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 2008 - 2 >
툭, 툭, 툭, 툭
시망의 패스를 이어받은 호날두는 짧은 시간 전방을 훑으며 ‘길’을 찾았다.
라인을 그은 채 촘촘히 배치된 수비진들의 모습은 호날두에게 갑갑함을 느끼게 했다.
잠깐 간을 보는 듯 하다가 무작정 공을 차고 달리는 호날두.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양면으로 달려드는 람과 히츨슈페르거.
라 크로게타를 펼치는 호날두에게 람이 먼저 몸으로 들이받아 균형을 잃게 한 후 히츨슈페르거가 발 밑 기술을 이용, 공을 탈취하려 했다.
거친 몸싸움에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와중에도 공을 쳐내서 데쿠에게 패스하는 호날두.
주심을 힐끗 바라봤지만 문제없다는 표정이다.
'이 정도 몸싸움은 봐주겠다는 거로군. 부디 이 판정이 일관성 있게 나왔으면 좋겠는데...'
볼 경합 도중 신체 접촉은 없을 수 없다.
람이 진짜 대단한 것은 그 찰나의 순간에 공을 먼저 건드리고 그 다음 몸을 밀침으로서, 방금 상황이 정당한 볼 경합 상황이었음을 주심에게 어필한 것이다.
정말 웬만큼 거친 플레이가 아닌 이상, 공을 먼저 건드리면 주심은 결코 파울을 선언하지 않기에.
아주 영리하고 모범적인 수비.
괜히 이 선수가 다니엘 알베스와 함께 2010년대 최고의 풀백에 선정된 게 아니다.
"헤이, 너무 거칠게 플레이하지는 마. 방금 꺼는 내 발목을 노리고 들어온 태클인 줄 알았다고."
"그런 저질스러운 태클은 내가 하지 않아. 그리고 너야말로 우리 팀이 지금 탈락 위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영어를 할 줄 알았나.
호날두는 일단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레프트백에서 뛰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포지션은 라이트백.
포지션을 변경한 이후 역대급의 폼을 보여주는 람은 전성기의 메시, 호날두라도 가볍게 지워버린 적이 있을 만큼 위대한 선수.
아무리 현재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동세대 비교불가 원탑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런 호날두에게도 필립 람은 절대로 가볍게 볼 선수가 아니었다.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양 팀 모두 서로의 골대에 많은 슈팅을 쏘았음에도 득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기를 이대로만 끝낼 수 있다면 독일로서는 어느 정도 만족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 대표팀 입장에서는 사실 이 경기에 온 전력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결국 토너먼트에서의 경기거든요. 독일이 이렇게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생각을 바꿔서, 비주전 선수들을 투입시켜 핵심 선수들의 체력을 비축하는 것
도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
[뭐, 스콜라리 감독도 분명 생각한 바가 있을 겁니다. 지난 4년간 우리 포르투갈에게 잊을 수 없는 영광의 시간들을 함께 했던 스콜라리 감독을 믿습니다.]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포르투갈 국가대표 감독 경력을 마감하게 된 스콜라리.
포르투갈에게 첫 유로 우승컵과 월드컵 우승컵을 선물해준, 이미 포르투갈의 레전드 감독이기도 한 그의 개인 커리어는 정말 화려했다.
2002 월드컵 우승, 유로 2004 우승, 2006 월드컵 우승까지
전무후무한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이룬 스콜라리 감독은, 명실상부한 이 시대 최고의 국가대표팀 감독이었고, 아예 이번 유로까지 우승하여 4연패를 위업을 찍고 싶어 했다.
어쩌면 '정지우'가 호날두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의 최대 수혜자는 스콜라리 감독인지도 모른다.
‘아니지. 스콜라리도 멘데스 에이전시 소속이니 결국 조르제 멘데스가 진짜 수혜자일수도...’
호날두, 무리뉴, 스콜라리 등의 성공을 등에 업은 멘데스 사단은 원래의 흐름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했고 벌써부터 축구계를 쥐락펴락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다시 한 번 멘데스 에이전시의 지분을 사들인 것이 옳은 판단이었음을 깨닫는 호날두다.
"독일은 강력한 우승 경쟁 팀이다. 떨어트릴 수 있으면 떨어트리는 게 무조건 좋아!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 경기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 명제는 전력을 최대한 보전한 상태로 토너먼트에서 올라가는 거야. 다들 몸조심하고 무리한 플레이는 삼가도록 하자."
