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운동회?”
“웅! 이번 쭈 토요일.”
민완은 그제야 요즘 숲이랑 부모들 단톡방이 왁자지껄했던 것이 떠올랐다.
잠깐 일하고 들어가 보면 밀린 메시지가 몇백 개씩 떠 있어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넘겼는데, 그게 운동회 준비 때문이었나?
“까비 꼭 가야 해. 안 끄러며는 쩔교야.”
“절교? 누구랑?”
“까비의 찐구들! 왜냐하며는 까비가 쑤피랑 오랫동안 못 가짜나. 끄래서 까머글 거래. 멀어지는 거야! 끄건 너무 쓸픈 일이야.”
“아아….”
생각해보니 가비가 어린이집에 이토록 오랫동안 등원하지 못한 것은 처음이긴 했다.
하지영이 절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스케줄을 잡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지금은 가비를 불러주는 곳이 너무 많았다.
너튜브와 심심해 심심해는 고정이었고, 거기에 자라다 컴퍼니의 일정이 계속 추가되었다.
더욱이 이선미의 그림책 ‘세상을 구한 아기 도깨비’가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으면서 여러 곳에서 행사요청이 몰려왔다.
이선미와 상훈이를 생각하면 계속 거절만 할 수도 없는 일정이었다.
가비의 어린 나이를 고려하여 하루에 여섯 시간 이하, 저녁 식사 전까지로 스케줄을 배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일매일 일정이 잡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민완이 해외에 연결될 수 있는 스케줄이라면 무조건 수락한 것도 영향이 컸다.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는 직접 방문하여 촬영하기도 했고, 미국이나 유럽 쪽은 이메일이나 영상 인터뷰를 통해 꾸준히 가비를 노출시키려고 애썼다.
덕분에 너튜브에서는 이제 한글로 쓰인 댓글만큼이나 다양한 각국의 언어로 쓰인 응원의 댓글도 줄줄이 달렸다.
가비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걸 즐겼다.
덕분에 ‘하이’, ‘헬로우’뿐만 아니라 ‘봉주르’, ‘곤니찌와’, ‘나마스떼’, ‘올라’ 등… 다양한 세계 인사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있다 여겼지만, 정작 ‘숲이랑’의 친구들과 멀어지고 있었던 걸까?
가비의 입에서 ‘절교’라는 말이 나오자, 민완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끄리고 이짜나, 예리니 언니는 이번 운동회가 마지막이라고 해써. 언니, 이제 학교 가니까.”
“아아… 그렇네. 언니는 일곱 살이니까 곧 있으면 학교에 가겠구나.”
“언니가 학교에 가도 까비랑 놀 쑤 있을 줄 알았는데… 언니는 이제 꽁부를 할 꺼시래. 학교 가고, 학원도 가고… 커서 의싸 선생님이 될 거라고 해써!”
“그래?”
“웅, 까비는 그거시 마음에 들지가 않아. 끄치만 언니는 아픈 싸람 찌료해주는 싸람이 되고 싶다 해써.”
가비의 얼굴에 쓸쓸함이 잠시 깃들었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끄러니까 그 전에 마니 놀아야만 해! 언니랑 마지막 운동회도 꼭 가치해야만 해!”
“그, 그래. 이번 주 토요일….”
민완은 핸드폰을 열어 이번 주 일정을 확인했다.
‘아… 역시.’
민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챈 가비가 물었다.
“왜 구래? 무쓴 일이야?!”
“어… 가비야,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 공연 연습 있는데….”
자라다 컴퍼니에서 하는 연말 공연 준비.
뮤지컬 형식으로 여럿이 함께 맞춰보는 무대였고, 가비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가비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꾸욱 누르며 절규했다.
“오또케, 까비 오또케!”
“가, 가비야….”
공연 연습은 가비가 무척 좋아하는 일정이었다.
춤과 노래를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라 가슴이 더욱 두근두근 뛴다며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
“오또케, 오또카지!”
“가비야. 진정해. 우리 한번 잘 생각해보자.”
“으이이이! 오또케에에!!!”
네 살 인생 최대의 난제를 만난 듯, 가비는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쓰러져 ‘오또케’를 남발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한참을 괴로워하던 가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민완을 바라봤다.
“까비 결쩡해써.”
“…벌써?”
“웅, 까비는 운똥회에 가게써.”
“으음….”
“왜냐하며는 마지막이쟈나.”
“마지막?”
