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꿈이 좋은 것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였다.
“까비가 특별한 삐밀을 말해줄까?”
“비밀?”
“뭔데?”
“…사실 까비는 씬이야!”
“씬이 뭐야?”
“씬! 하늘에 있는 씬.”
가비가 손가락 하나로 위를 콕콕 찌르며 말했지만, 친구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당황하여 계속 ‘씬!’, ‘씬을 몰라?’ 하고 외치는 가비가 재밌어서, 옆에 선 민완은 일부러 정정해 주지 않았다.
“…우잉….”
“크큭큭, 가비야. 일단 뭐라도 하나 보여주고 얘기해 봐.”
“알아써. 까비 잘 봐봐.”
가비가 손에서 얍! 하며 흰색 빛을 뿜더니 금세 복숭아꽃 화관 하나를 만들어냈다.
“우와, 이게 뭐야?”
“여기가 꿈이라서 가능한 거야? 나도 해볼래. 얍! 얍! 이야압!”
옆에서 두 손을 탈탈 털어내는 밤이를 지나, 가비는 복숭아꽃 분홍 화관을 예린이에게 씌워주었다.
“헤헤, 이거슨 예리니 언니 거야. 언니가 오늘의 주인공이니까!”
“고마워. 너무 예쁘다.”
“아! 옷도 머찌게 바꿔줄게.”
“옷을?”
“웅!”
가비가 춤을 추듯 손을 요란하게 휘저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친구들 앞에서 힘자랑을 할 수 있는 날이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니까.
저 정도 보여 주기 식 퍼포먼스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완은 짝, 짝, 손뼉을 치며 추임새도 보태었다.
“이야압! 뿅!”
가비가 손을 뻗어내자, 흰색 빛이 예린을 감싸며 순식간에 공주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반짝이는 레이스가 가득 달린 그 드레스에는 알이 커다란 색색의 보석, 그리고 탐스러운 꽃장식까지 주렁주렁했다.
“…으으음….”
패션 전문가인 민완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전체적인 밸런스 따위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그저 예쁘고 좋은 것을 모두 때려 박은 디자인이다.
‘…과하다, 과해. 이건 아무리 내 딸이래도… 예쁘다고 할 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중얼중얼하며 드레스를 냉정히 평가하게 되는 민완.
그러거나 말거나 가비는 한껏 신이 나서 예린의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어때, 언니? 까비의 뜨레쓰가?”
“예뻐. 진짜 예쁘다.”
“우와, 이거 엄청 비쌀 것 같다.”
“가비 꼭 마법사 같아. 그… 신데렐라에 나오는 마법사 할머니!”
친구들의 칭찬에 더욱 기분 좋아진 가비가 민완에게 다가왔다.
“으헤헷~~~ 아빠! 어때? 까비가 만든 뜨레스?”
“…어?”
“뜨레스 예뻐?”
가비의 커다란 눈이 칭찬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어, 예쁘지!”
“헤헤헤~ 까비는 패숀 띠자이너야. 뜨레스 띠자이너!”
깡충깡충 신나게 달려가는 가비의 뒷모습을 확인한 민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석은… 예뻐.”
옷에 관해서는 아무리 딸이라도, 자신의 신념을 무너트릴 수 없다는 민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어찌 되었든, 세상 화려한 드레스에 탐스러운 꽃 화관을 쓴 예린이의 미리 졸업식이 시작됐다.
“자, 강예린 양에게 졸업 상장을 수여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와 주세요.”
짝짝짝짝!!
올망졸망 앉아 있는 세 명의 동생들이 열심히 박수를 보냈다.
“흠흠~ 마음이 바다 같은 상, 강예린!”
민완이 몇 날 며칠을 고심하여 직접 쓴 상장이었다.
“위 어린이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동생들을 품어주었고, 햇빛에 비치는 물결처럼 반짝이는 감성을 가졌으며, 또한 파도보다 높은 용기를 가졌으므로 이 상을 드립니다.”
짝짝짝짝!!
예린이 수줍게 웃으며 상을 두 손으로 받고, 돌아서 동생들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언니, 죠케따.”
“누나, 축하해!”
“졸업을~ 축하♪ 축하합니다♬”
동생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 속에 예린이 환하게 웃었다.
“흠흠! 자, 원래는 졸업 선물을 줘야 하지만… 여기는 꿈이니까 들고 돌아갈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대신 축복의 말을 해주자.”
“축복의 말?!”
“응, 예린이 손을 잡고 좋은 말을 들려주는 거야.”
“끄거 죠아! 까비 쭉복하는 말 아주 잘할 쑤 이써. 마음속에 가득 있거든.”
