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기점 - 3 >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로카곶은 포르투갈의 유명 관광지로 유럽을 여행하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절경을 감상하곤 했다.
"이럴 때는 유명해지는 것도 참 문제야."
"그러게 말이에요. 크리스와 연인이 된 이후부터는 어딜 나가지도 못하게 됐네요.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꼼짝없이 갇혀 살겠네?"
"괜찮아. 케슬린이 갇혀 살아도 내가 다 먹여 살려줄 테니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시내를 걸을 수 있었는데 지금 그랬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
포르투갈 내에서 이제 호날두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괜히 멘데스는 어디 나갈 때는 반드시 경호원들을 대동하라고 신신당부를 한게 아니다.
그래서 지금도 호날두와 케슬린을 두고 멀리서 따라오는 평범한 차림의 경호원들이 있었고,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평범한 척 휴양지를 거닐 수 있었다.
호날두는 이곳에서 한적함과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챙이 긴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 그리고 눈에 안 뛰는 복장까지 챙겨 입었다.
케슬린 역시 짙은 선글라스에 깊게 눌러 쓴 모자와 펑퍼짐한 옷을 입었는데 머리가 워낙 작아서 모자에 거의 파묻히는 수준이었다.
역시 현직 모델의 도움을 받은 변장술은 위대해서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이 평일이라 사람들이 적은 것도 이들의 은밀한 휴양에 한 몫을 했다.
로카곶은 '바다 위에 돌출된 절벽'같은 속뜻이 있는데 막상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곳에 올라서면 주변 해안가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을 맛볼 수 있다.
아래는 정말 깎아지는 듯한 절벽과 바다지만, 그 절벽 위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워져서 마치 바다 위의 화원같은 느낌을 준다.
로카곶의 들판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아이스플랜트라는 식물이다.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것이 특징인 아이스플랜트는 식용으로도 쓰이는데, 아이스플랜트의 꽃이 만개하는 여름에는 정말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보여준다.
로카곶 위의 들판을 가득 뒤덮는 아이스플랜트의 꽃들은 정말 그 이름 그대로 들판에 피어난 얼음 꽃 같았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세상에! 이런 경치가 있을 줄이야!”
케슬린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 추억을 보관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새하얀 해안선과 비스듬히 기울어지면서 아찔한 위태로움을 간직한 절벽,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있는 녹슨 십자가는 마치 예술작품의 한 장면을 실사로 옮긴 것 같았다.
절경이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늑해지는 광경이다.
"우리,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이런 곳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이라도 다닐까? 유럽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거야."
"굳이 우리가 은퇴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짬짬이 시간을 내서 여행을 다니도록 해요. 음, 우선은 아일랜드부터 시작하죠! 그곳의 유명한 명소들과 맛집들을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요."
호날두는 말없이 케슬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호날두.
무심코 십자가가 있는 해안가 쪽을 바라보는데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 그래요, 크리스?”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착각인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는데...
‘내가 얘를 보고 착각을 할 리가 없지.’
긴 생머리(?)에 작달만한 키, 하지만 한 번 보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바로 리오넬 메시였다.
"......"
"......"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호날두는 메시도 자신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다며 확신했다.
참.... 어마어마한 우연이다.
그 넓은 유럽에서 축구 선수를, 그것도 리오넬 메시와 딱 마주치다니.
메시는 여고생 머리를 끈으로 묶고, 어디 놀러온 학생처럼 배낭을 메고 있었다.
골든 보이상을 수상한 그 축구천재 메시와의 연관성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차림새였다.
"메시? 리오넬 메시 맞지?"
"맞아요, 크리스티안. 와...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히 내가 모를 리가... 여기는 쉬러 온 거야? 시즌 아웃을 당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네. 재활치료도 다 끝났고, 시즌 시작 전에 잠깐 바람이라도 쐴 겸 이곳으로 왔죠. 아, 월드컵 우승 축하해요. 크리스티안의 퍼포먼스는 정말로 환상적이었어요."
