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깨비 딸이 너무 귀여워 (192)화 (192/453)

192화

“생기를 다루는 법이라….”

산신령은 긴 수염을 쓸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팔찌로 억제한다고는 해도, 이렇게 갑자기 힘이 솟구칠 때가 있잖아요. 가비도 자기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고 하는데….

오히려 가비가 조금씩 자기 힘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이 팔찌도… 언젠가 풀어줘야 할 때가 올 테니까요.”

민완은 제 손목의 붉은 팔찌를 매만지며 말했다.

예린이의 생일 때 가비가 스치듯 한 말이었지만, 그게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무엇이 가비를 위하는 일일까?

매일매일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그게 정말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을 안고 있는 건지도….

“어떤 때에는 정말 보통의 아이처럼 키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가도,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게 도깨비라는 가비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비가 도깨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영석 내외가 있지만… 이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어쩌면 자기 대신 가비의 부모가 되었을 수도 있는 부부였으니까.

민완의 속 이야기를 듣던 산신령은 허허, 웃으며 민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고는 잘하고 있다는 말도, 어떻게 키우라는 조언 대신에 꺼낸 말은.

“애를 키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었구나.”

-였다.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일단 이 산신령은… 육아를 해본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까지 애들은 그저 밥만 주면 저 홀로 뚝딱 자라는 줄 알았지.”

그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 무책임한 말을 어찌나 천진하게 내뱉는지… 민완이 산신령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니, 그러면서 첫날에 저에게 너는 참 복 받았구나 그러셨어요?”

“허허허,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느냐? 왜? 후회가 되냐? 지금이라도 어떻게~ 무를래?”

“아니, 무른다니! 농담이라도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가비가 무슨…!!!”

흥분한 민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산신령이 낄낄대며 웃었다.

“거봐라, 너는 이미 복을 다 받았다. 안 그러냐? 저렇게 예쁜 딸이 너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더 큰 복을 받니?”

“…….”

반박할 수가 없다.

가비를 만난 이후 제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민완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흠흠, 어쨌든요. 그 생기를 조절하는 법이요. 그걸 가비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제가 할 수 없는 거니까, 산신령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일단은 한번 가비의 생기를 살펴보자꾸나.”

산신령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범과 놀고 있는 가비에게 다가갔다.

“가비야, 여기 이 손을 좀 볼래?”

산신령이 손바닥을 펼치고 가비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할바지?”

푸른빛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건 뭐랄까….

드라이아이스를 물에 담갔을 때 만들어지는 연기 같다고 할까.

푸르스름한 연기가 가비에게서 뿜어져 나와 아래로 떨어지는데… 마른 낙엽이 뒹굴던 흙바닥에서 초록 싹이 돋아났다.

“…이게 뭐야.”

정말이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생기가 예사롭지 않았는지, 산신령도 얼른 손을 거두었다.

“…허어, 그것 참!”

“왜요? 산신령님?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힘이구나. 어찌 이렇게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꼬? 신기하구나, 가비는 정말 남달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감탄하는 산신령을 보니 민완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그러니까 작년보다 힘이 더 세졌다는 거죠? 산신령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거예요?”

“흐음! 방금은 내가 팔찌의 힘을 일시적으로 풀어서, 실제로 가비가 발동할 수 있는 생기를 끌어 올린 것이야.

너도 봤지? 작년에는 눈처럼 내리던 생기가, 지금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지 않던? 가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거다.

내가 만났던 그 어떤 도깨비에게서도 이런 힘은 본 적이 없구나.”

산신령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비가 활짝 웃었다.

“헤에헷! 까비 채고 힘쎈 도깨비야! 쌩기 펄펄~ 도깨비다요!”

가슴을 쭉 내밀고 두 팔을 니은 자로 뻗어 힘주는 가비.

흡, 위로 한 번.

흡, 아래로 한 번.

보디빌더 선수 흉내를 내는 것 같지만, 민완의 눈에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일 뿐이다.

“자, 가비야. 이 할아버지 따라 해볼래?”

