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25)

< 해야 하는 일 - 5 >

출산 예정일보다 일주일 앞서 케슬린에게 진통이 찾아왔다. 

호날두는 오늘 어디 가지 않고 집에 딱 붙어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자부했다. 

급히 케슬린의 몸을 봐주던 주치의에게 전화를 건 호날두는, 매니저에게는 구급차를 부르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케슬린의 손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줘." 

“너, 너무 아퍼.... 흐으윽!" 

“우리 아기가 엄마아빠를 일찍 보고 싶은 모양이야. 계속 옆에 있어줄게.” 

엠브런스 안에서도 진통으로 괴로워하는 케슬린의 손을 꼭 잡아준 호날두는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조금이라도 케슬린의 고통이 나아지길 바라면서. 

다시 한 번 그녀가 진통을 겪을 때, 자신이 옆에 있었음을 하늘에게 감사했다. 

날듯이 달려온 주치의는 산부인과 병원에 케슬린의 진료 기록들을 전부 전해줬다. 

엠브런스에서 실려 나온 케슬린이 분만실에 들어갈 때까지 호날두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호날두의 아버지, 그리고 케슬린의 부모님이 병원에 도착했다. 

케슬린의 부모님은 애써 걱정을 숨기는 모습이었지만 떨리는 두 손을 감추지는 못했다. 

호날두는 그들과 뺨을 맞대면서 케슬린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었고 진정을 시켜주었다. 

“어머니는요?” 

“마리아는 친구들과 캐나다로 놀러갔단다. 지금 급하게 돌아오고 있는 중이야.” 

1시간 반이면 도착한단다. 

호날두는 어머니가 빨리 도착해서 케슬린의 가족들을 진정시켜주길 바랬다. 

"후...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프로 축구 선수로 데뷔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단의 훈련 일정에 빠지지 않았던 호날두. 

데뷔 이래 최초의 훈련 불참 원인은 바로 케슬린의 출산 때문이었다.  

호날두의 어머니, 마리아 디네스는 분만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불안해하고 있을 케슬린의 부모님들께 다가가 손을 꼬옥 잡아드렸다. 

"얼마나 불안하시겠어요, 사돈...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아유, 괜찮습니다. 크리스가 좋은 말로 저희를 안심시켜줬어요." 

"순산할 겁니다. 케슬린은 지금까지 아주 건강했잖아요. 주치의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으니 이리 앉아서 좀 쉬세요. 제가 대신 상황을 지켜볼게요." 

“고맙습니다, 사돈.” 

케슬린이 분만실에 들어간 지 어느덧 7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분만실의 문이 열렸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초조해하던 호날두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날두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의사가 안고 있는 꼬물거리는 생명체였다. 

"축하드립니다!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오 마이 갓...!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나... 크리스! 너와 케슬린의 아이야. 얼른 와서 안아보렴." 

당장이라도 꼼지락거리고 있는 아기를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호날두는 의사에게 물었다. 

"산모는... 케슬린은 건강한가요?" 

"산모도 마찬가지로 건강합니다. 초산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없는 순산이었습니다." 

코끝이 찡해졌다. 

그제서야 호날두는 아기를 안아볼 수 있었다. 

그 무게가 그대로 팔에 전해졌다. 

손이 떨려왔다. 

그 감각은... 이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목이 메어왔다. 

"아이 이름이... 짓고 싶은 이름이 생각났어요..." 

"뭐라고 지을 거니...?" 

"레오카주(Leocadio). 레오카주 호날두 아베이루에요..." 

"빛나는(Leocadio)이라...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너와 케슬린의 아이로 딱 맞는 이름이야." 

호날두의 아버지 주제 디니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웃었다. 

호날두는 입술을 깨물면서 울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레오카주.”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이고 가슴이 뛰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버지, 어머니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나요?” 

“당연하지! 우리는 그만큼 너를 사랑했단다.” 

울고 있는 레오카주에게 자신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갑자기 케슬린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레오카주와 함께 그녀를 안고 싶었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될게요.” 

“크리스, 너는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야.” 

부모님의 격려를 들으면서 호날두는 레오카주의 이마를 살짝 쓰다듬었다. 

2006년 7월 27일의 일이었다. 

=== 

시즌 개막전은 하나의 시즌을 시작하는 첫 걸음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듯, 스타트를 잘 끊으면 그 기세를 계속 끌고 나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매 시즌의 개막전은 언제나 호날두에게 특별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하다 말할 수 있다. 

바로 호날두 자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고 치르는 첫 번째 공식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호날두가 맨유에서 어떤 경기력을 보여줄 지 무척이나 기대하는 중이다. 

그리고 모든 축구 팬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한국인 뺨치는 냄비근성으로 중무장한 사람들. 

조금이라도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면 '호날두는 팀빨이었다.‘ 라는 소리를 면치 못할 것이다. 

반대로 잘한다면 '역시 호날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 라며 찬양을 늘어놓겠지. 