"고마워, 리오넬. 내가 결혼한 건 알고 있지? 여기는 내 아내인 케슬린이야. 케슬린, 리오넬 메시를 알지?"
"당연히 알죠! 아르헨티나의 축구 천재잖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메시 선수!"
"아, 넵! 저도 반갑습니다, 미세스 아베이루(호날두의 성). 굉장히 아름다우시네요."
케슬린은 싱글벙글했지만 쑥맥임이 분명한 메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호날두와 메시 사이에는 살짝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다보니 서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상황.
남자 둘에 여자 하나까지.
이러고 있으니 주위가 쏠린다.
안 그래도 호날두와 케슬린은 키가 매우 크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보다 못한 케슬린이 나선다.
"어휴, 답답한 남자들! 그냥 어디든 좀 걸어요.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일단 크리스가 먼저 물어보세요,"
"그... 좀 걸을까? 차타고 왔어?"
"하하, 아뇨. 아직 면허가 없어서요. 버스 타고 왔어요."
"지난 챔피언스 리그 때 부상은 음... 정말 안타깝게 됐어. 너라면 충분히 결승전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였을 텐데."
메시는 첼시와의 2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을 당했다.
지울리와의 주전 경쟁에서 결국 승리한 메시였기에, 만약 시즌 아웃만 당하지 않았다면 호나우지뉴-에투-메시라는 역대급 라인이 결승전에서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메시의 시대는 조금 더 빨리 찾아왔을 테고.
"음- 그 때의 부상이 정말 아쉽긴 했지만...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결국 팀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어요. 어차피 제가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으면 나중에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있지 않을까요?"
언론과 팬들로부터 한창 주목을 받을 때 그 흐름을 타지 못하고,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것이 선수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호날두는 알고 있다.
그걸 웃으며 넘기는 메시를 보고 '역시...' 라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호날두와 함께 세계 최고의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출난 재능에 이런 단단한 멘탈까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 멘탈도 재능인가?
어쨌거나 호날두로서도 본받을만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런데 끈으로 묶었음에도 찰랑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살짝 거슬린 호날두는 무심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리오넬, 머리 좀 자르면 안 되겠니?"
"네?"
"너는 충분히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스타일이 무슨... 여학생 같아. 안 어울리는 배낭에 칠부바지 그렇고."
그제서야 호날두는 무심코 한 말이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옆에서 케슬린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중이다.
메시는 살짝 어이없어 하더니 이내 자기도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크리스티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얀 바지에 줄무늬 난방이라니. 누가 봤을 때 스탠포드 공대생인 줄 알겠어요?"
"호호호, 모델인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정말 심각해요. 전문적인 코디네이터를 반드시 고용해야 할 것 같은데요?"
호날두와 메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스스로의 패션이 나쁘다고는 조금도 생각 안해 본 이들이었다.
"...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다보면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겠니?"
"오, 그건 동의해요. 축구 선수는 공만 잘 차면 되죠."
메시는 내성적이었지만 심성이 착했고 가벼운 농담도 즐길 줄 알았다.
이런 녀석이 나중에 탈세를... 크흠... 어쨌든 그러했다.
어느새 걷다보니 호날두의 별장에 다다랐다.
이것도 인연인데 호날두와 케슬린은 메시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메시는 특히 해물 파스타와 폭립을 좋아했는데 역시 운동선수답게 먹는 양이 상당했다.
어느 순간 케슬린은 자리를 비켜주었고 호날두와 메시는 많은 대화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했었어요. 그런데 정확히 저의 4번째 생일날, 부모님은 저에게 축구공을 선물했죠. 그 때부터 축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길이 제 길이라는 것을 확신했죠.”
“왠지 선수들은 다 비슷한 것 같네. 내 동료들도 그렇고, 나도 처음 그렇게 시작했거든. 아버지께 받은 축구공이 내 인생을 바꾸었지.”
“하하!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제라르드 피케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녀석은 완전 부자에요. 그래서 유스 시절에는 그에게 많이 얻어먹었죠.”
제라르드 피케, 뭐 호날두도 잘 알고 있는 선수였다.
