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7시즌 - 6 >
후반전 시작.
주장과 감독 사이의 불화가 터졌음에도 첼시 선수들은 투철한 프로의식을 발휘하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몇 번의 실점 위기 상황이 있었지만 투쟁적으로 맞서며 끝끝내 스코어를 지켜나갔다.
뭐, 그건 맨유 역시 같았다.
호날두를 비롯한 첼시 선수들의 강력한 슈팅에도 몸을 가져다대는 걸레수비를 통해 실점을 막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수들.
양 팀 수비수들의 투혼은 분명 공격수들보다 빛났다.
경기 중에 보이는 퍼거슨과 무리뉴의 순간순간 전술 싸움도 돋보였다.
터치라인 바깥의 전장에서 이 둘은 감독들만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퍼거슨이 공격하면 무리뉴가 되받아치고, 무리뉴의 찌르기에 퍼거슨은 카운터를 들고 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칼을 세워 휘둘렀다.
이들은 한 시도 그라운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상황에 따라 선수들의 상태에 따라 유기적으로 전술을 변화시켰다.
[퍼거슨 감독과 무리뉴 감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터치라인에 나서서 지시를 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역시 첼시는 맨유를 만났기 때문에, 맨유는 첼시를 만났기 때문이겠죠?]
[감독들의 절대 질 수 없는 자존심 싸움입니다. 이미 경기 전 인터뷰부터 절대 지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치지 않았습니까? 세계 최고의 감독들의 발언은 그만큼 무겁습니다. 여기서 지면 그것만으로도 이들에겐 치욕일 수 있습니다.]
터치라인의 전장에서 먼저 이탈을 한 감독은 바로 무리뉴였다.
마지막으로 맨유의 진영을 훑어본 무리뉴는 슬그머니 첼시의 감독 석에 와서 앉았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힐끗 퍼거슨을 살핀 무리뉴는 왼쪽 손의 검지로 왼쪽 눈썹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호날두는 땀을 닦으면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번 경기에서도 느꼈는데, 터치라인에서의 지시를 영어로 하니까 그 노망난 영감탱이가 바로바로 대처하는 것 같아. 포르투갈어도 할 줄 안다니까... 크리스, 네 시력 좋은 편이지? 우리들만의 신호를 정하도록 하자. 그 영감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내가 왼손으로 왼쪽 눈썹을 쓸어내린다면 애슐리와 스위칭하여 왼쪽에서 돌아 뛰며 돌파하도록 해. 그럼 선수들이 알아서 그 쪽으로 공을 보내줄 거야. 오른쪽 눈썹을 쓸어내린다면 행동은 그대로, 방향만 바꾸도록 하고.'
그 외에도 무리뉴는 호날두에게 여러 가지 사인을 전달했다.
'너는 선수들들 하나하나를 보지 말고 전체적인 경기장의 흐름을 읽어. 맨유 수비진들의 상황을 보고 신호를 보내는 것은 내가 할 테니까. 내가 총 지휘관이라면 크리스, 너는 야전사령관이다. 내가 미헬스고, 네가 크루이프야.'
마치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가 사인을 보내는 것처럼 이런 긴밀한 암호 전달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실제로 전반전에서의 득점과 그 외 위협적인 상황들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맨유 수비진의 상황을 보고 적절한 신호를 보낸 무리뉴와 그것을 120% 충실히 따른 호날두의 협업이 바탕이 된 것.
또한 무리뉴는 가끔씩 터치라인 지시와 상반된 내용을 호날두에게 새로 지시함으로서 퍼거슨에게 엿을 먹이기도 했다.
무리뉴가 다시 왼쪽 눈썹을 긁었다.
맨유는 현재 속공에 실패하면서 선수들의 전체적인 포메이션이 흔들린 상황.
무리뉴의 사인을 본 호날두는 기회를 엿본 뒤 움직였다.
맨유의 선수들이 현재 공을 잡은 에시앙에만 신경을 집중할 때, 기습적으로 스위칭하여 애슐리 콜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즉시 왼쪽측면의 전방을 향해 직선가도로 달리는 호날두.
에시앙의 멀리 차는 패스까지 기가 막히게 이어지자 맨유 선수진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우왕좌왕 하였다.
애슐리 콜 봉쇄 임무를 수행 중이던 박치성은 급히 호날두의 팔을 잡으며 막으려했지만, 호날두의 피지컬이 더해진 돌파력을 저지시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야 이 X같은 새끼들아! 정신 똑바로 안 차렷-!?"
부심의 경고를 감수하면서까지 거칠게 나선 퍼거슨이 무시무시한 고함을 사방으로 쳐댔다.
충격요법에 겨우 정신을 차린 맨유 선수들이 즉각 대응에 나섰지만, 리그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호날두를 상대로 그것은 너무 늦은 대처였다.
이미 오버래핑을 과도하게 한 박치성과 게리 네빌 때문에 맨유의 우측면과 중앙 사이에 균형이 무너졌고 균열이 생겼다.
이것은 세계 최고의 크랙인 호날두가 활개 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되었다.
