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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딸이 너무 귀여워 (193)화 (193/453)

193화

환한 빛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였다.

까만 오프 숄더 원피스에 은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껏 요염한 포즈를 취한 구연우가 서 있었다.

“…나 불렀니?”

이번엔 또 무슨 드라마를 본 걸까. 입술 색깔은 저게 또 뭐야….

민완의 떨떠름한 시선에도 구연우는 한껏 제 매력을 발산하며 허리를 꺾고, 상체를 기울이며 계속 포즈를 바꾸고 있다.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누웠다가… 혼자 화보를 찍나.

“…저기, 구연우? 여기는 세 살 아이가 사는 집이거든?”

“호호홋, 왜? 가만히 서 있어도 내가 너무 유혹적이니?”

“안 되겠다. 너 그냥 다시 천계로 돌아가….”

-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는데, 안방에서 가비가 이불을 끌고 나왔다.

질질질.

“가비야, 뭐 해?”

“여누 언니 춥쨔나.”

“응?”

가비는 어렵게 끌고 온 이불을 바닥에 엎드려 있는 구연우에게 휙, 그물처럼 던졌다.

파닥파닥.

“아, 뭐야!”

이불에서 얼굴만 쏙 내민 구연우에게 가비가 다가간다.

그리고 두 손으로 이불 끝을 맞잡아서 단단히 여며주는 작은 손.

“언니, 그로케 입꼬 다니면 어깨가 시리다요?”

“아니, 나는 원래 추위를….”

이불 속에 폭 감싸여 얼굴만 내밀고 있는 구연우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민완이 웃으며 가비 편을 들었다.

“지금 딱 좋아. 그 이불 벗으면 다시 천계로 가는 거야. 어? 거울 안 열어줄 거야.”

“칫.”

구연우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이불이 흘러내릴까 봐 두 손으로 얌전히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범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넌 뭐야?”

“…아, 안녕하세요. 저는 월향 산신령의 권속인 범이라고 합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아… 근데 왜 여기 있어?”

“경대를 이 인간에게 전해주러 왔습니다.”

납작 엎드려 정중하게 말하는 범을 보니까, 민완은 혼란스러웠다.

“범님이… 너보다 아래야?”

“범님? 버엄~니임? 호호호홋! 민완아, 너 얘한테 님이라고 해?”

“…어.”

“야, 범. 너 왜 민완이 앞에서 허세 부리고 그래~ 꼭 별것도 없는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앞에서는 센 척하더라?”

“그,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 그냥 처음부터 저를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부르라고 한 게 아니라고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범에게 구연우가 따끔하게 말했다.

“야, 그러면 네가 정정을 해줬어야지~ 부르란 대로 듣고 있는 건 또 뭐야? 으이구, 민완아. 그냥 범이라고 불러. 알았지?”

…오호라.

민완이 씨익 웃으며 옆에 납작 엎드려 있는 범을 내려다보았다.

“…범아?”

“…….”

“야, 민완이가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응.”

“응, 이 뭐야. 네, 해야지.”

“…….”

지금까지 ‘범님’ 대접을 받아온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민완은 웃으면서 구연우를 말렸다.

“에이~ 괜찮아, 뭐라 하지 마. 그냥 서로 반말하는 게 편하지 뭐. 그치, 범아? 괜찮지?”

“…응.”

“연우야, 범이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얘가 우리 집에서 좀 밥을 축내고, 사고도 치고, 지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긴 하지만… 괜찮아~ 그래도 함께한 정이 있거든. 그치?”

민완은 하하하, 웃으며 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꼬리털이 파르르 떠는 것을 보았지만 그럴수록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니 가비도 여태 ‘뻠!’이라고 했는데, 나는 왜 범님이라고 한 거지?

처음 만났을 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호랑이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가?

“그래, 뭐. 민완이 네가 그렇다면… 상관없지. 그건 그렇고~ 여기가 네 집이야?”

구연우가 두리번두리번 집 안을 살펴보았다.

“까비랑 하빠 집이다요. 까비가 쏘개해주께, 우리 집!”

그리고 구연우가 뒤집어쓴 이불자락을 잡아당기며 따라오라 했다.

졸졸졸.

구연우는 이불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비의 뒤를 따라갔다.

