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정말, 가비 후회 안 할 거지?”
“녜에!”
오디션 당일 아침.
재차 정말 이 옷을 입을 것이냐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가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캬오! 캬오오옷!”
연둣빛 공룡 탈을 쓴 가비가 무거운 꼬리를 질질 끌며 뽈뽈뽈 거실을 활보했다.
저 공룡 탈은 지난번에 밤이 공룡 울음소리를 가르쳐 준 후, 물려준 것이었다.
지금은 팽이에 빠져 있는 밤이지만, 원래는 말문이 터질 때부터 공룡 이름을 달달 외우던 공룡 덕후였다고 한다.
공룡 책, 공룡 피규어, 공룡 카드, 공룡 스티커, 옷, 신발 등등 보이는 족족 수집했다고.
지금은 팽이에 빠진 다섯 살이지만, 공룡 컬렉션은 여전히 밤이의 보물 상자에 고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저 옷만 이제는 작아져서 입을 수 없다며 물려준 것이다.
밤이 무척 아끼는 것이라고 생색냈던 만큼,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옷이었다.
색이 조금 바래고, 세탁을 해도 얼룩덜룩한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상당히 좋은 퀄리티의 옷이었다.
밤이 아빠 말에 의하면 해외에 코스프레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을 한 옷이라고 했다.
나중에 너튜브 촬영 때 입히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넙죽 받아와 세탁하고 넣어둔 옷을, 하필 오디션 날에 입겠다니!
여기저기 협찬과 선물로 들어온 것도 많고, 백화점 쇼핑에 갔을 때 산 것만 여러 벌이었다.
민완은 갖은 말로 가비를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까비는 이거 입고 가 꺼야!”
“가비야, 그래도 더 예쁜 옷을 입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고 아주 예쁜 옷이야. 하빠도 그래쨔나. 이거 아주 예쁘고 특별한 옷이라고 그래써.”
“우리 가비는 기억력도 좋네… 하하. 근데 가비야, 다른 친구들은 아주 예쁜 옷 입고 올 텐데?
그때 결혼식에 갔던 것처럼 말이야. 반짝반짝하고 샤랄라한 옷 입고 올 텐데 가비만 공룡 탈 입고 있으면 좀 부끄럽지 않을까?”
“까비는 하나도 안 부끄러워! 까비는 뿌끄러운 거 몰라~ 씨원씨원한 쎄 살이니까!”
…가비는 부끄러움도 없고, 성격이 참 시원시원하다는 말을 언젠가 어린이집 부모 모임에서 나왔던 말인데. 그걸 기억했다가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정말이지, 가끔은 그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딘가에 ‘한번 들었던 말’의 저장 창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민완이 가늘게 눈을 뜬 채 어떻게 가비를 잘 구슬려서 다른 옷을 입힐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가비 또한 아빠에게 어찌 말해야 흔쾌히 알았다고 해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슥-.
가비의 작은 손이 민완의 손을 꼼질꼼질 만지면서, 진지한 눈빛을 발사했다.
“하빠, 까비가 꽁룡이 옷을 입꼬시픈 이유가 이써.”
“…어떤 이유?”
“이 옷을 입으면, 쩌음 만나는 친구들이 까비를 보고 ‘하하하’ 할 꺼쟈나. 그치? 끄리고 까비한테 오겠지? 안녕, 꽁룡아. 우리 가치 친구 하쟈. 끄래, 싸진도 찌글까? 너는 꽁룡 어떠케 우는지 알아? 까비가 보여주까?
이로케 앞발을 들고 캬오오오! 하면서 쿵쿵쿵! 어때? 가치할래? 이거 아주 재밌는 놀이야.”
혼자 묻고 답하며 ‘새로운 친구 만나기’ 상황극에 완전 몰입한 가비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이제는 1인극도 하는구나.’
그러니까, 오디션에서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새로운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건데.
그 마음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래, 가비 입고 싶은 대로 하자.”
“헤에헷~ 까비 꽁룡! 캬옷! 하빠를 잡아머게따!”
민완이 백기를 들자, 가비가 잡고 있던 민완의 손을 살짝 깨물면서 웃었다.
***
오디션이 열리는 ○○ 시민 회관.
층층이 돌계단 위로 돔 형태의 크고 작은 건물이 보였다.
‘…별관 2층 대연습실’
위치를 확인한 후에 차를 주차하고, 공룡 옷을 입고 카시트에 끼어 있는 가비를 들어서 내려주었다.
“휴우, 쌀아따.”
“쿡쿡, 카시트 답답했지?”
“녜에, 까비 뚠뚠이 꽁룡이 알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어써.”
“그래, 이렇게 쭈욱 스트레칭 한번 해. 시원할 거야.”