'내 자존심 상, 전자는 절대 용납 못해.' 

이것은 세계 최고 선수라면 당연히 버텨내야 하는 기대였다. 

호날두는 이미 그것에 맞설 준비가 되었다. 

"다들 시즌 개막을 위해 구슬땀을 흘렸던 기억들을 잊지 마라.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했다. 올 시즌 프리미어 리그 팀들 중에서 우리만큼 심혈을 기울여서 칼을 갈았던 팀은 단언컨대 없다!“ 

“'우리'라는 것은 너희뿐만 아니라 나도 포함되는 이야기야. 부족했던 것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을 비워내는 과정을 수백 번 반복했다. 이번 한 시즌을 위해 나는 내 수명을 갈아 넣었어!" 

""알고 있습니다, 보스!"" 

"그래.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시즌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그러면 내가 무척 화가 나겠지? 그렇지? 내가 화가 나면 무슨 짓을 벌일까?" 

"......" 

"상대가 약팀이라 생각하지 말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최선을 다해 뛰어라. 비기는 것도 절대 용납 못해! 무조건 이겨라. 우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줘!" 

복잡한 전술지시보다 간결하고 전달력 있는 몇 마디로 맨유 선수들의 정신무장을 한층 더 강화시킨 퍼거슨. 

상대 팀은 레딩이다. 

레딩은 사실 한국인 선수 설기현이 뛴다는 것을 제외하면 호날두에게 별다른 존재감이 있는 팀은 아니었다. 

첼시에서 뛸 때도 레딩을 만나면 거의 무조건 이겼으니까. 

아, 생각해보니 체흐를 실려 가게 만든 팀이 바로 그 레딩이었지. 

[저 선수가 맨유의 유니폼을 입고 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데요. 역시 우리에겐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호날두가 더 낯이 익어요.] 

[호날두로서는 맨유에서 대 활약을 펼침으로서 그런 익숙함을 지워 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팀을 갈아치운 과거 최고 에이스가 맨유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정말 궁금하군요. 일단 오늘 몸은 굉장히 가벼운 것 같습니다.] 

[프리미어 리그 3연패의 첼시는 이제 4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노리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영입이 첼시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재미도 있을 겁니다. 이번 시즌 정말 기대됩니다!] 

지난 시즌부터 4-4-2 포메이션과 4-3-3 포메이션을 혼용해서 사용한 퍼거슨. 

개막전의 카드는 4-3-3이었다. 

첼시에서는 보통 왼쪽 측면에서 뛰었던 호날두는, 현재 4-3-3의 오른쪽 인사이드 포워드로 출전해 있었다. 

이것은 분명 상대팀의 예측을 벗어난 변수라면 변수였다. 

경기 초반에는 그렇게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팀에 녹아들면서 오른쪽 측면의 빌드업과 공격 전개를 돕는 호날두. 

조금씩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다가 기회가 찾아오면 전방으로 킬 패스를 찔러주거나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리는 호날두. 

번쩍번쩍 튀는 화려한 플레이는 아니지만 팀에 완벽히 녹아들어서 클래스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는 호날두. 

하지만... 

“아나, 저 자식 오늘 폼이 말이 아닌데?” 

무슨 약을 먹었는지 오늘 원톱 스트라이커로 나선 웨인 루니의 슈팅은 골문을 전부 비껴나갔다. 

호날두나 긱스, 스콜스 등이 창출한 많은 기회를 여러 번 무산시키는 루니. 

퍼거슨의 표정이 서서히 험악해지려는 기세가 보였다. 

‘신입이니까 골 좀 만들어줄까 했는데... 받아쳐먹지를 못하니, 원.’ 

어쨌든 현재 분위기는 맨유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골 하나만 터지면 레딩을 압살할 수 있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호날두는 자신이 결정짓기로 했다. 

간단한 헛다리짚기로 앞을 가로막는 레딩 선수들을 가뿐히 제치는데 성공한 호날두.  

골대와 약 20M 거리에서 잠시 드리블을 멈추고 공격 템포를 가다듬었다. 

‘알지?’ 

‘오케이!’ 

오버래핑하는 파트리스 에브라와 짧은 시간, 사인을 나누었다. 

사인대로 에브라는 패스하기 딱 좋은 위치로 침투했고, 호날두는 그의 발밑을 향해 깔끔한 패스를 던졌다. 

그리고 바로 페널티 에어리어로 들어가는 호날두. 

좋은 위치까지 파고든 호날두에게 이번에는 에브라가 공을 보내주었다. 

질리도록 연습한 2대1 패스 플레이. 

호날두의 골 결정력과 오프 더 볼 능력이 슛의 성공률을 대폭 보정했다.  

호날두가 강하게 걷어찬 공은 골네트를 흔드는데 성공했다. 

[크리스티안! 공 잡았습니다! 대단한 탈 압박! 에브라에게 패스! 에브라가 다시 호날두에게...! 호날두 슛! 들어갔습니다! 선제골입니다! 골을 넣은 선수는 크리스티안 호날두입니다!!] 