지금은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골든 보이상을 받았다는 것은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메시는 아직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았다.
“크리스를 비롯해서 지금 잘하는 선수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제가 어떻게 그들을 넘겠어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목표는 바르셀로나 주전 선수가 되는 거예요. 그 다음은.... 이 목표를 이루고 생각해보죠.”
“넌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봤을 때, 너는 나보다 재능이 있는 걸.”
메시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웃어넘겼다.
호날두는 운전기사를 시켜서 그를 바르셀로나 숙소까지 데려다 주려 했지만, 메시는 버스 왕복 티켓을 끊었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스본에 있는 버스 터미널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했다.
"제가 크리스티안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물론이지. 네가 그런 인터뷰를 안했다면 내가 아는 척을 했을 것 같아?”
“아하하하! 그래요?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고 다닌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저는 처음에 크리스의 성격이 굉장히 오만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을 먼저 알아봤어도 아는 척 하지 않았죠."
알고 보니 메시가 호날두를 먼저 발견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심한 메시는 자신이 쌩 깔까봐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지금까지 아무도 못 알아봤는데 메시만 알아봤다니 눈썰미가 참 대단하다.
"그래? 지금은?"
"모르겠어요. 이게 가식일지 어떻게 알아요?"
"이야, 그건 진짜 너무한 소리다. 먹은 거 토해낼래?"
"에이! 당연히 농담이죠. 크리스티안은 굉장히 유쾌하고 재밌는 사람이었어요. 다정했고... 그리고 배울만한 점도 찾았고요. 아, 케슬린도 굉장히 매력적인 여자였어요. 크리스와 아주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리오넬. 축구 잘 하세요. 멀리서도 응원할게요.”
나중에 함께 뛰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메시는 이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안타깝게도 호날두와 메시가 한 팀에 같이 뛰게 되는 것은 어렵겠지만... 웃으면서 만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
이번 월드컵의 영웅은 포르투갈 대표팀이었지만 영웅 중에서도 급이 있다.
조별리그와 토너먼트 합쳐서 6골 3어시를 기록했고 결승전에서 매우 임팩트 있는 2골을 몰아넣은 호날두는 단연 우승의 1등 공신, 월드컵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골든 슈, 골든 볼 수상을 확정지은 그에게 밀려드는 광고와 스폰서 제안들은 정말 끝이 없었고 그 금액도 이전보다 몇 배는 뛰었다.
호날두의 가치가 그만큼 뛰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이긴 했지만, 전 세계적인 스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종목의 탑을 찍기는 했지만 플로이드 메이웨더, 타이거 우즈, 마이클 조던 등과 같은 거물 선수들과 비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게 사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의 얼굴이 세계 유명 언론지들과 TV 프로그램들을 타고 쉴 새 없이 전송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점점 더 많아지는 중이다.
월드컵을 기점으로 호날두라는 선수의 ‘급’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느낌.
이것이 바로 수억 명이 시청하는 메이저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친 결과였다.
과장 하나도 없이 세상천지 호날두를 부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르제 멘데스가 매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이번 월드컵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서 멘데스를 통해 연락이 닿기도 했다.
그것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 호날두였다.
선수로서의 최고 대박을 친 호날두지만 투자자로서의 성과 역시 고무적이었다.
지난해 투자한 영화들이 모두 대박행진을 이어나갔고 페이스북은 이제 일반인들까지 대상을 확대하는 중이라고 한다.
애플, 구글, 아마존 등의 주식 등을 꾸준히 사두는 일도 잊지 않고 있는 호날두.
특히 아이폰의 출시일이 점점 다가오는 중이었기에 애플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이는 중이다.
적어고 경제호황기가 계속되는 올해 말까지는 현물 자산의 크기를 최대한 줄여 남은 돈을 전부 투자에 쏟을 생각이다.
부동산 자산이든 주식 지분이든.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가 분명 내년 초에 터지니까 그 때까지만 투자를 계속하면 되겠지.”
< 분기점 - 3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