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25)

< 위대한 도전 - 13 >

경기 시작 휘슬이 불리기 전. 

호날두는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의 관중석을 쭉 둘러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경기장을 딱 반으로 갈라서 넘실거리는 것이 마치 검투사들의 대결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로마의 시민들 같았다. 

이곳의 모습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위대한 발걸음의 종지부를 찍을 곳. 

마음에 새겨놓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측의 벤치석에도 시선이 갔다. 

라이언 긱스, 안데르손, 존 오셔, 대런 플레쳐 등의 선수들은 마치 석상과도 같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날두의 후배인 나니는 아예 두 손을 모으고 고개까지 숙이는 중.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는 압박감, 트레블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라는 부담감은, 아무리 퍼거슨이 선수들을 잘 다독여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하하, 선발로 경기 뛰는 우리보다 저 녀석들이 더 긴장한 것 같네.” 

“크크... 그러게. 우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으하암~! 난 심지어 졸리다고! 빨리 경기 끝내고 맥주나 실컷 먹었으면 좋겠네!” 

동료들의 쓰잘데기 없는 허세를 들으면서 호날두는 마지막으로 몽을 풀었다.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발목을 돌리고 허리를 비틀었다. 

일말의 뻐근한 느낌조차 없다. 

몸은 이미 만전의 상태. 

검투사는 싸울 준비를 마쳤다. 

고개를 이리저리로 흔드는 호날두의 시선이 닿은 곳은 벤치석과 관중석 사이에 있는 스텝진들의 자리. 

그곳에서는 과거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지금은 친한 동료 선수가 되어버린 박치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맨유 유니폼이 아닌 잿빛 양복을 빼입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결승전 벤치멤버에도 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호날두와 박치성의 시선이 맞닿았다. 

박치성은 자신의 처지에 낙담하지 않고 호날두에게 오늘 경기 잘하라고 눈인사를 보냈다. 

호날두는 미소로 화답했다. 

어제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일 결승전 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정말로 유감이야. 이건 분명 영감의 커다란 실수임이 분명해. 치성같이 큰 경기에서 강한 선수가 명단에도 없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위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 보스가 이런 데에서 실수할 분은 아니잖아.] 

자조적으로 웃는 박치성의 어깨를 주무르며 호날두는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겠지. 영감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바꾸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년 결승전 때를 기대해. 그 때는 분명 선발 출장을 할 수 있을 거야.] 

[하하... 말이라도 고맙다, 크리스.] 

박치성은 자신의 선발 출장 여부는 제쳐두고서라도, 내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또 다시 오르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호날두는 알고 있었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맨유는 다음 시즌에도 챔스 결승전에 진출하고, 펩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바르셀로나와 붙게 된다는 것을. 

호날두와 박치성은 그 때 듀오를 이루어서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뽑히는 그들과 맞서게 될 것이다. 

결승전이 열리는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는 맨유와 첼시를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붉은 유니폼과 푸른 유니폼은 이 거대한 경기장의 좌석을 가득 메웠고, 이들이 내뿜는 열기와 열망은 추운 모스크바의 대지를 달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맨유 선수들과 첼시 선수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수많은 서포터들의 염원은 차가운 바람을 타고 그라운드에 전해졌다. 

첼시와 맨유의 선수들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삐이이익-! 

와아아아아-!! 

[로벤의 크로스! 퍼디난드가 헤딩으로 끊어냅니다! 오늘도 대단한 수비를 보이는 퍼디난드! 아쉬운 표정을 짓는 드록바!] 

[바로 호날두에게 패스하는 퍼디난드! 좋은 위치에서 받았습니다! 크리스티안 달립니다! 엄청난 속도!] 

[올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만 13골을 넣은 호날두의 질주가 무섭습니다!] 

호날두는 각 잘 잡은 상태에서 중거리 슛을 때렸다. 

웬만한 골키퍼는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빠른 타이밍의 강력한 슛이었지만 리그 톱클래스 골키퍼인 페트르 체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동물적인 선방으로 그것을 쳐내는 체흐는 곧바로 일어서서 포효했다. 

역시 자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골키퍼. 

블루스들이 푸른 깃발을 흔들며 같이 환호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코너킥 상황. 

파트리스 에브라가 찬 공이 공중을 가르며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왔고 네마냐 비디치의 헤더 슛이 미하엘 발락의 허벅지에 맞고 튕겨지면서 세컨 볼 찬스를 만들었다. 

그 사이를 들소처럼 침투한 웨인 루니의 강한 슛! 

