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25)

새로운 시대, 새로운 흐름

[호나우지유, 도움닫기... 슛! 들어갔습니다! 멋지게 휘어지는 기가 막힌 골!]

[3:0, 도합 5:2로 뒤지고 있는 와중에 호나우지뉴가 1점을 만회합니다. 바르셀로나의 체면치레에 성공하는 호나우지뉴!]

외계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첼시 수비진들과 골키퍼 체흐가 그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골이 또 터졌다.

[호나우지뉴 슛~~! 골! 골입니다! 호나우지뉴, 두 번째 골을 넣습니다!]

[페인팅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첼시 선수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호나우지뉴가 추격의 불씨를 살립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호나우지뉴!]

이제 첼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여기서 바르셀로나가 한 골이라도 더 넣게 된다면? 

원정 다 득점의 원칙에 따라 원정에서 더 많은 골을 넣은 바르셀로나가 올라가고 첼시는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스탬포드 브릿지의 참사’ 라며 런던 언론들이 대서특필을 할 테지.

호나우지뉴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내지르는 바르셀로나 원정 팬들.

레이카르트 감독은 주먹을 쥐고 흔들면서 대역전극의 희망을 불태웠다.

무리뉴 역시 앉아만 있지만은 않았다.

터치라인 바깥에서 끊임없이 선수들에게 고함치며 지시를 내렸고 수비라인을 조율했다.

양 팀이 치열하게 맞붙으며 5골이나 나온 전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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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익-!

바르셀로나 선수 중 줄리아노 벨레티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판정에 항의했다.

그의 팔꿈치가 호날두의 오른쪽 가슴을 후려쳤고 그걸 본 주심이 옐로우 카드를 들었는데 그게 부당하다는 이유였다.

“야! 그만 엄살 부리고 일어나!”

“반칙까지 해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더프가 벌게진 얼굴로 항의했고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양 팀 다 한 치도 방심할 수 없는 경기가 계속되다 보니 감정적으로도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호날두는 사실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판정의 번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슴을 쥐며 인상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아, 진짜 더럽게 플레이하네.’

어딜 가나 저런 선수들이 있다.

아까도 몇 번씩 마주칠 때마다 티 안 나게 반칙하더니 경고까지 받았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일어나랜다.

‘상병신 같은 새끼.’

장담컨대 저 놈. 길가에서 마주치면 20초 안에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 괜찮아? 공 없는데도 선수를 패네! 무조건 레드 카드 나왔어야 하는 건데.”

“괜찮아요. 이 정도 견제는 견뎌야죠.”

이래서 헐리우드 액션을 선수들이 즐겨 쓰는가 싶다.

계속 얻어맞아도 반응을 안 하면 심판들이 휘슬을 불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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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지뉴의 골에 힘입은 바르셀로나의 공세는 매서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첼시가 승리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무리뉴 감독의 공이 컸다.

첼시 선수들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음을 감지한 무리뉴는 복잡한 전술 지시보다는 선수들의 심리를 안정시키는데 집중했고, 자신들이 충분히 유리한 상황임을 선수들에게 주입시켰다.

무리뉴의 다독임을 받은 첼시의 선수들은 보다 침착하게 경기를 이어나갔다.

오늘 날아다니는 호나우지뉴에게 마케렐레가 마커맨이 되어 밀착 수비했고, 원톱인 드록바를 제외한 모든 첼시 선수들이 하프라인 안쪽에서 '선 수비, 후 역습'을 철저히 이행했다.

아무리 외계인과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겹겹이 둘러싼 수비라인을 뚫어내는 건 무리.

그 상황에서 바르셀로나의 동점골 의지조차 꺾어버린 것은 바로 호날두였다.

[더프의 코너킥! 뛰어오르는 첼시 선수들! 호날두 헤딩-! 들어갔습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헤더 골!]

[바르셀로나의 역전 의지를 꺾어버리는 호날두 선수! 1차전에서도 그렇고, 2차전에서도 바르셀로나를 격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호날두의 세트피스 헤딩골로 스코어는 4:2.

결국 첼시는 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을 이뤄낼 수 있었다.

"멋진 승부였어, 호날두. 이번에는 우리가 졌네."

"오늘은 저희가 운이 좋았네요. 당신을 상대해서 즐거웠어요, 가우슈."

호나우지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나우지뉴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짜증내는 법이 없었다.

그는 선수로서 훌륭한 프로의식은 없었지만 대단히 좋은 스포츠맨쉽을 가졌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축구를 즐겼다.

그래서 많은 축구 팬들이 그를 좋아했고 그의 몰락을 아쉬워했다.

"결과는 운이 아니라 실력이지. 오늘은 아쉽게 되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기회가 또 오지 않겠어? 다음에는 높은 곳에서 한 번 놀아보자고."

호나우지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상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 그가 보여준 두터운 첼시 수비진들을 농락하는 플레이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 했으니까.

긴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는 역시 생각만큼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을 호날두는 알 수 있었다.

호나우지뉴와 유니폼을 교환한 호날두는 짧은 시간동안 호나우지뉴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기 관리 실패의 대명사, 게으르고 방탕한 천재.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자초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호날두는 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04-05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첼시(4) VS 바르셀로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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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끝나고 4월이 도래한 이 시점, 프리미어리그의 순위표는 다음과 같았다.

1위 : 첼시, 승점 82점

2위 : 아스날, 승점 67점

3위 : 맨유, 승점 67점

4위 : 에버튼, 승점 51점

5위 : 리버풀, 승점 50점

첼시, 아스날, 맨유를 바짝 쫓던 에버튼은 후반기에 급격히 무너져 내림으로서 3위와의 승점차가 16점까지 벌어졌다.

이제는 리버풀과 다음 시즌 챔스 티켓을 놔두고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진 에버튼이다.

아스날과 맨유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2위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단독 선두인 첼시와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이제 프리미어 리그 남은 경기는 7경기.

그러나 이들 사이의 승점 차는 15점이다.

첼시가 남은 경기를 다 지고 맨유 또는 아스날이 다 이기지 않는 이상 우승은 확정적이었다.

EPL 역사상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렇게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 시즌 첼시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반증해주는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리뉴 감독은 '매직 넘버 6? 이미 게임은 끝났어!'를 외치며 이제는 챔피언스 리그에 집중할 것을 공언했다. 

퍼거슨과 벵거는 여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무리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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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 리그 8강 상대는 바로 분데스리가의 영원한 강호,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레바뮌'이라 불리며 유럽 축구를 주름잡는 강팀 중의 한 팀이 되지만, 지금은 주축 선수들이 이탈과 노쇠화 등으로 침체기를 걷고 있는 그런 팀이었다.

최근 분위기, 기세로 봤을 때 첼시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 예상대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첼시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4:2 승리를 거두었다.

뮌헨은 바스타인 슈바인슈타이거와 미하엘 발락의 대활약이 아니었다면 아마 4:0 떡실신을 당했을 거다.

홈에서 적지 않은 점수차이를 벌린 첼시는 알리안츠 아레나로 원정을 떠났는데 여기에서도 무승부를 거두면서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을 이뤄냈다.

지난 시즌에 이은 챔피언스 리그 연속 4강 진출기록을 세우게 된 첼시.

이로써 이미 거의 확정적인 리그 우승에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 가능성까지 넘보게 되었다.

원래 축구 역사에서 첼시는 이 때 리버풀에게 패배하여 챔스 결승진출이 좌절된다.

EPL에서는 리버풀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던 첼시였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리버풀에 막혔던 적이 더 많았던 첼시.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호날두가 있었다.

그것이 반드시 차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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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벵거, '스포츠는 우아함과 과정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윤리관 없이 오로지 승리에만 목숨을 건다면 그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주제 무리뉴, '우리 팀이 과정이나 윤리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인의 얕은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벵거는 위기에 빠진 자기 팀이나 신경써야한다.']

[아르센 벵거,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현실과 동 떨어져 있고, 무례하며 천박하다. 멍청한 사람에게 성공을 주면 그 사람은 때때로 더 멍청해진다.']

[주제 무리뉴, '그는 단지 우리의 성공이 배 아플 뿐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내가 프리미어 리그에 있는 동안, 벵거는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할 것이다.']

무리뉴와 벵거의 신경전이 불이 붙었다.

퍼거슨이 먼저 무리뉴와 첼시 흔들기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벵거가 바통터치를 하며 무리뉴를 비꼬았다.

이것은 EPL의 전통인, 우승 경쟁팀 흔들기였다.

물론 첼시의 우승을 저지하기에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무리뉴와 퍼거슨과의 설전 역시 격한 편이었지만  벵거와의 설전은 그 이상으로 상당히 살벌했다.

아무래도 아스날과 첼시 둘 다 런던을 연고지에 삼고 있는 팀이었기 때문에, 지역 라이벌 색채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에게 감정이 날 선 상태에서 무리뉴와 벵거, 첼시와 아스날은 04-05시즌 프리미어 리그 2차전을 시작했다.

이날 호날두는 경기에 빠졌다.

바로 5일 뒤에 있을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 경기에서 온 힘을 쏟기 위해서다.

현재 프리미어 리그는 총 6경기가 남았고 첼시는 여전히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중이다.

2위 아스날과의 승점 차는 13점으로, 첼시가 남은 경기에서 전패를 하지 않는 이상 우승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아무리 중요한 라이벌 간의 경기라도 챔피언스 리그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

악감정이 있는 무리뉴는 그 누구보다도 벵거와 아스날을 꺾고 싶을 테지만, 그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시작된 첼시와 아스날의 경기.

아스날은 부상으로 빠진 티에리 앙리를 제외한 베스트 11을 동원하여 풀 전력으로 나왔지만, 챔스를 염두에 둔 첼시는 대범하게 1.5군으로 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0:0 무승부.

무리뉴는 경기 시작부터 아예 작정하고 텐백을 사용했고, 이것을 뚫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시종일관 공격적으로 몰아쳤던 아스날이지만 끝끝내 첼시의 수비벽을 뚫지 못한 채 득점을 내지 못했다.

수비적이고 소극적인 축구를 한 무리뉴에게 분노한 것인지 그를 맹비난하는 벵거.

하지만 무리뉴는 딱 한마디로 벵거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지 못하는 팀은 이해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바이에른 뮌헨을 만나 16강에서 떨어진 아스날은 그저 부들부들 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드디어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 추첨 결과가 UEFA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4월 26일 - AC 밀란 VS PSV

4월 27일 - 리버풀 VS 첼시

첼시, 맨시티의 대두로 나중에는 ‘탑 4’에도 밀려나는 리버풀이지만 이 시절의 리버풀은 명실상부한 챔피언스 리그의 강팀.

70~80년대 잉글랜드 프로축구를 주름잡던 그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맨유와 아스날의 양강 체제를 끊임없이 위협할만한 저력을 지녔다.

주장 스티븐 제라드부터 시작해서 예지 두덱, 제이미 캐러거, 사미 하피아, 스티브 피넌, 욘 아르네 리세, 루이스 가르시아, 밀란 바로시, 사비 알론소 등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했다.

구단주들의 연이은 삽질이 아니었으면 분명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괜히 2000년대 프리미어 리그 빅 4(맨유, 첼시, 아스날, 리버풀)에 포함된 것이 아니다.

특히 리버풀은 EPL 클럽 중 유일하게 5번 이상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랐고 4번의 우승을 차지한 클럽답게 전통적으로 유럽대항전에서 아주 막강한 모습을 보여 왔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첼시는 리버풀과 두 번 만나 두 번 다 가뿐히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금은 유럽대항전인 만큼 일말의 방심조차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감독님은 이번에 우승하면 챔피언스 리그 2연속 제패죠? 평생 챔스 우승 한 번 해보지 못한 사람들 천지인데, 다른 감독들의 질투심이 장난 아니겠는데요?"

호날두가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해보았다.

무리뉴는 바로 전 시즌인 03-04시즌에 포르투를 이끌면서 유럽을 정복했고, 지금은 첼시를 지휘하며 다시 한 번 챔피언스 리그 제패를 꿈꾸는 중이다. 

무리뉴는 웃으면서 답했다.

"모차르트가 살리에르를 신경이나 썼던가?“

(실제로는 모차르트가 살리에르를 굉장히 의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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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닭 무리뉴가 리버풀과의 경기를 앞두고 입을 털지 않을 리 만무.

‘PSV가 최선이었고 밀란이 최악이었다. 그나마 리버풀을 만나서 다행이다.’ 라고 발언하며 먼저 선빵을 날렸다.

이에 베니테즈 역시 ‘리버풀은 이미 챔스 우승 트로피를 4번이나 든 클럽. 첼시는 리버풀의 전통을 넘을 수 없어.’ 같은 코멘트를 남기며 도발에 응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준결승전인 ‘PSV VS AC 밀란’은 양 팀 간의 전력 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 중론이었기에, 경기 며칠 전부터 두 팀의 팬들이 첨예하게 대립한데다 클럽 간 체급 차도 비슷한 ‘첼시 VS 리버풀’이 축구 팬들의 주목을 휩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첼시의 홈에서 치러지는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

호날두가 기억하는 것보다 앳된 얼굴의 스티븐 제라드의 선축으로 ‘첼시 VS 리버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현재 양 팀에게 걸려있는 서포터들의 기대가 하늘을 찌르는 만큼 단단한 정신무장을 걸친 선수들의 투쟁적인 경기양상이 주를 이루었다.

[하피아 선수 태클! 티아고의 공을 뺏어냅니다. 하지만 발이 살짝 위로 올라갔습니다.]

[거친 플레이입니다. 카드가 나와도 될 것 같은데 관대한 판정을 내리는 주심입니다.] 

[가르시아와 마케렐레의 볼 경합! 몸싸움이 아주 거칩니다!]

[결국에는 볼을 끊어내는 마케렐레! 양 팀 선수들이 적잖이 흥분한 게 보입니다. 이럴 때는 진정을 시켜야 할 것 같은데요.]

“주심! 왜 첼시 놈들이 반칙할 때는 휘슬을 불지 않는 거야! 이건 아주 위험한 파울이라고!”

“지랄! 너희 팀이 먼저 티아고의 발목에 대고 태클을 날린 것은 잊어버렸나보지?”

“생선냄새 나는 아가리 다물어!”

“리버풀, 그 후줄근한 촌동네에서 온 새끼가!”

“그만, 그만! 더 이상 경기 진행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둘 다 카드를 주겠다.”

가르시아와 조 콜이 서로 머리를 맞대며 대립하자 주심이 그들을 말렸다.

오늘 웬만한 주심은 카드를 잘 안 꺼내는 성향인지 파울에 관대한 판정을 내렸지만 그럴수록 선수들끼리의 신경전은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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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같은 리그의 클럽끼리 붙는 유럽대항전이 더 치열했다.

“패스 부탁해요!”

"오케이!"

경기가 시작하고 30분이 지나도 스코어는 0:0인 상황.

탄탄한 양 팀의 수비에 막혀 공격이 지지부진했는데 아주 좋은 타이밍에 나온 램파드의 패스를 호날두가 가볍게 받았다.

그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약 25분 동안 알론소와 캐러거의 집중 마크를 때문에 호날두는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호날두의 경기력은 스스로 자평하더라도 기대 이하였고, 이 기회를 살려서 만회하지 않으면 분해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Shit! 저 녀석을 막아!"

급박한 캐러거의 외침을 뒤로한 채 전력 질주하는 호날두.

윙 플레이어들의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는 속도.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는 호날두는 어렸을 때부터 속도를 키우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가장 빠른 축구 선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호날두.

리버풀의 선수진들은 날쌘돌이처럼 달리는 호날두를 도무지 따라잡지 못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질주합니다!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엄청난 속도!]

[공을 잡고 달림에도 호날두 선수의 속도는 여전히 엄청나게 빠르네요!]

[슈팅!!]

호날두의 날카로운 슈팅은 골문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지만 리버풀의 골키퍼 예지 두덱은 펄쩍 뛰어올라 공을 걷어내는 대단한 선방을 선보였다.

골키퍼가 상당히 막기 어려운 왼쪽 상단에 들어차는 공이었는데 역시 에지 두덱, 정상급 기량을 자랑하는 골키퍼답게 이걸 처낸다.

