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옷은 외부와 소통하는 가장 직설적인 방법이다. 옷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지, 무엇이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며….]
칼럼 쓰기에 열중하는 그때, 민완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열 시가 넘도록 잠들지 않는 가비가 계속해서 같은 노래를 반복해 듣는 것이 아닌가.
“뚜따~ 응 나햐라 나햐 뚜따~!”
“가비야~ 이제 자야 돼.”
“…녜!”
대답만 할 뿐, 노래는 다시 시작된다.
“히따하꼬~ 하음따운~”
락 페스티벌 이후 가비의 도깨비 부심은 부풀어갔다.
어린이집에서도 공공연히 ‘까비는 깨비햐’라 말하고 다녔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집에서 가비 영상을 접한 아이들이 도깨비 밴드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모두가 ‘나는 도깨비야, 너의 도깨비야.’ 하고 다녔기에 가비가 튀어 보이지도 않았다.
선생님들까지 덩달아 도깨비와 관련된 이야기, 노래, 놀이 등을 알려주면서, 가비의 타오르던 도깨비 부심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시무룩한 모습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이렇게 밤에 잠도 안 자고 흥분 상태로 있는 것은 곤란했다.
민완은 쓰던 글을 저장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민완의 기척을 느끼자 가비가 얼른 이불에 엎드렸다.
“…코오. 코….”
이제 자는 척까지 하다니.
타조처럼 베개에 얼굴만 묻고 동그란 엉덩이는 치솟아 있다.
“도~ 가~ 비이이!”
민완이 다가가 옆구리에 손을 대자마자 몸을 뒤집으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가비.
“우리 가비, 오늘 왜 이렇게 신났어? 이렇게 늦게 자면 안 돼.”
“하뺘 가띠 코오~”
“아빠랑 같이 잔다고?”
“녜!”
“아빠는 아직 일이 남았어.”
“…힝.”
눈썹을 축 늘어트리는 모습을 보니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민완은 가비의 옆자리에 누워서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헤에헤.”
금세 웃으며 민완의 옆구리로 파고드는 조그만 가비의 체온이 따뜻하다.
“자장~ 자장~ 우리 아기.”
노래까지 부르며 가슴을 토닥여 주는데 가비는 방긋방긋 웃으며 눈만 깜빡일 뿐이다.
그렇게 20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듯했다.
“가비야.”
“녜!”
“지금 잠 안 자면 가비는 도깨비 나라로 가야 돼.”
“…네, 녜에?”
“가비가 아까 노래 불렀잖아.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 도깨비 나라라고. 가비가 잠 안 자면 도깨비들이 같이 살자~ 하고 데리러 온대.”
“…하뺘 가띠?”
“아빠는 도깨비가 아니라서 같이 못 가. 가비 혼자 가는 거야. 가비는 도깨비 나라 좋아하지? 가고 싶지? 그럼 잠 안 자고 조금만 더 버텨봐~ 알았지?”
“앙대!”
가비가 눈을 질끈 감고 민완의 옆에 더욱 찰싹 붙었다.
‘호오, 이게 먹히네?’
지금까지는 특별히 가비를 훈육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왜 많은 부모들이 망태 할아버지나 호랑이를 들먹거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뺘, 까비 코오~ 쟈.”
“어어? 자는 사람은 말 안 하는데에?”
“…….”
“도깨비 아저씨들이 어디까지 오셨을까아~?”
통통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잔뜩 몸을 웅크린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놀리고 싶어지지만.
“쿡쿡, 아빠가 노래 불러줄게, 가비, 코오 자자.”
살포시 끄덕이는 가비.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아기~”
민완의 토닥거림에 조금씩 가비의 몸에 힘이 풀리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휴우, 이제야 잠들었네.”
민완은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이쿠! 깜짝이야! 범님, 거기서 뭐 하세요?”
창턱에 앉아 고개를 쭉 내민 채 밖을 두리번거리는 범.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네?”
“인간아, 너는 모르겠냥?”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여기가 12층인데.”
민완은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공포 영화는 예고편도 못 보는 체질이라, 이런 이야기는 질색이다.
