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7시즌 - 11 >
꿈에도 다시 그리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이 좌절된 탓일까.
연승 행진을 이어나가면서 맨유를 따돌리고 있던 첼시는 굉장한 부진을 겪으면서 무너졌다.
뉴캐슬 전, 볼턴 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것도 모자라서, 지금까지 리그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아스날과의 경기에서도 지고 만 첼시.
이로써 첼시의 승점은 82점, 맨유의 승점은 83점이 되었다.
고작 2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리그 테이블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팀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첼시의 보드진과 팬들, 그리고 선수들까지.
크리스티안 호날두라는 선수의 빈자리가 이렇게 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호날두가 빠진 첼시의 역습은 빠르고 날카롭지 않았으며 생각보다 볼품없었다.
호날두가 빠진 첼시의 결정력은 생각보다 끔찍했으며 득점 기회 창출 빈도 자체도 급감했다.
수비 능력은 물론이고 조직력이나 팀플레이 역시 삐걱거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윤활유처럼 그것들을 이어주는 호날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호날두 선수는 득점뿐만 아니라 첼시가 ‘첼시로서’ 경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문전 앞에서 득점을 노리다가도 적절한 수비가담으로 상대 팀의 역습을 끊기도 했었죠. 높은 활동량으로 이렇게 많은 일을 해주는 선수가 사라지니 그 빈틈을 메울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첼시의 호날두 의존도는 이미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가 없으면 공격 전개부터가 제대로 풀어지지가 않아요. 속된 말로 그 전에 첼시 선수들은 호날두에게 패스하고 그가 알아서 풀어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첼시의 심각한 부진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지요.]
‘호날두가 없어도 첼시는 여전히 강팀.’이라고 주장하던 평론가들은 몇 경기 만에 안면을 싹 바꾸고 호날두 칭찬과 첼시 까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호날두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한 첼시를 물어뜯었고 또 다시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불화 기사까지 떴다.
총체적인 난국,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첼시의 명운을 건 단두대 매치가 성큼 다가오는 중이었다.
첼시 V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의 홈인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펼쳐지는 프리미어 리그 37라운드 경기.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건 맨유와 첼시의 단두대 매치.
두 팀 다 챔스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남은 것은 리그 우승 타이틀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바 모든 것을 동원한 총력전을 펼칠 것이 예상되었다.
첼시 팬들은 이번 맨유와의 경기에서만큼은 무조건, 무조건 이겨야 한다며 각자 자신들이 믿는 신을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중이다.
챔스도 떨어졌는데 거의 먹었다 생각한 리그마저 놓칠 수는 없는 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크리스티안 호날두를 조기 복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우리는 그가 있어야 해! 이번 맨유전에서는 무조건 그가 있어야 한다고!
- 감독과 보드진들이 생각이 있으면 크리스티안을 불러오겠지. 이 한 경기에 리그 우승컵이 달려 있는데 말이야.
- 오우... 지난 시즌과 지지난 시즌 무적을 자랑하던 첼시가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역시 EPL은 다이나믹하군. 하지만 이런 식의 다이나믹함은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 우리 선수들은 분명히 리그 톱클래스 레벨이 분명한데 크리스티안 한 명이 빠지니까 왜 이렇게 불안해보이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 우승이 걸린 경기니까 자기도 생각이 있으면 조기 복귀 하겠지.
ㄴ 부상 기간이 2~3주라는데 힘들지 않을까?
ㄴ 호날두는 자기 스스로 최대한 많은 우승컵을 따내고 싶다했음. 팀을 위해서 조기 복귀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 부상 회복기간을 앞당겨서 경기에 출전하는 거,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네. 그거 되게 위험한 일임. 의사의 권고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ㄴ 솔직히 호날두는 다음 시즌에 떠날 것 같음. 계약기간도 1년 밖에 안 남았는데 재계약 의지는 없고. 어차피 나갈 선수 그냥 뛰게 하는 게 낫지. 이제 우리 선수도 아닌데.
ㄴ 마인드, 소름 돋는다. 싸이코패스야?
무리뉴 감독은 호날두에게 조기 복귀를 원한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호날두를 끝까지 출전시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보드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조기 복귀가 가능한가에 대해서 물어봤다고요?"
[그래, 그래서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다며 내가 거절했지. 그랬더니 너를 보자고 하더군.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직접.]
