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25)

< 2006 독일 월드컵 - 9 >

툭, 툭, 툭. 

가투소와 피를로 그리고 2선의 토티까지. 

서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중원 점유율을 압살할 때, 매의 눈으로 그 빈틈을 노리고 있던 피구의 노련함이 변화를 만들었다. 

그로소에게 가는 패스를 굉장한 예측 능력으로 파악, 달려들어서 끊어내는데 성공하는 피구. 

                                                                    

와아아아! 

포르투갈 응원단의 함성과 함께 그렇게 선수들이 바라던 역습이 시작됐다. 

공을 잡은 피구에게 집중적으로 프레싱이 가해졌지만 피구는 대단한 볼 키핑 기술을 이용해서 공을 지켜냈고, 가투소까지 씩씩거리며 덤벼들었을 때는 이미 공이 그의 발을 떠난 후였다. 

스콜라리 감독의 지시대로 길게 날아가는 피구의 롱 패스, 그 끝에는 언제 달려왔는지 모를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있었다. 

툭. 

부드러운 터치로 먼 거리에서 날아온 공을 가볍게 받아내는 호날두. 

이런 완벽한 볼 터치 기술 때문에 호날두는 공이 오자마자 바로 역습을 칠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위협적인 선수가 되었다. 

호날두가 공을 잡자마자 포르투갈 측에서는 감탄과 환호가, 이탈리아 측에서는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피구의 장거리 패스를 받아내는 크리스티안 호날두! 이것은 마치 데이비드 베컴의 롱 패스를 받아내는 라이언 긱스의 모습과 같습니다!] 

잉글랜드인 해설자가 이렇게 감탄했을 정도로 피구와 호날두의 콤비 플레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긱스와 베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호날두는 공을 받자마자 달렸다. 

그의 장기인, 속도만 제대로 붙으면 아무도 쫓아갈 수 없는 스피드를 보여주면서 단숨에 이탈리아의 수비라인의 종심을 향해 질주하는 호날두.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다 늙은 사람들이잖아. 날 어떻게 막을 거야!’ 

카테나치오는 분명 상대를 질식시킬 정도로 뛰어난 수비 전술이지만, 그런 카테나치오를 이루는 이탈리아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나이가 많았다. 

그들의 주력을 세계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호날두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그것은 이처럼 뒷공간 털어버리는 롱 패스 플레이에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한 번의 기회가 터지기를 기다린 호날두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생각했던 방향, 동선을 향해 달렸다. 

가투소가 콧김을 씩씩거리면서 달려왔지만 속도 차이는 현격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쭉쭉 벌어졌다.  

중간 중간 터지는 깔끔한 개인기들은 덤. 

더티 플레이의 대가, 마테라치가 맞고 뒈져라 태클을 날렸지만 공을 들고 가뿐히 뛰면서 피해주고, 잠브로타와의 몸싸움을 마르세유 턴으로 흘려버리며 순식간에 칸나바로와 부폰만을 남겨두게 된 호날두. 

이번 경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포르투갈의 공격이었다. 

호날두! 호날두! 호날두! 호날두! 호날두!! 

포르투갈 응원단의 함성과 응원소리가 거세졌다. 

정말 역사가 만들어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경기 시작 이후 25분 동안 포르투갈의 모든 공격들을 철통같이 막아낸 이 두 선수는, 이런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와 난데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칸나바로는 호날두의 현란한 플립 플랩에도 속지 않고 제대로 공을 솎아내는데 성공했다. 

정말 미친듯한 수비력. 

하지만 호날두 또한 만만치 않다. 

칸나바로의 태클에 중심을 잃으면서도 한쪽 발로 쳐서 공을 위로 뜨게 만들었다.  

원더 골을 집어넣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호날두. 

모두가 예상은 하지만 절대 막을 수 없는 그 슛. 

공을 보며 몸을 띄워서 허리를 회전시키는 호날두는, 공중에 띄워진 다리를 교차시키면서 공을 강하게 후려 찼다. 

바이시클 킥이었다. 

이것은 현존하는 그 어떤 골키퍼라도 감히 막지도, 아니 막으려 시도조차도 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공의 움직임과 호날두의 움직임을 놓쳤을 때, 끝끝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최적의 자세를 취한, 이탈리아 선수 한 명만 아니었다면. 

잔루이지 부폰.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의 위대한 이 골키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인간을 넘어선 동체 시력과 괴물 같은 신체 능력으로 공을 향해 날아오른 부폰. 

골포스트 우측 상단 사이에 정확히 꽂히는 공을 쳐내는데 성공했다. 

같은 이탈리아 선수들조차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슈퍼 세이브. 

[크리스티안 호날두! 다 뚫어내고 돌파합니다! 어느 누가 이 위대한 선수가 카테나치오에게 막힐 것이라 단언했습니까!? 칸나바로의 태클! 공이 뛰는데... 어어...!] 

[부포오오온-!! 이걸 막아냅니다! 잔루이지 부폰!! 호날두 선수의 바이시클 킥을 믿기지 않는 선방으로 막아내는 부폰!] 

