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야 하는 일 - 7 >
한번 기세를 탄 맨유는 파도처럼 치고 올라가면서 승승장구 했다.
선더랜드 홈 경기와 에버튼 원정 경기 모두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리를 거둔 맨유는 리그 3연승을 달렸다.
맨시티, 첼시 등이 살짝 휘청거리는 사이, 계속해서 연승을 이어나간 맨유는 어느덧 리그 테이블 1위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레드 데빌즈들은 각자 조촐한 파티를 벌이면서 이번에는 1위 행진이 시즌 끝까지 계속 되길 기도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로마, 스포르팅, 다니모 키예프와 같은 조가 된 맨유.
스포르팅은 호날두의 친정팀이자 그가 1군 무대에 처음으로 데뷔한 클럽이다.
호날두는 스포르팅에게 리그 우승과 유로파 리그 우승을 선물해주었고 많은 이적료까지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호날두는 포르투갈의 오랜 염원을 풀어준 영웅.
스포르팅 원정에서 호날두를 비롯한 맨유 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광적인 환영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위대한 영웅 크리스티안 호날두와 그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환영합니다.]
포르투갈 국기와 스포르팅 클럽 엠블럼이 박힌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스포르팅.
분명 스포르팅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간의 경기였지만 포르투갈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채로 호날두를 응원해주는 관중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서로 한 팀만 죽어라 응원하는 그런 경기가 아니었다.
맨유와 스포르팅, 그리고 호날두라는 선수를 향한 응원과 찬가가 울려 퍼졌다.
퍼거슨도 이런 원정 분위기는 처음인지 감독석에 앉아서 연신 경기장을 훑어보았다.
이 경기에서 호날두는 결승골을 넣으면서 맨유를 승리로 이끌었다.
경기장에 모인 수많은 관중들은 자신의 팀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날두를 향해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영웅에 대한 경의, 영웅에 대한 찬사였다.
호나우지뉴가 레알 마드리드의 홈에서 기립박수를 받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팀에 대한 마드리드 팬들의 조롱의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경기 승패에 관계없이 한 선수에 대한 경의만으로 이런 열광과 응원을 보낸 적이 전 세계 축구 역사에 몇 번이나 될까?
맨유의 서포터들마저도 이 위대하고 장엄한 광경에 크게 감동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스포르팅을 위해 박수를 보냈다.
어느새 원정과 홈 관중들 모두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경기를 치른 양 팀 선수들을 향해 환호하고 격려했다.
경기 종료 후, 스포르팅 팬들과 어깨동무하며 나서는 맨유 팬들의 사진이 곳곳에서 찍히기도 하였다.
“스포르팅 팬들은 저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오늘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뜨거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클럽에서도 국대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포르투갈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우며 맨유의 엠블럼을 달고 뛰고 있음에 행복합니다.”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언론은 호날두의 MOM 인터뷰와 함께 ‘진정한 스포츠의 가치를 보여준 경기’ 라며 이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축구 선수 한 명이 클럽과 국가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던 모습.
이 감동적인 일화는 앞으로 호날두의 일생에 따라다니는 미담과 역사가 될 것이다.
아직까지 시즌 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호날두의 활약에 맨유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인터뷰는 맨유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다른 팀에서도 경외와 찬사의 박수를 받을 정도로 위대한 선수가 자신들의 팀에 있다는 것은 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이제 호날두를 라이벌 팀에서 온 선수, 맨유의 우승을 막은 선수라며 불편해하는 맨유 팬들은 없다.
스포르팅에서도, 첼시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어느새 맨유의 가장 중요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
9월 23일.
이날은 바로 맨유와 첼시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맨유와 첼시의 팬들 뿐만 아니라 EPL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매치.
꼭 지난 시즌 1위와 2위 간의 대결이라서가 아니라, 이 두 팀 사이에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호날두’라는 스토리다.
첼시 팬들 입장에서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애증의 대상이다.
호날두의 활약으로 3회의 리그 우승과 창단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 공로를 모르는 첼시 팬들은 없었고, 호날두는 명실상부하게 첼시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함께한 주인공이다.
그런 선수가 리그 경쟁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레알이나 바르샤도 거절하고 맨유에 대한 이적만을 바래왔단다.
보드진들의 삽질이 크겠지만 어쨌든 블루스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첼시에게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빈자리는 컸다. 아주 컸다.
무적이라 불렸던 첼시는 현재 리그 5위.
