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뒤풀이라….
민완은 이럴 때마다 참 난처하다. 워킹대디의 비애랄까.
“저는 딸을 데리러 가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함께하겠습니다.”
“벌써요? 잠깐이라도 계시다 가시지. 오늘 촬영한 거 얘기도 좀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박선영 작가의 말을 강미나가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그래요~ 저희 지난번 미팅 끝나고도 밥 못 먹었잖아요. 잠깐이라도 같이 있다가 가요. 네?”
민완의 팔을 붙잡고 애교 있게 흔드는 강미나.
평소라면 떨떠름한 표정이 여과 없이 나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미나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발걸음이 안 떨어지네요.”
강미나의 손을 떼어 내면서도 사르르 눈웃음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강미나가 꺄르륵 웃으며 민완의 팔을 통통 두드렸다.
“아, 뭐예요~ 민완 씨 눈웃음 좀 봐, 완전 여우네?!”
뒤통수에 꽂히는 싸늘한 시선은 분명 타미의 것이겠지….
***
방송국 옆 고깃집으로 모두 함께 이동했다.
이현은 추가 촬영 후에 최문영 피디와 함께 오기로 했고, 박선영 작가가 몇몇 스태프와 패널들을 이끌고 자리를 잡았다.
미리 전화를 넣었던 듯, 세팅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고기가 척척 나왔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바라보니, 가비 생각이 났다.
‘혼자 고기 냄새 풍기면서 데리러 가면 슬퍼하겠지…. 집에 갈 때 포장을 좀 해갈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불판을 바라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박선영 작가가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을 걸어왔다.
“배고프시죠? 소고기니까 금방 익어요, 먼저 드세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구울게요. 집게 주세요.”
“괜찮아요. 저 고기 잘 구워요. 저희 부모님이 삼 대째 내려오는 고깃집을 운영하시거든요. 대학생 때까지 고기 굽는 알바도 했어요. 자, 이거 드셔보세요.”
박선영 작가가 민완의 밥그릇 위로 고기를 쌓아주었다.
한 점 먹어보니 입에서 사르르 녹을 만큼 부드러웠다.
“와, 정말 맛있네요.”
“그쵸? 여기 많이 드세요.”
“작가님이 구워주셔서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아유, 민완 씨도 참. 진짜~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아유….”
박선영 작가가 부끄럽다는 듯 집게 든 손을 휘적거렸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타미가 말했다.
“작가님,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닙니까?”
앞자리에 앉아 있던 타미가 집게와 가위를 빼앗다시피 가져왔다.
나머지 고기를 척척 잘라 옆자리 사람들에게 올려주었다.
“아니, 저는 민완 씨가 곧 가셔야 된다고 하니까….”
박선영 작가가 머쓱하게 중얼거렸고, 이번에도 강미나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요, 민완 씨 곧 가셔야 한다잖아요. 이것도 드세요.”
“고맙습니다.”
민완이 싱긋 웃으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러곤 타미와 눈이 마주치자, 더욱 해맑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 고기 너무 맛있네요.”
타미의 어이없는 표정을 바라보며 민완은 속으로 큭큭 웃었다.
‘아, 이거 은근 재밌네….’
어느새 즐기게 된 민완이었다.
잠시 후에 최문영 피디와 이현, 정재영이 합류했다.
“자자, 오늘 대망의 첫 촬영이 있었습니다. 크으~ 지금 제 마음은 너무 흡족하고요. 제가 스타일온에서만 십 년을 피디 생활했는데, 정말이지 지금까지 이런 스타일 프로그램은 없었다!
패셔너블하면서 막 감동도 있고, 힐링도 되는… 아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최문영 피디가 원래도 좀 오버하는 성격인 것은 알았지만, 오늘은 첫 촬영의 여운 때문인지 더욱더 흥분한 것 같았다.
“특히나 각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계신 뛰어난 분들과 함께하니 너무 든든하고요.