졸졸졸.

그 모습이 꼭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검고 길쭉한 요괴 같다 생각하며 민완은 웃었다.

“짜, 조기는 코 잠자는 방~ 찜대가 푹씬푹씬 구름이다요.”

“그리고 요기는 옷들이 쒸는 방이다요. 짜라짠~ 애쁜 옷이 만치요? 우리 하빠는 멋쨍이 또마토니까요.”

“그리고 이거슨 까비가 쩨일로 죠아하는 냉짱고! 꺄하하! 여누 언니, 요꾸르뜨 짠?”

가비가 까치발을 하며 요구르트 한 줄을 꺼내어, 식탁 의자를 밟고 올라가 빨대까지 꺼내 뾱! 꽂아서 내민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집주인으로서 손님 접대에 최선을 다하는 가비를 보며 흐뭇함도 잠시.

“…어어, 가비 동작 그만!”

뾱! 호로로록!

뾱! 호로로록!

아빠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요구르트를 흡입하는 가비.

“가비야, 요구르트를 그렇게 많이 먹으면 배탈 나!”

뾱! 호로로록!

순식간에 요구르트 세 병을 완주한 가비가 배시시 웃었다.

“헤에헷… 하빠 꺼는 남겨써.”

민완의 손에 하나 남은 요구르트를 올려주는 가비.

이럴 땐 참 혼을 낼 수도 없다.

잠시 후.

식탁에 넷이 둘러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가비의 생기 수련 프로젝트>

민완이 종이 한 장에 크게 제목을 썼다.

“프로젝트는 뭐냥?”

“…음, 영어인데… 한국말로 풀이하면 계획?”

“그럼 그냥 계획이라고 쓰지 프로젝트는, 무슨….”

못마땅해하는 범에게 구연우가 핀잔을 주었다.

“야, 범! 요즘 인간계에서는 흔하게 쓰는 말이거든? 너도 이런 건 좀 배워~ 꼰대처럼 굴지 말고!”

“…크흠.”

구연우, 나이스 샷!

곁에서 지켜보는 민완은 실실 웃음이 나왔다.

“자, 일단 수련의 가장 기본은 그 힘을 조절하는 거야. 마구잡이로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딱 필요한 만큼, 원하는 때에 끌어 올리는 거지.”

“흐음… 맞아. 가비가 아직 그게 안 돼. 팔찌를 해서 억제하고 있긴 해도, 기분이 좋거나 비가 오면 순간적으로 폭발해 버린다고 해야 하나.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

“까비는 뽁탄… 퍼엉!”

“그래, 이게 가장 기초인데… 뭐든 기초가 제일 어려워. 그러니까 매일매일 나랑 같이 연습해보자.”

“…매일?”

“응!”

“매일 여기를 오겠다는 거야?”

“그럼~ 뭐든 꾸준히 해야 결실을 맺는 법이거든!”

“아니, 잠깐. 그건 안 돼.”

“왜? 뭐가 문제야, 세이 썸씽?”

“우리에게도 유지해야 할 일상이 있다고. 세 살인 가비가 매일매일 어린이집 갔다 와서 너랑 수련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럼 어린이집을 안 가면 되잖아.”

“끄럴 쑤 업써! 까비는 빤대야.”

“그래, 가비한테는 어린이집도 엄청 중요하다고.”

“쭝요하다구!”

“아니, 도깨비가 그런 데는 다녀서 뭐 해? 생기 수련만 잘해도 천계 가면 큰 직책이 떨어질 텐데?”

“그런데 다녀서 뭘 하냐니. 가비가 얼마나 즐겁게 다니는데. 어?”

“마따요. 까비 찐구도 이꼬, 어, 썬생님도 이꼬, 또마또도 키우고, 우하하하 놀기도 하는데!”

“…아니, 어차피 나중에는 다….”

“잠깐!”

민완이 구연우의 말을 잘랐다.

“가비한테는 일상의 시간도 중요해. 생기 수련 안 해도 매일매일 즐겁게 잘 살았다고.”

“마따요!”

“그걸 네가 존중해줄 생각이 없다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미안하다. 괜히 네 시간 뺏어서.”

그 단호한 말에, 황당하긴 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구연우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왔는데.