산신령이 검지를 들어 끝에 하얀빛을 서리게 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이만큼… 촛불처럼 생기를 만들 수 있겠니?”

“해보게따요!”

가비는 짧은 손가락을 눈앞에 가져가서 흡, 힘을 주었다.

파란빛이 서서히 맺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화르륵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만들었다.

가비는 저도 깜짝 놀라 손을 얼른 휙 떨궜고, 생기는 빠르게 흩어져 버렸다.

“헤에… 이고 참 어렵꾸나!”

“허허, 원래 힘을 마음껏 발산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조절하는 것이란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그 크기와 농도를 조절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힘을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매진하는 것… 그것이 수련이지.”

그렇게 말하며 산신령은 손을 휙휙 움직이면서, 크고 작은 모양의 빛, 쏘아 올리는 빛, 흩뿌리는 빛 등등을 그림처럼 그려 보였다.

“…후와아, 예뻐!”

가비가 조그만 손을 뻗어 빛을 잡으려고 했지만,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허허, 너와 나의 힘은 서로 다르단다. 나는 신기(神氣)이고, 너는 생기(生氣)니까.”

“…녜에?”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가비 대신, 민완이 물었다.

“뭐가 다른 거죠?”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기는 천계에서 관장하는 힘이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거나… 필요에 따라 질서를 바꿀수도 있는 것이지.”

“질서를 바꾼다는 건?”

“뭐, 예를 들면 가비를 네 호적에 버젓이 올렸던 그런 일?”

“아아…, 그 서류 조작이요.”

“조작이라니! 그저 인간계의 질서에 맞도록 정황을 좀 맞췄을 뿐이다. 그것이 가비와 너를 위한…!”

“네네, 저희를 위한 거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신령님, 계속 말씀하셔요.”

“크흠, 어디까지 했더라?”

“신기는 천계에서 쓰는 힘이다, 까지요.”

“그래. 그리고 생기는 인간계 안에서 작용하는 힘이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기운을 북돋울 수 있고, 더 넓게 보면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힘이야.”

“…어떻게 보면 둘이 비슷하지 않나요? 세상의 질서 안에 인간의 생사도 포함되는 것이니까요.”

“오호, 예리한 질문이구나. 네 말이 맞다. 신기와 생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겹치며, 영향을 주고받는단다. 그것은 저승에서의 귀기(鬼氣)도 마찬가지다.”

“귀… 기요?”

“그래, 귀기는 죽음 이후의 혼들을 다루는 힘인데, 때때로 죽은 혼들이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세상의 질서를 흔들기도 하고….

뭐 그렇게 세 가지의 힘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지.”

산신령이 설명을 마치고 돌아보니, 민완은 눈만 깜빡깜빡.

가비는 입을 쩍 벌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다.

“흐아아암, 몬 쏘리인지 알 쑤가 업따요. 할바지, 까비는 쫄음이 놀러와써요.”

“…허허, 그래. 미안하다. 내가 말이 너무 길었구나.”

“저기 산신령님… 계속 같은 말만 드리게 되는 것 같아 죄송한데요. 그러니까 가비가 힘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럼, 수련을 해야지!”

“그러면 산신령님께서…?”

“일단 나는 안 되고….”

“네?”

“나는 이 산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아니면 네가 매일 가비를 데리고 나를 찾아올 수 있느냐?”

“그건 좀….”

일전에 들은 것 같다.

산신령은 이 산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그래서 범을 수족으로 다룬다는 것도.

“그러면 저기 범은…?”

“버엄?! 범은 기가 없다.”

“변신도 하고, 말도 하는데요?”

“그건 내 기를 빌려주는 것이지. 애초에 범의 것이 아니다.”

“아아….”

그 순간 민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 아니… 동물이 하나 있었다.

천 년을 수련했다는 존재.

“저기, 혹시요. 산신령님. 구연우… 라고 아세요?”

“구연우?”

“네, 그 꼬리 아홉 달린 여우인데… 지난번 제주도 여행에서 만났거든요.”