호날두를 비롯한 첼시 선수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홈 팬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반대로 리버풀 서포터들 사이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호날두 선수의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 득점은 4골로 첼시 선수들 중에서 드록바 선수와 함께 공동 1위입니다. 조별리그에서는 득점이 저조한 편이었는데 토너먼트에 올라와서 연속으로 골을 넣고 있습니다.]

[만약 이 골을 넣었다면 단독 1위로 올라갈 수 있었겠지요. 참고로 현재 챔피언스 리그 득점 1위는 8골을 넣은 반 니스텔로이 선수입니다.]

[아무튼 정말 날카롭고 매서운 슈팅이었습니다. 리버풀 선수들은 십년감수한 표정이죠? 예지 두덱의 멋진 선방이었습니다.]

리버풀 선수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순간적인 기습 돌파, 그리고 강력한 슈팅.

이 위협적인 모습에 경계심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프로 선수가 아니다.

호날두를 제대로 마킹하라는 라파엘 베니테즈의 고함 속에 리버풀 선수들은 호날두를 강하게 의식하며 압박을 강화한다.

호날두는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강력한 '치고 달리기' 돌파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짝 경계하고 있던 리버풀 선수들이 조직적인 협력수비를 펼침으로서 막혔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정면을 막는 캐러거, 측면을 막는 알론소, 달려들어 공을 따내려 하는 히피아를 동시에 견뎌낼 수는 없었다.

그대로 전반전은 종료되었다.

첼시 라커룸 분위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리뉴는 강하게 승리를 염원했다.

"리버풀은 고작 리그 5위 팀이야. 우리는 챔피언이고! 적어도 전반전에 한 골은 넣었어야 했다! 만약에 오늘 경기에서 무승부라도 나온다면 나는 아주아주 실망할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압박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볼을 뺏어 와라! 여기가 스탬포드 브릿지라는 것을 잊지 마! 팬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일 생각일랑 말아라!"

무리뉴의 라커룸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그는 유명 선수 출신이 아니고 감독으로서의 경력도 대단히 짧았지만, 압도적인 팀의 성적과 자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라커룸을 확실하게 휘어잡아왔다.

오늘은 그 모습이 유독 돋보였다.

무리뉴의 으름장은 첼시 선수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것은 리버풀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원정에서 무승부 이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는 것.

한층 더 치열해진 분위기 속에서 후반전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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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흙탕 싸움’이다.

전반전 45분 동안 첼시의 수비력을 확인한 라파엘 베니테즈는 아예 무승부를 노리는 것으로 선회한 모양.

반대로 득점을 노리는 첼시는 날카로운 창을 들고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부었다.

원래 축구 경기는, 양 쪽 다 공수를 주고받는 난타전보다 한쪽이 수비, 한쪽이 공격인 경기가 더 거칠고 뜨거운 법이다.

선수들끼리의 파울과 몸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 거칠어졌고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느긋한 성향의 주심이라도 카드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반전에는 한 장도 나오지 않던 옐로우 카드들이 후반전에만 세 장이 나왔다.

어느새 후반전의 남은 시간은 10분.

하지만 스코어는 여전히 0:0.

첼시 선수들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첼시 팬들의 얼굴에는 불만과 분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홈에서 무승부를 거둔다는 것은 반드시 원정에서 승리, 또는 1:1 이상의 무승부를 내야한다는 건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오, 맙소사...! 저게 가능합니까!? 예지 두덱의 기적 같은 선방이 드록바의 헤더를 막아냅니다! 골이나 다름없는 것을 그가 막아냈어요!]

[제라드 선수의 깔끔한 태클! 공을 따내는 리버풀! 구드욘센 선수가 반칙이 아니냐며 손을 들어 보이지만 주심은 고개를 젓습니다.]

경기 종료를 눈앞에 두고 발악을 하듯이 몰아치는 첼시였지만 오늘 리버풀의 수비는 단 하나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해하다가 공을 빼앗기고 역습의 기회까지 내주니 조용한 성격인 체흐가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지를 정도였다.

딱딱하게 굳어진 채 그라운드를 노려보는 무리뉴와 열정적인 목소리로 선수들을 격려하는 베니테즈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추가시간까지 더해도 8분.

하나 둘 첼시 선수들의 얼굴에 체념이 새겨지려는 순간, 드디어 호날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호날두는 현재 불만이 가득 찬 상태였다.

전반 25분까지는 별로였지만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호날두는 첼시의 공격을 거의 이끌다시피 했다. 

그의 움직임은 첼시 선수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고 덕분에 리버풀 선수들에게서 갖은 견제와 압박을 받은 호날두.

가끔 놀라운 개인기와 드리블 돌파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호날두라도 마라도나 스페셜 찍듯이 매번 그들의 압박을 빗겨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호날두가 이렇게 집중 견제를 받으면 첼시의 다른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오늘 첼시 선수들은 기회를 창출하기는커녕 실수 연발이었다.

심지어 램파드 조차도 부정확한 중거리 슈팅을 남발하며 실망스러운 경기력만 보였다.

램파드를 같은 선수로서 존경하는 호날두지만, 이럴 때만큼은 그에 대한 존경심이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그런 호날두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리버풀과 첼시 선수들 간의 볼 경합 싸움 결과로 세컨 볼이 뒤로 흘러나왔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잡아채는데 성공했다.

망설일 것 없이 리버풀 선수들의 협력 수비가 조직되기 전에 공을 잡고 스퍼트를 시작하는 호날두.

'이건 무조건 내가 해결해야 한다!'

팀원들의 부진 속에서 호날두는 스스로 해결해야함을 직감했다.

눈을 번득이며 달려오는 리버풀 선수들 속에서 호날두는 적지 않은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압박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지만, 호날두는 자신이 바라는 위치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을 걷어차면서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달렸다.

[오늘 첼시 선수들 중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호날두 선수! 밸런스를 흔드는 헛다리짚기로 캐러거 선수를 따돌리는데 성공합니다!]

[정말 폭주 기관차처럼 다 뚫고 달리네요! 리버풀로서는 위험한 위치까지 파고드는데요! 여기서 패스 하나요!?]

리버풀의 수비수들은 몸으로 공을 막을 기세였고 촘촘히 세워진 수비 두께 때문에 슛을 때릴 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호날두는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드록바와 구드욘센에게 패스하지 않았다.

이미 이들은 여러 번 기회를 놓쳤기에 호날두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맞고 죽어라 슛이지!’

왼쪽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상태에서 디딤발을 딱 잡고 갈겨버리는 아주 강력한 슛!

호날두가 찬 공은 알론소의 다리 사이를 뚫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골키퍼 예지 두댁의 손에 닿은 공.

하지만 그의 손가락에 걸렸음에도 공이 나아가는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골라인을 넘으면서 골이 선언되었다.

우와아아아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호날두의 플레이를 지켜 본 첼시 서포터들.

그들이 응원하는 선수가 리버풀의 모든 벽을 뚫고 골을 성공시키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거친 환호성을 토해냈다.

고개를 푹 숙인 리버풀 선수들과 온갖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으면서 달려오는 첼시 선수들 속에서 호날두는 경기장 바닥을 가리켰다.

마치 이곳은 스탬포드 브릿지, 그리고 승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한 세레머니였다.

‘하, 하마터면 호우- 세레머니가 터질 뻔했네.’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서 ‘호우-!’가 터질 뻔했다.

몸이 반 바퀴 돌았을 때 그라운드를 가리키는 세레머니가 생각나서 얼른 동작을 바꾼 호날두.

‘정지우’는 아쉽게도 호날두의 ‘호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

[호날두의 벼락같은 결승골! 1차전 기적 같은 첼시의 승리를 이끌다!]

[주제 무리뉴, '호날두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고 레벨. 그와 같은 선수를 얻은 것에 감사.']

[첼시를 결승전에 한발 올려놓은 호날두의 천금 같은 골!]

[라파엘 베니테즈, '이제 겨우 1차전이 끝난 것. 포기하지 않고 호날두 봉쇄 법 찾겠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에서의 결승골.

그것도 팀의 공격 전개가 전체적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홀로 모든 리버풀의 수비진들을 뚫고 들어가 만든 골이다.

그 파장은 호날두의 생각보다 훨씬 컸다.

잉글랜드 스포츠 채널에서는 그 장면만을 편집해서 주구장창 틀어주었고 여러 평론지에서도 호날두의 플레이에 대해서 연이은 호평을 쏟아냈다.

벌써부터 반 바스텐 이후 20년 만에 연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선수가 나오는 거 아니냐는 낯 뜨거운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첼시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발롱도르는 호날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물론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강력한 후보로 남을 것이고요.]

해설위원이자 평론가인 지미 핸드윅의 말은 사실상 정론이었다.

잉글랜드에서의 호날두에 대한 평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사이, 호날두는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초대 받았다.

"들어가시지요."

비서가 문을 열어주자 마치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갖가지 화려한 색상의 산해진미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한 중년 남자가 호날두를 반겼다.

평범한 인상에 낡은 청바지, 티셔츠 등의 후줄근한 차림.

하지만 그는 바로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의 구단주였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에서 보여주었던 호날두 선수의 경기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왜 무리뉴 감독이 그렇게 거액의 이적료를 주면서까지 호날두 선수 영입에 신경을 썼는지 깨달았죠. 호날두 선수는 첼시의 보물입니다. 덕분에 아주 좋은 경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저 역시 첼시에서 보여준 환대가 만족스럽습니다. 반드시 첼시가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정말로 첼시가 챔스에서 우승한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게 없을 겁니다. 그 때는 호날두 선수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에게도 아주 두둑한 보너스를 준비하지요. 자! 약속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을 텐데 식사부터 하면서 얘기 나누어봅시다."

식탁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고칼로리에 당분과 염분이 많은 음식들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한 호날두는 당연히 시즌 중은 물론이고 프리 시즌, 심지어 휴가 기간에도 이런 음식들을 피해왔다.

수저를 뜨고 있지 않은 호날두를 의아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로만이었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고 중요한 경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음식들은 먹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아, 이런 내가 경황이 없었군. 미안합니다."

"그래도 구단주님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음... 이건 먹어도 되겠군요."

전용 소스가 빠진 송아지 스테이크와 드레싱을 하지 않은 샐러드, 으깬 감자나 호밀빵 같은 음식들만 골라서 먹는 호날두.

솔직히 맛은 별로 없었다.

소스가 빠진 고기는 텁텁하고 심심했으며, 드레싱을 하지 않은 샐러드는 풀을 씹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날두가 이럴 수 있는 것은 식욕보다도 축구 선수로서 더욱 성공하고 싶은 욕구, 오래 뛰고 싶은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나이답지 않게 철저한 식단관리를 하고 있군요. 어제 굉장히 특별한 경기를 치렀으니 오늘 하루쯤이야 하는 유혹에 빠질 만도 할 텐데."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는 그저 오늘도 뛰고, 내일도 뛸 뿐입니다. 그러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멀리 갈 수 있겠지요."

호날두의 말에 로만은 눈을 크게 뜨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그거 아주 좋은 교훈이 깃들어있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는 그 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죠.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한 조사와 분석, 그리고 분배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것도 시간과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죠. 뭐, 가장 최고는 결국 '운 좋은 놈'이겠지만... 그건 우리들과도 상관이 없지 않은 이야기겠지요."

하긴, 로만이나 자신이나 억세게 운 좋은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호날두는 어쨌거나 축구 선수로서의 최고의 재능을 타고 났고, 로만은 줄타기(?)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 타이밍 맞게 모시는 주인을 배신하고도 끝까지 살아남았으니까.

하지만 현명하게도 이 생각을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

"내가 내어준 음식들을 보고 호날두 선수는 손님에 대한 배려가 없다며 욕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의 석유 사업가임과 동시에 축구 구단을 운영하는 구단주입니다. 당연히 선수들이 시즌 중에 몸을 무겁게 만드는 음식들을 먹지 않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아까와 같은 제스쳐를 취한 것입니까?"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나는 전부터 무리뉴 감독과 첼시의 보드진들을 통해서 호날두 선수의 유별난 프로의식에 대해서 여러 번 전해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지요."

"......"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호날두 선수도 알다시피 나는 사업가입니다. 중요한 정보와 소식들은 항상 직접 듣고 경험해야 안심이 되죠. 이것은 호날두 선수가 그만큼 첼시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날두는 왠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자신에게 따로 바라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호날두 선수가 첼시에 오래, 아주 오래도록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알다시피 첼시는 EPL 최고의 팀이 될 것이며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팀입니다. 또 첼시는 호날두 선수에게 그 누구보다도 많은 주급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설령 세계 최고 수준의 주급이라도."

결국 로만이 바라는 것은 재계약, 그것도 장기계약이었다.

완벽한 성적을 거두면서 EPL과 챔스를 정복하고 있는 첼시였지만 그런 첼시에게 부족한 것은 스타 선수의 존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데이비드 베컴 같은 선수.

로만은 호날두가 ‘첼시의 베컴’이 되길 원했다.

“저는 올해 초에 재계약을 맺었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계약을 논한다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계약기간이 긴 것은 선수와 구단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고요.”

원클럽맨 같은 로망이 없는 호날두. 

그는 결코 첼시에서 남은 선수로서의 시간, 전부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시기와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첼시지만, 나중에 어떤 식으로 홍역을 겪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드진도 문제지만, 로만도 거기에 톡톡히 한 몫을 했지.'

안드리 셰브첸코를 비롯하여 첼시의 스쿼드와 스타일상 맞지 않은, 순전히 구단주 입맛대로 선수들을 거액에 영입해오는 것은 물론, 경기 도중 라커룸에도 드나들면서 감독의 전술에 개입한 일은 여러 언론지에서도 소개된 로만의 기행이다.

오죽하면 무리뉴가 '내가 당신 사업 하는 일에 끼어들지 않듯이, 당신도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무리뉴 부임 초기라 간섭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지만 나중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내 선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구단, 그리고 내가 가담함으로서 팀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단에서 뛸 거다.'

너무 계산적이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선수든 자신의 커리어와 성공이 달린 일에는 계산적으로 변하는 법이다.

호날두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라는 이름에 걸 맞는 선수로 성장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트로피를 쓸어 모을 수 있는 성공적인 구단에서 뛰어야 했다.

지금은 첼시가 그런 구단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오늘 호날두 선수와의 대화는 참 즐거웠습니다. 이제 20살 성인이 된 것으로 아는데 나이답지 않게 저와 코드가 잘 맞는군요.”

“구단주님께서 제게 잘 맞춰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의를 거절한 것은 죄송스럽군요.”

“아아, 거기에 마음 쓸 필요는 없어요. 호날두 선수는 아직 충분히 어리니 넓은 선택권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부디 챔피언스 리그에서 멋진 모습 보여주기를.”

“물론입니다, 구단주님.”

로만은 호날두에게 아브라모비치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호날두는 끝끝내 깍듯하게 구단주님이라는 호칭을 놓지 않았다.

===

[04-05시즌 프리미어 리그도 이제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에서도 유력한 우승경쟁 팀으로 꼽혔지만 무관의 고배를 마셔야 했죠! 오늘 그 첼시의 숙원이 이뤄지기 직전입니다.]

[이곳 볼튼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첼시는 자력으로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설레발은 금물이지만 사실 첼시가 우승을 놓치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첼시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우승을 확정지어야 속 편합니다. 리그를 확실하게 끝내놓아야 챔스에 전력투구할 수 있거든요.]

첼시에게 한 가지 변수를 들 수 있다면 우승을 해보지 못한 선수들의 막판 집중력이다.

우승에 근접했던 팀들이 자만심, 부담감 등의 이유로 막판에 무너진 적은 축구 역사상 셀 수 없이 많았기에 첼시도 그런 일을 겪으리라 충분히 기대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첼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강력한 팀이었다.

특히 이제 공격형 윙어로서의 기량을 만개해 굉장한 득점 페이스를 보여주는 호날두의 존재는 ‘혹시...’를 기대하는 볼튼을 가볍게 침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뻐엉-!

호날두의 강력한 중거리 슛!

그 슛은 볼튼의 수비수를 맞고 굴절되어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키퍼는 이걸 어떻게 막냐는 듯이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오오올-! 크리스티안 호날두! 두 번째 골입니다!]

[굴절까지 되었으니 골키퍼 입장에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공이었죠!]

호날두는 오늘 경기에서 두 번째 골을 넣으면서 리그 20골의 고지를 밟았고 첼시의 리그 우승을 확정 시켰다.