시즌 초반은 어찌어찌 버텼지만 무득점 경기의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
확실한 득점원, 믿고 맡길 수 있는 에이스 사라진 팀의 흔들림과 추락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호날두의 빈자리는 아무도 메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첼시를 무시할 수 있느냐...? 절대 아니지. 니들 같으면 이 놈들 무시할 수 있겠어? 3번 연속 우승을 해 처먹던 놈들을?"
"절대 무시 못 하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죽을 둥 살 둥 뛰겠습니다."
"영혼을 다 바쳐서 반드시 첼시를 이기겠습니다!"
퍼거슨이 원하는 말들을 이젠 알아서 가져다 바치는 맨유 선수들.
고참이나 신입할 것 없이 아주 그냥 바짝 엎드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영감, 또 심통이다.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죽기 살기로, 영혼까지 걸면서 뛰라고 했어? 왜 사람을 히틀러처럼 만들어?"
"......"
"그냥 열심히만 해. 열심히 하면 되는데... 거기서 이기기만 되는 거야. 간단하잖아? 내가 가르친 대로, 너희가 훈련한 대로. 그대로만하면 이길 수 있으니까. 안 그러냐?"
"...커, 컨디션의 문제 때문에 경기에서 삽 풀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떡하죠?"
누가 이렇게 눈치 없는 질문을 하냐면서 고개를 돌리는 맨유 선수들.
안데르손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퍼거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한마디만 했다.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공이 안 들어간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그 때는 이 녀석한테 패스만 하면 되는 거야. 이 놈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호날두를 가리키면서 하는 퍼거슨의 말.
호날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제서야 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퍼거슨이 호날두를 보면서 잘하라는 듯 눈빛을 보낸다.
‘임마! 네가 먹는 주급이 얼만데! 당연히 그 이상으로 잘해야지!’
라커룸 독재자의 무언의 말에 호날두가 취해야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오늘도 잘하자.
=
[첼시와 맨유! 맨유와 첼시! 이 두 팀은 시즌 시작 전부터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뽑혔습니다. 그 두 팀들 간의 대결입니다. 말 그대로 승점 6점이 걸려있는 경기에요!]
[잉글랜드 최대 스포츠 베팅 사이트인 'SKY BET'에서 시즌 시작 전에 예측한 첼시의 우승 확률이 37.8%, 맨유의 우승 확률이 41.3%이었습니다. 두 팀 중에서 우승팀이 나올 확률이 무려 79%를 넘는다는 뜻이지요. 이 정도면 맨유와 아스날이 우승경쟁을
하던 2000년대 초반보다도 더 높은 수치입니다.]
[이번 시즌 첼시는 살짝 부진을 겪고 있죠. 하지만 맨유만 꺾을 수 있다면 다시 사기를 끌어올리는 거, 일도 아닙니다. 무리뉴 부임 이후, 맨유와의 상대전적에서 압도를 하고 있는 첼시.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승리가 간절한 무리뉴 감독이죠. 맨유 역시 리그 테이블 1위를 되찾기 위해서 승리가 간절합니다. 이겨야 해요!]
맨유는 잠시 동안 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그 때는 아스날이 2경기를 덜 치른 상황이었다.
아스날은 2경기를 모두 잡으면서 승점 16점으로 승점 15점인 맨유보다 1점이 높았다.
1위를 위해서 맨유는 첼시를 꺾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무리뉴와 첼시 선수들을 보며 호날두는 반가움을 드러내는 중이다.
비록 보드진과의 불화로 이적하게 된 호날두였지만 이들과의 사이는 여전히 각별했다.
그들 역시도 호날두에게 눈인사를 보냈는데, 비록 경쟁 팀으로 갔어도 이들의 우정은 깨지지 않았다.
"한 시즌만에 다시 적으로 만났네? 조심하라고. 크리스. 내 태클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어차하면 발목도 깔 수 있어."
"저의 헐리웃 액션도 사람을 가리지 않아요, 애슐리. 발목을 깐다면 그라운드를 뒹구면서 애슐리에게 레드 카드를 적립하게 해줄 겁니다."
"흐흐, 하여간 예전부터 한 마디도 안 졌지. 좋은 경기 하자고."
첼시 선수들과 악수를 하면서 말을 섞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뭐, 이런 행동을 하는 선수는 호날두 뿐만이 아니다.
잉글랜드 국대 센터백 듀오인 퍼디난드와 존 테리가 친한 것은 당연했고, 그 외에도 램파드와 스콜스, 캐릭 등도 적지 않은 친분을 드러내는 중이다.
한 리그에서 축구를 오래 해왔던 만큼 친분이 쌓이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경기가 시작하면 바로 돌변하겠지.'