[맨유 데뷔전에서 멋진 데뷔골을 터트린 크리스티안 호날두! 공을 주고 파고드는 오프 더 볼 움직임이 상당히 훌륭했습니다!] 

[에브라와의 콤비 플레이도 굉장히 매끄러웠죠!? 팀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수준 높은 팀플레이가 나오는군요!] 

프리미어 리그 개막전을 맞이하여 올드 트래포드를 꽉꽉 메운 맨유 팬들. 

호날두의 슛이 골로 연결되자마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최고 선수의 최고 활약에 대한 열성적인 환호를 보냈다. 

이게 바로 호날두라는 듯, 그들에게 손가락을 흔드는 세레머니를 보여주는 호날두. 

그제서야 퍼거슨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조금 풀렸다. 

1:0으로 가볍게 앞서가는 맨유. 

하지만 레딩이 강팀도 아닌데 여기서 끝내기는 아쉽지 않겠는가? 

"라이언! 우리 4일 전에 영감님한테 뒤지게 깨지면서 연습했던 그 연계, 지금 써먹는 거 어때요?" 

"이 상황에서? 흐음... 좋아, 폴한테 말해둘게." 

퍼거슨 역시 무리뉴처럼 매 상황마다 써먹을 수 있는 선수들 간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고안하는 감독이었다. 

또한 그런 움직임이 경기에서 원활하게 드러나도록, 프리시즌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켜왔다. 

그렇게 구사되는 콤비네이션 플레이들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방금 터진 파트리스 에브라와의 2대1 패스 플레이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이런 식의 훈련법과 플레이가 한창 유행할 때이기도 했다. 

레딩은 왼쪽 수비수와 센터백의 키가 작은 팀이었다. 

그것은 곧 공중 볼에서 약점을 보인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는데 몇 번의 실험 끝에 이 구간이 노릴만한 구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호날두였다. 

호날두는 고개짓으로 터치라인에 서 있는 퍼거슨에게 신호를 보냈다. 

퍼거슨은 한쪽 눈을 깜빡이면서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을 내렸다. 

‘축구는 결코 몸으로만 풀어나가는 스포츠가 아니야. 전략과 전술이지!’ 

호날두는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나 혼자 잘났다고 뛰어다니는 선수는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다. 

하나의 팀 안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선수. 

알렉스 퍼거슨이 있는 맨유는 그 과정을 연습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였다. 

폴 스콜스가 감각적인 패스는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왔다. 

라이언 긱스의 바로 코앞에까지 공을 배급하는데 성공한 스콜스. 

긱스는 공을 툭 차올리는 동작을 통해 레딩 미드필더의 태클을 벗겨냈다. 

호날두는 전방에 있으면서도 이들의 동작이나 플레이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맨유에서 10년 이상을 함께 뛴 이들은 사인 같은 것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그 상황에서의 최적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정말 우아하고 품격이 있었다. 

긱스를 비롯한 맨유의 선수들이 전부 좌측에 치우쳐져서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레딩의 선수들 역시 그쪽으로 무게가 치우쳤다. 

자연스럽게 그라운드의 오른쪽은 수비 두께가 옅어졌고, 이 상황은 호날두에게 또 다시 기회를 열어주었다.  

레딩 감독이 그 부분을 지적하며 고함을 치기 전에 긱스의 패스는 오른쪽의 빈 공간으로 날아갔다. 

그 공을 받아낸 것은 역시 호날두였다. 

뻐엉-! 

프로 선수들의 육체 능력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긱스에서 호날두로 공이 가자마자 순식간에 10M, 20M를 주파해서 달려오는 레딩의 수비수들. 

그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뛰어와 호날두가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막았지만, 급하게 달려오느라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호날두에게 골을 넣을 수 있는 ‘각’을 제공했다. 

먼 거리를 격하고 골문을 가를 수 있는 자신의 무기를 또 한 번 뽑아드는 호날두.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강력하게 걷어찬 중거리 슛으로 날아간 공은, 골대 하단을 맞고 골라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2:0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거, 신고식 한번 요란스럽게 하네.” 

“부럽냐? 알면 좀 잘해.” 

“부럽기는! 꼴사납게 웃지나 마라.” 

“영감님이 너 노려보고 있는데.” 

“...Shit!" 

웨인 루니가 투덜거리면서 먼저 라커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호날두는 피식 웃었다. 

과거에는 둘도 없는 앙숙이었지만 지금은 간극이 많이 옅어졌다. 

올드 트래포드의 맨유 팬들은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호날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자신이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를 퍼부었던 레드 데빌즈(맨유의 서포터)들은 이제 없다. 

대신 블루스들의 야유를 받겠지. 

“과거는 과거에 불과해. 결국은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중요한 거야.”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 해야 하는 일 - 5 > 끝

ⓒ 아이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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