“오오, 맞다. 나도 일월 선녀에게 들었다. 팬티를 고쳐줬다지?”

“…아, 네.”

“녜! 그 빤쮸는 효뇨 까비가 싸준 거다요! 부아악 찌어진 거 여누 언니가 찰싹 부쳤는데, 이제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요.”

조금 전까지도 눈을 비비며 졸려 하다가, 제가 아는 얘기가 나오니까 번쩍 손을 들며 끼어드는 가비.

“허허, 그래. 우리 가비가 아빠 팬티 사줬다고 천계에도 소문이 자자하다. 아주 대단한 효녀야.”

“헤에헷~ 효뇨 까비♪ 아빠 빤쮸도 사주는 효뇨 까비♬”

…소문이 자자하다니.

도대체 이놈의 팬티 얘기는 언제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인가.

민완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괜찮다… 괜찮아.

천계야 뭐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은 없을 테니까.

“흠, 흠. 산신령님. 그러니까 그, 구연우는 가비에게 기를 다루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건가요?”

“오오!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어~ 왜 나는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산신령이 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 전능한 것 같다가도 어딘가 허술해 뵈는 산신이란 말이지….

“구연우는 인간계에서 천 년을 수련하였지. 지금은 선적에 이름을 올리고 천계에 거주하고 있지만… 인간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이니까. 아주 적임자구나.”

“으음, 그렇군요.”

“내가 바로 천계에 연락 넣으마.”

“자, 잠시만요.”

민완은 머뭇거렸다.

과연 이게 최선의 선택인가?

구연우 성격에 사고는 치지 않으려나, 가비에게 도움이 되는 건 맞나? 충동적인 것은 아닐까? 다른 선택지는 없나?

민완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가비가 바지 자락을 잡고 흔든다.

“하빠? 왜 구래?”

“…어, 가비야.”

그래, 가비에게 먼저 설명해 줘야지. 내 마음대로 결정하면 안 되지.

민완은 산신령님께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러곤 가비를 무릎에 앉히고 마주 보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최대한 쉬운 언어로, 가비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후움?”

“가비, 아빠 말 알겠어?”

“요만끔?”

“그럼 가비가 다시 아빠한테 말해볼래?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어어, 그르니까… 까비 힘 어마무씨 채고 쎄다! 까비 아주 때단한 도깨비다!”

“…어, 맞아. 그런데?”

“끄런데 그 힘 요로케 까비 마음대로 하려면 연씁 피료해. 고거시 바로 쑤건이야.”

“수건 아니고, 수련.”

“아이챰~ 고거나 고거나.”

“하하, 알겠어. 계속 말해봐.”

“까비는 어마무씨 대딴한 도깨비지만, 연씁 혼자는 힘드러. 그래써 또우미가 피료해!”

“와, 가비 진짜 똑똑하네.”

“헤에헤, 그래서 그 또우미가 꾸여누 언니야. 여누 언니 죠아? 까비 괜챠나? 하고 하빠가 물어써.”

“맞아, 그래서 가비의 대답은?”

“죠아! 너어무 죠아!”

가비는 손뼉을 짝짝 치며 환히 웃었다.

어찌 보면… 가비의 대답은 민완의 예상 범위였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도 했고, 매사에 긍정적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민완은 이렇게 가비에게 설명하고, 물어보기를 계속할 것이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육아의 세계에서, 너의 대답이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좋아, 산신령님께 말씀드리자.”

“녜!”

***

그리고 다음 날.

범이 조그만 나무 서랍 같은 것을 들고 찾아왔다.

“이게 뭐예요?”

“경대야. 여기를 이렇게 뒤집으면 거울이 나오지. 이 거울이 구연우가 천계에서 인간계로 드나들 수 있는 길이 되어줄 것이다.”

“아아….”

겉으로는 이렇다 할 장식 없이 작고 평범한 나무 가구였다.

“후와우, 얼른 불러보쟈! 여누 언니!”

“그래, 그러면 거울을 이렇게 뒤집어서… 흠흠. 구, 구연우. 나와….”

-라, 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얀빛이 쏟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