1954-55시즌 이후 정확히 50년 만에 이루어진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이었으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의 첫 우승이었다.

[첼시의 우승입니다! 50년 만에 첼시가 잉글랜드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맙소사! 과연 50년 만에 우승한 팀을 응원하는 서포터들은 무슨 기분이 들까요!? 블루스들은 오늘을 기념일로 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프리미어 리그의 중하위권, 우승팀들을 빛내주던 조연 같던 팀이, 04-05시즌 새롭게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근 10년간 이어져 내려온 맨유와 아스날의 양강 체제가 오늘로써 드디어 깨집니다!!]

시즌 초반부터 압도적인 1위를 질주해왔고 단 한 번도 선두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첼시.

그랬기에 첼시의 선수들도, 팬들도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북받쳐오는 이 감정들을 어찌 숨길 수가 있을까.

특히 응원하던 팀이 50년 만에 다시 리그의 정상을 차지하는 모습을 본 나이 든 백발의 블루스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그 자리에서 오열하는 중이었다.

이들의 뜨거운 눈물은 많은 축구 팬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삑-! 삐이익!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볼튼 원더러스를 3:0으로 제압한 첼시 선수들은 일제히 괴성을 질러대며 포효했다.

첼시 유스 출신 존 테리는 서포터들에게 뛰어가 안기면서 굵은 눈물을 뚝뚝 쏟아냈고, 램파드와 구드욘센, 더프 등 오랜 기간 첼시 선수로 뛴 이들도 난입한 팬들과 얼싸안으며 같이 울고 웃었다.

첼시의 우승이었다!

중계 카메라에는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도 비춰졌다.

주먹을 움켜쥐면서 고개를 젖혀 환호하는 로만의 모습은, 축구에 일희일비하는 다른 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경기에 역시 첼시의 구단주, 로만도 와 있었습니다. 재작년 첼시를 인수한 이후 굉장히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해서 선수단 리빌딩을 진행했죠. 덕분에 첼시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 이렇게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해외 자본의 유입을 꺼려하는 축구 팬들도 상당히 많았었죠. 하지만 결국 첼시는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첼시의 우승은 로만,.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죠! 이 일련의 사건이 유럽 축구계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오늘 두 개의 골을 넣으면서 승리를 이끌었던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모습을 비추었다.

포르투갈에서 리그 우승, 유로파 리그 우승, 심지어 유럽 선수권 대회까지 우승한 호날두는 많은 이들의 우려와 조롱 등을 깨고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까지 정복했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이미 역사를 쓰고 있는 선수였다.

주장인 존 테리가 트로피를 첫 번째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램파드가 그 뒤를 이을 차례였지만 램파드는 웃으면서 호날두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감격스럽게 지켜보는 팬들과 선수들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주장인 프랭크 램파드 선수가 트로피를 호날두 선수에게 양보합니다! 아, 이건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인데요? 그만큼 호날두 선수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어린 에이스에 대한 배려겠죠! 올 시즌 램파드 선수도 그야말로 잉글랜드 최고, 아니 유럽 전체를 따져도 첫 손에 들어갈만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호날두도, 램파드도 정말 대단한 선수들입니다.]

[더 큰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요? 호날두 선수, 담담하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립니다. 하하하, 어린 선수답지 않은 굉장히 차분한 표정인데요.]

남들이 보기에는 차분해보일지라도 지금 호날두는 격동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힘든 상황이었다.

EPL 중계를 통해 해외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정지우’. 

어렸을 때부터 축구 선수로서의 길을 걸어왔던 ‘정지우’는 프리미어 리그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성남 FC에서 뛰면서도 언젠가는 EPL로의 이적을 꿈꿔왔다.

지금 자신은 ‘정지우’가 아닌 호날두로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이렇게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숙원 하나가 풀어졌다.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리그 우승만으로도 이정도인데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까지 얻는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챔스 뿐만이 아니야... 월드컵도 있지.’

목표를 달성하면 할수록 목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 번 달리기 시작했으니 멈출 수 없다.

이 끝없는 갈증을 일시적이라도 채우기 위해서는 소금 가득한 바닷물, 우승 트로피를 더 들어 올려야 한다.

호날두의 우승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이 때부터 시작이었다.

===

[프리미어 리그의 새 역사를 쓰다! 첼시 04-05 프리미어 리그 우승!]

호날두의 연속골과 램파드의 쐐기골로 볼튼 원더러스를 잠재운 첼시가 1954-55시즌 이후 반세기만에 우승을 확정지었다.

첼시는 지난 해 10월 17일,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0:1로 단 한번 패한 것을 빼고는 무패행진을 이어나가며 1위와 2위 사이에 철옹성을 세웠고 결국 완벽한 우승을 이뤘다.

첼시는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에 진출해 있기도 하다.

첼시의 감독, 주제 무리뉴는 ‘아무도 우리가 우승할 자격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우리는 EPL에서 가장 압도적인 챔피언이다!’ 라고 선언하며 선수들 하나하나를 껴안아 주었다.

이어서 무리뉴 감독은, ‘50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루었고 이제 남은 것은 구단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 이라며 챔스 우승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드러냈다.

이날 MOM으로 지정된 호날두 선수는 주장인 존 테리 선수 바로 다음으로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우승을 자축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이 오는 3일에 내정되어 있기 때문에 첼시의 샴페인 파티는 그 이후로 미루었다.

한편 바이에른 뮌헨은 카이저스라우테른을 4:0으로 대파하면서 독일 분데스리가를 통산 18번째 제패하는 위업을 선보이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스페인 라리가에서는 초호화군단 레알 마드리드가 레알 소시에다드를 누르고 6연승을 달리며, 크루이프의 유산 바르셀로나와의 승점 차이를 3점으로 줄여 역전 우승의 불씨를 되살렸다.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는 안드리 셰브첸코의 활약으로 피오렌티나를 2:1로 격파하며 한 경기를 덜 치른 유벤투스와의 승점차를 3점으로 벌리기도 했다.

댓글

- 너무 대단하다... 너무 감동이다... ㅠㅠ

ㄴ 첼시 팬이냐? 부럽다.

- 오자마자 리그 우승에 이제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노리네. 주제 무리뉴가 얄밉긴 해도 진짜 물건이긴 해.

- 진짜 가장 꼴도 보기 싫은 팀이 우승하게 되었네. EPL에 대한 흥미가 확 떨어진다. 크로켓이나 볼까.

ㄴ 너 하나 안본다고 별 차이 없음.

ㄴ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분탕치는 이유가?

ㄴ 자기가 응원하는 팀 우승 못하니까 깽판치는 거 봐라ㅋㅋ

- 이대로 챔스까지 우승하는 거다! 주제! 너만 믿겠어!

- 호날두의 활약이 가장 중요해. 그는 언제나 가장 중요할 때 한 건씩 하는 선수니까.

ㄴ 괜히 램파드가 호날두에게 트로피를 먼저 들라고 한 게 아니지.

ㄴ 크리스티안는 팀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꼭 한 골씩 넣어줌. 기복도 거의 없고 강팀에게 강함. 스탯은 앙리보다 못하지만 팀에 대한 기여도는 앙리보다 높다고 생각.

ㄴ 아무리 그래도 앙리를...

ㄴ 앙리보다 더 잘한 거 맞는데? 괜히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배당률이 가장 낮은 게 아니야.

- 여기까지 와서 선수 비교 그만하고 우승 축하나 하자. 첼시 팬은 아니지만 축하해. 니들 정말 강하더라.

ㄴ 너무 고마워!

- 옆집 할아버지 첼시 팬이셨는데 우승 트로피 들어 올리는 장면에서 엉엉 우시더라...

- 다음 시즌에는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성적은 거두지 못할 듯. 견제가 더욱 심해질 테니.

- 그나저나 뮌헨은 정말 대단하구나... 이렇게 빨리 우승 확정이라니.

ㄴ 그런 뮌헨을 우리 첼시가 꺾었지! 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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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의 홈 경기장인 안 필드에서 펼쳐지는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리버풀 VS 첼시 2차전.

호날두의 결승골로 1:0 우위를 유지한 채 2차전을 치르게 된 첼시는, 이번 경기에서 최소 무승부만 거두어도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경기 양상은 1차전과 비슷했다.

다만 공격을 퍼붓는 쪽이 리버풀, 지키는 쪽이 첼시라는 점만 다를 뿐.

경기 도중 갑자기 관중석에서 난입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팬 때문에 잠시 경기가 지연되기도 했다.

자기 겉옷을 벗어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그라운드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난입 팬은 더없이 진지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도 실소를 터지게 만들었다.

난입 팬과 진행요원들 사이에서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금방 잡히게 되고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다.

촤아아악-!

대지를 가르는 슬라이딩 태클.

호날두의 태클은 정확히 스티프 피난의 공을 쳐서 끊어냈다.

첼시 원정석에서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호날두가 공을 잡자마자 헉 소리를 내는 리버풀 선수들.

그만큼 호날두는 리버풀에게 요주의 대상이었다.

‘...길이 다 막혔네. 어쩔 수 없지.’

이미 리버풀 선수들끼리 수비벽을 잘 조직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돌파하다가는 오히려 공을 뺏길 위험이 컸다.

호날두는 언제나 그랬듯이 팀의 승리에 부합되는 선택을 했다. 

높은 크로스를 올리면서 반대쪽의 구드욘센에게 보낸 것.

절묘한 크로스는 정확히 구드욘센의 앞 쪽에 공을 배달했고, 구드욘센은 두 번의 볼터치 이후 바로 중거리 슈팅을 때렸다.

아쉽게 공대를 벗어났지만 호날두에게 집중된 리버풀 선수들의 견제를 역이용한 좋은 시도였다.

첼시는 다른 팀 원정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처럼, 먼저 수비를 튼튼히 한 다음 상대의 빈틈을 노려 역습을 가하는 식의 전술 테마를 정한 뒤 경기에 임했다.

리버풀의 파상공세가 체력이 달려 옅어질 때쯤, 대대적인 역습으로 득점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물론 아까처럼 기회가 있을 때는 올라가서 중거리 슛이나 프리킥을 유도하기도 했다.

분명 전반전 시작까지는 첼시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고 무리뉴의 전략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수비 실수로 그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라드의 강력한 슈팅!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옵니다! 루이스 가르시아! 슈우우웃! 들어갔습니다! 루이스 가르시아의 골!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골입니다!]

[경기 시작 19분 만에 골을 넣는데 성공하는 리버풀! 갈라스 선수와 경합하여 볼을 따내고 슛까지 날렸던 제라드가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높은 활동량과 체력, 피지컬로 공수 양면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던 제라드가 좋은 위치에서 공을 가로챈 다음 놀라운 중거리 슛을 쐈다.

튕겨 나오면서 노골 선언이 되었지만 결국 가르시아에게 가게 된 것.

약간 행운이 가미되었지만 어쨌든 볼 탈취에 성공한 제라드와 좋은 위치에서 파고든 가르시아가 이뤄낸 합작 골이라 볼 수 있었다.

가르시아가 찬 공을 쫓아간 마케렐레가 급히 걷어내기는 했지만 이미 골라인은 넘었고 골이 선언되었다.

망연자실해 하는 체흐. 

첼시의 원정 팬들을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빠졌다.

반면 안 필드의 콥들은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함성을 내지르며 응원가를 열창했다.

“허, 참...“

얼치기 같은 플레이에 그대로 당했다.

길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

리버풀의 번개 같은 공습에 첫 골을 내준 첼시는 이후에도 동점골을 넣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리버풀과 첼시 수비진들(딱 한 번의 실수를 제외하고)은 오늘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양 측의 골키퍼는 첨병의 중심에 있었다.

마치 전설적인 골키퍼 야신이 살아 돌아온 듯한 예지 두덱의 선방과 그 못지않은 체흐의 반사 신경은 골문에 거미줄을 친 것처럼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가끔은 이렇게 골키퍼들이 신들린 날이 있는데 이 때는 정말 뚫기가 어렵다.

결국 승부는 연장전으로까지 접어들었다.

연장전에 접어들었음에도 호날두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우측면을 교란시키면서 리버풀을 공격했다.

상황에 따라서 화려한 개인기를 터트리거나 피지컬적인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선수들을 벗겨내는 호날두.

기회가 왔을 때 터지는 호날두의 벼락같은 중거리 슈팅이 다시 한 번 리버풀의 골문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 공을 몸으로 막아내는 선수는 리버풀의 캡틴인 스티븐 제라드.

작정하고 찬 강력한 슛이라 맞은 등이 아플 텐데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

중앙 미드필더로 나와서 공수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인 제라드.

과연 램파드와 더불어서 현 시대 최고의 미드필더라 할만 했다.

"램파드를 막아!!"

첼시 선수들에게 제라드가 큰 벽이라면 리버풀 선수들에게는 램파드가 거대한 시련이다.

언제 어디서나 골을 노릴 수 있는 강력한 중거리 포는 제라드에 뒤지지 않았고 침투력과 활동량은 그 이상이었다.

3선 미드필더나 2선 윙어들의 패스를 받아 날리는 논스톱 슈팅은 리버풀 수비진들이 미쳐(?)있지 않았다면 두세 골은 헌납했을 정도로 날카롭고 위력적이었다.

‘정말 둘 다 인간이 아닌 것 같네. 램제의 전성기가 이렇게 대단했었구나.’

정지우가 해외 축구를 보기 시작한 2000년대 말엽에도 제라드와 램파드는 너무도 대단한 선수였다.

하지만 지금의 제라드와 램파드는 명백히 그 이상, 경기를 이끄는 미드필더의 표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순수하게 이들을 지켜보는 선수의 입장으로서 호날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프사이드 룰의 개정으로 제라드, 램파드 같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들이 손해를 보게 되고, 새롭게 포텐을 터트리며 등장한 사비, 이니에스타, 피를로 등의 선수들에게 세계 최고 미드필더 자리를 내주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명실상부한 현세대 최고의 미드필더들이었고 왜 그렇게 불리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중이다.

속된말로 호날두의 눈에서는 공수 가리지 않고 맹활약 하는 램파드, 제라드만 보일 정도.

괜히 이 시대에 램파드와 제라드가 발롱도르 2,3위를 나란히 받은 게 아니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두 미드필더들의 대결이 정말 돋보이는 경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활동량이 넓고 슈팅력과 패스, 태클능력, 경기조율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미드필더들이 오늘날 축구 경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려주는 전례가 바로 오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 선수들은 지치지도 않나봅니다. 연장전에 접어들었음에도 더더욱 놀라운 투혼을 보여주는 램파드와 제라드! 이들이 바로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선수들입니다!]

눈이 즐거워지는 치열한 육박전은 분명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이대로 연장전이 끝난다면 승부차기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 팀을 가리게 된다.

축구판 러시안 룰렛 같은 운빨 승부를 바라고 있을 서포터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장 30분도 이제는 12, 3분 정도만 남은 상황.

이제는 정말 승부차기에서 결정이 나려나 싶었지만.

경기의 승패는 결국 저 두 미드필더와 다른 한 명의 선수에 의해서 갈리게 되었다.

=

호날두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크랙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두터운 방어벽이라도 그의 드리블과 개인기, 그리고 역동적인 피지컬은 그것들을 돌파할 수 있게 만든다.

이번 시즌을 치르면서 호날두는 언제나 중요할 때 한방을 보여주었고 첼시를 응원하는 팬들은 이번에도 호날두가 무언가를 해주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중이었다.

‘호날두가 공을 잡으면 마법이 일어난다.’

‘당신을 믿어요, 크리스티안!’

‘그는 반드시 중요한 역할을 해낼 거야!’

호날두는 자신을 향한 첼시 팬들의 바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숨이 턱에 차올랐음에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20살의 나이에 세계 최고 윙 플레이어 자리를 꿰찬 호날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빨라지고 단단해졌다.

히피아의 거친 태클을 뛰어넘었고 트레오레의 반칙성 몸싸움도 끝까지 견뎌냈다.

마지막으로 덤벼드는 캐러거까지 크루이프 턴으로 제친 호날두.

안 필드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고함을 지르는 리버풀 팬들과 ‘제발...’을 외치는 첼시 팬들이 교차된다.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골라인을 따라 페널티박스 쪽으로 파고드는 호날두는, 45도 컷백으로 리버풀의 골문 정면을 향해 짧은 크로스를 올렸다.

