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째영 쌈촌, 안녕하쎄요!”
“아이구, 우리 가비~ 잘 지냈어요? 삼촌 안 보고 싶었어요?”
“녜에!”
“…안 보고 싶었다고?”
“녜에!”
가비의 해맑은 대답에 정재영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가비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정재영 옆에 서 있는 이현을 가리키며 콩콩 뛰었다.
“아쿠뽕? 머리!”
“응, 머리가 좀 짧아졌지?”
“머시따요!”
“와아, 고마워! 우리 가비도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이제 애기가 아니라 어린이 같다. 한 번 안아 봐도 돼?”
“녜에!”
이현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가비를 포옥 안아주었다.
만지작만지작.
가비의 작은 손이 이현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훑으며 헝클어트리는데, 옆에 서 있던 차세희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비야, 나도! 나 기억해?”
“…쎄….”
“그치, 세….”
“쎄 이모!”
“새, 새 이모?”
“헤에헷, 쎄모야, 쎄모. 뾰족!”
가비가 이현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서 차세희의 턱을 가리켰다.
턱이 뾰족해서 세모라는 건가?
민완이 풉, 웃으며 키득거리는데 차세희는 그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좋아, 가비는 다음부터 날 보면 세모~ 하고 불러줘. 알았지?”
“쎄모~ 헤에헷.”
“꺄아, 쎄모래, 쎄모! 나 앞으로 누가 별명 물어보면 세모라고 해야지~ 뾰족뾰족! 쎄모다!”
차세희가 가비의 손을 잡고 흔들며 명랑하게 말했다.
이전에 정재영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 차세희가 좀 의기소침해 있다고 해서 걱정했다.
그런데 오늘 잘 웃고, 장난을 치는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촬영 종료된 걸 축하해요.”
“추카추카!”
“오늘은 민완이가 쏘는 거니까 많이 먹읍시다~”
“와아아!!! 잘 먹겠습니다.”
룸으로 된 식당에서 그간의 촬영 에피소드를 안주 삼아 맥주를 기울였다.
<그림자 짙은 밤>은 스릴러인 만큼 액션 신도 많아서 차세희는 발목 부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특히 마지막 화에서 현이 언니랑 추격전을 벌이다가 몸싸움하는데… 와,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대역 쓰자고 했을 텐데.”
민완이 구운 고기를 쉴 새 없이 집어 먹으면서도, 촬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열심히 얘기하는 차세희.
얘기를 듣고 보니, 원래도 말랐던 몸이 더 야윈 것 같다.
“…현이 언니는 벌써 차기작 제안이 줄을 이었더라고요.”
“정말요? 축하드려요.”
“하하, 감사해요! 영화랑 드라마가 여덟 개 정도 들어왔는데, 재밌는 건 정통 로맨스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신기하죠?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재미있는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고민돼요.”
“머리는 왜 자르신 거예요? 새 작품 들어가면 어차피 바꿔야 하지 않아요?”
“그냥… 바꿔보고 싶었어요. 항상 다음 작품 생각해서 머리도 기르고, 어지간해서는 탈색, 염색 이런 것도 잘 안 했거든요.
그런데 뭐, 어차피 머리는 자라는 거고. 지금은 촬영이 끝났으니까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려고요.”
이현의 쾌활한 목소리.
호흡 곤란으로 창백한 얼굴을 하던 모습이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여유롭고 밝은 얼굴이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 구운 고기를 잘게 자르고 있는데.
“…짬깐! 그거슨 아니지.”
단호한 가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쎄모가 짜구 꼬기 다 머거. 까비 기다리고 이썼는데… 쎄모 너무 빠르다요!”
불만 섞인 가비의 말에 정재영과 이현, 민완이 동시에 차세희를 바라봤다.
양 볼이 통통해진 차세희가 머쓱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는데, 앞접시에도 고기가 수북하다.
“…미안, 가비야.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다.”
“괜챠나. 끄치만 이제는 쳐언쳔히 먹쨔요. 왜냐하면 우리 하빠 꼬기 하나도 못 머거써요.”
그렇게 말하면서 가비는 아빠가 방금 제 앞접시에 올려준 고기 하나를 야무지게 쌈을 싸서 민완에게 내밀었다.
“우리 하빠도 머거야지~ 아아.”
“아아….”