“쮸욱! 쮸우우욱!”
민완이 양손을 잡아주자 쭈욱 몸을 늘리는 가비.
발끝이 땅에 닿을 듯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민완이 손을 낮춰 주자 허리를 접으며 이리저리 흔들었다.
덕분에 등과 꼬리에 매달려 있는 뿔인지, 비늘인지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비의 머리를 삼키고 있는 바보 같은 공룡 눈이 민완의 눈과 마주쳤다.
‘앞에서 볼 때보다… 위에서 보니까 더 웃기게 생겼잖아.’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크기가 다른 양쪽 눈동자가 위치도 제각각인 것이….
“큭큭, 가비야. 위에서 보니까 공룡 표정이 엄청 웃겨.”
“우껴? 까비 우낀 거 죠아!”
가비는 민완을 붙잡고 허리를 숙인 채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바보 같은 공룡 표정에, 씰룩거리는 꼬리라니… 아, 이건 안 찍을 수가 없다.
민완이 키득거리며 핸드폰으로 동영상 촬영을 하는 그때.
쑥!
들이미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핫바, 이거 너튜브예요?”
바로 밤이었다.
“어우, 깜짝이야! 밤아!”
“히이~ 핫바, 안녕하십니까. 이거 너튜크 촬영이에요?”
“아니, 이건 그냥 찍는 거야.”
“아아… 그랬구나.”
계속 민완의 핸드폰을 향해 히히 웃고 있던 밤이가 급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비, 공룡 옷 입었네?”
“캬오! 캬오옷!”
“아니, 팔을 이렇게 쭉 뻗으면 안 돼. 공룡은 팔이 짧단 말이야. 이렇게 옆구리에 챡 붙이고 여기 앞에만 움직여야지. 손은 닭발처럼 이렇게 해.”
“이로케?”
“응, 캬오오옷!”
“캬오오오옷! 캬캬캬캬!”
밤이와 가비가 같이 포효하며 발을 쿵쾅거리는 모습을 밤이 엄마와 민완이 똑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얘들이 오디션을 잘 볼까요?”
“글쎄요. 뭐, 잘 보든 아니든 재미는 있겠네요.”
“쿡쿡, 그래요. 재밌으면 됐죠. 자자~ 꼬마 공룡들, 이제 안으로 들어갑시다.”
“엄마, 나는 꼬마 공룡 아니야. 나는 오늘 신사야.”
조금 전까지 신나게 앞발(?)을 흔들며 포효하던 밤이, 뒤늦게 허리를 곧게 펴며 목에 달린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만졌다.
시골에서 소 타고 다닐 것 같은 얼굴의 까까머리 밤이가 까만 정장을!
너무 안 어울려서, 또 귀엽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아이들이란 뭐든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밤이 오늘 멋지네?”
“진짜요?”
“응, 아주 멋쟁이 신사야.”
민완의 칭찬에 밤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좋아했고, 그 모습을 보던 밤이 엄마가 깔깔 웃으며 민완에게 말했다.
“밤이 쟤가, 가비 아빠가 정장 입은 거 보더니 자기도 저거랑 똑같은 거 사달라고 조른 거예요.”
“네? 제가 정장 입은 모습을 밤이가 본 적이 없을 텐데요?”
“SNS에서 봤어요.”
“아아….”
“애들 정장이 생각보다 비싸더라고요. 오디션 한 번 보고 안 입을 것 같아서 안 사주고 싶었는데…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엄마, 아빠 5분씩 안마해주는 조건으로 사준 거예요.”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밤이가 허리에 양손을 붙이며 당당하게 외쳤다.
“핫바, 저 안마 잘해요.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거든요.”
“효자가 모야?”
“가비 너는 여자니까 효녀고, 나는 아들이니까 효자야.”
“후와! 까비 효뇨인데, 빰이는 효자야?”
“응, 엄마 아빠가 내가 안마해주면 아이구 우리 효자~ 그런다?”
“헤에, 빰! 까비는 하빠한테 팬티도 사줬….”
“어이쿠, 가비야!!!”
민완이 얼른 가비의 입을 막으며, 번쩍 안아 들었다.
“얼른 들어가자, 늦겠다!”
“하빠, 더워? 얼굴이 빨개져써.”
가비의 복슬복슬한 공룡 손이 민완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
“여기 맞죠?”
“아, 네.”
문 앞에 ‘ABS 어린이 예능 오디션장’이라고 큰 종이로 붙여져 있었다.
한쪽만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니,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마룻바닥과 전면 거울, 음향 장비 등이 잘 갖춰진 연습실이었다. 곳곳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와, 움직인다. 안녕!”
“진쨔다~ 히야.”