문전 앞까지 주어진 그 크로스를 받고 트래핑 후 다이렉트 슈팅을 날리는 선수는 바로 프랭크 램파드.

귀신같이 나타난 램파드가 리버풀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공은 예지 두덱의 손을 스쳐지나가며 골네트를 거세게 흔들었다.

순식간에 침묵과 경악이 들어찬 안 필드.

리버풀의 팬들이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홉뜨는 순간, 외곽의 첼시 팬들만 찢어져라 함성을 지를 뿐이다.

[고오오오올~~! 무득점의 균형을 램파드 선수의 슛이 드디어 깨트립니다! 시원하게 골문을 흔드는 프랭크 램파드!! 스코어는 1:1! 첼시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9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램파드 선수의 결정력과 골문 앞 침착함도 대단하지만,,, 호날두 선수의 드리블 돌파와 기가 막힌 크로스는 정말...! 측면 공격수의 정석과도 같은 어시스트 장면이었죠!]

[리플레이로 나오네요. 히야... 여기서 어떻게 저런 센스로 리버풀 선수들을 속이고 컷백을 올린건지... 이 선수의 천재성은 도무지 한계를 모르겠습니다. 

[네, 이번에도 역시 호날두네요! 역시 호날두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동점골을 먹힌 것은 리버풀 선수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타격으로 다가왔다.

멘탈 붕괴, 경기를 놓아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버풀에는 영원한 캡틴, 제라드가 있었다.

제라드는 타고난 리더쉽과 장악력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선수들을 다독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 

‘여기는 안 필드야! 최소한 형편없는 정신력으로 팬들을 실망시키지 마라!’

단호하기까지 한 제라드의 말은 리버풀 선수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들은 이미 하얗게 태워진 가슴 속의 전의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고작해야 10분 언저리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미미한 가능성을 위해서, 그리고 안 필드를 가득 채운 콥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가슴 터져라 뛰었다.

이들의 투혼은 충분히 눈부셨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툭, 툭, 툭, 툭!

공을 받은 호날두가 전방을 아주 짧은 시간에 살폈다.

알론소와 캐러거, 그리고 카윗 등의 위치를 파악한 호날두는 그의 장기인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다.

‘알론소와 캐러거는 무척 좋은 선수지만... 이미 늦었어.’

호날두의 볼을 쳐내기 위해 몸을 부딪쳐 들어오는 알론소.

하지만 호날두는 전혀 밀리지 않고 드록바에게 패스했다.

호날두의 피지컬에 밀린 알론소가 휘청거릴 때, 드록바에게 다시 공을 받은 호날두.

라 크로게타로 알론소를 제치고, 공을 툭 차놓고 캐러거까지 제쳤다.

그리고 가속이 붙었다.

한번 가속 붙은 드리블의 전진성, 속도성은 호날두를 따라올 선수가 없었다.

리버풀 골 에어리어까지 직진하는 호날두는 마르세유 턴과 플립 플랩으로 히피아와 피넌까지 무력화시켰다.

무려 4명의 리버풀 선수들을 모두 벗겨내는데 성공한 호날두.

그리고 그의 앞에 남은 것은 골키퍼 한 명.

골키퍼 예지 두덱의 미세한 잔 동작까지 살핀 호날두는, 그가 가장 막기 어려운 위치로 공을 보냈다.

그리고 예지 두덱은 호날두의 공을 막지 못했다.

[크리스티안..! 공 잡았습니다. 드록바와 1대1 패스 플레이! 알론소와 캐러거를 제치고! 플립 플랩으로 히피아, 피넌까지 제칩니다! 그리고 슈우우우웃! 으아! 들어갔습니다! 크리스티안의 골입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선수의 송곳 같은 골! 말도 안 되는 드리블 돌파 이후 첼시의 두 번째 골을 만듭니다! 이것은 결정적입니다!!]

추가 시간에 기록한 호날두의 골은 첼시의 결승 진출을 축하하는 축포와도 같았다.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와 개인기의 향연 끝에 마지막 득점까지 성공한 호날두.

그에 리버풀 선수들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경기가 종료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결승이다! 결승이야!! 으하하하하!!"

"이거야! 우리가 바라던 게 이거라고!"

“We are the Blues! We are the Blues!!"

승리는 첼시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첼시는 구단 역사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르게 되었다.

그 주인공들은 바로 여기 있는 선수들이다. 

차오르는 이 환희와 기쁨, 감동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클럽 축구를 뛰는 선수로서 도전할 수 있는 가장 큰 대회의 장이자 진정한 유럽 챔피언을 겨루는 자리.

하지만 수많은 선수들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무대를 밟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한다.

하지만 첼시 선수들은 위의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

바로 오늘, 그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은 온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할 수 있었다.

포르투에 이어서 2년 연속으로 자신의 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려놓은 감독이 있다.

바로 주제 무리뉴 감독.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스탭들과 함께 경기장에 질주했고 무릎을 스터드로 삼아 잔디 위에 쫙 미끄러졌다.

꽉 쥔 주먹을 미친 듯이 흔들면서 소리를 지르는 무리뉴.

그가 첼시에 오고 나서 이렇게까지 격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호날두는 무엇보다 안도가 되었다.

지금껏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리그에서는 승승장구해왔지만 챔스에서는 리버풀을 비롯한 다른 팀들에게 상당히 고전한 첼시.

어쨌든 첼시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뚫고 결승전에 올랐다. 

그 답답함이 이제야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호날두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으며... 호날두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준결승전 도합 2골 1어시.

첼시가 득점한 3골은 모두 호날두의 발에서 완성되었다.

호날두 혼자 첼시를 결승전에 올려놓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리버풀 전의 영웅이었다.

"크리스티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호날두.

리버풀의 심장이자 영원한 8번, 스티븐 제라드가 더없이 씁쓸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주춤거리며 유니폼을 벗자, 호날두 역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유니폼을 벗었다.

이것이 제라드의 유니폼...

호날두는 왠지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비록 지긴 했지만... 아니다. 무슨 말을 여기서 더 할 수 있겠나. 아주 멋진 경기였고 특히 너는 정말 훌륭했어! 기왕 우리를 이겼으니 반드시 결승전에서도 승리해서 우승컵을 들어올리길 바랄게."

"고마워요, 제라드. 당신은 오늘 정말 멋졌고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헌신과 투지는 우리에게 큰 부담이었어요. 반드시 리버풀이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길 바랄게요."

"그래야지. 우리를 위해 울어준 팬들을 위해서라도!"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강하게 말하는 제라드.

현재 리버풀의 리그 순위는 5위.

챔스 우승의 길이 막혔으니 무조건 4위안에 들어야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룰 수 있었다.

제라드의 유니폼을 꼭 손에 쥔 호날두는 고개를 돌려 안 필드를 돌려보았다.

팀의 결승진출 무산에 눈물을 쏟으며 슬퍼하고 좌절하는 리버풀 팬들.

나이답지 않게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분명 이들은 경기 중에 자신들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화를 돋게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호날두의 마음을 살짝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결승전에 오른 기분을 즐기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호날두는 때마침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밝게 웃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언론지 기자들의 사진으로 찍혀서 풀럼(첼시 축구단이 있는 도시)시의 신문 1면에 실리게 되었다.

[Cristiano, H.E.R.O!]

신문 1면의 제목은 위와 같았다.

=

2005년 5월 10일, 첼시의 프리미어 리그 남은 경기는 단 두 경기.

첼시는 이미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기 때문에 사실상 나머지 경기들은 이기든 지든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첼시의 보드진들은 남은 경기들도 충실히, 전력을 다해 치르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바로 현재 첼시의 승점 때문이었다.

우승을 확정 지었을 당시 첼시의 승점은 88점.

역대 프리미어 리그 최다 승점 우승이 93-94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92점이다.

때문에 로만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첼시가 이 기록을 깨주길, 그래서 맨유의 시대가 끝나고 첼시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려주고 싶어 했다.

무리뉴 역시 ‘EPL 역대 최다 승점 감독’이라는 타이틀에 욕심이 나는지, 2군이나 유스 선수들을 내보내는 것보다 1군 주전 선수들을 대거 내보내 찰튼 전에서 승리를 따냈다.

이제 첼시의 승점은 91점.

만약 남은 두 경기에서 한 번이라도 승리한다면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승점 기록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이미 기세를 탄 첼시였기에 기록 갱신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 상대는 결코 쉽지 않다.

프리미어 리그 최다 우승팀이자 트레블의 전설을 이룩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들과의 리턴 매치가 남아있었다.

[알렉스 퍼거슨, ‘최다 승점 우승? 첼시는 지금 챔스를 앞두고 너무 큰 꿈을 꾸고 있어.]

[퍼거슨. ‘나라면 리그에 신경 쓰지 않고 챔스에 올인 할 것. 만약 무리뉴가 승점 타령하다 챔스를 놓치면 그것은 그의 감독 인생에 커다란 좌절이 될 거.’]

퍼거슨-벵거, 벵거-무리뉴, 퍼거슨-무리뉴는 모두 사이가 좋지 않은 조합.

나중가면 언론 인터뷰를 통한 심리전은 무리뉴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되지만 이 시기에서는 퍼거슨의 장기이자 특기였다.

뉴캐슬의 감독인 케빈 키건을 자극하는 인터뷰를 통해서 격장지계를 성공, 막판 역전 우승을 이룩한 스토리는 가히 EPL에서 전설로 통하는 퍼거슨의 심계.

퍼거슨은 위와 같은 노련한 인터뷰 스킬로 무리뉴와 첼시 팀을 살살 긁었다.

이 인터뷰가 불같은 성격의 무리뉴에게 얼마나 짜증으로 다가왔는지, 그가 인상을 피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고 이것은 맨유전 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첼시와 무리뉴는 흔들리지 않았고 프리미어 리그 우승 확정 이후 승점 추가, 리버풀을 꺾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결과가 어쨌든 첼시와 무리뉴에게, 그리고 블루스들에게도 퍼거슨은 반드시 꺾어야 하는 얄미운 숙적이 되었고, 이들은 대동단결하여 맨유전의 필승을 다짐하게 된다.

당연히 첼시는 베스트 11을 가동했고 무리뉴의 입 모터(...)도 가동했다.

[주제 무리뉴, '맨유를 박살내서 리그 준우승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무리뉴, '맨유 시대는 첼시에 의해서 종막을 맞이할 것. 퍼거슨과 맨유는 챔피언의 품격을 느껴보길.']

두 팀 간의 라이벌 리를 형성하는 원인이 무리뉴와 퍼거슨 뿐만은 아니었다.

첼시의 에이스이자 현재 팀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크리스티안 호날두와 잉글랜드의 슈퍼 원더 보이, 웨인 루니는 동갑이었고(생일은 호날두가 거의 9개월 정도 빠르다.) 때문에 이 둘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같이 묶여 평가되는 대상이었다.

특히 루니는 작년에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펼치며 2004 골든 보이 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에는 호날두가 그 상을 수상했으니, 둘의 경쟁이 골든 보이들의 전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물론 위와 같은 소리는 잉글랜드 내에서, 그 중에서도 맨유 팬들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역정을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웨인 루니가 비록 놀라운 재능과 유로에서의 임팩트로 골든 보이 상을 수상했다지만,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유로 챔피언이자 발롱도르 위너였으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양 팀 팬들 모두 서로에게 작지 않은 앙금을 가진 상태에서 프리미어 리그 37라운드 경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

맨유의 홈,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지는 오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선수는 반 니스텔로이였다.

‘좌측면의 지배자’라 불리는 라이언 긱스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웨인 루니와 폴 스콜스가 그 빈자리를 훌륭히 메워 맨유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폴 스콜스의 장거리 패스를 받은 루니가 특유의 절구통 드리블로 중앙을 돌파 후 기다리고 있던 반 니스텔로이에게 패스를 보냈다.

공이 나아가는 위치에 정확히 서 있는 위치선정과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슛.

그야말로 최전방 공격수의 정석을 보는 듯한 움직임으로 철벽 방어, 첼시로부터 골을 뽑아내는데 성공한 맨유..

손가락에 입을 맞추면서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반 니스텔로이.

우렁찬 맨유 팬들의 함성이 올드 트래포드를 달구었다.

주먹을 내지르며 포효하는 퍼거슨과 인상을 찌푸린 무리뉴의 표정이 대비되었다.

하지만 맨유의 우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퍼억!

“아악!”

조 콜의 다리를 향해 스콜스가 태클을 날렸고 조 콜은 그대로 쓰러졌다.

스콜스가 저건 헐리웃 액션이라고 항의했지만 제대로 본 주심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콜스는 옐로우 카드를 받았고 프리킥까지 내주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퍼거슨은 거칠게 항의했지만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조?”

“조금 까지긴 했는데... 괜찮아. 그나저나 진짜 더럽게 플레이하네, 저 인간.”

국대 선배였기에 차마 더 험한 말을 하지 못한 조 콜.

스콜스의 더티 플레이는 알아주었기에 호날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킥 지점은 페널티 박스에 상당히 가까운 위치.

잘 찬 프리킥 한방으로 골을 넣을 수도 있는 위치였다.

첼시의 프리킥 담당은 램파드였고 이제 그가 차면되는 일.

하지만 터치라인 바깥에 서 있는 무리뉴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는 '호날두가 차라.' 였다.

[첼시의 프리킥입니다. 램파드 선수와 호날두 선수가 엇갈려서 위치해 있습니다. 보통은 램파드 선수가 차거든요.]

[속임수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 없는 가운데 달려드는 램파드! 살짝 비껴서 지나가고! 호날두..! 찹니다! 호날두, 슛! 들어갔습니다!!]

약 25M 거리에서 제대로 찬 호날두의 왼발 프리킥.

호날두의 슛은 맨유의 수비벽의 틈을 통과한 다음 유려한 곡선을 그리면서 휘어졌다.

공은 골키퍼 로이 캐롤이 손쓸 수 없는 지역, 골대의 우측 상단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오른손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환호하는 호날두에게 첼시 선수들이 다가가 축하빵을 갈긴다.

“적당히 좀 쳐요! 아파 죽겠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날두의 기분은 최고.

리그 21번째 골을 프리킥으로 집어넣는 호날두였다.

=

전반전이 끝난 후 맨유 선수들을 라커룸에서 말 그대로 작살내버린 퍼거슨은 첼시의 크랙, 크리스티안 호날두를 막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전반전 내내 머리를 싸매도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남은 몇 분의 자투리 시간에 번뜩이곤 했기 때문에 퍼거슨은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 놈을 어떻게 막아야할까...'

첼시에서 호날두만 잘한다면 그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그 한 명 봉쇄하는 전술을 퍼거슨이 만들어내지 못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도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더 문제인 것이다.

=

지금 첼시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인 램파드와 마케렐레가 중원에 떡 버티고 있으면서 묵직한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램파드는 조금만 맨유 수비진들이 비틀거려도 언제든지 박스 안으로 치고 들어 와서 득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천후 선수. 

또한 호날두와 함께 쓰리 톱을 구성하는 더프, 드록바 역시 언제든지 골을 뽑아낼 역량이 있는 선수들로 하나하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비진은 또 어떠한가?

존 테리, 카르발류, 갈라스, 제레미 그리고 골키퍼 체흐까지 이어지는 무게감은 EPL 최고, 아니 유럽 최고 수준.

아마 이들보다 더 뛰어난 수비진들을 보유한 팀은 세리에A의 AC 밀란이 유일할 것이다.

이런 대단한 스쿼드를 갖추고 뒤를 받쳐줄 수 있기에 현 시대 최고의 크랙인 호날두는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이놈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데려올 기회가 있었는데... 어이구, 지금 안타까워해서 뭐하겠누. 제 놈이 거절한 것인데."

다시 한 번 대어를 놓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퍼거슨.

과거 퍼거슨이 스포르팅 시절의 어린 호날두를 처음 보았을 때는 당연히 지금만큼의 놀라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빠른 주력에 화려한 개인기와 드리블을 장착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재능임이 분명했고, 본격적으로 스카우터를 보내 그에 대해서 조사하게 했다.