결국 독일을 꺾기 보다는 주전 선수들 체력을 보충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인 듯, 스콜라리 감독은 후반전에는 수비적인 전술을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호날두를 비롯한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후반전 경기를 준비하는 포르투갈 선수들.
호날두는 고개를 돌려서 자신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살짝 김이 빠진 표정.
이유는 잘 알고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바뀌어서 다들 의욕이 조금 떨어졌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뭐...”
“솔직히 골득실 따져도 우리가 1위로 8강 진출할 것이 확정적인데 보스는 너무 소극적으로 나서려는 것 같아서 좀 그러네. 토너먼트는 기세싸움인데.”
불평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호날두는 미소를 지었다.
“수비적으로 나선다고 해서 꼭 득점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 우리는 보스의 지시를 따르면서 골을 넣으면 되는 거야.”
=
독일 선수들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독일 국대팀, 독일 클럽팀들은 선수들 간의 조직력이 정말 장난 아니다.
이런 팀은 한 개인이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다 뚫고 들어가 골을 넣는 것이 매우 어렵다.
국대와 국대끼리의 경기에서는 특히 독일의 촘촘한 조직력과 연계 플레이가 더 잘 드러난다.
클럽과의 경기에서는 도장 깨기 하다시피 수많은 팀을 때려 부수던 전성기의 메시, 호날두가 독일과의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괜히 힘을 쓰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런 팀을 꺾기 위해서는 허를 찌르는 일격이 필요했다.
"파울루, 높은 크로스를 조금 더 자주 해줘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공중전의 비중을 높여야겠네요."
"흐흐, 그 작은 친구가 너를 참 성가시게 하는 모양이야?"
“하아~ 지독하게 달라붙는데 정말 죽겠습니다.”
국대 팀에서, 클럽에서 오래 뛴 페레이라와 호날두는 척하면 척이었다.
완벽한 육각형 풀백의 대명사인 필립 람은 호날두를 상대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지만 단 하나의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작은 키.
호날두와 람은 약 20cm 가까이 신장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몸이 바윗돌처럼 딴딴하고 신체밸런스가 좋아도 타고난 ‘높이’의 격차는 어쩔 수 없는 것.
"하긴. 람은 정말 잘하는 선수로도 유명하지. 좋았어, 그가 젖 먹던 힘까지 뛰어도 절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크로스를 올려주지!"
"내 생각에 이번 경기는 아주 작은 점수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 날 것 같습니다. 파울로의 두 다리에 오늘 경기의 결과가 달려 있어요."
“오우, 그런 부담은 사양할게. 나는 너처럼 부담감을 경기력으로 치환시키는 놈은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페레이라였지만 그의 실력은 확실했다.
자신의 키에 딱 맞게 배달되는 높은 크로스를 보고 호날두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환상의 짝꿍이다.
높은 제공권을 이용해서 공중 볼을 따내고 깔끔한 트래핑, 볼 터치 기술로 바로 슈팅 각을 잡는 호날두.
단단하게 굳어진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일순간 팽창하면서 공을 걷어찼다.
람이 태클을 하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
뻐엉-!
옌스 레만의 놀라운 선방이 아니었다면 바로 골로 연결됐을 듯한 강슛.
득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제대로 된 유효 슈팅을 쏘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계속 맞붙던 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것이 호날두를 유쾌하게 하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페레이라와 알베스가 호날두에게 높은 크로스를 몰아주었고 호날두는 마치 포스트플레이 하듯 높게 전진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람이 고전하자 메첼더가 가담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호날두보다 키가 컸고 점프력도 좋은 센터백이다.
이 둘의 조합이면 호날두의 공중 볼과 드리블을 모두 견제할 수 있을 거라는 독일 감독의 생각.
“네가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우리를 모두 뚫어내진 못할 거다.”
결의어린 눈빛으로 호날두를 노려보는 메첼더.
하지만 호날두는 그저 코웃음만 쳤다.
'애초에 드리블로 뚫으려는 생각은 없었어.'
메첼더와 람은 소속팀이 다르다.
또한 그는 람처럼 최대한 파울을 지향하는 식의 수비가 아닌 투박하면서도 투쟁적인 수비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호날두가 노리는 바였다.
삐익-!
람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호날두를 메첼더가 어깨로 강하게 밀어 넘어뜨리자 주심이 반칙을 선언했다.