그게 바로 팬들이 바라는 프로 축구 선수의 자세니까.
그라운드에 나오기 전, 드레싱 룸에서 무리뉴 감독과 만난 호날두.
현재 무리뉴의 표정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 호날두가 이적하면서 존 테리 등과의 불화가 더 심해졌다고.
자신의 위치와 입지에 대한 불안감을 심각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인테르로 가서 완벽하게 부활하는 흐름을 알고 있는 호날두는 그의 앞날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삐이익-!
맨유
루니-테베즈
긱스-스콜스-캐릭-호날두
에브라-퍼디난드-비디치-브라운
반 데 사르
첼시
조 콜-셰브첸코-말루다
에시앙-마케렐레-미켈
애슐리-테리-페레이라-타이
체흐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4-3-3이 아닌 4-4-2로의 회귀를 선택한 맨유.
전통적인 4-4-2와 4-3-3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첼시와 맨유 팬을 제외한 축구 팬들은, 경기 승패와 상관없이 화끈한 경기력과 치열한 승부를 벌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
오른쪽 윙에서 프리 롤을 부여받은 호날두.
마치 베르캄프를 연상케 하는 깔끔한 볼 트래핑 이후, 뒤를 도는 동작으로 압박하는 에시앙을 제치는데 성공했다.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바로 측면 돌파를 시도하는 호날두.
툭, 툭, 툭, 툭. 뻥!
조 콜의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에 잠시 붙들렸지만 단단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결국 공을 끝까지 지켜내면서 반대편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그것을 이어받은 테베즈의 멋진 발리슛이 아깝게 골문을 스쳐지나가면서 골이 되지는 못했지만 나름 위협적인 모습을 만들어낸 것에 만족했다.
이는 한 경기의 수많은 장면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첼시로서 답답한 것은, 계속 이와 같이 '맨유만' 공격하는 상황만 연출된다는 것이다.
[아...! 공을 또다시 뺏깁니다, 말루다! 파트리스 에브라의 철통 수비를 도무지 뚫어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지공 상황에서는 정말 속수무책인데요?]
[정말 오랜만에 셰브첸코에게 공이 닿았습니다. 셰브첸코의 슛! 그러나 골대 위를 향합니다. 아직까지 셰브첸코는 유효 슈팅을 때리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조 콜과 호날두의 볼 경합! 역시 크리스티안 호날두! 높은 타점으로 공을 따내죠. 스콜스에게 패스합니다. 헤딩 기술도 상당히 좋아진 모습입니다.]
[퍼디난드와 비디치의 합동 수비에 꼼짝 못하고 공을 내주는 말루다! 오늘 말루다와 셰브첸코는 정말 쉽지 않은데요! 그저 무기력합니다.]
맨유가 총 6번의 슈팅, 2번의 유효 슈팅을 때리는 동안 첼시는 단 1회의 슈팅과 0번의 유효 슈팅만을 기록 중이었다.
볼 점유율에서도 64 대 36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첼시.
첼시는 맨유에 비해 볼 점유율에 집착하는 팀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볼을 따내지 못하고, 또 따내더라도 그것을 이어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할 팀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경기력에서 털리고 있는 것이다.
[요 근래 첼시가 이렇게까지 밀린 적이 있었나요!? 세 시즌 연속 챔피언의 자리를 수성했던 팀답지 않게 너무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이곳이 맨유의 홈이라는 페널티가 있긴 해도 이렇게까지 밀릴 팀이 아닌데요. 지난 시즌 변칙 쓰리 백으로 맨유를 격파한 것이 격세지감처럼 느껴집니다.]
해설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긱스의 패스를 이어받은 루니가 멋진 골을 넣으면서 스코어 상으로도 앞서가게 되었다.
전반 2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려서 경기에 임한다면 첼시에게도 조금은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 오비 미켈이 저질스러운 반칙으로 퇴장 당하자 첼시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이건 내가 알던 첼시가 아닌데.'
첼시는 EPL에서 맨유와 투톱으로 뽑힐 만큼 가장 좋은 스쿼드와 선수진들을 보유한 팀이었고, 또 언제나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팀이었다.
호날두가 첼시에서 뛸 때만하더라도 램파드, 드록바 같은 선수가 없어도 단 1실점에 이렇게 무너지는 적은 없었다.
다들 악착 같이 달라붙어서 적어도 이기려는 의지를 보여 왔다.
그런데 지금의 첼시는... 그런 것마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 해야 하는 일 - 7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