으로.”
민완은 피팅룸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옷을 입고 나온 손님이 거울 앞에 섰다.
“손님은 바지 밑단을 이렇게 복숭아뼈 위쪽으로 올리시면 좋아요. 그리고 팔뚝이 조금 드러나면 좋을 것 같아요. 소매는 살짝 이 정도로만 걷어볼까요?”
민완은 스타일링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정보가 많으니 더 적극적으로 그에 맞는 스타일을 권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샘솟았다.
게다가 크게 리액션을 해주지 않는 손님일지라도, 미묘하게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어떤 것에 더 시선을 빼앗기는지 등.
사소한 것들이 모두 캐치되었다.
‘재밌다.’
결국 손님은 점퍼와 티셔츠, 바지까지 함께 결제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작년 12월에 제대하고 곧 있음 복학하거든요.”
“아, 네.”
제 짐작이 맞았다는 것에 민완은 속으로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옷을 잘 입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서 너무 막막했는데…. 추천해 주신 옷들이 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학생이 전하는 감사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민완은 알 수 있었다.
“학생이 미술을 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 거죠?”
“네?”
“저는 옷도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알면 옷을 고르는 게 더욱 쉬워져요.”
“아….”
“내가 봤을 때 학생은 상체가 멋지게 발달한 것 같아요. 특히 이 팔뚝이요.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거든요.”
“…감사합니다.”
“예쁘게 입으세요.”
쇼핑백을 소중히 들고 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는 민완의 입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하뺘!”
손님이 나가길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자마자 가비가 오도도 달려왔다.
“읏쨔! 밥 다 먹었어?”
“녜!”
민완은 가비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아빠가 잘 썼어. 빌려줘서 고마워.”
“헤에헷!”
뒤따라 들어온 지혁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형, 아까 그 손님이 미술 전공인 거 어떻게 알았어여?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그냥 되게 평범해서 예술을 하는 사람 같진 않았는데.”
“손톱 밑에 찰흙이 있었거든.”
“에에? 그게 보였다구여?”
민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
“그래?”
범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는데, 별로 놀라워하는 기색이 없다.
“천년 상점 물건은 원래 쓰기 나름이란 말이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일월 선녀도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물건이라도, 그 물건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안목을 가지신 분들에게 유용한 곳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시경이라는 저 목걸이는 신기한 물건임이 틀림없지만, 범의 말처럼 팔자를 고칠 만큼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돈이 넘쳐나는 화수분 같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힘이 세지거나 하늘을 난다거나 하는 특별한 능력도 아니고….’
그저 좀 더 잘 보일 뿐, 아니 좀은 아니고 많이 잘 보이는 거지만.
‘쓰기 나름이라.’
탐정이었다면 엄청나게 유용했을 것이다.
심리학자에게도 좋겠지, 흔들리는 눈동자 하나까지도 캐치할 수 있으니.
민완은 낮의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짧은 시간에 파악하여 취향, 체형, 생활에 꼭 맞는 옷을 추천해 준다는 것.
‘뭐, 나한테도 괜찮은데?’
민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더 비싼 코인을 주면 더 좋은 물건을 얻을 수 있는 걸까?
1천 코인, 1만 코인씩 하던 물건들은 뭘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코인을 산신령이 줄 리가 없지.’
“후-와!”
가비는 창문에 앉아 펜던트로 하늘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 가비 네가 좋음 됐다.”
민완이 나시경 생각에서 빠져나와 밀린 집안일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벨 소리가 울려 확인해보니 재영이었다.
“어, 왜?”
[민완아, 어디냐?]
“집인데? 왜?”
[가비도 같이 있는 거지?]
“어, 왜?”
[내가 주소 찍어줄 테니까 가비랑 같이 택시 타고 와줄 수 있어? 빨리.]
민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곧이어 주소 하나가 떴다.
“…아쿠아리움?”
이건 또 뭔 일인가.
민완은 일단 가비랑 같이 집을 나섰다.
“민완아! 여기!”
타고 온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재영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함또?”
“어, 우리 가비. 오느라 고생했어요~”
“무슨 일이야?”
“일단 들어가면서 얘기하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휴관일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여기서 광고 촬영 중이었거든.”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광고 촬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배우 이현이 메인으로 나오고 아역 모델이 섭외되었는데, 섭외된 아이가 얼굴에 발진이 생기는 수족구병에 걸렸다며 갑자기 펑크가 났단다.
