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기점 - 1 >
지방이냐 도시냐 등을 따지지 않고 포르투갈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대통령과의 만찬은 호날두를 포함한 대표팀 선수들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이미 포르투갈의 첫 월드컵 우승 신화를 이뤄낸 축구대표팀 선수 전원과 감독 스콜라리에게 엔리케 왕자 훈장이 내려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전해 듣기도 했다.
이것은 영국의 대영제국 훈장과 비슷한 것으로 스포츠, 비스포츠를 가리지 않고 포르투갈 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훈장으로 뽑히는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집안의 경사라며 엄청 좋아하시겠네.’
그 점이 더 기쁜 호날두였다.
실바 대통령이 직접 대표팀 선수들에게 엔리케 왕자 훈장을 상징하는 메달을 걸어주었다.
"그대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20세기, 21세기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운 영웅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나라가 겨우 이 정도 훈장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
"그건 정말... 과한 말씀이십니다."
"포르투갈의 국격을 드높인 영웅들입니다. 국민들에게 더없이 큰 행복과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우리 포르투갈 역사에 그대들은 누구보다 더 깊게, 그리고 더 중요하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국민들로부터 세금만 받아먹는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지요.“
실바 대통령의 말에 스콜라리 감독과 대표팀 선수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대통령은 그저 인자한 얼굴로 웃을 뿐이다.
“오, 그러고 보니 사인 받는 것을 잊어버렸군요. 부탁드립니다. 우리 와이프와 자식들이 학수고대를 하고 있어요."
“아, 물론 해드려야지요. 10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허허허, 대통령 직책이 이래서 좋긴 좋습니다. 위대한 영웅들에게 가장 먼저 사인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영광이군요.”
실바 대통령은 엔리케 왕자 훈장 외에도 이번 대표팀 선수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정부 차원에서 만들 생각이라고 밝혔다.
유럽 국가의 국민 대부분이 축구가 국민 스포츠이고 축구 경기에 미쳐 산다.
포르투갈도 마찬가지.
그런 포르투갈이 국가대표 메이저대회의 최고봉인 월드컵에서 첫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국고를 쓰는 일이었지만 여기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는 충분히 이루어질 만도 했다.
유니폼에 새겨진 선수들의 사인을 받아가면서 실바 대통령은 호날두와 눈을 마주했다.
실바 대통령은 싱긋 웃었고 호날두 역시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호날두의 사인을 받아가면서 실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든지, 어렵거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나를 방문해주세요. 나와 정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성심성의껏 호날두 선수를 도울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
호날두는 잠시동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내 얼굴을 조금 굳혔다.
대놓고 청탁해도 된다는 말인데... 이거 함부로 생각하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팍 들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만 대통령 각하, 그것은 거절하겠습니다."
"허허허,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하지만 내 말은 진심입니다. 국민들도 충분히 그것을 이해해 줄 겁니다. 당신은 우리 포르투갈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니까요."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호날두에게 다시 한 번 웃어준 실바 대통령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월드컵 우승의 절반 정도는 호날두 선수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제안은 언제까지든 유효하니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
“.....이라던데 조르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럴 때는 역시 에이전트만한 것이 없다.
호날두는 왠지 이런 쪽에 해박할 것 같은 멘데스에게 전화를 걸어서 방금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흠... 실바 대통령이 아무래도 너의 인기에 편승을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인 것 같다.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나쁠 건 없지. 그렇게 심각하게 신경 쓸 건 아닌 것 같아.]
“대통령이 제 인기에 편승을 해요? 에이, 그의 지지율이 몇 프로 인지는 아시고 하는 말씀이신가요?”
[지지율은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는 거잖니. 당장 국책 사업 한, 두개만 흔들려도 금세 위태로워 질 걸? 일단 한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상 5년 후 반드시 재선을 노릴 텐데, 포르투갈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와 사랑을 받는 스타에게 잘 보일 기회를 찾
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한마디로 호날두를 도와주고 그것을 언론을 통해 홍보함으로써 호날두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하는 멘데스의 조언이었다.
[크리스, 실바 대통령이 아무리 전 국민적으로 존경을 받는다 해도 표를 벌어먹고 사는 정치인이야.]
“듣고 보니 멘데스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흐음...”
[설마 불법적인 일을 그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 흐흐, 만약 그걸 생각하고 나에게 전화한 것이면 정말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네. 미리 말릴 수 있어서.]