“날씨가 선선해져서 바람이 부는 거예요. 창문을 닫아야겠어요.”
“흐음.”
범이 창턱에서 내려오자 민완이 창문을 닫으며 힐끗 밖을 살폈다.
보름달이 환해서 별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아, 그리고 인간아.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으로 범이 무게를 잡았다.
“산신령님이 이제 돌아오라고 연락이 왔다.”
“…네?”
언젠가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처음에야 삼백 년 만에 태어난 귀한 도깨비를 돈타령하는 놈에게 맡기려니 못 미더웠을 것이다.
그래서 감시 겸 보호의 명목으로 범을 보낸 것인데….
막상 같이 지내보니 범이 이곳에서 할 일이란 게 딱히 없었던 것이다.
낮 시간에는 집에서 혼자 뒹굴며 티브이를 보는 것이 전부였으니.
‘뭐, 그래도 가끔 유용한 정보를 주기도 했지. 가비랑도 잘 놀아주었고….’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민완이 가지 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가실 건데요?”
“뭐, 당장 내일 가야지. 여기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가비랑 인사는 하고, 마지막으로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아, 그렇지! 범님은 여기 오셔서 외출도 많이 못 해 보셨잖아요.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다. 이 몸으로 밖에 나가 봐야 귀염을 받는 것밖에 더 하겠냐?”
범은 대부분의 시간을 이 집 안에서만 보냈다.
함께한 외출은 딱 한 번, 어린이날 바다 여행을 간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함께 살면서 정도 들었고, 이제는 한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야! 뭐 영영 안 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 표정을 짓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흔들리는 꼬리를 보니 범도 싫지는 않은가 보다.
“어차피 자주 들여다보게 될 거야.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불러라.”
범은 민완의 손등을 꾹꾹 누르는 것으로 아쉬워 말라는 말을 대신했다.
***
민완과 재영, 가비는 광고 촬영 전 사전 미팅을 위해 이츠세븐 본사에 도착했다.
“후와~ 끄다!”
높은 빌딩 앞에는 빵과 도넛, 아이스크림 조형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암냠! 냠!”
초코 소라 빵 모형에 매달려 있는 가비를 떼어서, 옆구리에 끼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탁 트인 로비 안에는 달콤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가비야, 안녕! 오랜만이네.”
마중 나와 있던 김정아 팀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넝!”
“가비야, 안녕하세요~ 하는 거야.”
“안넝햐땨~”
두 손을 흔들거리면서 고개는 더욱 정중히 숙이는 가비.
“후후~ 안 본 새에 좀 큰 것 같네요. 더 귀여워진 것 같고요.”
“네, 애들 자라는 건 정말 금방이더라고요.”
“후후, 위층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로 이동했다.
넓은 회의실에는 가비를 위해 먹음직스러운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땨히야홋!”
도도도 달려가서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가비.
벌어진 입에서 침이 뚝, 흐르지만 손부터 뻗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뺘?”
“이따 밥 먹어야 되니까 딱 하나만 먹어.”
“녜!”
신중한 눈빛으로 과자를 고르는 가비의 모습에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쩜~ 말을 다 알아듣는 거야?”
“귀여워! 저 진지한 표정 좀 봐.”
회의실에 앉아 있던 네 명의 직원들이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귀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가비 온다니까 서로 회의에 참석하고 싶다고 난리였어요. 치열한 경쟁 끝에 뽑힌 직원들이에요.”
김정아가 민완에게 귀띔해 주었다. 이제는 이런 반응도 좀 익숙해진 것 같다.
“하뺘! 이꼬!”
가비가 신중히 고른 과자를 내밀었다.
민완이 포장을 뜯어서 다시 돌려주자 혀를 날름 내밀어서 맛을 본다.
“헤에헤~ 아꾜머거!”
옴뇸뇸, 조그만 입을 움직이자 통통한 두 볼이 흔들거린다.
“…으윽!”
회의실 안의 모두가 그 모습을 보며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저, 회의 시작 안 하나요?”
“아! 네! 해야죠. 흠흠.”