재영과 이현, 차세희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도 민완은 딸이 싸준 쌈을 한입에 넣고, 엄지 척도 잊지 않았다.
“으음~ 맛있어. 이제 가비도 먹어, 얼른. 아빠가 가비 접시에 고기 많이 올려줄게.”
“쌈촌이랑 아쿵뽕도 쮸세요. 쎄모는 쪼그만 쭈고요.”
“큭큭~ 그래요.”
“와… 세상에, 아빠한테 쌈 싸주는 세 살이라니. 그게 가능해요?”
“우리 가비 너무 많이 커서 삼촌은 마음이 아플라 그런다.
처음 봤을 때 ‘하뺘빠빠아’밖에 못 했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쌈도 싸 먹고, 많이 먹는 이모 혼내줄 수도 있고, 어?
세상에. 이러다가 어느 날 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거야?”
“또또, 재영이 삼촌이 오버한다~ 그치?”
“오뻐가 몬데?”
“어, 음. 과하다는 건데… 과하다는 건 어….”
“깡하다는 꺼구나!”
가비가 두 팔을 옆으로 뻗어 알통 자세를 취하는 걸 보니, 과하다는 걸 강하다는 걸로 이해한 모양이다.
“오구오구~ 우리 가비. 똑똑해라. 맞아요, 삼촌이 좀 강해요. 흡! 봐라, 여기 알통도 있지?”
“알똥! 삐약! 뺙!”
금세 또 병아리 흉내를 내는 가비를 보고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진짜~ 하루종일 가비만 보고 있어도 안 심심하겠어요.”
“네, 하루종일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들 때까지, 단 5분도 조용히 안 있는 것 같아요. 혼자 놀 때도 노래하고, 춤추고, 1인극하고… 끊임없이 말하는 게 진짜 라디오 같다니까요?”
“아, 오디션 준비는 하고 있어?”
재영이 물었다.
지난번 스튜디오에 와서 얘기했던 ABS에서 하는 어린이 예능 프로그램 오디션을 말하는 것이다.
“까비, 오띠션 안다요! 이로케 쏜 들고, 쩌요! 하는 거.”
“오구오구, 우리 똑똑이는 모르는 게 없네~”
“헤에헷, 쩌요, 쩌요!”
오랜만에 보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예쁨받으니, 아주 신이 난 모양이다.
발그레한 얼굴에 솟아오른 광대가, 안 그래도 통통한 얼굴을 더욱 빵빵하게 만들었다.
민완은 가비의 입에 고기를 하나 넣어주면서 진정시켰다.
“가비야, 음식 앞에서 뛰면 안 되지? 자리에 앉아서 밥 먹자.”
“헤에헷, 미안~ 까비 너무 기부니 죠아서 그래써. 이쩨 밥 쪼용히 머글게.”
“그래그래.”
민완이 가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남은 고기를 불판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뭐, 오디션 준비랄 게 따로 있나? 그냥 배부르게 먹고, 힘내서, 예쁜 옷 입고 가면 되지.”
“크으- 저 자신감!”
“가비는 카메라에도 익숙하니까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광고 처음 찍을 때도, 그렇게 사람 많은데 하나도 겁 안 먹잖아. 어른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치, 천생 연예인 재질이지.”
“근데 어린이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는 거예요? 초등학생이면 몰라도, 애기들이면 글도 못 읽을 텐데, 대본 같은 걸 주지는 않을 거 아녜요?”
“그렇지. 보통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유아를 캐스팅할 때는, 프로필 사진으로 이미지를 먼저 보고 카메라 테스트, 감독 면접 그 정도거든? 유아들은 보통 비중이 크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거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예능 프로그램이란 말이지?
대본이 있어도, 대본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관찰 예능에 가까울 거야.
그러니까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캐릭터를 먼저 볼 테고, 또 여럿이서 함께하는 거니까 또래 아이들과 원만하게 어울릴 수 있는 사교성도 보겠지? 개인기가 있으면 금상첨화고….”
“얘기만 들으면 딱 가비네.”
“그러게, 너무 기대된다. 가비가 예능 찍으면 진짜 그건 대박이다.”
“헤에헷! 쩌요! 쩌요!!”
가비는 또다시 손을 번쩍 든 상태에서, 바닥에 붙인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떠들썩했던 식사 자리가 끝나자, 민완이 마지막으로 계산을 하고 나가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 차세희와 마주쳤다.