우리 이현 씨도 흔쾌히 첫 게스트로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한 얘기를 또 해주셔서 제가 좀 울컥했다니까요?”
…모두가 잔을 든 채 기다리고 있는데도 최문영 피디의 말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선영 작가가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말을 끊었다.
“피디님, 1절만 하세요.”
“앗, 네. 죄송. 자~ 건배할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잔과 잔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구석구석 기분 좋게 퍼져나갔다.
“그런데 보통 이런 프로그램은 몇 회 정도 찍으면 종영이에요?”
“얼마나 화제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데요. 보통 20회 정도 하고, 반응이 좋으면 다음 시즌제로 갈지 말지를 정해요.”
“그렇네. 생각해보면 스타일온은 거의 다 시즌제였네요? 와, 잘 됐으면 좋겠다.”
분위기가 이제 막 무르익어갈 즈음, 민완은 슥 눈치를 살피며 일어나야 했다.
옆자리에 앉은 박선영 작가에게만 속삭이듯 말했다.
“작가님,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다음에 봬요.”
타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고깃집을 빠져나오는데,
“민완 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현이었다.
촬영 때 입은 옷과 헤어, 메이크업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서요. 오늘 저 때문에 여러모로 애써 주셨잖아요.”
“아아… 아니에요,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출연하길 잘한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민완의 다정한 말에 이현이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세요?”
“아니, 민완 씨. 오늘 좀 다른 사람 같아서요.”
“…그런가요?”
“아, 우리가 자주 본 건 아니긴 하지만… 세희나 재영이가 민완 씨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이런, 저 없는 데서 그 사람들이 제 흉을 봤다구요?”
민완이 일부러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이현도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쳤다.
“제가 본의 아니게 고자질을 했네요. 호호, 비밀로 해주세요.”
“일단 내용을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흐음~ 민완 씨는 참 성실하고, 매사에 진중하다. 그런데….”
“그런데?”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게 느껴질 수 있다…고 하던데요?”
“아아….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민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좀 다르게 느꼈어요.”
“네?”
“민완 씨는 성실하고, 진중하며, 또… 굉장히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그걸 알게 된 것 같아요.”
이현이 웃는 얼굴로 민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네.’
아무리 여우 팬티를 입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민완 씨, 현이 씨. 둘이 뭐 해요?”
담배 피우러 나오던 최문영 피디와 전종헌 아나운서였다.
최문영 피디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지면서 손가락이 이현과 민완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둘이 수상하다니까… 아까도 말이야, 어? 둘이 손을 막 조몰락조몰락….”
“네에? 진짜요? 둘이 손을?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도 단둘이 있지 않았어요?”
“지하 주차장? 아니, 왜에? 왜 자꾸 둘이 있는 데에?”
깐족거리는 두 사람.
정색하며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어 민완이 애써 웃으며 상황을 수습하려는데.
“피디님, 진짜 이럴 거예요? 아까 나 속 안 좋아서 그랬다니까~ 약 먹어가면서 열심히 촬영했는데, 이런 식으로 몰아가면 나 엄청 서운해요!”
애교 있는 말투로 툴툴거리며 이 현이 최문영 피디를 귀엽게 노려보았다.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쏘리쏘리~~~”
“그리고 혹시라도 이상한 소문 퍼지면, 다 종헌 씨가 한 거라고 알 거예요. 나도 종헌 씨에 대해 들은 게 좀 있는데에~?”
“나, 나요?”
“종헌 씨 요즘 연애한다면서요.”
“…누, 누가 그래요?”
“글쎄요. 얼마 전에 종헌 씨가 가방 사주셨다고 자랑하던데, 이름이 지….”
“지? 지… 지가 누구야?”
최문영 피디가 눈을 반짝거리며 관심을 보이자, 전종헌 아나운서가 얼른 그의 등을 떠밀었다.
“으하하하하하!!!! 거참, 이현 씨도 재밌는 사람이네. 아, 피디님. 담배 태우자면서요. 아하하하.”