“참나, 날 뭐로 보고 그러시나요? 대통령 투표와 저 같은 축구 선수를 연관 짓는 게 좀 이해가 안가서요.”
호날두에게 정치인에 대한 투표와 대중적인 인기는 다른 영역이었다.
[크리스, 지금의 너는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야. 또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지. 어딜 가도 너에 대한 찬양과 존경의 표현이 가득해. 아마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도 수두룩하게 많을 거다.]
“농담하지 마요, 조르제..”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야. 너는 지금 너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있어. 이미 축구 선수라는 틀 하나로는 너를 가둘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는 정계와 재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너를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거야. 함부로 책
잡힐 일을 만들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버릇을 들어야해.]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라면... 조르제처럼요?”
[나는 이미 이용해먹고 있잖아, 그것도 잔뜩. 흐흐.]
“하하, 알았어요. 좋은 충고 고마워요.”
월드컵 우승을 달성한 이후, 자신의 가치가 수직 상승한 것은 확실한 듯 싶었다.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는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아니었는데.... 정말 월드컵이 대단하긴 했다.
“호날두 선수, 통화 다 하셨습니까?”
“네, 다했습니다. 가죠.”
만찬장으로 향하는 호날두였다.
음, 설마 도청기 같은 건 없겠지?
===
대통령과의 만찬을 끝낸 호날두는 가장 먼저 리스본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넓은 정원과 들판, 수영장, 주차장 등이 딸려있는 주택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컹! 컹컹! 컹!
끼잉...! 낑낑!
가장 먼저 머피, 해피, 리피가 삼형제가 뛰어왔다.
말라뮤트를 닮은 이 믹스견 삼형제는 겅충겅충 뛰면서 오랜만에 온 주인에게 온갖 반가움을 표현했다.
드러누운 그들의 배를 북북 긁어주는 호날두에게 아버지가 다가왔다.
“아버지...!”
"장하다...! 정말 장하다, 우리 막내...! 이 아비는 네가 해낼 줄 알았어!"
그의 아버지 주제 디니스는 호날두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는 막내아들,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포르투갈의 우승을 확정 짓는 골을 넣은 장면을 TV로 똑똑히 보았다.
그 순간 호날두가 태어났을 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배워가는 나날들과 스포르팅에 입단, 프로선수로 데뷔하게 된 경기들, 첼시로 이적 후 세계 최고 선수로 자라나는 과정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던 디니스.
그 때의 감동과 벅참이 다시 떠오름에 호날두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아들이 너무 대견스럽고 너무 자랑스러웠다.
호날두의 어머니와 형, 누나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무 훌륭했다, 너무 멋졌어. 크리스... 이제 이 어미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흑흑...”
“아이, 참! 좋은 날,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요, 어머니. 오래오래 살아서 크리스가 또 한 번 월드컵 우승 또 하는 것을 봐야죠!”
“누나는 왜 이상한 바람을 불어놓고 그래...”
“한번 해내면 두 번째는 조금 더 쉽지 않겠니. 호호호.”
월드컵 우승이 무슨 뚝딱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호날두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나하나 모두 안아주었다.
축구에 지나치게 집중하느라 이들과의 만남을 조금 소홀히 했던 것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크리스...."
"케슬린. 나 없이 잘 지냈어?"
“어떻게 연락 한 번 안할 수 있어요?”
“미안, 미안. 정신 무장을 다시하고 싶었어.”
그의 연인 케슬린.
월드컵 기간 동안 왠지 딱 다잡은 마음이 흔들릴까봐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호날두.
호날두는 준비해두었던 반지를 꺼냈다.
케슬린의 눈동자 색을 닮은 에메랄드 반지였다.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계속 네 생각이 나더라.“
“크리스.... 저는...”
“나와... 결혼해주겠어? 평생을 아껴줄게."
많은 고민을 했다.
그의 성격상 원래의 호날두처럼 플레이보이로 살 수는 없지만, 굳이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그녀와 생활 반경을 맞추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잘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정신적으로 성장한 호날두는 한 발 나아가기로 했다.
비록 첫 번째 삶은 고아로 태어나 사랑 주는 법을 몰라 확신이 없었지만, 두 번째로 얻은 삶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충분히 배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슬린을 사랑했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호날두의 말에 케슬린은 울면서 웃었다.