“여기가 한 달에 한 번 휴관하는 곳이라, 오늘 못 찍으면 완전 펑크거든. 아님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거나.”
“…그래서 네 말은, 지금 가비한테 출연하라는 거야?”
“…어, 일단 가비 사진을 감독님께 보여 드렸는데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야! 이렇게 갑자기 그럼 어떡해.”
“민완아, 딱 세 컷이야. 진짜 몇 초. 후딱이야~ 전체 스텝들 몇 시간째 올 스톱 상태고.
몇몇 후보들을 올려봤는데, 감독이 다 커트했고. 딱 가비만 보자고 한 거란 말이야. 일단 만나만 봐. 응?”
간절한 재영의 부탁에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그랬다.
“가비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 알겠지?”
아직 두 살 아기이긴 하지만, 말만 못 할 뿐, 전부 다 알아듣는다고 민완은 생각했다.
아쿠아리움에 처음 와본 가비는 입을 딱 벌린 채 구경하느라 바빴지만, 민완은 가비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춰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가비야, 여기 들어가면 사람이 엄청 많거든? 반짝거리는 조명이랑 찰칵하는 카메라가 있어.”
“후와!”
“근데 그 카메라가 가비를 찍고 싶대.”
“녜!”
가비가 두 손을 만세하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켜보던 재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지금은 그냥 사전 설명이야. 들어가서 찍다가 조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바로 데려갈 거야.”
“알겠어~ 나도 가비 삼촌이야. 가비 싫다는 거 억지로 시킬 마음 없어.”
“함또~!”
가비가 민완과 재영의 손을 한쪽씩 잡고는 아장아장 촬영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스텝들의 시선이 꽂혔다.
두리번거리던 가비가 코를 찡긋거리는 눈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안넝~”
경직되어 있던 현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술렁였다.
“웃는 거 봤어? 너무 귀여워!”
“사진보다 더 예쁘잖아!”
“어머, 애기가 낯도 안 가리네.”
그 수군거림이 민완의 귀에도 꽂혔다.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 김주환 감독님이야. 감독님, 사진 보여드렸던 아기에요. 이름은 가비에요, 도가비.”
김주환 감독은 깡마르고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검은 뿔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눈이 가비를 위아래로 훑었다.
민완은 저도 모르게 몸을 틀어 가비를 보호하듯 섰다.
“헤에헷~”
가비는 그런 민완의 몸짓을 장난친다고 여긴 것 같다.
조그만 손으로 민완의 바지를 부여잡고 몸을 흔들거렸다.
“하뺘빠앗~”
살랑살랑 움직이는 가비를 보던 김주환 감독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름이 가비라고?”
“네, 두 살이에요.”
“두 살보다는 좀 커 보이는데?”
“생일이 빨라서요.”
“일단 카메라 테스트 한번 해볼까요?”
김주환 감독이 민완의 바지를 잡고 있는 가비에게 다가갔다.
“가비야, 저기서 아빠 손잡고 걸어와 볼래?”
“…저랑요?”
“아빠 얼굴은 안 나오니까 걱정하지 마요.”
민완은 가비의 손을 잡고 아쿠아리움 터널을 같이 걸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은 번쩍거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지만, 가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엄청 흥분 상태였다.
“후와! 후우와하뺘!”
아쿠아리움이 처음이라 그런가?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민완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하뺘하뺘!”
가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색색의 물고기들을 가리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촬영장에 낮은 탄식이 흘렀다.
“좋아, 아주 좋아!”
김주환 감독이 벌떡 일어나 박수까지 쳤다.
“아이 표정이 아주 살아 있어!”
몇 시간째 대기 중이던 스텝들의 표정이 활짝 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된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 옷 갈아입고 30분 후에 촬영 시작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재영이 달려왔다.
“어휴, 우리 가비는 완전 카메라 체질인가 보다. 얼굴도 예쁜데, 담력도 있어요!”
“헤에헷~”
“가비, 저기 가서 우리 예쁜 옷 입고 올까요?”
“녜!”
재영이 가비를 안아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얼른 가비가 몸을 틀어 민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하뺘!”
“…하아, 우리 좀 친해지지 않았었나?”
실망한 재영이 탄식했다.
“내가 있는데 너한테 가겠냐?”
민완이 피식 웃고는 가비를 번쩍 안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