맨유 선수들의 날카로운 태클과 거친 몸싸움을, 오직 자신의 개인기와 피지컬로 버텨내면서 질주하는 호날두.
눈 깜짝할 사이에 호날두는 이미 맨유의 페널티 에어리어에 근접했다.
드리블로 공을 굴리고 맨유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느라 조금 시간이 지체된 호날두.
스콜스, 캐릭 등이 호날두를 물고 늘어지며 벌어준 귀중한 시간 때문에, 이미 골키퍼 반 데 사르와 수비수 퍼디난드, 비디치 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기서 공을 차는 것도 낮지 않은 확률로 골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호날두는 조금 더 승률 높은 도박을 원했다.
그리고 올 시즌 정말 최악의 부진을 펼치고 있는 안드리 셰브첸코.
센터포워드 사이에서 좋은 위치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호날두는 외면할 수 없었다.
슛 모션을 취하다가 반대쪽 발로 흘리듯 공을 차냈다.
미끄러지듯이 나아간 패스는 정확히 셰브첸코의 왼쪽 발에 닿았다.
오늘 경기에서도 영 신통치 않은 모습들을 보이면서 첼시 팬들의 암세포를 증식시킨 셰브첸코.
과연 이번에는...!
터엉-!
받자마자 바로 찬 공이 맨유의 골대를 맞았다.
그 짧은 순간 맨유의 선수들과 서포터들이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첼시의 선수들과 서포터들은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은 욕구를 끝끝내 참아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세컨 볼을 포기하지 않고 궤적이 나아가는 자리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가는 호날두.
퍼디난드의 어깨가 호날두의 가슴을 거세게 쳤지만 끝내 버텨내면서 공을 지킨 호날두는 다시 셰브첸코에게 패스할 수 있었다.
셰브첸코는 이번만큼은 실수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돌파입니다, 크리스티안! 쭉쭉 달려와서 맨유의 위험지역까지 들어왔습니다! 슛을 쏩니까? 아, 셰브첸코에게 패스!]
[골대 맞았습니다! 하지만 호날두가 세컨볼을 따냅니다! 다시 셰브첸코에게 패스! 셰브첸코 슛! 들어갔습니다! 셰브첸코! 셰브첸코 선수의 골입니다!]
[첼시로 이적하면서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악의 끔찍한 부진을 겪고 있는 안드리 셰브첸코! 마지막 슈팅 장면에서는 자신감이 엿보였습니다! 이번 골이 그가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크리스티안! 정말 고마워! 멋진 선물이야!"
영어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짧은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셰브첸코.
하지만 표정을 보고 그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첫 번째 슛, 그 완벽한 찬스 때, 골대를 맞추는 광경을 보고선 호날두도 짜증이 팍 나긴 했다.
만약 세컨 볼이 날아든 위치가 슛을 때리기 더 좋은 위치였으면, 패스하지 않고 바로 자신이 바로 슛을 때렸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골을 넣긴 넣었으니 다행이었다.
"안드리를 챙겨주려고 일부러 그쪽으로 패스했던 거야? 역시 속이 깊은 남자야~ 덕분에 안드리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겠는걸."
드록바가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처음 안드리 셰브첸코의 첼시 이적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불안해한 것은 바로 드록바였다.
월드 클래스 스트라이커의 영입으로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봐 안절부절 했던 드록바.
처음에는 경쟁자인 셰브첸코가 삽을 푸자 내심 좋아하는 기색이었는데, 셰브첸코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지하로 파고 들 기세니, 오히려 그를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안드리가 가장 골을 넣기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패스를 한 거죠."
"흐흐, 두 번씩이나?"
"네. 어차피 저한테는 슛을 쏠 각도 안 나왔어요. 다른 선수들은 네빌, 비디치에게 잡혀있었고, 디디에는 아주 이상한 곳에 처박혀있었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드록바는 전혀 자신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여러 가지 상황과 셰브첸코의 불쌍한 눈빛을 넘길 수 없었던 것으로 합의(?)보기로 했다.
어쨌든 딱 좋은 타이밍에 터진 골에 서로를 얼싸 안으면서 좋아하는 첼시 선수들.
라커룸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팀 분위기는 좋았다.
다음 시즌 이적하기로 마음을 굳힌 호날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의견다툼은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이 지금처럼 경기에만 미치지 않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호날두였다.
팀이 망하자 도망치듯 이적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
1:2로 첼시가 앞서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경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퍼거슨은 박치성을 교체시켰다.
애슐리 콜을 마크하고 그의 크로스를 방해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박치성.
산소탱크라 불릴 정도로 체력적인 강점이 있는 박치성이라 할지라도, 애슐리 콜 역시 체력과 활동량이 달리는 선수가 전혀 아니었기에 90분 내내 그를 묶어두는 것은 무리였다.
박치성은 오늘 경기에서 모든 선수들 중에 가장 많이 뛰었다.
루이스 사하를 공격수로 이동시킨 퍼거슨은 루니와 투톱을 이루게 만들었다.