퍼거슨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점은 호날두의 프로페셔널한 태도, 

단 한 번도 훈련에서 지각한 적이 없는 점과 조국과 클럽을 가리지 않고 굉장히 주목받고 있음에도 스타 병에 걸리지 않는 바로 그 태도였다.

날듯이 뛰어간 퍼거슨은 그와 계약하고자 했다.

하지만 호날두는 잔류를 택했고 그 곳에서 더욱 재능을 꽃피웠으며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퍼거슨의 구애를 까버리고 주제 무리뉴를 따라 첼시로 갔다.

그 결과는 지금에 이르렀다.

"맹랑한 놈! 건방진 놈!"

지금 맨유는 리빌딩 과정을 겪고 있다.

자신에게 반하는 콧대 높은 일부 선수들을 내쫓는 것도 그 일환이다. 

나이 들고 기량이 떨어진 선수들을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로 대체하면서 유기적인 조직력과 팀워크를 기르는 시기.

이 과정은 너무 급하게 또는 너무 더디게 해서도 안 되며, 제대로 된 리빌딩을 위해서라면 리그 우승 한두 번쯤은 포기할 각오가 있다.

대신 고치가 성충으로 탈피하듯, 고행의 시기가 끝나면 맨유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다시 EPL의 제왕으로서 군림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무리뉴의 첼시든, 벵거의 아스날이든, 베니테즈의 리버풀이든 전부 흠씬 두들겨 패버리리라 다짐하는 퍼거슨.

자신의 구애를 까버리고 첼시로 도망친 맹랑한 놈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사소한 바람일 뿐이다.

'일단 경기에서 이겨야겠지. 비록 우승컵은 뺏겼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서 치르는 홈경기. 절대 내줄 수 없지!'

완고한 눈빛을 띄며 껌을 강하게 씹는 퍼거슨이었다.

첼시가 아무리 막강해도, 이곳은 맨유의 성지였다.

=

승리에 대한 열망에 불타오른 감독과 달리 막상 펼쳐진 경기 결과는 참담했다.

그 정도는 퍼거슨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후반전 시작하자마자 동료 선수에게 공을 받은 것은 크리스티안 호날두.

퍼거슨이 그렇게 경계하던 호날두는 공을 가볍게 차고 그것을 쫓아 달리고, 다시 차고 달리는 '치달'을 통해, 보는 사람들이 쾌감마저 느껴질 강렬한 속도로 맨유의 선수들을 뚫어냈다.

마지막엔 헛다리짚기로 개리 네빌의 중심을 빼앗은 호날두는 그대로 다이렉트 슛을 날렸다.

골네트가 시원스럽게 출렁였다.

벼락같은 2:1 역전골.

호날두에게 또 한 대 얻어맞은 퍼거슨은 붉어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로이 킨, 개리 네빌, 퍼디난드, 폴 스콜스, 웨인 루니, 반 니스텔로이 등의 스타 선수들조차도 퍼거슨의 호통에 벌벌 떨었고 다시 턱이 숨에 차오를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호날두.

이번 경기의 호날두 컨디션은 정말 미쳐 날뛰는 사자와 같았다.

레프트 백으로 출전한 웨스 브라운은 맨유 트레블 시절부터 함께한 멤버이고 지금까지 준수한 폼과 노련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번 경기에서는 호날두에게 갈가리 찢겨나갔다. 

호날두는 압도적인 속도로 그를 수없이 뚫어내면서 멘탈까지 탈탈 털어버릴 수 있었다.

왼쪽 라인을 컨트롤 해줘야 할 라이언 긱스가 없는 좌측면의 무게감은 상상 이상으로 가벼웠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 로이 킨과 퍼디난드조차도 호날두를 막지 못했다.

마라도나를 연상케 하는 엄청난 전진 능력의 드리블과 경합 장면에서 간간히 터지는 화려한 개인기.

맨유의 스타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슛, 그리고 골.

생애 첫 해트트릭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그것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이룬 호날두였다.

[오 마이 갓-!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공을 가지고 무려 40M를 질주하면서 맨유 선수 4명을 제쳐버리고 골을 넣어버린 크리스티안 호날두!! 선수로서 첫 번째 해트트릭입니다!]

[퍼거슨 경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세요! 퍼거슨 경의 저런 얼굴을 근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맨유가 홈에서 이런 치욕을 언제 또 당해봤을까요!]

[다시 한 번 봐도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원더, 원더 골입니다! 아마 올 시즌 프리미어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이보다 멋진 골은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뽑힐 것입니다!]

'호날두'로서 처음 해낸 1부 리그 해트트릭.

잔디 위로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누워버리는 세레머니는 무의식의 발현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여서 나온 것.

그런 호날두의 몸 위에 첼시 선수들이 달라붙어서 거칠게 짓눌렀다.

그들이 입이 쉴 새 없이 나불거리면서 여러 나라의 언어를 쏟아냈지만 솔직히 호날두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묵직하게 올라오는, 가슴 속 무언가를 겨우 억누르며.

오늘의 활약을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계속 이어나가길 기도할 뿐이다.

=

안타깝게도 호날두의 질주는 여기까지였다.

호날두에게 해트트릭을 먹혀버리자 맨유의 주장이자 인성왕, 로이 킨이 가만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얼굴의 로이 킨의 질주.

대놓고 발목을 노리는 태클이 공을 몰고 달리고 있던 호날두에게 펼쳐졌다.

퍼억!

“으윽....!”

호날두는 발목을 움켜쥐며 넘어졌고 당연히 필드에서는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방금 뭐한 거야!?"

"어쩌라고! 좆같은 새끼가!"

눈 부릅뜨면서 몸을 밀치는 드록바와 맞서며 오히려 욕설을 퍼붓는 로이 킨.

선수 생활을 아작 낼 수도 있는 태클을 펼치고도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로이 킨을 첼시 선수들이 가만 놔둘 리 없다.

분노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첼시 선수들과 그걸 말리면서 주장을 보호하는 맨유 선수들로 그라운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관중들의 야유 또는 함성 속에서 결국 양 팀의 코칭 스탭들까지 나와 선수들을 말리며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열이 오른 선수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해당 선수 모두에게 카드를 주겠어! 함부로 행동하지 마! 영상은 모두 녹음되고 있고 FA는 언제든 징계를 때릴 수 있으니까!”

주심까지 와서 큰 목소리로 엄포를 놓으며 싸움을 말리자 그제서야 언제든 패싸움이 벌어져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특히 챔스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첼시는 무조건 몸을 사려야 했다.

주심은 호날두와 로이 킨의 경합 장면을 보았다.

공을 몰고 달리는 호날두에게 비신사적인 태클을 날린 로이 킨.

당연히 주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다이렉트 레드 카드를 뽑았다.

퇴장이었다.

본인도 퇴장을 직감했는지 항의는커녕 주심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대로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로이 킨.

일부 맨유 팬들만 그에게 작게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발목은 좀 어떠니, 크리스? 고통은 들지 않고?"

"조금 삐끗한 것 같네요. 부목은 괜찮아요."

“오늘 경기는 여기까지만 뛰도록 하자. 일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푹 쉬어라.”

이런 식으로 크게 지고 있는 팀은 상대 선수들에게 해코지 겸 분풀이를 가할 수도 있다.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대 팀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는 무대를 앞두고 있는 이상 더더욱.

분노를 잠시 잊은 무리뉴는 자신의 핵심 선수를 지켜야 할 사명을 우선했다.

호날두는 자신의 부상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다행히 인대가 조금 놀랐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로이 킨의 발이 들어오는 위치와 각도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호날두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는데 그게 도움이 된 듯.

또 호날두의 몸 자체가 워낙 유연하고 탄력 있는 덕을 보기도 했다.

이런 몸은 부상도 잘 당하지 않고, 설령 당하더라도 회복도 빠르다.

이래나 저래나 참 축복받은 신체였다.

"로이 킨, 그 쓰레기 자식이 언젠가 한 번 이런 더러운 짓을 벌일 줄 알았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징계를 내리지 않으면 FA에 정식으로 항의할 거다."

무리뉴 감독이 포르투갈 어가 섞인 욕설을 내뱉으면서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핵심 선수에게 일부러 이런 부상을 입히다니.

만약 호날두의 부상이 조금만 더 심각했더라면 당장 달려가 로이 킨의 목을 졸랐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쿵푸 킥을 날리던지.

"음... 저에게 의료 라이센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승전 전까지는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아무 생각 말고 안정을 취하는 게 우선이다. 설령 결승전에 뛰지 못하더라도 아무도 너를 욕하지 못해."

무리뉴는 호날두 자신이 괜한 만용을 부린다 생각하겠지만 진짜로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피하기도 잘 피했으니까.

첼시의 팀 닥터들이 경미한 부상이라 하면서 결승전 전까지는 무난하게 복귀 가능할 것 같다는 진단을 내린 이후에야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는 무리뉴였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지연된 경기는 호날두와 로이 킨이 빠진 후에 계속 진행되었다.

맨유는 로이 킨이 퇴장당한 이후 10명에서 뛰었는데, 그들 주장의 매우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분노한 첼시 선수들을 그대로 맞이해야 했다.

끝끝내 몰아붙여서 기어코 맨유의 골문을 한 번 더 흔드는데 성공한 첼시.

골을 넣은 디디에 드록바는 경례를 하면서 원정 온 첼시 팬들에게 감사의 세레머니를, 그리고 호날두의 부상에 환호를 지른 일부 맨유 팬들에게 조롱의 세레머니를 보냈다.

경기가 종료 되었다.

1:4

충격적인 올드 트래포드의 참사였다.

퍼거슨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맨유의 홈에서 벌어진 맨유와 첼시의 프리미어 리그 37라운드 경기.

충격적인 경기와 그 결과는 잉글랜드 전역, 아니 유럽 축구계 전체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EPL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아무리 예전만 못하더라도 홈에서 1:4로 박살이 나다니.

이것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레드 데빌즈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는 일이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슈퍼스타 베컴을 팔아버린 퍼거슨의 오만함이 이 사단을 불러일으켰다면서 강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퍼거슨은 퍼거슨.

대다수의 맨유 팬들은 퍼거슨이 이룩한 신화와 빛나는 시절들을 잊지 않았다.

아직 모른다, 퍼거슨은 언제나 그랬듯이 맨유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다 라면서 지지를 굳건히 했다.

위기일수록 결집하는 충성 팬들의 숫자가 많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지금은 잠시 위기를 겪는 중이지만 귀신같이 반등에 성공할 것이란 믿음과 신뢰가 이 때의 맨유에게는 존재했다.

현재의 맨유를 흔들리는 로마 제국의 말엽에 비유하는 가십전문 언론들과 타팀 팬들의 물어뜯는 공세가 계속되었지만, 굳건한 팬들의 지지는 앞으로의 맨유와 퍼거슨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다.

첼시 팬들은 로이 킨의 살인 태클에 맹렬히 분노했고, 자신들이 잘못했음에도 도리어 화를 내는 맨유 선수들의 태도에도 환멸을 느꼈다.

스카이 스포츠에서 공개한 리플레이에서는 호날두의 다리를 노려보며 태클을 날리는 로이 킨의 모습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로이 킨은 FA의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맨유에게는 이번 경기가 올드 트래포드의 참사였지만 첼시에게는 올드 트래포드의 대첩이었다.

잉글랜드 각 지역의 스포츠 언론들은 앞 다투어 첼시의 모든 선수들에게 찬사가 늘어놓았고 그 중에서도 단연 주목받는 선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MOM을 받은 크리스티안 호날두.

슈퍼스타 베컴을 연상케 하는 프리킥으로 첫 번째 골,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두 번째 골, 말을 탄 기사처럼 돌진하며 놀라운 드리블로 맨유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넣은 마지막 세 번째 골까지.

이 엄청난 슈퍼 플레이에 대한 칭찬과 환호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한 일.

[로타어 마테우스, '오늘 아침,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플레이를 보았다. 그 때 나는 확신했다. 그에게는 세계 최고,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루이스 피구, '크리스티안은 포르투갈의 미래이다. 그는 반드시 포르투갈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어 포르투갈에게 무한한 영광을 선물해 줄 것이다.']

[벅 허드슨(해설위원),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2004년 당시 데쿠, 셰브첸코와 함께 최고의 선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2005년, 오늘에서야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부정할 여지없이 현 세계 최고의 선수입니다. 그리고 더욱 발전할 것이고요.']

[디에고 마라도나, ‘호날두의 경기? 물론 보았다. 마지막 해트트릭을 기록한 골은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맨유전 해트트릭을 포함한 이번 시즌 호날두가 넣은 프리미어 리그 골은 총 23골.

현재 리그 20골을 넣으면서 커리어 하이를 달리고 있는 앤드류 존슨을 따돌리고 득점 2위에 랭크된 크리스티안 호날두.

그가 마지막 남은 리그 경기를 부상으로 출전 못하게 되어 총 리그 25골을 넣은 티에리 앙리의 득점왕 수상이 확실해졌지만 그 누구도 호날두를 조롱할 수 없다.

호날두는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어. 

윙어가 리그 23골을 박아 넣은 것은 EPL 역사상 처음 있는 일.

심지어 호날두는 시즌 중반기까지는 페널티 킥도 차지 않았다!

어시스트 기록 역시 13개로 앙리와 2개 차이가 나는 호날두.

골 기록도 앙리에 2개 밀린 2위, 어시 기록도 앙리와 2개 밀린 2위여서 한국의 어떤 프로게이머가 생각나는 기록이었지만... 아무튼 스스로가 생각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빅 리그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거나, EPL의 템포와 몸 싸움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며 비웃던 자칭 전문가들을 전부 입 닥치게 만든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 호날두, 그는 정말로 크레이지한 선수야! 나는 지금 맨유 전에서 넣은 중거리 골을 계속 돌려보는 중인데 봐도봐도 소름이 가라앉질 않아.

ㄴ 나는 드리블 돌파 이후 넣는 골이 너무 환상적이었어. lol!

- 윙어가 한 시즌에 넣은 리그 골수만 23골? 이게 말이 되는 수치인가?

ㄴ 그는 ‘득점형’ 윙어라는 수식어를 새로 달아야 해. 아니다, 컴플리트(완성형) 윙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네. 드리블도 하고 찬스 메이킹에 골까지 넣으니까.

ㄴ 첼시는 너무나 굉장한 선수를 얻었군.

- 이적료를 아직도 공개를 안 하고 있지만 난 그를 4000만 파운드에 데려왔어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

ㄴ 물론이지! 맨유의 루니를 보라고. 그는 3500만 파운드의 가격으로 데려왔잖아. 물론 루니도 잘해주고 있지만 호날두는 정말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

- 크리스티안의 나이는 이제 20살이야. 그가 전성기에 접어들었을 때 얼마나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칠지...!

- 호날두는 조금 더 큰 클럽으로 눈을 돌릴 필요도 있어. 첼시의 기세가 좋지만 그게 다음 시즌까지 이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호날두는 첼시에서 왕으로 군림할거야.

ㄴ 첼시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지. 지금 첼시보다 더 나은 팀은 어디에도 없어.

- 첼시는 정말 싫지만... 호날두의 경기는 너무 매력적이야! 가슴 뻥 뚫리는 치달과 강력한 슛들을 계속 보고 싶어.

- 로이 킨은 이런 보물 같은 선수에게 살인 태클을 날렸지. 제발 이런 인간은 경기장이 아니라 구치소에서 보았으면 해.

ㄴ 그러나 멍청하고 편파적인 FA가 맨유와 퍼거슨을 배신할리가 없지~

ㄴ FA는 맨유의 부속 기관이 아닐까?

- 로이 킨은 이제 그만 잉글랜드를 떠날 때가 온 것 같네. 이런 추한 선수는 더 이상 EPL에 필요 없어.

ㄴ 프리미어 리그 사무총장이세요?

ㄴ 이 놈, 맨유 팬이네.

ㄴ 그러게, 맨유 팬이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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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가 폐막했다.

최종 우승은 당연히 첼시로 그 어느 때보다도 압도적인 승점과 기록을 남기면서 리그 역사에 기록될 예정이었다.

첼시가 세운 30승은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단연 최다승이었으며 승점 97점 역시 출범 이후 최다 승점.

맨유의 최다 승점을 무려 5점이나 추가하여 갱신한 첼시는 단기 임팩트로는 그 어떤 팀들도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BBC의 보도가 가장 정확했다. 