독일 선수들이 항의했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호날두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면서 웃었다.
'교묘하게 람의 다리 부분을 가렸지.'
호날두는 주심과의 방향까지 계산하고 그쪽으로 점프했고 넘어졌다.
몸싸움에서 람에게 밀려 넘어진 호날두는 이미 공을 빼앗겼고 그 상태에서 메첼더가 무리하게 밀치고 들어왔다며 주심은 판단했다.
만약 이 두 과정이 따로 일어났다면 주심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바라던 대로 프리킥 찬스를 얻은 호날두.
거리는 골문까지의 약 30~35M.
바로 골을 노려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확률 낮은 도박.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생각하던 호날두는 페페와 눈이 마주쳤다.
'크리스.'
'오케이.'
눈빛만으로 두 사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다.
짧은 심호흡 끝에 강하게 공을 걷어 찬 호날두.
기다렸다는 듯이 독일과 포르투갈 선수들이 그쪽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호날두가 찬 공에 걸린 강한 회전은, 독일의 골문을 7,8M 앞두고 급하게 휘어지도록 만들었다.
호날두의 전용, 바나나킥!
그리고 그렇게 휘어진 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선수는 바로 페페!
호날두의 눈짓을 받았던 그는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공이 나아갈 위치를 꿰고 있었다.
로켓처럼 치솟는 그의 머리에 맞은 공은 옌스 레만의 손을 넘어서 독일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골이었다.
이예예예예예-!
온갖 난장을 떨면서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페페는 잔디 위에 철길을 그리며 미끄러졌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그런 페페에게 엉겨 붙으며 같이 환호하고 기뻐했다.
가장 열정적으로 좋아해주는 사람은 당연히 포르투갈의 축구팬들!
호날두는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박수를 취는 시늉을 해주었고, 그 모습을 본 포르투갈 관중들은 더욱 열렬히 페페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번이 첫 국제 대항전 출전인 페페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적진 않았지만 이번 골은 그런 걱정을 전부 불식시켜 줄 것이다.
'생각보다 프리킥의 정확도가 많이 향상됐어.'
절묘하게 페페의 바로 앞을 향해 휘어지는 프리킥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운 킥이었다.
청소년기 때처럼 하루하루가 다른 폭발적인 성장세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날두는 조금씩조금씩 더 나은 선수가 되는 중이었다.
=
삑-! 삐이익!
경기가 종료되었다.
스코어는 많은 득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호날두의 생각대로 1:0.
실점 이후부터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몰아치던 독일의 파상 공세를 끝끝내 막아낸 포르투갈의 승리.
독일의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당연하게도 하나같이 분하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 포르투갈과 독일의 경기력 차이는 오히려 독일이 더 좋았으면 좋았지 절대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이제 그들은 패장이 되어서 폴란드와 크로아티아의 경기 결과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희비가 엇갈린 모습 속에서 호날두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람에게 다가갔다.
오늘 자신과 가장 많이 부딪친 만큼 그의 실력과 역랑에 대해서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호날두.
비록 독일이 패배했지만 추가골 기회를 여러 번 무산시킨 것은 바로 람의 공이 컸다.
그와 같은 곳에서 뛰게 될 일은 앞으로도 없었지만, 람은 호날두가 존경하는 선수 중에 한명이다.
"네 수비력은 훌륭했고. 오버래핑 이후 공격력도 좋았어.“
"...그런 나를 물 먹여서 실점 빌미를 만들고 내 크로스도, 패스도 다 막아낸 너는 뭔데?"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 람.
호날두와 람은 지금껏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지만, 오늘 90분 동안 함께 경기를 뛰면서 무언의 교감을 나누었다.
그것은 서로를 친근하게 만들어주었고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윙백으로서의 재능도 있다더라. 실력 발휘 좀 했지."
“확실히 그런 것 같더라고. 하지만 다음번에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거야."
"물론, 너라면 충분히 더 발전할 수 있을 테지. 이게 전력도 아닐 거고."
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마치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말하네. 우리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나?"
"미래의 적이 될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의 결과라고 알아둬. 그리고... 조금 있다가 ‘더 높은 곳’에서 붙을 때는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응?"
"이만 가볼게. 또 만나자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람의 유니폼을 낚아챈 호날두.
자신의 유니폼을 람에게 준 채 자리를 떠났다.
< 유로 2008 - 2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