프랑크 아르네센이나 피터 캐넌 같은 작자가 만나자고 했으면 호날두는 싹 무시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만 구단주는 그럴 수 없었다.
화통한 그의 성격상 괜히 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적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 번에 끝내려 하고 싶었던 모양.
"알았어요. 가죠, 뭐."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직접 너의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아뇨, 그랬다가 일이 틀어지면 괜히 이상한 말만 나올 겁니다. 제가 가는 게 맞는 것 같네요."
구단주가 직접 찾아왔는데도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무리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이 수평적이라 해도 이건 한소리 듣기 딱 좋은 상황이다.
이적을 앞둔 호날두는 빈축을 사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오랜만에 보는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여전했다.
어마어마한 석유 재벌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근한 인상에 소탈한 차림.
솔직히 그의 영입 정책과 구단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인간적으로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호날두에게 반갑게 악수를 건넨 로만은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언론이 뭐라 떠들건, 보드진들의 의중이 어떻건. 나는 결코 내 선수를 혹사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호날두 선수의 몸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그 경과를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보드진들이 내 뜻을 곡해했군요. 불쾌했다면 사과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도움이 될 수 없어 유감입니다. 저는 여전히 전문의와 제 개인 트레이너의 의견에 따라 리그 마지막 경기에만 복귀할 생각입니다."
"아쉽지만 충분히 이해합니다. 축구 선수는 몸이 자산이죠. 내가 호날두 선수 입장이었어도 충분히 그런 선택을 했을 겁니다."
로만과 호날두는 그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축구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주제는 피하고자 하는 느낌이었다.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내가 듣기로 호날두 선수가 축구 선수의 성공보다 더 큰 성공을 할리우드에서 이뤘다고... 할리우드의 '황금 손'이라고 불린다면서요? 투자한 영화마다 무패행진을 이어가고 있다는데 그 비법이 궁금합니다."
"제가요? 구단주님께서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 그런가요? 아, 제가 잘못 알았네요. 호날두 선수가 아니라 호날두 선수가 자금을 대고 있는 ‘미론도’의 대표가 할리우드의 황금 손이라고 불렸었군요. 이거 오해가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뭐,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홀랜드와도 친한 사이인 것도 맞고요.”
"하하하, 제가 바보 같은 착각을 했군요."
진짜 착각했는지 아니면 떠보려고 자신을 한 건지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둘러대는 호날두였다.
필름 투자회사인 '미론도'의 대표인 마이클 홀랜드는 수많은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면서 할리우드계의 '황금 손'이라고 불리는 중이다.
그리고 축구 선수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그가 운영하는 ‘미론도’에게 돈을 대주는 투자자 중의 한명이다.
표면적으로는 이게 호날두와 홀랜드 사이의 관계였다.
하지만 실제로 홀랜드는 호날두의 대리인이었고, 미론도 역시 호날두의 지분이 다수인 호날두의 회사였다.
축구 선수인 호날두 자신이 이런 비정상적인 영화 투자 성공률을 보인다면 의심의 눈초리가 쏠릴 것이 분명하기에 방패막이를 내세운 것뿐이다.
"호날두 선수도 예상을 했다시피 이리 번거롭게 호날두 선수를 직접 만나자고 한 것은 이적 문제 때문입니다."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내가 알기로 호날두 선수는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첼시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새로운 도전을 원합니다."
호날두는 솔직하게 밝혔다.
다음 시즌부터는 첼시에서 뛰고 싶지 않았다.
로만은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으면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의 정체를 확인한 호날두는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백지 수표였기 때문이다.
"바라는 금액을 쓰세요. 그것이 곧 호날두 선수의 주급이 될 것입니다."
"이, 이건..."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호날두 선수의 가치입니다."
돈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재계약을 해달라는 로만의 제안.
자신을 한 번은 더 설득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통 크게 지르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그것을 가라앉힌 호날두.
이제 호날두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실력에 맞는 급여는 받아야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호날두’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것.
훌륭한 팀 커리어를 이룰 수 있는 팀, 그리고 자신에게 잘 맞는 팀에 가는 것이 바로 호날두의 바램.
그것을 바라본 로만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백지 수표를 집어넣었다.
"혹시 특별히 이적하고 싶은 팀이라던 지, 따로 들어온 제안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 제안은 없었습니다. 가고 싶은 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제의가 들어와야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첼시에 정이 붙었던 만큼 최대한 많은 이적료를 안겨줄 수 있는 팀에게 가고 싶습니다."