직원들은 광고 촬영 컨셉에 대해 화면을 띄우며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크리스마스와 도깨비를 결합한 광고예요. 동서양 문화의 혼합이랄까요?”
잇츠락 페스티벌에서 유명해진 가비의 이미지들을 크리스마스 광고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도깨비 밴드가 CM송을 만들어주실 거고요, 곡이 완성되면 가비 목소리로도 녹음하는 걸 생각하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구매하면 이렇게 반짝거리는 도깨비 방망이를 증정하거든요. 세워서 조명으로 쓸 수도 있고요….”
“이 방망이 안에 응모권이 있어서 경품 추첨도 할 거예요.”
“가비 포토 카드를 넣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1등은 가비랑 놀이공원 가기?”
“그냥 열댓 명 초대해서 파티를 하는 건 어떨까요?”
단순한 광고 촬영을 넘어서 여러 이벤트가 엮여 있었다.
게다가 직원들의 사심 가득한 아이디어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난감해하는 민완과 달리 정재영이 노련하게 치고 나갔다.
“아하하, 이거 단순한 광고 모델이 아니었네요. 이벤트에 관한 얘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설마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는 건 아니시죠?”
“네, 일단은 내부적인 아이디어고요, 무엇보다 가비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그 이벤트에 관련된 자료만 따로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확답 드리겠습니다. 오늘 회의 자리에서는 광고 콘티 위주로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민완은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괜히 매니지먼트를 차린다는 게 아니었네….’
“아기 도깨비가 혼자 쓸쓸하게 산속을 걷고 있는데, 자기 방망이를 샘에 빠트리게 돼요. 그 샘에서 산타가 나오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불빛이 나오는 방망이를 주는 거죠. 방망이를 휘두르니까 주변이 전부 크리스마스 느낌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때 저희 케이크가 나올 거고요~”
김정아가 화면에 콘티를 띄워가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저, 가비가 입게 될 옷은 준비해 주시는 건가요?”
“저희가 따로 의뢰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컨셉을 상의한 후에 직접 제작해 주셔도 됩니다.”
“가비 옷은 제가 직접 제작하고 싶습니다.”
민완의 말에 정재영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일단 상의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콘티는 메일로 다시 보내주시겠어요?”
그렇게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직원들은 남은 간식을 따로 챙겨주었다.
“깜땨함댜!”
직원들은 가비가 로비를 빠져나갈 때까지 졸졸 쫓아오며 인사를 했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재영이 민완의 등을 두드리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야, 진짜 대박이다!”
“뭐가?”
“저쪽에서 가비 아니면 안 된다고 대놓고 들이대잖아. 너 이츠세븐 그룹이 얼마나 콧대 높은지 모르지? 내가 이현한테 들어봤는데… 쟤네는 태도가 너 아녀도 할 사람 많다~ 이런 걸로 완전 후려친대.”
“야야, 가비 앞에서 말 좀 조심하자.”
“아, 쏘리. 여튼! 이벤트는 저쪽에서 목록 주는 거 봐서 괜찮으면 수락하는 거고, 아니면 거절해도 돼. 너무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
“그래, 고맙다. 너랑 같이 와서 좀 안심이다.”
“짜식, 낯간지럽게 고맙기는~ 너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딸 생겨서 그러냐?”
“…흠흠, 아. 그런데 가비 의상을 내가 담당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뭐, 어차피 저쪽에서 외부로 맡길 거면 우리가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긴 한데… 너 괜찮겠어? 저쪽에서 간섭을 많이 할 수도 있는데.”
“응, 재밌을 것 같아. 요즘 재봉틀을 공부하고 있기도 하고.”
“흐음…. 그래, 일단 컨셉은 나왔으니까, 디자인 시안을 잡아보고 저쪽에 제안해보자.”
민완은 그림책 속에 나오는 산적 같은 도깨비 옷 대신, 요정같이 밝고 귀여운 느낌의 의상을 준비해주고 싶었다.
이제 겨우 도깨비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가비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다.
“가비야~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으러 갈까요?”
“꼬기!”
민완과 재영이 가비의 양쪽 손을 잡아주자 가비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나, 둘, 셋~”
부웅~
가비의 웃음소리가 높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