하지만 아쉽게도 골대를 살짝 벗어났고 루니는 부족한 머리 숱 생각도 못한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다들 침착하게 해!! 합이 하나도 안 맞잖아!" 

“템포를 늦춰서 다시 한 번 가자!” 

스콜스의 말에 호날두는 동의했다. 

맨유가 공격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좋았지만 지금은 잠깐 숨을 고르고 템포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스콜스와 호날두가 아는 것을 퍼거슨이 모를 리가. 

그는 중원의 점유율을 높일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하그리브스에게 조금 더 측면 지향적인 플레이를 요구했다. 

지금껏 오른쪽 윙어로는 거의 출전하지 않았던 하그리브스. 

하지만 오늘 그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오른쪽 라인의 공격을 주도하는 중이었다.  

이 한 번의 경기를 위한 변칙 전술, 퍼거슨의 노림수는 바로 하그리브스의 운영이었다. 

[볼 커팅에 성공하는 하그리브스! 첼시의 턴 오버를 유도합니다! 오늘 그의 활약이 아주 대단한데요?] 

[그는 멀티 플레이어이긴 했지만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거든요. 이런 선수를 측면에 배치한 퍼거슨 경의 배짱이란... 근데 그게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모습입니다!] 

[퍼거슨 감독이 믿고 기용한 이유를 보여주는 하그리브스입니다.] 

하그리브스가 상대해야 하는 첼시의 오른쪽 라인에는 애슐리 콜을 비롯해서 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있다. 

피지컬, 축구 지능, 기슬적 센스 등 동 포지션에서 뭐하나 빠지는 능력이 없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수들. 

하지만 하그리브스는 그런 이들과의 경합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끝끝내 공을 따내 역습전개를 이끌어냈다. 

하그리브스는 박치성, 나니, 긱스 등 쟁쟁한 윙어들을 제치고 자신이 선발 출전 명단에 들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퍼거슨의 용병술을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그리브스의 활약은 공격진 전체가 살아나도록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맨유 선수들에게도 투혼을 불어넣었다. 

캐릭은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적인 플레이로 중원에 안정감을 더했고 비디치와 퍼디난드의 협력 수비는 과연 명불허전. 

아무것도 못하고 고립된 드록바와 로벤이 짜증을 부릴 만큼 이들은 첼시의 역습을 훌륭하게 틀어막았다. 

맨유의 왼쪽 라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는데 첼시의 오른쪽 라인인 조 콜, 발락과의 싸움에서 호날두, 에브라 콤비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맨유는 무려 62%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져가며 공격주도권을 확실하게 따낼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득점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시 첼시의 자랑인 단단한 방패 때문. 

애슐리 콜-존 테리-카르발류-에시앙의 포백 라인과 수문장 체흐의 존재는 노도처럼 몰아치는 맨유의 공격에도 첼시가 무실점을 이어가도록 도왔다. 

뚫고자 하는 맨유와 막고자 하는 첼시. 

경기는 점점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징글징글하다! 코너킥 상황. 젠장, 이번에는 반드시 골 넣는다!' 

벌써 4번째 코너킥이다. 

워낙 첼시의 수비가 단단하다보니 앞선 3번의 코너킥에서 모두 득점에 실패했다. 

세트피스 공격에서 강점을 보이는 맨유 답지 않은 모습. 

하지만 그 상대가 첼시라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첼시의 세트피스는 EPL 최고였으니까. 

  

호날두는 살짝 짜증이 났다. 

코너킥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견제가 극심한 탓도 있었지만  정말 첼시 선수들의 세트피스 수비 능력은 대단했다. 

코너킥 키커인 스콜스가 조용히 호날두와 눈을 마주했다. 

퍼디난드, 비디치 등 제공권이 뛰어난 맨유 선수들을 고르던 그는 호날두에게 공을 주기로 한 모양. 

공을 차는 것을 확인한 호날두는 이번에는 반드시 헤더 슛을 성공시키리라 다짐하며 힘을 주고 땅을 박찼지만 그만 누군가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앞에는 드록바, 뒤에는 애슐리 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호날두를 보며, 드록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허. 그렇게는 안 되지, 크리스." 

“우리가 핵심 선수를 가만 놔둘 것 같아?” 

"진로방해는 반칙이에요. 우리 페어플레이 하죠?" 

하지만 드록바의 눈빛은, 주심에 눈에만 띄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하던 상관없다 였다. 

앞뒤에서 찍어 누르는 옛 동료 선수들 때문에 호날두는 공을 잡을 수 없었지만 용케 빈틈을 비집고 헤더 슛을 날린 선수는 또 있었다. 