“아, 무슨 말을 하지.”
할 말이 넘쳐나는 가비와 신중한 희준이, 그리고 왜인지 당황한 밤이의 얼굴.
“밤이 왜?”
“저기 핫바. 손, 꼭… 잡아야 해요?”
“어? 손잡고 눈을 보면서 해주면 좋지. 그러면 마음이 더 잘 전달되니까….”
“아니, 그래도. 손은 좀….”
가비 손은 맨날 덥석덥석 잘만 잡으면서, 순정남이야. 뭐야?
민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알았어. 밤이는 그럼 눈만 보고 말하자.”
“네!”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밤이.
민완이 예린의 어깨를 잡고 서서 다음 진행을 했다.
“자, 우리 가비부터 할까?”
“녜에!”
가비가 벌떡 일어나 예린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두 손을 박력 있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눈에 힘을 실어 부릅뜬 채로 입을 열었다.
“언니!”
“응, 가비야.”
“언니는 학교에 가서도 행뽁할 거야. 빤드시, 쩔대로, 진짜로!”
“…응, 고마워.”
“까비는 언제나 언니를 마음쏙에 생각할 거야. 언니가 친구들이랑 싸이죠케 지내고, 썬생님이랑도 재미있게 놀으라고.”
“풉, 선생님이랑 재밌게 놀라고?”
“헤헤, 이노옴~ 하지 말고, 예린 앙~♡ 해줄 거야. 썬생님이.”
“하하, 알았어.”
“끄리고….”
가비의 눈에 힘이 풀어지면서 속눈썹이 축 아래로 기울었다.
“까비를 잊으면 안 돼.”
“…가비야….”
“언니가 공부만 마니 해서, 까비를 까먹으면 까비 너무 쓸퍼.”
예린이가 맞잡고 있던 손을 당기며 가비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비를 안 잊어버리지. 너는 내 소중한 동생이야.”
“웅, 언니도 쏘중한 내 언니야.”
서로를 끌어안은 두 아이의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며 민완은 속으로 웃었다.
‘…아니, 너희 뭐 평생 안 볼 거냐?’
생일 파티에 서로 초대도 할 거고, 가끔은 함께 가족 여행도 가게 될 거다. 숲이랑에서 하는 운동회 같은 가족 행사에서도 종종 보게 될 텐데….
저렇게 영원한 이별인 것처럼 슬퍼하는 아이들의 세계란 참.
귀여우면서도 애틋했다.
“자, 다음은 희준이!”
희준이가 주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부드럽게 예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누나, 아프지 마.”
“응, 너도.”
“놀리는 사람 있어도 울지 말고. 알았지? 선생님께 꼭 일러.”
“응, 너도.”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
“착한 동생 해줘서 고마워.”
함께 마주 보며 방긋 웃고, 희준이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다음은 밤이.
평소와 달리 몹시 어색하게 삐걱거리며 나오는 모습이다.
“어, 누나. 졸업 축하해.”
“밤이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야? 예린이 누나 얼굴을 봐야지.”
“…….”
몸을 배배 꼬던 밤이가 힐끗 예린의 얼굴을 보았다가, 쑥스러운지 다시 눈동자를 위로 데굴데굴 굴렸다.
“어… 누나 학교 가서 잘 지내.”
“그래, 너도. 말썽 피우지 말고.”
“어….”
“…….”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밤이 민완을 보며 말했다.
“저 다 했는데요?”
“그게 끝이야?”
“네.”
그러곤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는 밤.
마지막은 민완의 차례였다.
민완은 예린의 키에 맞춰 무릎을 접고 앉았다.
“예린아, 항상 고마웠어.”
“…뭐가요?”
“가비의 좋은 언니가 되어주어서. 예린이가 있어서 가비도, 핫바도 많이 행복했어.”
“저도요.”
“졸업이 이별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 또 만나자? 슬퍼하지 말고?”
“…네.”
“그래, 그리고… 예린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처음부터 아이다운 거, 어른다운 거. 그런 거는 없다고 생각해.”
“네?”
“그러니까, 애처럼 굴 필요도 없고. 애써서 어른다울 필요도 없어.
그냥 예린이는 예린이답게 지내면 되는 거야. 언제, 어디서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예린이는 예린이답게. 알았지?”
“저다운 게 뭐예요?”
“그건 핫바보다 예린이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음…. 내 생각에는 마음이 편안하면, 그게 나다운 것 같기는 해.”
“마음이 편안하면….”
예린이가 작은 손을 포개어 제 가슴에 대었다.
오로라 걸즈 리나가 일깨워 주었던 내 안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나답게.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네! 고마워요, 핫바.”