"하하, 그건 참 고마운 말이군요. 그럼... 같은 EPL 팀으로의 이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혹시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 아마도 이것이 로만의 진정한 본심이리라.
호날두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굉장한 경기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많은 승점을 첼시에게 벌어다줬고 그만큼 대단한 기록들을 세우고 갈아치웠다.
이런 자신을 같은 리그의 상대팀 선수로 맞이하게 되는 것은 누구라도 꺼리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EPL팀 역시 제가 이적을 고려하는 대상 중 하나입니다. 죄송합니다, 구단주님."
"...그렇군요. 호날두 선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로만과 호날두는 그렇게 헤어졌다.
아마도 다시 웃으면서 만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비즈니스의 세계 아니던가.
=
호날두가 떠난 후 로만은 즉시 전화를 걸었다.
그 상대는 첼시의 단장인 피터 캐넌이었다.
[이렇게 빨리 전화를 거신 것을 보니... 협상은 결렬입니까?]
"그렇게 되었네. 아쉽구만."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월드컵도 우승하고 발롱도르도 여러 번 탈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보여준 그를, 그다지 많은 주급도 주지 않고 잘 써먹었지 않습니까? 재계약 시, 그의 높아진 명성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출혈을 강요했
을 것입니다. 차라리 값싸고 경제적인 대체 선수를 구하는 것이 옳은 길이지요. 솔직히 그에 대한 구단의 의존성은 너무 큽니다. 그것은 구단주님과 제가 바라는 팀의 모습은 아니죠.]
“그건 그렇지.”
[첼시의 전술 자체가 호날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를 팔아버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꾼다면 의존성의 해소가 가능할 겁니다. 또한 그의 이적료라면 재능 있는 수많은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제 2, 제 3의 호날두
가 왜 없겠습니까?]
호날두가 재계약을 끝내 거부하자 오히려 피터 캐넌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른 보드진들은 설령 호날두를 자유계약으로 보내는 한이 있어도 1년 더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랭크 아르네센과 피터 캐넌은 이번 시즌 종료 후 즉시 호날두를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 서있었다.
그들은 그 건방진 선수가 첼시에서 하루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고, 충분히 대체할 선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를 붙잡고 있음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많은 상업적인 수익과 세계 최고 구단으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놓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어."
호날두는 첼시 선수들 중에서 유니폼의 판매가 가장 많은 선수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인' 원탑 수준으로 많았다.
물론 유니폼 판매 수익은 유니폼 제작 업체인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대부분 가져가지만, 이 판매 금액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호날두의 스타성이 크다는 뜻이고, 그를 바탕으로 높은 금액의 구단 스폰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월드컵 우승 이후, 호날두에게서 들어오는 개인 스폰서 비용이나 광고비는 날이 갈수록 뛰고 있었는데, 첼시는 초상권 단 50%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이적료 값을 다 메우고도 남았다는 경영 팀의 보고도 있었다.
이렇게 호날두는 데리고만 있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래서 로만이 이렇게 그를 붙잡기 위해 백지 수표까지 꺼냈던 것이다.
하지만 피터 캐넌의 생각은 달랐다.
[호날두 자체가 스타성 있는 선수라는 것은 뭐,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죠. 하지만 그것을 만든 구단은 바로 우리 첼시입니다. 그냥 호날두가 아닌, 우리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린 호날두가 스타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스포르
팅 시절부터 그는 어마어마한 스폰을 물고 다녔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죠.]
[지금 호날두가 말도 안 되게 높은 몸값을 받는 것은 월드컵 프리미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이 두 번 다시 유로나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메이저 대회 우승을 해내지 못했던 팀이? 피구까지 은퇴한
마당에 그들은 반드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호날두의 프리미엄도 걷혀지게 되겠지요.]
[우리는 실력뿐만이 아니라 상업적 수익까지도 그를 대신할만한 선수를 구할 것입니다. 이미 물망에 오른 실력 있는 선수들과 미래가 유망한 유망주들이 여럿 있습니다. 세계 최고 리그를 주름잡는 첼시의 성적과 그런 클럽에서 뛰고 있다는 상징성은 호
날두 같은 스타 선수들을 금방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피터 캐넌의 말에 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나 저래나 피터 캐넌은 여러 성공적인 영입을 통해 첼시를 반석 위에 올린 단장이었다.
로만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에게 신뢰를 보내기로 했다.
< 06-07시즌 - 11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