차세희가 배꼽에 손을 얹으며 장난스레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네, 오늘 엄청 잘 먹던데요? 보기 좋았어요.”
“하하, 가비한테 혼나긴 했지만, 진짜 오랜만에 즐겁게 식사한 것 같아요.”
“오랜만이요?”
민완이 그 말을 콕 집어서 다시 되물었다.
웃고 떠들며 식사 자리를 갖긴 했지만, 전과는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 있기 때문에 확인하고 싶었다.
차세희는 민완의 질문에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일 있어요?”
민완이 다시 한번 묻자, 차세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민완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지독하게 슬럼프를 겪는 배우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차세희도 그런 경우일까?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음, 얘기하고 싶어지면… 들어줄 수는 있어요.”
민완이 어렵게 꺼낸 말에, 차세희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는 거예요?”
“그냥… 울 수는 없어서?”
그렇게 말하며 차세희가 민완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앞서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민완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서 있었다.
***
다음 날.
숲이랑 어린이집에 가비를 등원시키는데 문 앞에 밤이와 밤이 엄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핫바, 오셨습니까!”
대문을 열고 가비와 민완이 들어서자마자, 밤이 벌떡 일어나 90도 인사를 건넸다.
한두 번 그러다 말 줄 알았는데, 너튜브 출연 이후로 한결같이 90도 인사를 하는 밤이었다.
“어, 밤이. 안녕~ 추운데 안 들어가고 뭐 해?”
“핫바를 기다렸사옵니다!”
“가비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요?”
“와앙! 우리 하빠 무러버린다아!”
민완에게 안겨 있던 가비가 민완의 목덜미를 덥석 무는 시늉을 했다.
“가, 가비야….”
“왕! 왕! 와앙!”
민완이 대롱대롱 매달리는 가비를 떼어놓았다.
“빰 오빠야, 까비랑 왕왕! 놀이하자. 빰이는 멍멍! 하고, 까비는 왕왕! 이로케 우다다다 뛰면서, 응? 째밌겠지?”
가비가 강아지 흉내를 내면서 밤이에게 놀이를 제안했다.
“…멍?”
밤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나 지금은 바빠.”
그러곤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으로 민완을 올려다보았다.
“…뭐, 뭔데? 밤이가 핫바한테 하고 싶은 말이?”
“핫바, 저에게는 꿈이 있어요.”
“꿈?”
“네, 제 꿈은….”
밤이가 한 손을 척, 들어 올리면서 크게 외쳤다.
“가비랑 같이 티브이에 나오는 연인이 되는 거예요.”
“…여, 연인? 가비랑?”
당황한 민완이 말까지 더듬으며 경악하자, 옆에 서 있던 밤이 엄마가 깔깔 웃으며 정정해 주었다.
“연예인이요, 연예인!”
“…아아.”
순간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민완의 얼빠진 표정을 보면서 밤이 엄마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고, 밤은 아직도 제 말이 어디가 틀렸는지 알아채지 못하며, 한 손을 든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실은 밤이가 토요일에 연기 학원에 갔거든요.”
“여, 연기 학원이요?”
“네, 아역 배우들 양성해주는 학원이라는데, 지난번에 너튜브 한 번 찍은 이후로 계속 티브이에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요.”
“아, 네….”
“솔직히 본판이 있으니까 여기서 더 크면 티브이에 나갈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지잖아요? 호호호!
한 살이라도 어려서 귀여운 맛이라도 있어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밤이 엄마가 제 아들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자기 아들에게 이토록 객관적인 엄마라니…, 그건 참 그것대로 존경스러웠다.
“여하튼 거기 갔는데, 오디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거예요.”
“오띠숀!”
제가 아는 말이 나오자 가비의 귀가 쫑긋해졌다.
“ABS에서 하는 어린이 예능 출연자를 모집한다는데, 밤이도 주말에 신청서 냈거든요. 가비랑 같이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얘기하러 왔어요.”
“오띠숀! 쩌요, 쩌요! 까비 할 쑤 이써요.”
가비가 손을 들고 콩콩콩 뛰었고, 그 모습을 본 밤이 기뻐하며 가비의 손을 맞잡았다.
“엄마! 내 말이 맞지? 우린 같이할 거라고 그랬잖아~ 가비 만세!”
“가치 만쎄에~ 꺄하하하!”
좋아하는 두 아이를 보는 민완과 밤이 엄마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