"물론이에요, 크리스. 내 사랑. 평생을 함께해요."
“사랑해. 케슬린.”
본의 아니게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프로포즈를 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호날두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첫째는 언제...”
장난기 많은 호날두의 형이 쉰 소리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호날두와 케슬린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다.
===
"오늘은 제가 기자가 된 이후, 가장 영광스러운 날로 기록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맙소사! 크리스티안 호날두 선수와 단독 인터뷰라니! 지금 와서 밝히지만 저는 정말로 크리스티안 선수의 지독한 팬입니다! 유니폼과 축구공을 준비해왔으니 인터뷰 끝나고
꼭! 사인 부탁드릴게요."
"제 팬이라니 저야말로 정말 기쁘네요. 부디 기자 분들의 흔한 감언이설이 아니기를...“
“감언이설이라뇨! 진짜입니다. 집에 호날두 선수의 레플리카도 있다고요. 물론 포르투갈 대표팀과 첼시, 두 종류가 모두 있습니다.”
“와~ 정말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멋진 사인을 준비해야겠군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인터뷰.
포르투갈 스포츠 언론지인 ‘헤코르드’는 조르제 멘데스의 에이전시와도 좋은 관계를 트고 있는 매거진이었는데, 과거 호날두가 세계 최고 선수가 되기 전에도 그를 포함한 멘데스 사단의 여러 선수들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지속적으로 써왔던 곳이다.
그래서 인터뷰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호날두도 흔쾌히 허락할 수 있었다.
멘데스 선수들 중에서도 호날두에게 특히 더 호의적이었던 헤코르드는, 좋은 기사들을 여러 번 써준 보상으로 현재 가장 핫한 선수인 호날두에 대한 단독 인터뷰를 따낼 수 있었다.
“먼저 월드컵 이후의 수상부터 축하드려야겠군요! 호날두 선수는 골든 볼(월드컵 MVP), 골든 슈(월드컵 득점왕)을 연속으로 수상하며 이번 월드컵의 완벽한 주인공으로 거듭났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수상이기도 했는데요. 그래도 소감을 빼놓을 수는 없겠
죠?”
“우선 대표팀 감독님과 캡틴을 비롯한 동료 선수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두 상 중에서 어떤 것도 타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경기 끝까지 응원해준 포르투갈 응원단들의 열정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
습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점골, 역전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들의 응원 덕분입니다.”
의례적인 말이 아니라, 대표팀 선수들은 준결승전부터는 정말 기회가 올 때마다 호날두에게 패스해서 득점을 몰아주려고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골든 볼은 몰라도 골든 슈는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경기가 지고 있음에도 열성적으로 응원가를 불렀던 포르투갈 응원단들은 빈말이 아니고 정말 큰 힘이 되었다.
프랑스와 격돌한 준결승전에서 마니시와 데쿠 같은 선수들은 거의 탈진된 상태로도 다리를 움직여서 연장전을 뛰었는데, 그것은 목이 갈라지고도 응원을 멈추지 않았던 응원단 덕분이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포르투갈을 세계 축구의 정상에 올려놓는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호날두 선수는 올해의 발롱도르 수상이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은데요?"
"오, 절대, 절대 아닙니다. 이미 유명 스포츠 배팅사이트의 호날두 선수 발롱도르 배당률은 1/25까지 내려갔습니다. 25유로를 걸어야 겨우 1유로의 수익을 얻을 정도로 탑독 중의 탑독이죠. 아직 06-07시즌이 시작도 안했음에도 이 정도라면 올해 발롱도르
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호날두 선수라는 뜻입니다.“
호나우지뉴는 라리가와 챔피언스 리그를 동시에 우승하면서 2006 발롱도르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지만 안타깝게도 월드컵에서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력한 우승후보인 브라질을 이끌고도 8강에서 탈락하는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은 호나우지뉴는, 현지 브라질에서도 각각 2002, 2006 월드컵 우승을 이룬 호나우두와 호날두에게 비교되며 엄청나게 까이는 중이라고.
물론 지난 시즌 보여줬던 호나우지뉴의 묘기와 같은 개인기들과 임팩트는 분명 대단했지만, 그것도 이번 월드컵에서 호날두가 가히 원맨쇼를 보이면서 강팀들을 박살내고 우승까지 차지하자 전부 묻혀버렸다.
그로써는 정말 애석한 일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분기점 - 1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