그리고 라이언 긱스를 윙어로 보내 4-2-4 진형을 내세우며 무조건 한 골이라도 넣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퍼거슨.
원톱 자리에서는 첼시 수비진들의 집중견제 속에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하기 힘들었지만, 투톱에서 뛰자 수비진들의 압박이 분산되면서 움직임이 살아나기 시작한 루니.
‘우당탕탕’을 연상케 하는 드리블로 첼시의 진영을 휘저으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인 루니는, 후반전에 들어서 맨유의 에이스다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후반전 15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막으려는 첼시와 뚫으려는 맨유’였다.
폴 스콜스의 감각적인 패스를 긱스가 받아서 한차례 접은 후 다이렉트 크로스, 그걸 튕기며 받아든 루니의 바이시클 킥까지.
다이나믹하고 날카로운 역습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맨유였지만, 첼시 선수들은 전부 중앙선 안쪽에 내려와서 텐백을 시전, 모든 공격들을 몸으로 막아냈다.
전반전의 실책을 씻어내려는 듯 재빠른 반응속도로 공을 차내면서 실점 위기를 막아내는 존 테리의 활약도 눈부셨다.
결국 이대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1:2
맨유의 홈에서 거둔 첼시의 너무나도 값진 승리.
이 승리로 첼시는 리그 선두로 치고 올라갔고, 맨유는 기세가 주춤하게 되었다.
과연 승점 6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경기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첼시 팬들은 승리에 기뻐하는 모습이었고 반대로 맨유의 서포터들은 현자타임이 온 표정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퍼거슨과 악수하는 무리뉴에게선 승리자의 당당함이 엿보였다.
아마 내일이면 무리뉴의 쓰리 백 변칙 운영을 칭송하는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겠지.
그라운드에 앉아 쉬는 호날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멍 때리는 중이었다.
주변이 시끌시끌해지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 호날두.
"크리스티안 호날두."
그를 부르는 사람은.
바로 맨유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었다.
"오늘 아주 훌륭한 경기력이었다. 원래도 잘하는 건 알았지만, 오늘 경기는 그 이상으로 나무랄 데가 조금도 없었어."
이번 경기에서 호날두는 해트트릭을 하거나 아주 임팩트 있는 장면들을 여럿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퍼거슨 같은 고수는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을 볼 줄 안다.
중원에서는 램파드가, 측면에서는 호날두가 첼시의 공격 전개를 이끌었다.
그 중에서도 호날두는 가장 많은 드리블 돌파를 성공시키고 2골에 모두 관여하며 경기 내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호날두는 첼시 공격의 흐름, 그 자체였다.
새로운 전술에 완벽하게 녹아들지 못한 선수들을 이끌었고 크랙으로서의 역할, 부진한 투톱을 대신한 득점포로서의 역할, 찬스 메이커로서의 역할까지 모두 해냈다.
그걸 간파한 퍼거슨이 호날두를 칭찬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퍼거슨 경. 언제나 그랬듯이 맨유는 이기기 힘든 팀이었어요."
"으음."
어느새 호날두와 퍼거슨이 같이 있는 장면을 찍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로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아예 퍼거슨은 호날두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잡고 사진 찍기 좋게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이 양반이 기자들에게 이렇게 친절한 양반이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호날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깜짝 놀랄만한 질문을 작게 던졌다.
"첼시에서의 생활이 별로 마음에 안 들지?"
"!?"
"너의 최종 목표는 첼시가 아닌 거야. 그렇지?"
"그건 루머일 뿐..."
"내가 잉글랜드에서 감독질만 20년이 넘었다. 근거 없는 루머인지, 아니면 사실에 기반한 스토리인지 척하면 척이야. 100% 너와 첼시 보드진 사이에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알력이 있어. 그렇지?“
“......”
“첼시 뿐만이 아니야. 이건 전통과 근본이 없는 팀들의 특징이거든. 급하게 성공하면 그게 다 자기들의 공이라고 착각을 하지. 선수든, 감독이든, 보드진이든.”
첼시의 보드진들은 그 정도가 좀 심한 느낌이지만 말이야.
확신이 깃든 퍼거슨의 말에 호날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뒤에 무슨 소스가 있는지, 아니면 정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인지는 몰라도.
퍼거슨은 이미 첼시에서의 일에 대해 100%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주제는 분명 뛰어난 감독이지만 글쎄... 지금 네 상황에서 그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맨유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 만약 네가 보드진과 싸움이 났다면... 나는 바로 구단주에게 직통 전화를 넣어 이사든, 단장이든 바로 내쫓았을 거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너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맨유로 올 수 있어. 당연히 첼시에서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과 대우로."
"맨유는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팀이다. 레드 데빌즈의 충성심과 팀에 대한 애정 역시 세계최고지. 네가 손을 뻗기만 한다면 그들은 너의 가장 열렬한 신자가 되어줄 거다."
퍼거슨은 자기 할말만 한 채 그대로 자리를 떴다.
몇몇 기자들이 퍼거슨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며 물었지만 호날두는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였다고 둘러댔다.
< 06-07시즌 - 6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