“졸업을 미리 축하해. 핫바가 한번 안아 봐도 될까?”
예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민완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까비도! 까비도!”
“나도.”
“…….”
더없이 따뜻한 꿈이었다.
***
“자, 아침이다! 일어나자.”
“응? 우으으응….”
“…….”
민완이 커튼을 열어젖히자 환한 햇살이 거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비가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고, 뒤이어 희준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예린이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온몸으로 일어나기 싫다는 것을 어필했고, 밤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대자로 팔과 다리를 펼친 채 여전히 쿨쿨 잠속이었다.
제일 먼저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쭉쭉 기지개를 켰다.
“헤헷! 엄청 잘 자따.”
“나도. 엄청 재미있는 꿈을 꿨었는데 말이야….”
“꿈 말이야? 꾸움~?”
가비가 히죽히죽 웃으며 민완을 쳐다보았다.
민완이 눈을 찡긋하며,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쉿!
가비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이며, 알아들었다는 사인을 보냈다.
“응. 아, 뭐였더라…. 우리가 다 같이 있는 꿈이었는데?”
희준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예린이가 이불 속에 누운 채로 눈만 반짝 뜨며 외쳤다.
“…꿈!”
“꿈? 언니도 꿈 꿔써?”
가비가 예린이 덮고 있는 이불 위로 풀썩 주저앉으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물었다.
“응…, 엄청 좋은 꿈.”
“엄쩡 죠은 꿈 말이야? 얼마나 죠은 꿈이야? 행뽁해써?”
“응, 학교에 가서 친구들도 사귀었고, 아! 선생님이 오로라 걸즈 리나였어. 그리고… 가비도 나왔는데?”
“까비도? 히히.”
가비는 두 손을 양 볼에 붙이고 웃었다.
입이 간질간질했지만, 아빠랑 약속한 게 있으니 꾹 참는다.
“으헛! 나도 꿈!”
쿨쿨 자고 있던 밤이가 벌떡 일어났다.
“빰도 꿈 꿔써?”
“어, 막 악당을 물리쳤어. 희준이랑 얍! 얍! 했더니 종이처럼 팔랑팔랑 날아갔는데.”
“어?! 맞아. 나도 밤이 형이랑 같은 꿈 꿨다.”
“…으음… 나도 왠지 그 장면을 본 것 같은데?”
밤이와 희준, 그리고 예린이가 각자 기억하는 꿈의 퍼즐을 맞춰보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민완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휘잉~ 바람이 불어왔다.
“앗, 추워!”
“자자, 우리 환기 한번 하고 밥 먹자. 오늘은 특별한~ 핫바표 볶음밥입니다!”
“우리 아빠 뽀끔밥 완젼 마시써. 까비가 케챱으로 그림을 그려줄게.”
“자, 일단 일어났으니 세수부터 하고 오세요.”
“밥 먹고 세수하면 안 돼요?”
“안 돼요. 우리 집 규칙입니다.”
“으-. 핫바는 깔끔쟁이야.”
“히히, 끄거슨 싸실이야. 우리 아빠는 깔끔쟁이 짠소리꾼이야!”
***
아침밥을 먹이고, 또 함께 공원에 나가 신나게 놀고 난 후.
피자집에 가서 피자 두 판을 모두 해치우고 아이들의 부모들이 데리러 왔다.
“애들 때문에 힘들지 않았어요?”
“아빠! 우리 되게 신기한 꿈 꿨어. 다 똑같은 꿈을 꿨어.”
“맞아. 밤이 형이랑 나랑 악당도 물리쳤고, 또 되게 멋있는 곳도 갔는데?”
“커다란 나무 있는 곳!”
“그게 벚꽃 나무인가?”
“뽁숭아야, 뽁숭아 나무.”
“어쨌든 우리가 다 같은 꿈에서 만났다니까? 신기하지?”
“어~ 그랬구나. 얼른 핫바한테 인사하고 가자.”
아이들이 같은 꿈을 꿨다고 종알종알 말해도, 부모들은 ‘어 그랬구나.’, ‘그것 참 신기하구나.’ 정도의 반응뿐이었다.
당연하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마주 보고 씩 웃는 민완과 가비.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강영석이었다.
“네, 형님!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다음 주 토요일 점심이요? …네, 일정 없습니다. 괜찮아요. 저희가 갈까요?
…네? …아… 그러니까… 지금 그때 말씀하신 선을… 네에…. 그러셨구나아….”
민완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가운데, 가비가 귀를 쫑긋 세우며 눈을 빛냈다.
“썬?! 끄거슨… 까비 엄마를 찾는 거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