바로 웨스 브라운. 

물론 체흐의 놀라운 선방에 막히긴 했지만 말이다. 

4번의 코너킥 상황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한 첼시. 

애슐리 콜과 드록바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주 잠깐 방심해서 자신의 마크를 놓쳤다. 

이 순간, 호날두는 하늘의 계시를 느꼈다. 

“어? 어!?” 

“젠장! 저 녀석을 막아!” 

체흐의 손에 튕겨나간 공의 궤적을 따라 호날두는 급하게 스퍼트를 올렸다. 

애슐리 콜과 드록바를 비롯한 첼시 선수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이미 가속도를 밟고 있는 호날두를 쫓는 것은 전 세계 그 어떤 선수도 불가능한 일. 

호날두는 공이 날아가는 궤적과 슛을 쏠 정확한 타이밍 계산을 끝낸 후였다. 

그의 신체나이는 겨우 23살에 불과했고 선수 경력도 그리 길진 않지만, '정지우'로서 뛰었던 경험이 더해졌고 여기 많은 경기 영상들을 복기하고 분석한 결실이 추가됐다. 

호날두의 축구 지능은 노련한 30대 중후반 선수들 못지않았다. 

한쪽 발에 강하게 힘을 주어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오른 호날두는 다른 한쪽 발 역시 하늘을 향해 띄웠다. 

공이 나아가는 궤적, 슛을 쏘아 보낼 최적의 공간, 첼시 수비 선수들의 위치까지 모두 계산에 넣은 호날두는 최적의 순간, 허리가 돌아가는 힘을 이용해서 강력한 발리슛을 때려 넣었다. 

뻐어엉-! 

묵직한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첼시 선수들이 어찌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총알탄처럼 쏘아져나간 이 공은.  

체흐의 반사 신경을 아득히 뛰어넘은 속도로 날아가 골문 좌측 아랫부분을 통과했다. 

골네트가 출렁였다. 

골이었다. 

[웨스 브라운의 헤딩! 페트르 체흐의 놀라운 선방! 어! 어어!? 세컨 볼, 호날두! 호날두!?] 

[호날두 선수 슛! 이야아아아!! 들어갔습니다-! 들어갔습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판타스틱한 발리슛이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첼시의 수비를 뚫어냅니다! 이건 그 어떤 골키퍼가 오더라도 막을 수 없는 슛이었습니다!] 

[호날두가 골을 만듭니다! 이번에도 역시 호날두가 골을 만들었습니다! 친정팀에게 강한 일격을 날리는 호날두입니다!!] 

[자! 이제 1:0으로 앞서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붉은 유니폼을 입은 레드 데블즈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영광이 성큼! 이들의 앞에 다가왔습니다!!] 

친정팀을 생각한 호날두는 머리에 두 손을 올리며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맨유 선수들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조용히 골의 기쁨을 갈무리하는 호날두에게 달려와서 엉겨 붙은 이들은 짐승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며 희열을 쏟아냈다. 

그 중 조금 이성이 남아있는 동료들도 물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미친 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야!?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젠장!” 

“지단의 챔스 결승골보다도 멋졌어! 푸스카스 상을 받을만한 골이야!”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번 발리슛 득점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첼시 팬들조차 그렇게 생각했는지 원래대로라면 단체로 거친 야유를 쏟아내야 하는데, 그저 멍하니 리플레이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니까! 

"파트리스, 네가 말해 봐! 정말로 내 골이 지단의 챔스 결승골보다 멋졌어?" 

"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최고였어!" 

“자기 대표팀 선배라고 편들어주는 거냐? 동료보단 선배라 이거야?” 

“헤헤헤... 그래도 넌 정말 최고야, 크리스! 머리카락이 완전 곤두섰다고!” 

                                         

"그래, Shit! 너는 완전 미친놈이야! 그래도 미친놈인 네가 우리 팀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루니의 헛소리를 들어주면서 호날두는 맨유 선수들 한명 한명과 모두 포옹했다. 

이 짜릿하고 환상적인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공유하고 싶어서.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퍼거슨과도 달려가서 이 기분을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또 뽀뽀해주겠다고 덤벼들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한 골만 더 넣자고! 아예 승부를 빨리 결정지어 버리는 거야! 우리가 그 어떤 팀들보다 압도적인 팀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자고!" 

                                                                                                                 

                                                                                                                

호날두의 말에 흥분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 그리고 트레블. 

정말 손 안에 다가온 것 같았다.

< 위대한 도전 - 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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