[두 눈을 뜨고 다시 봐도... 이건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슈퍼 세이브입니다!! 아니 어떻게 저 위치로 날아드는 공을 막을 수가 있는 거죠!?] 

공이 골대를 벗어나는 경우는 몰라도, 이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했던 호날두. 

호날두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입을 떡 벌린 채로 부폰을 바라보았고, 부폰은 그런 그에게 가볍게 한 쪽 눈을 깜빡여주었다. 

인상을 찌푸리는 호날두. 

'젠장! 반드시 한 방 먹여주겠어!' 

부폰의 선방 임팩트가 대단했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부폰도 대단하지만 칸나바로의 수비도 기가 막혔다. 

개인기를 펼치는 호날두의 공을 정확하게 끊어냈고, 그 때문에 호날두는 억지로 공을 띄워서 슛의 템포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즉, 칸나바로는 부폰에게 선방을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준 것이다. 

“정말 미친 양반들이야... 이러니 월드컵 내내 1실점밖에 하지 않았지.” 

  

이탈리아가 2번, 3번 공격하는 동안 스콜라리의 ‘뻥축’ 작전으로 1번의 공격 기회를 얻어갈 수 있었던 포르투갈. 

언 듯 보면 비효율적인 움직임이었지만 빠르고 강한 윙어인 호날두 덕분에 한 번의 공격이라도 위협적인 공격을 때려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폰의 미친 선방과 칸나바로의 미친 수비력 때문에, 이런 호날두의 활약에도 좀처럼 골문이 열릴 기회가 나오지 않았다. 

속도를 끝까지 끌어올린 호날두에게 달려들어서 공만 걷어내는 칸나바로의 수비기술이나, 작정하고 때린 무회전 슛을 쳐내는 부폰이나, 정말 ‘수비 괴물이 아닐 수 없다. 

호날두 뿐만 아니라 피구나 파울레타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한번씩 이 두 사람에게 당한 피구와 파울레타는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호나우지뉴가 챔스에서 우승했음에도 왜 2006년 발롱도르를 수비수인 칸나바로가 받았는지, 골키퍼인 부폰이 2위에 올랐는지를 알겠네.’ 

둘의 수비능력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는데 이탈리아 수비진들이 이 둘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마테라치, 카모나레시 같은 선수들은 결승무대라는 타이틀에 조금 긴장했던 것인지 처음에는 호날두의 돌파에 뻥뻥 뚫리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조직력을 짜 맞춰서 협력 수비 형태를 구축했다. 

‘진짜 카테나치오’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호날두를 비롯한 포르투갈 공격진들은 틈을 찾지 못해 한숨만 절로 쉬는 중이었다. 

결국 실점은 포르투갈에게서 먼저 나왔다. 

코너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높이 뜬 공을 노려보고 달려간 마테라치의 헤딩이 골로 이어진 것이다. 

천금 같은 선제골에 혓바닥을 내리면서 미친 듯이 좋아하는 마테라치와 얼싸안고 환호하는 이탈리아 선수들. 

부폰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주먹을 움켜쥐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완전히 분위기가 넘어갔다. 

어찌어찌 수비라인을 뚫어보는데 골키퍼가 미쳐 날뛰어서 모든 공을 다 쳐낼 때. 

공격진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얻어맞는 경기보다 이 때 더욱 절망을 느낀다고 한다. 

아예 철통 방어,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라면 ‘졌지만 잘 싸웠다.’ 라는 마음으로 다 내려놓고 편하게 플레이 할 수 있는데, 들어갈 듯 말 듯 들어가지 않으니 같은 찬스에서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 포르투갈도 마찬가지다. 

한 골을 먹었는데 더 기가 죽고 어깨가 축 쳐진 것은 공격진들이었다. 

포르투갈 선수들 사이에서 짙은 좌절감이 감도는 가운데 전반전이 끝이 났다. 

호날두는 차라리 지금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포르투갈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 새롭게 정신무장을 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조별리그, 토너먼트 포함해서 1실점만 한 게 아니었네..... 그 놈들은 정말 미친놈들이야." 

“화력 최강이던 독일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놈들이잖아...” 

“그놈의 카테나치오, 카테나치오...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진짜 차원이 다르구나.” 

이 말을 하는 선수들이 누굴까? 

바로 히카르두, 카르발류, 메이라, 미겔, 발렌트 같은 수비진들이었다. 

이탈리아 수비수들과 제대로 붙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이탈리아 수비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축 쳐져있는 공격진들을 위로해주는 거겠지... 다들 정신 좀 차립시다. 이런 말 듣고도 가만있으면 정말 비참한 거예요.“ 

한마디 하고 싶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봐 참는 호날두였다. 

"...계속 두드리면 언젠가는 열리는 법이야! 힘내서 다시 한 번 해보자! 저 놈들도 괴물이 아니니까 반드시 실수가 나올 거야." 

피구가 뻔한 말로 모두를 격려했다.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인 만큼 피구에게는 더 절박했다. 

"크리스! 15분 전의 네 움직임은 정말 좋았어! 바이시클 킥도 기가 막혔고. 부폰이 미친놈이어서 한 번은 막았던 것이지 다음에는 그러지 못할 거야. 그 루트를 더 노려보자." 

