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결국 민완은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씽씽이를 챙겨서 가비와 함께 공원으로 나왔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제법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꺄하하하핫~ 꺄하하하핫~”
눈 내리는 공원에서 분수대 주변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가비.
평소보다 높은 텐션이라 염려가 될 정도였다.
“하빠! 하빠! 하빠!”
“응, 가비야.”
“씨간 얼마만큼 가써?”
“이제 8시 50분이야.”
“꺄하하하핫~ 씨간아 또망가라! 까비가 쫓아갈테닷. 슝~ 슝~ 슝~”
“가비야, 그러다 넘어져. 좀 살살 달리자, 살살.”
“쌀쌀~ 쌀쌀~ 싸르쌀~ 싸르쌀쌀~ 싸싸싸싸~ 랄랄랄라~♪”
살살 달리라는 말에, 즉흥으로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쌩쌩 달린다.
가비의 통통한 볼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고,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올라왔다.
‘아침부터 너무 힘을 빼는 건가?’
집에서는 가비의 과도한 텐션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일단 밖으로 데려 나오긴 했는데.
저러다가 오후에는 뻗는 거 아닌지 걱정도 됐다.
‘적당히 힘 좀 빠지면, 집으로 데려가서 씻기고, 삼십 분이라도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베이킹이 두 시니까, 한 시쯤에는 출발해야겠다… 제일 먼저 희준이 집에 들르고, 그다음에는 밤이네….’
민완이 머릿속으로 시간과 동선을 계산하는 그때.
끼익-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비가 넘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비야!!”
벌떡 일어나서 달려간 민완.
“아코코….”
위아래 두툼한 겨울옷에 무릎 보호대도 하고 있어서 몸은 다친 데가 없었다.
얼굴과 손바닥에 붉게 긁힌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가 크지는 않지만 금세 핏방울이 맺혔다.
민완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괜찮아? 가비야?”
“녜! 녜에….”
조금 놀란 것 같긴 하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왈! 왈왈!”
눈앞에는 겨울옷을 입은 갈색 푸들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목줄을 매고 있지만 잡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헤에… 안 부딪쳐써! 까비가 끼이익! 하고 멈쳐써!”
뽀얀 얼굴에 상처가 나서 아빠가 속상한 줄도 모르고, 가비는 벌떡 일어나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도대체 저 강아지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란 말인가, 민완이 눈을 부라리는 그때.
강아지의 주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달려왔다.
“…몽자야! 어이구, 이놈의 시끼. 헉헉!”
“아저씨가 키우는 개예요?”
“아, 네. 이놈의 시끼가 잠깐 지 똥 치우는 사이에 후다닥 뛰어가 버렸지 뭐야~ 아휴, 고놈의 시키. 빠르기도 해라.”
남자는 허허 사람 좋은 웃음으로 목줄을 잡고 돌아서 가려 했다.
“아저씨, 그 개가 갑자기 뛰어들어서 저희 애가 넘어졌잖아요. 사과하셔야죠.”
“넘어졌어요? 어디?”
남자가 가비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이고~ 살짝 긁혔네. 이 정도는 뭐 하루 이틀 지나면 금방 나아요. 여튼 미안합니다!”
그 가벼운 말투에 민완은 순간 화가 나서 남자의 팔을 잡았다.
“아니, 무슨 사과를 그렇게 하세요?”
“네? 아니~ 그럼 뭐, 어떻게 더 사과를 해요?”
“여튼 미안합니다, 라니요. 애가 다쳤다니까!”
“그럼 뭐, 무릎 꿇고 빌까? 하, 참나. 하여튼 요즘 젊은 부모들은 유난이야, 유난~ 원래 애들은 좀 다치고 그렇게 크는 거지. 뭐 그냥 신줏단지 모시듯이 곱게만 키우려고 하니까 나라가 이 모양 아냐?!”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남자를 보니 민완도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돌아서서 제 갈 길 가려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제대로 사과하고 가세요.”
“아, 뭐! 돈이라도 줘? 진단서 끊어와요, 그럼!”
“이 아저씨가 진짜!”
민완이 저도 모르게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때.
“…하빠?”
가비의 작은 손이 민완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그로지 말어….”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가비의 모습에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아, 가비야….”
순간 화가 나서 눈앞에 딸을 두고 소리부터 질렀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가비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민완은 가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포옥 안아주었다.
“미안해, 놀랐지? 정말 미안해.”
“우웅, 괜챠나.”