이번 시즌은 그야말로 '첼시에게 정복된 잉글랜드'였다.

1위 첼시 30승 7무 1패 승점 97점

2위 아스날 25승 8무 5패 승점 83점

3위 맨유 22승 11무 5패 승점 77점

4위 리버풀 18승 8무 12패 승점 62점

5위 에버튼 18승 7무 13패 승점 61점

2위는 아스날이 차지했고, 3위는 맨유였다.

에버튼과 마지막까지 4위 경쟁을 펼친 리버풀.

챔스에서 탈락하자 마자 배수진을 치며 리그에 올인했던 리버풀은 결국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리버풀의 서포터, 콥들은 크게 안도했지만 그 외에 다른 팀들은 아주 아쉬워했다.

헤이젤 참사를 일으켜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악감정은 아직도 다른 클럽들에게 남아있었기 때문.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은 25골을 집어넣으며 맹활약한 티에리 앙리에게 돌아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04-05시즌이 어제부로 폐막했습니다. 우승팀은 50년 만에 왕좌를 탈환한 첼시였죠. 이들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여태 잉글랜드 축구 리그 역사에서 이들만큼 강하고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전례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들을 놀라울 만큼 빠르고 강했으며 또 조직적이었습니다. 많은 리빌딩을 거친 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이죠. 이 각양각색의 선수들을 잘 녹여내어 한 팀으로 만든 것은 바로 주제 무리뉴 감독의 역량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Sky Plc가 운영하는 텔레비전 채널, 스카이 스포츠에서 방영하는 'MNF(Monday Night Football)'은 축구 관련 여러 종사자들이나 전문가들을 불러 경기나 팀 상황, 전망 등 여러 가지들을 평론하고 코멘터리를 남기는 방송이다.

어제부로 프리미어 리그가 폐막한 만큼, 오늘은 한 시즌에 대한 총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그 시즌의 우승팀이라고 해도 경기를 오래 치르다보면 보다 부족한 부분, 부족한 포지션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첼시는 어디에서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어떤 포지션이든 리그 탑급 활약을 보여주었지요! 특히 공격진에는 호날두 선수가, 중원에서는 램파드 선수가, 수비진에서는 테리 선수가 중심축을 이끌었는데 아시다 시피 이들은 리그 탑급을 넘어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죠.]

[또한 첼시는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도 진출했습니다. AC 밀란과의 맞대결이 치러질 예정인데요. 어쩌면 우리는 개편 이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후 두 번째 유럽의 챔피언이 될 팀을 볼 수도 있겠죠. 지금껏 첼시가 보여준 경기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프리미어 리그는 끝이 났으니, 언제나 그랬듯이 이제 올 시즌, 가장 잘했던 선수들을 칭찬해야 할 때가 찾아왔습니다.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와 영 플레이어, 올해의 팀 그리고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등의 수상이 이뤄질 예정인데요. 베스트 11도 뽑고요. 다이먼은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하하하! 사실 베스트 11같은 경우에는 그대로 첼시 팀을 가져다 놓아도 될 정도로 첼시가 잘했습니다.]

[오우, 다이먼. 앙리와 제라드 같이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찍었지만 팀은 우승하지 못한 아쉬웠던 선수들도 생각을 해주셔야죠. 이들의 불만 섞인 표정을 인터뷰로 마주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하하하하!

[베스트 11에는 수비진에는 골키퍼 체흐에 네빌과 테리, 카르발류, 콜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15점으로 최소 실점을 기록한 첼시의 수비진들은 정말 경이로웠으니까요. 미드필더에는 션과 램파드, 제라드, 그리고 크리스티안이 들어가야겠죠. 그리고 투톱에는 앙리와 존슨입니다. 이 둘은 이견이 여지가 없어요.]

존슨-앙리

호날두-램파드-제라드-션

네빌-테리-카르발류-콜

체흐

[흠, 저는 버클란드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카르발류도 정말 잘한 선수지만 그는 부상 때문인지 리그를 도중에 좀 쉬었죠. 이 빠진 기간을 감안한다면 카르발류보다는 퍼디난드가 들어가야겠죠.]

[리오 퍼디난드. 그 역시 대단한 선수죠. 그렇다면 다이먼이 짠 베스트 11을 읊어주세요.]

[저는 골키퍼에 체흐, 수비수에 네빌, 테리, 퍼디난드, 콜. 미드필더에 램파드, 마케렐레, 제라드. 윙에 호날두와 더프. 톱에는 앙리를 세우겠습니다.]

호날두-앙리-더프

램파드-마케렐레-제라드

네빌-테리-퍼디난드-콜

체흐

[세상에! 리그 21골을 넣은 앤드류 존슨이 다이먼에게는 찬밥 취급을 받는군요!]

[그가 리그 21골을 넣었나요? 아, 물론 농담입니다.]

하하하하하~

[물론 다른 상위 팀들보다 지원이 적은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21골을 넣은 것은 굉장한 퍼포먼스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앙리와 존슨의 투톱보다는 호날두-앙리-더프의 쓰리톱이 저에게는 더 강해 보이는군요.]

2명의 해설위원과 1명의 MC로 구성된 ‘MNF’는 이렇듯 서로를 적당히 디스하면서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들이 매력.

당연히 이 시간대에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

어느덧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상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올 시즌 리그에서 가장 잘했던 선수를 뽑는 것.

MOM이 한 경기의 MVP라면 이 올해의 선수상은 한 시즌 전체의 MVP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명예로운 상이었다.

[포지션 대비 기록만을 놓고 보면 올해의 선수상 경쟁은 티에리 앙리와 크리스티안 호날두, 프랭크 램파드의 삼파전 구도가 맞습니다. 하지만 최다 골, 최다 어시스트를 찍은 앙리가 개인상을 수상할 확률은 매우 적죠!]

[그건 왜 그런가요?]

[그의 팀이 리그에서 2등한 아스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1위인 첼시와 2위 아스날 사이의 승점 차가 너무 크기도 합니다. 1등이 절대적인 주목도를 쓸어갈 수 있는 구도죠.]

[확실히 그렇군요. 하지만 아스날의 승점 83점도 다른 시즌에 비하면 결코 낮은 기록이 아니지 않나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결국 첼시와 승점 14점의 차이가 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FA와 프리미어 리그 스폰서들은 이걸 반드시 반영할 것이고요.]

스포츠 언론지, ‘가디언’의 편집장이기도 한 다이먼은 주목도의 문제를 들어서 이번 시즌 아스날 선수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 이유를 설명했다.

[모든 언론과 팬들이 역대 우승팀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던 첼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 앙리는 이미 득점왕을 탔기 때문에 선수 개인의 활약에 대한 보상은 더 해줄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FA가 충분히 할 수 있죠. 그가 매우 압도적인 스탯을 거둔 것도 아니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호날두와 램파드의 싸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지션을 파괴하는 득점포, 프랭크 램파드는 이번 시즌 정말 경이로운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의 활동량은 프리미어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넓었으며 그 외의 능숙한 탈 압박과 키 패스, 경기 조율 능력까지 보여줬죠.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입니다. 리그에서만 13골을 넣었고 전체 시즌 기록은 23골 20어시, 와우! 정말 미드필더인 것이 믿겨지지가 않는 대단한 기록입니다!]

[득점과 어시 기록도 놀랍지만 버클란드가 말했듯이 역시 높은 활동량과 체력을 바탕으로 한 공수 양면에서의 활약이 램파드의 가장 큰 장점이죠. 이 선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무적 첼시도 없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첼시의 보물 같은 선수입니다. 무리뉴 감독이 바이에른 뮌헨의 오퍼에 절대 팔지 않겠다, NFS 선언을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호날두 선수는 이번 시즌 유럽 축구 전체에서, 바르셀로나의 호나우지뉴와 함께 가장 핫한 선수였습니다. 이 어메이징한 선수는 그의 빛나는 스타성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치 성장기의 어린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것처럼 실력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죠. 실제로 호날두는 리그 후반기로 갈수록 경기당 쌓는 공격 포인트의 개수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티에리 앙리보다 2골이 부족하여 득점왕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거나 어시스트를 올리는 등 질 경기를 비기도록, 비길 경기를 이기도록 만들었습니다. 특히 강팀과의 경기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이것은 진정한 에이스로서의 자질을 드러낸 것이죠! 잘생긴 외모보다 이런 경기 내적인 모습이 호날두 선수의 진가가 아닐까 합니다.]

‘MNF’ 후반부는 호날두에 대한 찬양과 호평이 이어졌다.

프리미어 리그 내내 대단히 일관성 있는 활약과 가끔씩 보여주는 순간적인 번득임으로 잉글랜드를 넘어 세계 최고의 크랙으로 떠오른 호날두.

폭발적으로 증가한 그의 인기를 반증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로만 구단주와 무리뉴 감독의 가장 큰 업적은 이 호날두 선수를 첼시로 데려온 것입니다. 20살짜리 선수가 EPL에서 잔뼈가 굵은 램파드, 앙리와 상대가 가능할 정도의 활약을, 그것도 첫 시즌에 펼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일입니다.]

[호나우도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그가 바르셀로나에 막 상륙했을 때의 충격과 거의 대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 어린 선수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같은 전설들과 비교될 수 있는 선수를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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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파드와 호날두는 프리미어 리드 개인 수상에 있어서 치열한 경합을 벌일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날두는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램파드는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과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받게 되었다.

첼시의 캡틴이자 올 시즌 최고의 수비수, 존 테리는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탔다.

프리미어 리그 개인 수상은 모두 첼시 선수들이 휩쓸었다.

런던의 스포츠 매거진 ‘밥-시티’의 기자인 닉 리처드슨은 이번 싹쓸이를 보고 ‘전례가 없는 일, 앞으로도 다시없을 일.’ 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04-05시즌은 압도적이고도 충격적인 ‘첼시의 시즌’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편 FA컵 결승전에서는 아스날과 맨유가 맞붙었다.

여기서 아스날이 맨유를 상대로 승리했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하며 리그 2위, FA컵 우승으로 나름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반면 EPL의 제왕, 맨유는 치욕적인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면서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이제 잉글랜드 축구팬, 아니 전 세계 축구들에게는 마지막 단 한 경기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별들의 전쟁, 그 마지막 이야기.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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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펼쳐지는 경기장은 이스탄불에 있는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이다.

호날두가 기억하는 이 경기장은 그 유명한 '이스탄불의 기적'이 일어났던 곳으로 리버풀 팬들에게는 가히 신성시 되는 장소.

하지만 역사의 뒤틀림 속에서 첼시가 리버풀을 꺾고 결승전에 올랐으니 이스탄불의 기적 역시 없던 일이 된 것.

이제는 호날두만 기억하고 있는, 그 장소로 향하는 선수들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현재 유럽 최고의 기세와 연승가도를 달리는 팀, 첼시.

하지만 이들은 신흥강호였고 이런 무대에 면역이 없다.

그것도 그냥 결승전도 아닌 그 장엄하고 웅장한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

이미 유로 결승전을 치러 본 호날두조차도 긴장감과 압박감이 느껴지는데 다른 선수들은 오죽할까.

"지구상에는 별처럼 많고 많은 축구 선수들이 공을 차며 선수로서 뛰고 있지. 하지만 그들 중에서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를 밟는 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한 사람의 선수 생활을 길게 15년으로 잡는다면 그동안 약 450명의 선수들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를 밟게 된다.“

무리뉴는 마치 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첼시 선수들에게 이야기 하는 중이다.

“한번 결승에 온 팀은 다시 또 올만한 여력이 있지. 그걸 감안한다면 약 300명에서 350명의 선수들이 그 기간 동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공기를 맡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그 중 한명이 되었다. 전 세계 300등 안에 든 것이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

"나는 정식 감독으로서 데뷔한지 4년도 채 되지 않은 신출내기다. 그럼에도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를 한 번 밟았고 또 거기서 승리했지. 그 대단하다는 퍼거슨조차 이 무대에 한 번 밖에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다. 이게 무슨 뜻이냐? 내가 그보다 더 뛰어나고 위대한 감독이라는 뜻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감독 주제 무리뉴.

"나는 절대 패배자로 남을 생각이 없다! 나는 반드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이 될 것이며, 두 번 결승에 올랐다가 한번 지는 ‘평범한’ 커리어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도 귀 열고 똑똑히 들어라! 세상은 두 번째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두 번째는 꼴지 중에서 1등일 뿐이야!"

"이겨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겨라. 신사다운 플레이만을 고집하다 멋있게 패배한다? 그건 멍청한 거다! 결승이라는 타이틀에 긴장해서 자빠진다? 그건 일류가 될 자격이 없는 거다! 너희는 잉글랜드의 챔피언이다. 가서 챔피언의 품격을 보여줘라! 그리고 우승컵을 내게 가져와!"

무리뉴의 오만하고 단호한 선언.

하지만 더없이 현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축구 선수들은 모두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

이런 말을 듣고 달아오르지 않으면 그건 선수가 아니다.

이들에게서 피어오르는 푸른 투쟁심은 절대지지 않겠다는 필승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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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이 열심히 옷을 갈아입는 사이, 무리뉴는 램파드를 따로 불러서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중이다.

무리뉴는 올 경기의 키포인트가 되는 선수들을 따로 불러서 지시를 내리기도 하는데, 저런 식으로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용히 마치 기밀을 말하듯이 설명하는 태도는 그 선수에게 마치 자신이 팀의 핵심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별거 아닌 심리요법이지만 선수와 감독의 신뢰를 강화시키고 선수들의 자신감과 사기를 살리기도 하는 무리뉴만의 지도법이다.

"크리스, 보스가 부르는데?"

호날두에게 다가온 램파드가 무리뉴의 전언을 전했다.

AC 밀란과의 결승전에서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스탄불에 오기 전에 실컷 듣고 온 호날두지만 군말 없이 무리뉴에게 갔다.

"오늘 경기에서 네 상대가 누구지?"

“AC 밀란 전체지요.”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포지션 싸움 상대를 묻는 거다.”

"파울로 말디니겠죠."

"그래, 말디니.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백. 아니, 어쩌면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백일지도 모르지. 밀란이 따로 윙어나 좌우측 미드필더를 두지 않는 이유는 말디니와 카푸가 있기 때문이니까."

파울로 말디니.

유소년 클럽까지 포함하여 밀란에서 30년 가까이를 뛴, 그야말로 베테랑 오브 베테랑 선수.

그의 수비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고, 전성기 때의 말디니는 정말 철의 장벽 그 자체로, 유수와 같은 세계 최고 선수들도 그의 앞에서는 피똥을 싼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은 30대 중후반의 나이임에도 그의 수비력은 단연 유럽의 톱클래스.

AC 밀란이 측면 미드필더를 두지 않는 것도 이 말디니의 수비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그 혼자서 한쪽 측면을 온전히 막아낼 수 있는 최고의 풀백이니까.

그런 전설이나 다름없는 말디니를 상대한다는 것은 호날두로서도 살짝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

"말디니 뿐만 아니라 카푸도 뚫어내야 결국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한 오늘의 전술적 테마는 바로 '스위칭'이다."

“스위칭이요?”

“그래, 오늘 너와 더프는 미친 듯이 좌우를 돌아다니며 최적의 공격동선을 찾아야한다.”

호날두의 눈이 커졌고 무리뉴는 가볍게 웃었다.

근데 그걸 왜 당일날 알려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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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시즌이 이제 끝나갑니다. 이제는 그 종막,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04-05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이곳은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입니다.]

[AC 밀란과 첼시의 대결은 경기 시작 전부터 굉장한 기대를 모았습니다. 첼시는 이번이 챔피언스 리그 첫 결승전입니다. 반면 AC 밀란은 오늘까지 포함해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무려 10번이나 진출한 팀입니다. 챔피언스 리그의 전통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죠.]

[하지만 최근 첼시의 기세가 아주 맹렬합니다.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 리버풀까지 명문 강팀들만을 만났지만 그들을 모두 꺾고 여기까지 왔거든요. 밀란의 안첼로티 감독도 첼시의 전력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지요. 과연 어느 팀이 빅 이어를 들어 올리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첼시의 선축으로 경기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데미안 더프가 선발로 나오면 호날두는 왼쪽 윙으로 간다.