전종헌 아나운서가 최문영 피디를 재촉하며 골목 뒤로 사라졌다.
그 당황해하는 모습에 민완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이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엔 제가 위기 탈출했죠?”
“네, 잘하셨습니다.”
“그럼 어서 가보세요. 가비 기다리겠어요.”
“네, 재영에게도 먼저 간다고 전해 주시고요.”
“네~ 다음에 또 봬요.”
이현은 민완에게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킁킁, 하빠아~ 꼬기 머거써?”
역시나 가비의 코는 속일 수가 없다.
“어, 아빠가 일 끝나고 먼저 밥을 먹고 왔어.”
“그래꾸나… 마시썼어?”
“…어, 음? 아니!”
“꼬기 안 마시써?”
“맛있는 건 가비랑 같이 먹어야 되는데, 아빠 혼자 먹어서… 조금 덜 맛있었어.”
혼자 저녁을 먹고 온 것에 대한 미안함에 한 말인데, 가비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가비, 왜? 무슨 생각해?”
“…까비는 마시썼는데….”
“쿡쿡, 뭘 먹었는데?”
“아쑤쿠림!”
“아이스크림? 숲이랑에서 먹었어?”
“우웅… 찐구들이랑 산에 갔다가 와서… 빰이 오빠 엄마가 사줬는데….”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가비를 보니, 웃음이 났다.
“산에 갔다 와서 먹으니까 더 맛있었겠네?”
“우웅… 맛있게 암냠냠 했는데… 까비 혼자 마시께 먹어서 미아내….”
가비가 민완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빠는 혼자 고기 먹어서 덜 맛있었다고 했는데, 자기는 혼자서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은 것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쿡쿡, 괜찮아. 가비야. 아빠는 항상 가비 마음속에 있잖아. 그러니까 가비가 혼자 먹어도, 아빠랑 같이 먹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 그런 고야?”
가비의 표정이 일순간 환해졌다가, 또다시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조그만 손가락을 꼬물거린다.
“가비 왜? 또 뭐가 걱정이야?”
“하빠… 쭈워?”
“춥냐고? 아니? 지금은 여름이잖아, 가비야.”
“…하빠는 까비 마음 쏙에 있는데, 까비가 아쑤쿠림 두 개 먹어써.
그래서 아까 요기가 아이 차가웠는데… 하빠 마니 추워써?”
가비가 제 가슴을 문지르며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귀여워….’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니, 오히려 장난기가 발동했다.
“에에취잇! 아휴, 그래서 아까부터 자꾸 기침이 나왔구나. 가비가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먹어서?”
“오, 오또카지? 하빠 추워? 감기야? 에취야?”
“으응~ 아빠 추워, 가비야. 가비가 더 꽈악 안아 줘야겠다.”
“아라써! 까비가 따뜻하게 해주께!”
민완의 목을 안고 있는 가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 주려는 듯 온몸을 비비적비비적, 꼬물꼬물하는 몸짓이 간지럽다.
“크, 크큭. 가비야. 이제 괜찮아. 간지러워. 그만, 그만.”
민완이 웃으면서 가비를 더욱 세게 한 번 안았다가 내려주었다.
함께 손을 잡고 마트에 들러서 간단히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완이 문득 생각이 나 가비에게 물었다.
“가비야, 내일 우리 어디 가기로 했지?”
“아조씨네.”
“맞아, 안 까먹었네?”
“우웅… 하빠 가치 가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까비만 혼자 안녕하면 안 돼.”
민완이 가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걱정하지 마.”
내일은 강영석의 집에 초대받은 날이다.
일주일 전부터 틈틈이 가비에게 말해 두었는데,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나 보다.
그게 미안하고, 안쓰럽지만… 그럴수록 민완은 더욱 가비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내일 아저씨한테 인사하고, 아줌마한테 인사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오자. 알았지?”
“웅, 우리 찝으로 돌아오쟈.”
“그래, 그러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