서로를 토닥거리는 부녀의 등 뒤로 ‘왈왈’ 개 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가 뭐라 투덜거리며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빠, 우리 집에 가까? 까비 얼굴에 뺀드 챡챡 붙여주라!”
“그래, 그러자.”
민완이 번쩍 안아 들려고 하자, 쏙 뒤로 물러나는 가비.
“괜챠나! 까비 걸을 쑤 이써!”
다리를 휙휙 들어 올리고, 팔도 요리조리 돌리면서 씩씩하게 말하는 가비.
해맑게 웃는 얼굴이지만, 민완의 눈에는 상처만 가득 들어왔다.
슥-.
민완이 가비의 턱 끝을 잡아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쓰라리지는 않아?”
“웅! 이거 금방 나을 쑤 이써! 하빠, 꺽정하지 마시라요!”
“그래, 일단은 집으로 가자.”
한 손에는 퀵보드를, 또 한 손으로는 가비의 손을 잡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킥보드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했는데….’
-하는 뒤늦은 후회가 컸다.
가비는 좀처럼 다치는 일이 없었다. 그게 다 생기가 넘쳐나는 도깨비이기 때문이라고… 내심 마음을 놓고 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 가비를 간단히 샤워시키고, 얼굴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헤에! 까비 약 바르는 거 죠아. 뜸뿍 쭈세요! 뜨음뿍! 그리고 뺀드는 이걸로 할 꺼야. 아가쌍어~ 뚜루뚜♪ 기여운 뚜루뚜♪”
아빠의 속상한 마음도 모르고, 약 바르고 밴드 붙이는 거 좋다고 잔뜩 신이 난 가비의 모습에, 민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비야, 아빠는 지금 속상해.”
“까비도 아라! 까비가 다쳐서 쏙상한 거쟈나.”
“아니, 그걸 알면서 약 바르는 게 좋~다고 웃는 거야?”
“헤에헷, 까비 울면 하빠 더 쓸플걸?!”
“…….”
너무 맞는 말이라서, 뭐라 더 대꾸할 수도 없었다.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고 말도 잘 하고… 내 딸인데 아직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약을 바르고, 밴드까지 찰싹 붙이고 나자, 가비는 거울에 요리조리 얼굴을 비추며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따가 짜랑할 꺼야!”
“뭐를?”
“까비가 끼이익! 해서 멍뭉이 안 다쳐꼬, 끄리고 까비는 얼굴에 뺀드를 부쳤다고!”
“그게 자랑은 아닌 것 같은데.”
“끄래도 짜랑할 꺼야!”
“그래, 그래라, 그래.”
본인이 자랑하고 싶다는데,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아빠는 잠깐 산신령님한테 전화할 거야.”
“웅? 싼씬 할부지! 왜? 까비도 인싸하고 시퍼.”
“그럼 옆에서 같이 인사할까?”
“녜에! 이고 영쌍 통화로 하쟈.”
“응? 왜?”
“까비 이고 보여주 꺼야, 할부지한테 짜랑하고 시퍼!”
그러니까 그게 자랑은 아니라고, 가비야아….
그 말은 속으로 삼키며, 민완은 월향 산신령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
띵디딩딩♪ 띵딩♬
띵디딩딩♪ 띵딩♬
띵!
화면 가득 흰 수염 그득한 산신령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할부지! 까비다요!”
가비가 민완의 앞으로 쑥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어! 허허허허! 이게 누구야, 우리 이쁜 가비가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전화했구나?]
월향 산신령이 얼굴 가득한 주름을 더욱 자글자글하게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좋을까….
보고 있던 민완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할부지! 이거 보쎄요. 까비 얼굴! 아가쌍어 뺀드 붙여써요!”
가비가 제 볼을 화면에 가까이 붙이며,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켰다.
[어구~ 예쁜 밴드구나! 우리 가비는 뭘 붙여도 예쁘네!]
…아니, 산신령님은 밴드가 뭔지도 모르나?
민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비는 헤엣~ 웃는 얼굴로 밴드 붙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침에, 꽁원까서, 까비가 씨간이 빨리 가라고 막 쫓아갔는데요~
멍뭉이가 왈왈! 하고 달려와서 까비가 위험해! 뿌딪히게써! 하고 끼이익! 머찌게 멈췄는데요.
아이코! 하면서 옆으로 철푸덕 넘어져꺼든요?”
[뭐어, 우리 가비가 넘어졌다고?]