사실 호날두는 양발 잡이였고 왼쪽과 오른쪽 윙 모두 익숙하게 플레이할 줄 알아서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호날두의 짝을 이루는 데미안 더프가 오른쪽 윙 자리에 익숙했기에 호날두는 보통 왼쪽 윙어로서 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기에서는 데미안 더프가 왼쪽 윙, 호날두가 오른쪽 윙을 맡게 되었다.

결승전 단 한 경기에 대비한 무리뉴의 변칙 전술이었다.

이렇게 해서 호날두를 말디니가, 더프를 카푸가, 구드욘센을 가투소가, 드록바를 스탐과 네스타로 막아 세우는 모양새가 된 밀란.

포지션 파괴 전술은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밀란의 감독, 안첼로티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무리뉴가 한 수를 준비해왔듯 그에 뒤지지 않는 감독인 안첼로티 역시 한 수를 준비해온 것이다.

“공수간격을 좁혀! 수비라인을 끌어 올리라고!”

무리뉴가 고함을 쳤다.

마케렐레가 볼 배급 때문에 포백라인 바로 앞이 아닌 중앙 미드필더 램파드, 구드욘센과 동일한 라인까지 전진해있었는데 이 때문에 공수간격이 벌어져있던 첼시.

급히 실책을 깨닫고 존 테리와 카르발류가 전진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벌어진 미드필더와 수비진 사이를 날렵하게 파고든 선수는 바로 히카르두 카카였다.

‘젠장...! 완전히 당했다!’

피를로의 대지를 가르는 패스를 이어받은 카카가 공을 잡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오버래핑을 끊고 복귀하는 호날두.

하지만 이미 가속을 붙은 카카를, 이렇게 먼 거리에서 따라잡는 것은 초인이어도 불가능했다.

훌륭한 개인기에 패스, 슈팅력, 헤딩에 뛰어난 피지컬까지 갖춘 이 때의 카카는 만능형 선수 그 자체였고, 특히 그의 장기인 '치달'은 상대팀에게 자신을 경계대상 1순위로 올려놓기 부족함이 없었다.

카카의 치고 달리는 저 돌파에 마케렐레가 찢겨나갔고 존 테리와 카르발류마저도 위태로운 상황.

호날두는 있는 힘껏 뛰어서 카카의 속도를 겨우겨우 따라잡는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비극은 막을 수 없었다.

테리와 카르발류의 주의 속에서 카카는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패스했다.

그 공간에 나타난 것은 ‘무결점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였다.

경기 시작 전까지 무리뉴가 그렇게 막고자 했던 카카와 셰브첸코의 연계 플레이가 초반에 터지고야 말았다.

전반전 10분이 채 되지 않을 무렵.

셰브첸코의 선제골이 첼시의 골망을 가름으로써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을 환호 속으로 던져놓았다.

와아아아아!!

과격한 패션과 복장으로 눈에 확 뛰는 로쏘네리들이 AC 밀란의 깃발을 휘두르면서 함성을 작렬시켰다.

라울의 반지 세레머니를 재현시키는 셰브첸코의 도발적인 골 셀레브레이션. 

로쏘네리들이 내뱉는 환호성의 크기는 더더욱 커졌다.

얼이 빠져있는 첼시 선수들을 보면서 고개를 작게 흔드는 호날두였다.

'우리 수비진은 도대체 강한 건지 약한 건지 모르겠어.'

EPL에서는 역사상 최소실점이라는 15골만을 허용하며 새로운 신화를 세운 최고의 수비진이다.

하지만 챔스에서는 겨우 12경기 치르는 동안 무려 13실점을 허용했다.

리그에서는 38경기 15실점, 반면 유럽대항전에서는 12경기 13실점.

내수용 포백 라인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챔스만 가면 부실해지는 수비력은 결국 오늘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수록 우리가 더 잘해야 해요."

비장한 호날두의 말에 더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에서 뛰는 더프는 익숙한 포지션이 아님에도 잘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따로 무리뉴에게 포지션 훈련을 받은 듯.

무리뉴가 지시한 스위칭 플레이.

그것이 상황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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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신을 차리기 전에 첼시는 또 한 번 강하게 얻어맞았다.

불도저 같은 이미지를 가진 ‘싸움소’ 가투소의 볼 쓸어 담는 능력은 그 누구와도 비교를 거부했다.

램파드의 패스를 받은 구드욘센과 거칠게 경합하는 가투소.

끝끝내 어깨로 구드욘센을 밀치는데 성공하며 볼을 따냈고 그 공은 바로 AC 밀란의 플레이 메이킹의 중추인 피를로에게 향했다.

첼시의 진영을 향해 향해 날카롭게 눈을 빛낸 피를로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긴 크로스로 전방의 크레스포에게 보냈다.

크레스포는 깔끔한 볼터치로 그것을 받아내면서 첼시를 위기에 빠트렸다.

참고로 여기 크레스포는 본래는 첼시의 선수지만 자리가 없어 AC 밀란으로 임대 간 선수였다.

"제기랄! 이거 무조건 막아야해!"

존 테리가 고함을 치면서 동료 선수들과 수비망을 형성했다. 

호날두를 비롯한 전방의 선수들이 달려오는 동안 이들은 뒷걸음질 치며 밀란 공격진들의 움직임을 바짝 경계했다.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어느덧 수비하는 선수들의 머릿수가 더 많아졌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챔피언스 리그의 왕자 AC 밀란.

이들의 날카로운 공격력을 간과한 첼시 선수들.

크레스포는 셰도로프에게 패스했고 공을 받은 셰도로프가 침투하는 크레스포에게 다시 패스. 

2대1 패스플레이의 정석을 보여주며 수적 우위를 점한 첼시 수비진을 농락하는 두 선수.

실점한지 10분 만에 또 위기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를 아득 깨문 존 테리가 파울을 각오하며 태클을 날렸다.

그의 태클은 공을 정확하게 건드는 태클이었다.

크레스포의 균형이 흔들렸고 볼을 살짝 놓쳤는데 그 사이 수십 미터를 질주해서 달려온 호날두가 공을 차서 하프라인 너머로 날려버리는데 성공했다.

크레스포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파울을 달라고 항의했지만 주심은 고개를 저었다.

첼시 선수들은 하나 같이 한 숨을 내쉰다. 

호날두의 걷어내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바로 옆에 있던 셰브첸코에게 두 번째 골을 내줘야 했을 것이다.

"브라보! 아주 훌륭한 수비였어, 크리스."

"가슴 떨리게 좀 하지 마세요. 지금은 결승전이라고요!"

“후... 뭐라 할 말이 없다.”

“미안, 최대한 아까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게.”

뒤이어 달려온 램파드의 칭찬에 화답하지도 않고 호날두는 수비진들을 타박했다. 

아무리 멘탈 좋은 호날두라도 결승전에서 정신 못 차리는 수비진들의 연달은 실책들을 보며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늘 존 테리와 합을 맞추고 있는 카르발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보였고 갈라스 역시 측면의 크로스를 너무 자주 허용하는 중이었다.

구드욘센이 볼을 뺏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후 피를로의 높은 크로스는 점프를 통한 공중 볼 따내기로 충분히 끊어낼 수 있었는데 말이다.

평소에 조용하던 호날두의 질책에 수비진들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다 첫 번째 골을 어이없게 먹혀서다.

경기 시작 10분 정도까지만 하더라도 무리뉴의 격려 속에서 첼시 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투쟁적이었고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카카의 치달 돌파에 이은 셰브첸코의 송곳 같은 골이 들어간 이후부터 첼시는 크게 흔들리는 중이다.

리그에서는 그렇게 철벽같던 수비진들이 왜 챔스에서는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역시 이래서 챔스는 우승 경험 있는 팀이 무조건 유리하다고 하는 건가... 제기랄!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왜 다들 떨고 있냐고!’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 챈 것인지 터치라인에서 급하게 수비를 조율하는 무리뉴.

공격진들에 대한 수비의 적극적 가담과 미드필더들의 왕성한 활동을, 스루 패스 등을 요구하면서 세부적인 전술부터 수정해나갔다.

조커가 될 수 있지만 포메이션 전체의 균형이 흔들릴 염려가 있는 스위칭 플레이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수비요구부터 철저히 하는 무리뉴.

수비 안정화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인 만큼 그가 직접 세심하게 수비에 신경을 쓰며 주문하면 첼시의 철벽 라인은 다시 가동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철벽이 가동하기 전에 찾아온 위기는, 정말로 치명적이었다.

[오늘 정말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카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선수를 풀어놓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팀에게는 재앙이죠!]

공을 툭 차놓은 다음 민첩한 몸놀림으로 첼시 선수들의 압박을 피해 전진하는 카카.

무자비한 순간 가속과 급격한 방향전환, 상체 페인팅도 아닌 하체 페인팅 모션까지.

무릎에 무리가 가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카카. 

왜 카카가 선수로서의 수명이 짧았는지 알 수 있는 플레이였다.

하지만 그만큼 위력적이었고 특히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첼시의 수비 라인을 단숨에 꿰뚫어내기 제격이었다.

단 3번의 터치만으로 공중에서의 공을 떨궈 내고 발밑에 안착시킨 채 중앙으로 치고 달려가는 카카.

같은 편인 셰브첸코와 크레스포마저도 쫓지 못할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첼시의 수비진을 찢어발기며 골키퍼와의 1대1 상황을 만드는 카카였다.

하지만 그는 직접 공을 차지 않았다.

어느새 더 좋은 위치까지 쫓아 들어온 크레스포에게 패스하면서 자신은 할 거 다했다는 듯 그라운드에 엎어졌다.

골키퍼 체흐까지 전부 카카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크레스포에게 수비진들의 경계가 쏠릴 리 만무.

결국 누구의 방해 없이 크레스포는 안정적으로 공을 찰 수 있었고, 그 공은 정확하게 날아가 첼시의 골라인을 넘었다.

2:0

프리미어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최소 실점 기록을 세운 최강의 방패, 첼시의 충격적인 스코어였다.

'이대로는 절대 안 돼!!'

얼마나 어렵게 올라온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인데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호날두의 가슴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이번 실점은 램파드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램파드가 길게 패스한 공이 노리고 있던 말디니에게 끊긴데다 가까운 곳에 있던 피를로에게까지 나아가는 공의 동선을 제공했기 때문.

하지만 여기에는 수비 가담의 이유로 오버래핑 하는 말디니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호날두의 실책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날두는 분노했다.

무리뉴의 말마따나 자신은 절대 지기 위해서, 우승팀의 조연이 되기 위해 여기까지 오른 것이 아니다.

AC 밀란, 물론 강한 팀이다.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가 등장하지 않은 지금, 어쩌면 챔스에서 가장 강한 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호날두는 우승 트로피를 들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상대가 누구건, 어떤 전설적인 선수들이 있건.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 이길 거다.

"데미안, 우리의 포지션간 거리가 너무 길죠. 중앙에서 플레이하기에는 가투소, 피를로 콤비에게 제한되고 있고요.“

“그렇지. 특히 싸움소는 너무 성가셔.”

“확실히 이 상태에서는 완전한 스위칭이 힘들어요."

"보스의 지시를 어기겠다는 거야?"

"그는 항시 스위칭을 원하는 게 아니라 공수 전환 시 우리의 위치가 바뀌었을 때, 포지션의 원상 복귀 없이 바로 역습에 나서는 걸 의미하는 것일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더 측면 쪽을 노려야겠어요."

말디니, 카푸에게 싸움을 걸겠다는 호날두의 말에 더프의 눈이 커졌다.

=

말디니, 카푸 양 풀백들의 노련한 수비는 정말 대단했다.

그 둘의 존재감으로 양 쪽 라인을 완전히 틀어막아버리는 영향력은, ‘역사상 톱클래스로 뽑히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는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늙은 몸은 속이지 못하지. 아까 스퍼트에서 분명히 나보다 훨씬 느렸어.’

말디니와 카푸가 전성기 시절의 몸이었으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늙고 노쇠했으며 호날두와 더프의 속도를 따라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카카가 첼시의 수비진을 완벽하게 농락했듯이, 자신도 속도로 치고 나가 밀란의 측면을 붕괴시키는 장면을 그려나갔다.

=

파울로 말디니의 태클.

다리나 발목 같은 부위는 건들지도 않고, 정확하게 딱 공만 노리고 들어가는 태클은, 어지간해서는 막을 수 없는 호날두의 드리블을 끊어낼 만큼 품격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갈고 닦아야 이런 태클이 나올까?

"아직 멀었다고, 어린 친구."

웃으면서 여유롭게 말하는 말디니.

현재 스코어와 본인의 수비 클래스를 생각하면 그의 여유는 자만이 아닌, 엄연한 사실.

호날두는 그런 그에게 얼굴 붉힐 새도 없었다.

전반전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 7분.

말디니와 카푸에게 여러 번 고배를 마신 호날두지만 그래도 충분히 성과는 있었다.

호날두가 전방에서 어그로를 잔뜩 끌어준 덕분에 첼시의 후방이 비교적 편해진 것.

수비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 판단한 구드욘센, 램파드가 본격적으로 빌드업을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중원의 활로가 뚫리고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상황이 반전된 것은 아니다.

'그 앞에서는 괜한 드리블로 끼 부리는 것은 통하지 않아. 지금 내게는 속도와 트릭이 가장 큰 무기다.'

남은 시간 3분.

복수할 수 있는 찬스가 드디어 찾아왔다.

클로드 마케렐레가 카카를 막으면서 강력한 피지컬로 공을 탈취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 밀란 선수들은 한 골을 더 넣기 위해 전체적으로 전진해 있는 상황.

기회를 눈치 챈 선수들이 눈을 번득였고 무리뉴가 소리를 질렀다.

마케렐레에서 구드욘센, 구드욘센에서 다시 램파드.

램파드가 피를로와의 몸싸움에서 승리, 공을 지키는데 성공.

미친 소처럼 달려오는 가투소를 피해 패스한 곳은 바로 호날두였다.

드디어 시작이다.

"어딜 가려고, 어린 친구?"

가로 막는 말디니에 대꾸도 하지 않고 호날두는 발끝으로 공을 차 올려 공중으로 띄웠다.

돌발적인 행동에 잠시 당황한 말디니였지만 이내 공을 쫓아 달렸다.

하지만 이것은 호날두가 바라는 바다.

공을 찰 때부터 이미 궤적을 예측하고 그 지점으로의 가속을 밟고 있던 호날두를 말디니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당황한 표정의 말디니를 지나치는 호날두.

하지만 그를 제치는데 성공했다는 성취감을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철벽이 호날두의 앞을 가로막았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덤벼드는 야프 스탐, 네스타.

‘말네스카’ 라인의 두 센터백은 보기만 해도 짓눌릴 것 같은 압박감을 주면서 호날두를 밀어 붙였다.

이들 역시 역대 최고 수준의 센터백으로 정면 승부는 자살행위다.

따라서 반 바퀴 턴을 하며 잠시 템포를 조절하는 호날두. 

그리고 헤딩 한번과 볼 터치 한번으로 페널티 박스에 좋은 위치에 자리 잡는 것에 성공했다.

‘제발 들어가라!’

이를 악물면서 균형 잡는데 성공한 호날두가 바이시클 킥을 때려 넣었다.

달려오는 말디니도, 스탐과 네스타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슈팅이었다.

불을 뿜고 날아간 공이 골키퍼 디다의 손에 맞았으나 공은 힘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나아간 공은 AC 밀란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놀라운 재치로 말디니를 제쳤습니다! 호날두! 스탐과 네스타의 협공! 버티는 호날두... 돌아서 슛! 으아! 들어갔습니다!!] 

[고오오오올-!!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강력한 슈팅! 호날두의 놀라운 바이시클 킥으로 한 점 따라 붙는 첼시! 이제야 첼시가 예전의 올 시즌의 그 모습을 되찾습니다!]

[호날두도 굉장했지만 밑에서부터 만들어진 패싱 플레이도 환상적이었죠! 마케렐레, 램파드, 구드욘센까지! 역습 상황에서 보여준 완벽한 팀플레이로 밀란 수비진을 혼란시킨 후, 호날두의 나무랄 데 없는 마무리까지! 특히 마지막에 말디니를 벙찌게 만들었던 센스도 아주 좋았습니다!]

[전반전 내내 EPL 최강팀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드디어 반격을 하는 첼시입니다. 이런 게 진짜 첼시의 플레이가 아니겠습니까?]