“아까 까비가 말해짜나. 예리니 언니 마지막 운동회!”
“아아, 그랬지.”
“끄로니까 아빠가 전해줘. 까비 너무너무 쏘중한 일이 이써서 이번 쭈 토요일은 양보할 쑤가 업다고 말이야. 그래줄 쑤 이써?”
“으응, 그래.”
마지막이라는 말에 민완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가비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운동회가 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지난 가을 운동회의 추억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잔뜩 긴장했던 첫 운동회, 엉망진창이었던 블랙몬 도시락, 그리고 넘어졌던 호진이에게 손을 내밀던 가비, 다 함께 손을 잡고 운동장을 돌던 아이들.
그때 상품으로 ‘혹부리 영감님’ 그림책을 받고 충격받았던 가비를 떠올리면 또 웃음이 났다.
두 번째 운동회 때는 야심을 갖고 소고기 초밥을 준비했는데, 가비가 아침부터 고기만 홀랑 집어 먹어서 결국 샌드위치를 사갔지.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방탕 아재단’이었다.
다른 아빠들과 함께 공원 내 화장실에 모여 얼굴에 비비크림을 바르고, 왁스로 머리를 세팅하고, 한껏 힘주고 무대에 올랐던 기억.
춤 연습은 제대로 한번 하지도 않았건만, 아이들이 열심히 손뼉을 치며 환호해준 덕분에 그 순간만큼은 월드 스타 부럽지 않았었다.
아, 물론… 나중에 올라온 영상으로 자신의 흐느적거리는 춤사위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아빠들이랑 만나면 종종 그때를 떠올리며 낄낄 웃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희준이가 선물해 준 ‘방귀쟁이 며느리’ 그림책.
도깨비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가비의 방귀에 날아가는 시늉을 하며 바닥에 구른 것이 수백 번이었던가? 시도 때도 없이 뿡뿡거려서 난감할 때가 많았는데.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방귀 얘기를 전만큼 안 하네….
새삼 깨닫고 나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루하루 좌충우돌이었던 것 같아도, 이렇게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애틋한 추억이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챈 걸까?
“아빠? 왜 구래?”
가비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민완의 얼굴을 붙잡았다.
“아…!”
감상에 빠져서 눈가가 촉촉해진 모양이었다.
민완이 얼른 눈가를 닦아내며 웃었다.
“잠깐 옛날 생각을 했어.”
“옛날? 옛쩍? 호랑이 땀배 피우던 씨절을 말하는 거시야?”
“아니, 우리 가비 두 살 때, 세 살 때… 같이 운동회했을 때가 생각났어. 참 재밌었는데, 그치?”
“웅! 운동회 엄청 재미써. 끈데 왜 째밌는 생각을 하는데, 울어?”
“안 울었어.”
“아빠, 까비는 다 봤어.”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이 ‘거짓말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민완은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음… 그냥 조금 어… 눈이 젖은 거야. 눈물이 떨어진 건 아니니까 운 거는 아니야. 약간 글썽였다… 정도?”
“히유…, 아빠. 까비는 참 꺽정이가 마나.”
“걱정?”
“웅, 아빠가 울보라서 걱정이야.”
“울보라니! 아빠, 울보 아니야.”
“까비가 아빠 운 거를 엄쩡 마니 봤쟈나. 하나, 뚤, 셋, 넷, 따섯… 손가락으로 다 쎌 수가 업써!”
가비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세는 모습에 민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 정도는 아닐걸?”
“끄 정도야. 아빠 화장실에서도 울고, 침대에서도 울고, 잉잉, 엉엉, 아주 울보야.”
“아니, 그건….”
가비 네 앞에서만 그런 거라고!
-말하자니, 그것도 딸 앞에서는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아빠는 울보야.”
“…놀리지 마.”
“놀리는 거시 아니야. 놀리는 거슨 ‘울보래요♪ 울보래요♬ 하는 거시지, 까비는 울보라고만 해쓰니까 놀리는 거시 아니야. 싸실을 말하는 거야.”
“…흐음….”
네 살이 무슨 말을 이렇게 잘하는 것인지, 이제 반박할 말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흠흠, 그래도 아빠가 듣기 싫으니까 하지 마.”
“왜 뜯기가 시러? 우는 거슨 나쁜 거시 아닌데?”
“나쁜 건 아니지만… 음, 좋은 것도 아니야. 울보라는 말은 약간 뭐랄까, 약해 보이잖아.”