서울 나들이 한 번 못 해보고 돌아갈 수는 없다.

“오호호~~~ 아니, 민완아. 너는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알겠어, 내가 미안해애~ 응?

가비야, 언니가 사과할게.

우리 이쁜 가비가 어린이집 좋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언니는 그냥 가비에게 많~이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랬어. 나쁜 마음 아닌 거 알지? 응응? 언니 미운 거 아니지?”

민완에게 안 통할 것 같으니까, 가비를 공략하는 구연우.

역시 여우는 여우다.

마음 착한 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연우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민완도 한발 물러나서 본격적인 조율에 들어갔다.

협상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시작은 주 1회로 한다.

익숙해지면 내년에 다른 요일을 더 추가할 수도 있다.

가비와 민완의 스케줄이 변동될 수도 있다. (직장, 어린이집 관련한 행사)

그런 경우에는 구연우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른 대체 요일로 변경될 수 있다.

수련을 도와주는 대가는, 4회 수련에 1회의 서울 나들이로 갚는다. 장소는 민완이 추천할 수 있지만, 선택은 구연우가 한다.

필요한 경비는 민완이 낸다.

구연우가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모두 민완이 낸다.

※절대 주의 사항※

구연우는 민완과 가비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매우 많이 주의해야만 한다.

민완은 구연우를 제지할 수 있고, 경고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천계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여기에 기재하지 않은 사항은 때에 따라 새롭게 협의한다.

“…이 주의 사항은 꼭 넣어야 해?”

“응, 제일 중요한 거야.”

“쭝요한 거야!”

“아니, 가비 너는 왜 자꾸 아빠 말을 따라 하는 거야?”

“하빠 딸이니까!”

구연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순조롭게 끝났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짤 뿌탁함다!”

“그래, 우리 잘해보자. 호홋! 나중에 가비가 잘되면 나도 그 덕 좀 볼 수 있겠지.”

협상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던 범이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인간아, 이제 밥 시키자. 밥!”

“…하여튼 범, 너는!”

“오오, 나도 먹고 가도 돼? 나 그거 먹고 싶어. 치맥!”

“찌매기가 모다요?”

“…치킨이야, 치킨. 그래, 오늘은 다 같이 먹자. 세 마리 시킬게.”

“꺄아!”

“니야옹!”

“찌키찌키찌키 쨔카쨔카요우♪”

***

지난달에 찍은 화보가 실린 아이코닉 12월호가 사무실로 도착했다.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지면에 실린 사진을 보는 것은 또 감회가 새로웠다.

박남구의 사진은 오지혜의 글과 어우러져 더욱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화보가 단순히 상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화보였다.

지면 구석에 조그맣게 인쇄된 ‘스타일리스트 도민완’이라는 제 이름을 발견하고 웃음이 났다.

그렇게 잡지를 뒤적거리던 민완은 문득 궁금함이 하나 떠올랐다.

“…왜 다들 연락이 없지?”

박남구는 가비의 사진을 평생 찍게 해달라고 했으면서, 제주도 이후로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나마도 리즈뷰티에서 주최한 게릴라 이벤트 때 이서진 대표가 연락을 취했는데, 올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 회장….

염치 불고하고 ‘밥을 사달라’ 했는데, 왜 소식이 없는 걸까?

그냥 그렇게 흘려버릴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렇게 마냥 기다려야 하는 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민완은 오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잡지를 잘 받았다고, 감사 인사는 전해야 하는 거니까!

뚜르르르.

뚜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오지혜가 전화를 받았다.

[아, 도 대표님!]

“안녕하세요, 편집장님. 잘 지내셨죠? 보내주신 잡지 받고 인사차 전화 드렸어요.”

[네, 저도 연락을 드린다는 것이 요즘 좀 정신이 없었습니다. 별일 없으시죠? 가비도 잘 지내나요?]

“네, 저희야 뭐. 항상 잘 지내죠. 편집장님은 여전히 바쁘신가 봐요?”

[…아, 네. 좀 일이 생겼거든요. 안 그래도 한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네, 저는 낮 시간이면 언제든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점심 같이하실까요? 저랑 남구가 스튜디오로 찾아뵐게요.]

“…아하, 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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