2골이나 뒤진 상태에서 터진 한 폭의 그림 같은 바이시클 킥, 그리고 골.

아직도 한 점이 뒤쳐져있었고 결승전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지만, 이 짜릿한 골의 감각은 잠시 동안 호날두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것은 호날두의 내면 속 무언가를 끄집어내는데 성공했다. 

펄쩍펄쩍 뛰다가 공중에서 180도 턴을 하면서 두 팔을 쫙 펼치는 호날두.

호우-!!

우리가 모두 아는 그 동작, '호우-!' 였다.

‘호날두’를 무척 존경했지만 이 쪽팔린 동작만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정지우’

하지만 역시 몸은 정직했다.

호날두에게 호우-! 는 역시 필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골 셀레브레이션이 2005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예스! 예스!! 예스-!!"

"완벽했어! 방금 전에는 정말 완벽했어!!"

“푸하하! 크리스, 방금 건 뭐야!”

"이기는 거다. 무조건 이기는 거다!"

허탈한 표정으로 골문을 바라보는 말디니와 오프사이드가 아니었냐면서 항의하는 싸움소 가투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카카까지.

부주장 램파드의 다짐을 마지막으로 전반전이 끝났다.

스코어는 2:1

1점을 뒤지고 있지만 역전, 충분히 가능했다.

=

무리뉴는 한바탕 호통을 치려다가 마지막 첼시의 플레이를 보고 가능성을 느꼈는지 오히려 선수들을 격려했다.

2골을 먹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지는 줄 알았던 첼시 선수들.

그러나 호날두의 만회골은 패배의식이 가득했던 첼시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하나의 불꽃 조각이 튀겨진 휘발유가 일시에 발화하여 폭발하듯, 첼시 선수진들의 분위기는 일순간 확하고 타올랐다.

“전반전 끝나기 5분 전처럼만 하자! 그러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호날두, 아까 골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골을 넣어야 해! 다들 호날두를 철저하게 보조하라고!”

주장 존 테리와 부주장 램파드의 다독임 속에서 챔피언스 리그 후반전의 막이 올랐다.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아 잠시 당황했지만 추스른 후 더 강력한 창을 들고 나설 AC 밀란과 승리에 대한 불씨, 승리에 대한 열망을 부활시켜 다시 도전 하는 첼시.

전반전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존 테리와 카르발류는 각각 대인마크로 셰브첸코와 크래스포를 막아 세웠다.

램파드, 구드욘센, 마케렐레의 미들진은 피를로의 패스 봉쇄, 가투소와의 몸싸움 등을 해내면서 카카에게 갈 공을 미연에 차단했다.

공격과 수비의 철저한 분업화.

어떻게 보면 세계 축구의 흐름이 된 토탈 사커의 개념에 반하는 전술적 움직임.

하지만 결과는 더없이 훌륭했다.

밀란은 선수들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된 팀이다.

포백 라인이 철저하게 골문 앞 수비를 하면서 가투소는 그런 수비수들과 중원 사이 공간을 보호하며 볼을 쓸어 담는다.

피를로는 가투소가 탈취한 공을 바탕으로 후방에서 플레이 메이킹을 펼치고, 카카는 장거리 드리블과 치달을 통해 전방의 스트라이커들에게 공을 운반한다.

이것이 밀란의 4-4-2 다이아몬드 전술의 핵심.

무리뉴는 이에 대한 대응법으로 선수들 대인마크와 공수 분업화로 그 연결고리들을 제한시켰다.

각 공간의 유기적인 연계 플레이를 끊고 특히 후방 플레이 메이킹을 주도하는 피를로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로써 밀란의 공격력은 전반전에 비해서 크게 감소되었다.

“심판! 이거 반칙 아니야!? 이 자식이 내 무릎을 발로 찼다고!”

“웃기는 소리! 너야말로 생겨먹은 것과 달리 헐리웃 액션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가투소와 램파드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이마를 부딪쳤다.

휘슬을 분 심판과 침착한 선수들이 그 둘을 말렸지만 이미 거칠어진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었다.

잠시 후에는 네스타의 태클에 기분이 불편했던 드록바가 삿대질을 하기도 했다.

매 순간 마주치며 서로에게 앙금이 생긴 카푸와 더프는 심판이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서로를 꼬집고 때렸다.

양 팀 선수들은 조금만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로 두 팔을 들어 올리고 항의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애들 싸움 마냥 유치하고 쪼잔해 보였다.

허나 그만큼 이 경기 승리에 대한 선수들의 욕망이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뻐엉-!

멀리서 찬 호날두의 중거리 슛이 골대를 향해 쏘아졌다.

디다가 손을 내뻗어 막아냈지만 조금만 늦게 반응했으면 골포스트 아래쪽을 맞고 골라인을 넘었으리라.

밀란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첼시 선수들은 아깝다는 듯 몸부림을 쳤다.

호날두는 박수 유도를 하면서 첼시의 진영으로 물러나는 도중 무리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크리스, 너도 봤지? 놈들의 수비는 지독할 정도로 단단해. 네가 골을 뽑아냈지만 솔직히 그와 같은 골이 또 나올 거라 생각 안한다.’

'어차피 그런 기회를 못 잡을 거, 차라리 중거리 슛을 최대한 많이 쏘도록 해. 공격 기회를 날린다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

중거리 슛을 기가 막히게 잘 쏜다는 호날두라도 그 성공률은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감아 차는 슛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중거리 슛 난사는 언뜻 보면 공격 기회를 낭비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무리뉴와 호날두는 이것의 또 다른 이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때리는 슛은 결국 선수들의 과도한 오버래핑을 방지하지. 따라서 카카에게 뒷공간이 털릴 염려가 줄어든다.’

‘공수 간격을 좁혀서 카카가 날뛸 공간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 동점골을 넣기 전까지 우리는 절대 이 스탠스를 버려서는 안 된다.’

또한 공격권을 상대팀에게 뺏겼을 시, 바로 자리 잡고 수비하기에 용이하기도 했다.

결국 이것은 수비를 크게 중시하는 공격 전술이었고, 무리뉴가 호날두의 중거리 슛 정확도에 대한 신뢰가 없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변칙이다.

그리고 호날두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게 단 한 번도 배신을 한 적이 없었다.

헤더로 크로스를 끊어낸 갈라스가 바로 호날두에게 롱 패스를 날렸다.

깔끔한 터치로 공을 잡은 호날두에 보조하며 더프와 구드욘센, 드록바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전방으로 뛰었다.

이 모습은 마치 기가 막힌 패스 플레이로 적진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밀란의 수비진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복귀했고 순간적으로 호날두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다.

뛰어난 저격수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이 순간만을 노렸던 호날두는 허벅지, 종아리의 힘 배분까지 신경 쓰며, 그의 인생 최고의 슛을 쏘았다.

무려 30M 이상에서 날린 중거리 슛.

설마 이 거리에서 슛을 갈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밀란 선수들이 일제히 당황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그 짧은 순간에도 스쳐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호날두의 슛은 공중을 가르면서 골문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는 중이다.

밀란의 선수들, 그리고 서포터들은 디다가 제발 저 공을 막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잘 때렸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연습했던 먼 거리 슈팅.

그 연습이 빛을 발했다.

밀란의 골키퍼, 디다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넘어 골대 좌측 상단에 정확히 틀어박힌 공.

잠시 동안 경기장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푸른 유니폼을 감싸 안은 이들이 일제히 질러대는 엄청난 함성이 그라운드를 뒤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

온 몸을 짜릿하게 쥐어짜는 동점골의 기쁨!

하지만 이번에 호날두는 ‘호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이스탄불까지 응원 차 와준 첼시 팬들을 향해서 달려갈 뿐이다.

터치라인을 따라서 뛰면서 그들 한명 한명과 시선을 맞추며 같이 호흡했고 같이 웃었으며 같이 행복해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적으로 호날두의 이름을 연호하는 수많은 블루스들과 그들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찍어주면서 달리는 호날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하이라이트라고 보아도 손색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2:2 동점.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더 이상 득점이 나오지 않는다면 밀란, 첼시는 연장전을 치러야 한다.

양 팀의 선수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90분 이내에.

자신들의 승리로 경기를 끝내길 원했다.

[로쏘네리들의 응원 크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밀란 선수들의 표정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 저건 좀... 너무 거친 플레이인데요? 카드를 받는 크레스포 선수입니다. 밀란 선수들이 침착함을 잃은 것 같은데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습이죠? 아무래도 축배를 너무 빨리 터트린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습니다. 안첼로티 감독이 고함을 지르는데 저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동점골 이후부터 전체적으로 밀란 선수들의 플레이가 더러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젠나로 가투소의 플레이가 아주 거칠었다.

자신의 별명인 싸움소처럼 선수를 들이받고 밀어트리는 것은 물론, 몸싸움의 거친 정도와 태클의 강도, 빈도 역시 점점 강해지고 많아졌다.

문제는 그의 거친 마크를 주로 당하는 선수는 바로 호날두 자신이라는 것.

심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팔꿈치로 배를 치거나 허벅지를 꼬집고 발을 밟는 행동들은 호날두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이딴 식으로 공차면서 살아왔나? 작작 좀 하지?"

"이게 내 축구다. 꼬우면 꺼지던가."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호날두와 가투소였다.

=

꼬라지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안첼로티 감독에게 호날두 자신을 마크하거나 또는 격동시키라고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마음을 다스리는 호날두.

졸렬한 플레이에 대응해봤자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이다.

진정한 복수는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보란 듯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호날두는 잊지 않았다.

‘지금 양 팀의 오버액션에 주심도 짜증이 날 때로 난 상황이라 항의해도 먹히지 않겠지.’

반드시 이번 결승전에서 이기고 인터뷰로도 그의 거지같은 플레이를 신랄하게 까야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도 실시간으로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에서 가투소 안티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호날두였다.

가투소의 치졸한 행위들은 중계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고 전 세계로 송출되는 중이었다.

호날두가 동점골 골을 넣고 약 20분 동안 첼시와 AC 밀란 사이의 밀고 당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꽤 괜찮은 찬스가 나오기도 했지만 상대 팀의 뛰어난 수비에 막히거나 슈팅 실수 연발 등으로 어느 팀도 골을 넣지 못하는 상황.

호날두도 두세 번의 슈팅이나 킬 패스 등을 시도해봤지만 더 이상의 득점을 낼 수는 없었다.

밀란의 에이스인 히카르두 카카 역시 비슷했다.

좁혀진 미드필더와 수비수 사이 공간은 그의 야생마 같은 돌파도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

마케렐레, 존 테리의 철저한 협력 수비는 덤.

[첼시는 두 번째 골을 내준 이후로 실점할 위기를 거의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역시 프리미어 리그에서 단 15실점만을 기록한 무리뉴 감독답습니다.]

[반면 AC 밀란은 색깔이 분명했던 전반전에 비해서 뭔가 애매해졌습니다. 날카로운 돌파력도 무뎌졌고 단단하던 수비도 흔들리는 중이죠. 안첼로티 감독은 뭔가 변화를 줘야할 것입니다.]

골이 나오지 않는 경기는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공방전을 경기장에서 직관하거나 또는 TV를 통해서 지켜보는 축구팬들의 손에는 땀이 나는 중이었다.

골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다이나믹한 경기 내용이나 선수들 플레이의 클래스, 감독들의 전술싸움 등은 과연 챔피언스 결승전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경기였다.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첼시와 AC 밀란의 선수들은 결승전의 중압감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체력이 소진되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경기에 임했다.

심장과 폐가 찢어져라 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스포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모두가 힘들고 지쳤지만 그것을 잊고 무아지경으로 뛰는 그 순간.

나중에 중요한 경기마다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될 '코뿔소'가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

첼시의 코너킥 상황.

작게 숨을 내쉰 더프가 노리고 찬 공이 페널티 박스를 향해 날아갔다.

첼시와 AC 밀란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거칠고 치졸한 신경전을 벌이는 그곳.

오늘 경기 원톱 스트라이커치고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디디에 드록바는 밀란 선수들의 견제와 압박을 그의 강력한 피지컬로 뚫어내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흑인 특유의 탄력 있는 몸과 큰 키를 이용하여 높은 타점에서의 그림 같은 헤딩.

마치 11-12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연상케 하는 멋진 헤딩은 정확히 공의 방향을 돌려서.

AC 밀란의 골문으로 밀어 넣는데 성공하는 드록바였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첼시와 AC 밀란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 그 균형을 깬 골.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망연자실해하는 로쏘네리들과 세상이 무너질 듯 미친 듯이 열광하며 눈물을 쏟아내는 블루스들.

오늘 천금 같은 골을 기록한 드록바. 

하마처럼 입을 쩍 벌리고 쉴 새 없이 두 팔을 흔들어대며 뛰어다니는 드록바는 그라운드에 미끄러져 슬라이딩하는, 일명 ‘철길 세레머니’를 선보이며 블루스들의 좌석을 광란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디디에! 디디에! 디디에! 디디에!!

동점골을 넣은 호날두 부럽지 않은 첼시 팬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성.

결승골의 주인공, 드록바를 동료 선수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다.

그를 쥐포로 만들 작정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드록바의 위에 다이빙하는 첼시 선수들.

당연히 그 중에서는 호날두도 있었다.

“오늘 나는 죽어도 좋아.”

짜부가 된 상태에서 드록바는 선수들 한명 한명과 뜨거운 포옹을 했다.

첼시 이적 첫 시즌, 잉글랜드 상륙 이후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치던 호날두에게 항상 비교되며 속으로 응어리를 앓았던 드록바는.

이 한 골로 첼시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120% 증명할 수 있었다.

AC 밀란 선수들이 이 골을 한 번에 인정할 리가 없다.

특히 가투소는 마치 심판과 싸울 듯이 격렬하게 항의하며 이번에도 역시 오프사이드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옐로우 카드를 받게 되었다.

두 감독들의 표정도 대비되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팔짱을 끼고 있는 안첼로티와 공중으로 점프하면서 허공에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지르는 무리뉴.

극명한 희비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들 주저앉아서 뭣들 하는 거야!"

“젠나로! 그만 항의하고 역습 준비해. 시간 끌어봤자 엿 되는 건 우리야.”

주장이자 최고참인 말디니가 호통을 치면서 밀란 선수들을 이끌었다.

추가시간까지 합쳐서 약 7~9분가량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텐백을 구사하는 첼시를 뚫고 골을 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으리라.

밀란의 선수들은 눈부신 투혼을 발휘하며 첼시를 밀어붙였지만 블루스의 방패는 뚫리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수비가담 하는 호날두는 오히려 패스를 끊어내고 날카로운 역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결국 피를로의 공을 터치 라인너머로 뻥 차버린 호날두의 걷어내기가 오늘 경기의 마지막 볼 터치가 되었다.

삑-! 삐이이익-!!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첼시의 코칭 스탭들은 일제히 그라운드로 달려가면서 선수들과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04-05시즌 챔피언스 리그 최종 우승은 결국 첼시였다.

포르투에서 이미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카르발류를 제외하고, 생에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룩한 첼시 선수들.

그리고 자신들의 팀이 2:0 상황까지 몰렸을 때도 목이 터져라 응원해왔던 블루스들.

지금 이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나가 되어 끓어오르는 환희에 몸을 맡기는 일뿐.

구단주의 몸임에도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하는 로만 아브라모비치도 그 중 하나였다.

"viva! blues!! viva! blues!! viva! blues!!"

50년 만의 리그 우승, 그리고 창단 이후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중위권을 맴돌던 별 볼일 없던 팀이 이뤄낸 기적.

기적이 아니라 석유 재벌의 돈지랄이라고 비꼬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이 시기, 첼시는 리그 우승만을 달성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자신이 가세함으로서 역사가 바뀌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 바뀐 것이다.

존 테리, 램파드에 이어서 빅 이어를 높이 들어 올린 호날두.

첼시 팬들의 격한 환호와 함성 속에서 호날두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유로에서도 그렇고, 이번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그렇다.

우승 자체도 기뻤지만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이끌었다는 게, 역사의 물줄기를 틀었다는 것이 더 없이 기뻤다.

‘내가 만들어가는 호날두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04-05시즌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 우승

리그 컵 : 4라운드 탈락

FA컵 : 5라운드 탈락

챔피언스 리그 :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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