“약하며는 안 돼?”
“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아빠는 딸보다 강해야지.”
“끄거슨 누가 정한 거야?”
“누가?”
“웅, 아빠가 딸보다 강하는 거슨 아빠가 정하는 거시야?”
“어… 아빠 혼자 정한 건 아니야.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걸?
아빠는 어른이잖아. 가비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더 많은 걸 알고 있고… 그러니까 가비보다 강해야 하는 거야. 가비를 보호해줘야 하니까.”
민완은 그렇게 말하면서 보란 듯이 가비를 번쩍 들어주었다.
“이것 봐, 아빠 힘세지?”
“웅, 아빠는 힘이 쎄지. 끄치만 울보야.”
“울보 얘기는 이제 그만~! 가비 어린이집 가서도 그런 얘기하면 안 된다?! 알았지?”
“씨른데~ 꺄하핫!”
“어어?! 얼른 약속해! 약속!”
“끼야아~ 울보 아빠가 까비를 괴로핀다! 까비 쌀려라!”
민완이 옆구리를 간지럼 태우자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웃음을 터트리는 가비.
“약속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할 꺼시야!”
“가비 진짜~”
“울보가 진짜~”
“어휴, 미운 네 살.”
“헤헤, 까비는 예쁜 네 쌀.”
“한마디도 안 져.”
“까비는 쩔대 지지 않아!”
결국 먼저 지쳐서 백기를 흔든 쪽은 역시나 민완이었다.
“어휴, 그래. 가비 마음대로 해라. 언제는 네 마음대로 안 했냐.”
“헤헤! 끄거시 맞는 말이야.”
민완은 안고 있던 가비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벌러덩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쑥쑥 자라난 가비는 이제 전처럼 안고 간지럼 태우며 이리저리 흔들기엔 제법 묵직해져 버렸다.
가비가 드러누운 민완의 얼굴 위로 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아빠!”
“…응?”
“까비는 아빠가 울보여도 죠아. 그로니까 마음껏 울어. 아라찌?”
“아빠가 운다는 건 슬픈 일이 있다는 건데, 그래도 괜찮아?”
“아빠가 쓸픈 거슨 시르지만, 끄거슨 삐가 오는 거자나. 엉엉 울고 나면 해님이 반짝하잖아.
안 울고 끄응~ 하고 참으면 까만 구름이가 더 힘이 쎄져.
끄러면 나중에는 우르릉 쾅쾅 번개가 쳐서 무씨무씨할 거야!”
“흐음… 번개가 치는 것보다는 비가 오는 게 낫다는 거야?”
“웅! 삐가 다 내리면 해님이 반짝하고, 무지개가 뜰 거야.”
가비는 이미 눈앞에 무지개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웃었다. 반짝반짝, 까만 눈동자에는 빛을 품은 채.
그 속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며 민완이 물었다.
“…가비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비가 오면 해님이 뜨고, 무지개가 뜰 거라는 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아빠가 가르쳐 줘짜나.”
“내가?”
“웅!”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민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지만, 눈앞에서 환하게 웃는 가비를 보면 아무렴 어떤가 싶어진다.
“똑똑한 우리 딸!”
와락!
민완이 가비를 품에 꼭 끌어안고 함께 뒹굴었다.
“꺄하하, 하하핫!”
가비의 웃음소리가 민완의 가슴을 둥둥 울렸다.
***
자라다 컴퍼니에서의 연습 일정은 매니저 하지영이 나서서 잘 조율해 주었다.
미리 확인하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라며 거듭 사과하는 민완에게 하지영은 웃으며 괜찮다 해주었다.
‘괜찮아요~ 이럴 때도 있는 거죠. 마음 쓰지 마세요. 지금까지 스케줄 한 번도 펑크 낸 적 없어서, 다들 잘 이해해 주셨어요.
참! 공연 일정을 다음 주 평일로 미루면서 너튜브 일정을 뺐거든요. 그래서 대신 토요일 가비의 운동회 영상을 담아서 올릴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하지영의 요청에 민완은 숲이랑 선생님들과 다른 부모들에게 촬영 협조 요청을 구했다.
다행히 다들 흔쾌히, 기쁘게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토요일,
가비의 세 번째 운동회 날.
민완은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번쩍 떴다.
이번 운동회 도시락만큼은 절대로 망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침대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쿨쿨, 새근새근.
가비는 아직 꿈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