어디선가 원격으로 조정이라도 하는 것인지 카메라가 혼자서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휑하니 넓은 공간에는 의자가 없어서 먼저 도착한 아이와 부모들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입구 쪽에는 데스크 책상이 길게 있었고, 흰색 티셔츠를 입은 네 명의 직원이 안내해 주었다.
“신발 벗고 들어와 주세요. 이쪽에 이름 확인하시고, 이름표 받아주세요.”
신발을 정리하고, 명단에서 이름을 체크한 후에 손바닥보다 커다란 이름표를 받았다.
챡, 챡.
가슴팍에 이름표를 붙인 아이들.
[도가비]
[한율]
…아, 밤이 이름이 한율이었지.
태몽과 머리 스타일 때문에 모두들 밤, 밤, 부른 덕분에 본명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헤에헤, 이거 까비 이름!”
“한율… 나는 밤이 좋은데.”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는 가비와 달리 율이는 제 본명이 부끄럽다는 듯 이름표를 만지작거렸다.
민완이 두리번거리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는 저쪽에 있을까요?”
“아, 그래요.”
마땅히 의자도, 구역도 나눠져 있지 않은 휑한 연습실이라니. 실내화라도 좀 준비해 주지.
양말만 신고 마룻바닥을 걸어서 들어가려니 민완은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는데.
“호옹! 빰, 이거 봐봐.”
“여기 꼭 스케이트 장 같다.”
밤이랑 가비는 얼음판을 걸어가듯이 발을 주욱, 주욱 길게 끌면서 미끄러운 마룻바닥을 제법 즐기고 있었다.
“가비야?”
“하빠! 까비 꽁놀이 할래!”
민완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가비가 바닥에 발랑 드러눕고는 온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두툼한 공룡 옷 덕분에 더욱 둥그런 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빰, 까비 공이야!”
“내가 굴려주까?”
밤이가 둥글게 몸을 만 가비를 힘차게 굴렸다.
데굴데굴데굴.
엉덩이 사이로 빼꼼 튀어나온 꼬리가 흔들거리면서 대연습실 중앙을 사선으로 굴러가는 가비.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건가.
민완이 가비를 잡으러 가면서 힐끔, 입구에 앉아 있던 직원들을 보았지만 말릴 생각은 없는 듯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시작 전이라 그런가?
“가비야, 우리 저쪽에서 조용히 기다릴까?”
민완이 가비를 붙잡아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가비가 무릎에 붙이고 있던 얼굴을 쏙 빼면서 물었다.
“왜에? 여기서는 노는 거 아냐?”
“…음?”
“하빠가 그래쨔나. 오늘은 다 가치 노는 날이라구.”
“아아….”
가비에게 오디션에 대해 설명하면서, 홍보물 속에 쓰여 있는 내용을 설명해 준 기억이 났다.
1차는 서류 접수
2차는 단체 놀이 면접
3차는 1박 2일 여행 면접
(자세한 내용과 일정은 추후 합격자에게 공지 예정)
그래서 가비는 오늘이 다 같이 노는 날이라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 음. 그런데 가비야, 아직 친구들이랑 인사도 안 했잖아? 우리 일단은 일어나서 다른 친구들한테 먼저 인사를 해볼까?”
“아! 마따!”
가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벽 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부모들과 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가비에게 쏠려 있던 참이다.
“헤에~ 안녕하쎄요! 도까비 쎄 살임다! 캬오오옷! 까비 꽁룡이랑 가치 놀 싸람~ 여기여기 붙어라!”
“나! 나나나!”
밤이가 먼저 가비의 공룡 손을 제 두 손으로 덥석 잡았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아이들 두어 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 나도 같이 놀아도 돼?”
“웅! 가치 놀면 더 재미써.”
방긋방긋 웃는 가비의 얼굴을 보고,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 티브이에서 봤어, 도가비. 나 네 너튜브도 알아. 너 화면보다 훨씬 작고 귀여운 것 같아.”
“아냐~ 까비 안 짝아. 까비 꽁룡이야. 캬오오옷! 무썹지?!”
“하하핫! 아, 너무 귀여워.”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가비의 공룡 머리를 쓰다듬자, 또 다른 남자아이는 바닥에 있는 꼬리 앞으로 쪼그려 앉았다.
“이거 만져봐도 돼?”
“웅! 꼬리 짭아봐라~”
가비가 엉덩이를 흔들면서 도망가고, 밤이와 오늘 처음 본 아이 둘이 꺄르륵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어색한 정적보다야 아이들 웃음소리가 울리니 좋기는 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민완의 귀에 꽂혔다.
“어휴, 애들이 왜 저렇게 정신없어? 유나야, 너는 얌전히 있자.”
“…네.”
고개를 돌려보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인형처럼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