“녜! 끄래서 얼굴이랑 쏜바닥 아야 해따요? 끄치만 까비는 안 우러따요? 까비는 씩씩하니까!”
[그래, 그것 참 장하구나~ 역시 천하제일 도깨비야!]
“헤에헷! 까비 채고 힘쎈 쩐하제일 도깨비야요?”
[그럼그럼~]
“까비 집에 와서 하빠가 이고 붙여줘써요. 아가쌍어 뚜루뚜 뺀드! 예쁘지요? 까비가 따른 사람 호오 마니 해줬는데, 하빠가 까비 호오~ 하고 붙여줘서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헤에헷~ 하빠 채고! 이거슨 하빠의 싸랑이야.”
핸드폰 속 할아버지를 보면서 말하던 가비가 어느새 민완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때 민완은 알았다.
오늘 가비 얼굴에 붙인 밴드가, 민완이 처음으로 약을 바르고 붙여준 밴드라는 것을.
그러니까 가비가 자랑하고 싶은 건, 예쁜 밴드를 붙인 제 얼굴이 아니라, 아빠가 저를 위해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줬다는 사실이었던 걸까?
민완은 가비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가비가 말랑한 볼을 꾸욱 누르며 더욱 가깝게 얼굴을 붙여왔다.
[아이구? 요, 요, 부녀가 나한테 전화해놓고 저희끼리 희희낙락하는 것이냐? 고얀 것들! 허허허!]
산신령은 ‘고얀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민완은 웃으면서 가비를 떼어놓고, 본래 전화한 목적을 밝혔다.
“흠흠, 사실 산신령님께 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나한테? 무엇을?]
“전에 저한테 ‘도깨비에게 위험한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그런 말씀 하셨잖아요. 그렇죠?”
[그래, 그랬지.]
“제가 가비를 키우면서 가비가 다치거나 아팠던 일이 정말 거의 없었거든요? 가끔 넘어지거나 어디 부딪히더라도 상처가 생기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이 벌써 두 번째예요. 왜 그런 걸까요?”
[흐음~ 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다친 게냐?]
사람이 많은 곳?
처음 다쳤을 때는… 미야를 산에서 데리고 오던 그날이다.
올챙이의 말에 의하면 친구들이랑 같이 산에서 새장을 옮기다가 굴렀다고 그랬지.
물론 그때도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올챙이가 약을 발라주었다고 했고, 그때는 미야를 동물 병원에 데려갔다 오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날 밤이었는지, 다음 날이었는지, 얼굴을 보니까 말끔히 나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공원.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주말이고, 또 눈이 내리는 날이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음, 그러니까 말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아주 약간, 그러니까 최소한의 상처는 불가피한 것이지.]
“네? 왜요?”
[인간계의 질서에 혼란을 주지 않는 최소한의 선에서 균형을 맞추는 거란다. 생각해 봐라.
누가 봐도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비가 티끌만큼의 상처도 나지 않는다? 한두 번은 기적일 수 있지만, 그런 상황이 계속 누적되면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 가비가 위험해지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보여주기식 상처는… 어쩔 수가 없다.]
“보여 주기식 상처라뇨… 뜻은 알겠는데, 어감이 썩 좋지는 않네요.”
[뭐, 이해했으면 됐다. 가비가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천계에서는 과한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보호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결코 여러 번 오는 것이 아니니, 가급적 조심하는 게 좋겠지.]
“네…. 조심하겠습니다.”
아까 같은 상황도 제가 눈을 떼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예방 가능한 부분이었으니까.
민완은 저에게 다짐하듯, 다시 한번 단단하게 말했다.
“제가 옆에서 잘 지켜볼게요.”
[가비는 걱정 안 된다. 그러니 너는 너를 더 잘 지켜야 한다.]
“하하, 제가 인간이니까요?”
가비의 생기, 구연우나 산신령님이 부리는 신기….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가비를 더 잘 키울 수 있을까?
요즘 민완의 머릿속에는 그런 아쉬움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월향 산신령님이 따뜻한 목소리로 민완의 이름을 불렀다.
“민완아.”
“네?”
“모든 존재에는 고유의 힘이 있단다. 그것이 생기나 신기처럼 눈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한한 것일 수도 있지.”
“…….”
“인간의 유약함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렴.
너는 인간이기에 가비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직 너만이 가비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단다.”
-이 무슨 선문답 같은 얘기인지.
민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뜻을 헤아리려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곱씹어 보았다.
“…인간이기에, 오직 나만이 가비에게 줄 수 있는 것….”
그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