"알았어요, 캡틴. 근데 놈들이 같은 방식으로 또 당할 것 같지는 않으니 공을 받은 이후에 변칙을 좀 섞죠. 제 생각에 만회골은 분명히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더 좋지! 다들 들었어? 막내도 할 수 있다고 하잖아! 후반전에 한 골만 더 넣으면 연장전이야. 연장전에서 프랑스를 꺾고 결승에 올랐지. 우린 그에 대한 노하우가 있고!" 

이탈리아도 연장전에서 독일을 꺾고 올라왔지만 여기에 태클 거는 선수는 없었다. 

지금은 ‘좋은 게 좋은 거’다. 

다함께 으쌰으쌰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피구가 이렇게 나서서 라커룸을 휘어잡고 선수들을 독려하자, 스콜라리 감독이 다시 세심하게 선수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새로운 전술 지시를 도맡았다. 

후반전 시작한 직후, 그 때가 만회골을 넣기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황금 타이밍을 놓친다면 역전을 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크리스, 우리에게는 골이 정말정말 필요해. 네 빈자리는 다른 선수들이 다 커버해줄 거다. 조금만 더 공격적으로, 루이스와의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완벽하게 이뤄주길 바래. 스위칭 플레이도 자주하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오늘 경기 후반전은 전적으로 크리스, 너에게 달렸어. 난 언제나 너의 실력을 믿는다. 너는 할 수 있어." 

호날두가 어지간한 일로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멘탈을 지녔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는 스콜라리 감독은 그에게 부담감을 팍팍 심어주었다. 

선수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그에 맞는 후반전 지시사항들을 풀어서 쉽게 설명해 주는 스콜라리. 

호날두 같은 핵심 선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지만, ‘우리 해볼 만 한데?’ 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어쨌거나 스콜라리와 피구의 노력으로 포르투갈 대표팀 선수들, 특히 파울레타와 데쿠 같은 공격진들이 상당히 진정되었다. 

다시 한 번 골을 먹힌 타이밍이 전반전 끝나기 직전이라는 것에 감사하는 호날두였다. 

"저는 나가서 무조건 한 골을 만들 겁니다. 나머지는 충분히 해줄 수 있죠? 연장 가든, 승부차기 가든 우승컵을 들어 올립시다. 이 기회가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다음 월드컵에는 캡틴도 없는데 이렇게 완벽한 멤버가 나올 것 같아요? 쟤네들, 수비는 정

말 토 나올 정도로 대단한 거 맞지만 공격은 조루입니다.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45분간만 잘 싸웁시다. 우리는 선수로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오를 수 있어요." 

"그래, XX! 우리가 못할게 뭐가 있어? 세트피스 골도 행운으로 주워 먹은 거지, 공격진들 합도 안 맞아서 빌빌거리는데!" 

“크리스에 비하면 루카 토니, 델 피에로, 토티 등은 종이 호랑이지! 느려터진 주제에 드리블도 존나 못 치는 거 봤지? 슛도 조루야!” 

“막내가 한골 무조건 넣는다고 했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지! 수비만 잘하고 이후를 노려보는 거야!” 

"전반전 끝나고 마테라치, 그 개새끼가 우릴 비웃었잖아? 저 오만한 이태리 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자고! 열 번 슛을 쏴도 그걸 다 막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조국에게 우승컵을!" 

"""조국에게 우승컵을!!""" 

                                                                                                                       

                                                                                                                       

정신무장 완료. 

이제 정말 멋진 역전극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호날두의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크게 위축되었던 포르투갈 선수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이 마치 자신들의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정말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 

이들은 입을 벌리고 소리 지르며 공을 따내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꺼려하던 거친 몸싸움도 망설이지 않으며 공을 위해 밀어붙였고, 라인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끝까지 끝까지 쫓아가며 대단한 투혼을 보여줬다. 

이번 기회가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절박감, 1골 차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 상반된 두 감정을 균형 있게 심어 준 감독과 주장의 역할이 컸으리라. 

뻐엉-! 

"좋았어! 방금처럼만 해!" 

"나이스 슛! 아주 위협적이었어!" 

“푸하! 저놈들 쫄은 거 보라고! 

파울레타가 찬 공은 아쉽게 골대를 넘겼지만 포르투갈 선수들은 서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청춘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썩 잘 먹혔다. 

이탈리아 선수들도 전혀 기죽지 않고 무섭게 달려드는 상대팀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포르투갈 대표팀은 그 어떤 경기에서보다도 투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네덜란드와의 패싸움이나 다름없었던 ‘뉘른베르크 전투’와는 다른 의미로 예외다. 

하지만 이건 앞으로의 호조를 끌어다 쓰는 상황이다. 

포르투갈은 오버 페이스를 달리고 있었는데 몰아치다가 결국 골이 나오지 않으면 역풍을 맞고 무너질 것이다. 

결국 핵심은 골이다. 

포르투갈은 무조건 골을 넣어야 했고, 그 역할은 호날두 자신 밖에 할 수 없었다.

< 2006 독일 월드컵 - 9 > 끝

ⓒ 아이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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