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 2008 - 3 >
호날두가 남긴 마지막 말이 왠지 모르게 여운이 남았다.
진의를 파악하느라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람.
그런 람에게 독일 국가대표 선배들이 다가왔다.
"필립, 너 크리스티안 호날두와 아는 사이였어?"
“아뇨.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흐음. 그런 것 치고는 친하게 말 잘하던데.”
"와우~ 호날두가 직접 네 유니폼과 바꾸러 올 줄이야. 벌써부터 최고의 선수에게 인정받는 기분이 어때?"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진 팀은, 보통 유니폼 교환을 먼저 청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경기를 지켜본 서포터와 팬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에서.
현 시대 최고의 축구 스타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같은 선수들에게조차도 경외의 대상이었고, 그의 유니폼을 얻고 싶어 하는 선수들도 독일 팀에 많았다.
유니폼을 교환하면서 말이라도 걸고 싶어 했지만, 조별리그를 통과하느냐 마느냐가 걸려있었기에 다들 꾹 참았다.
그런데 호날두가 직접 와서 발락이나 슈바인슈타이거, 클로제도 아닌, 람의 유니폼을 가져갈 줄은 몰랐다.
“자기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보통 먼저 다가가려 하지 않을 텐데.”
"그 녀석이 좀 독특한 녀석이긴 하지. 필립의 실력이 우리 중 최고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일 수도 있고,"
호날두와 한 시즌을 같이 뛰었던 미하엘 발락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람과 한번이라도 함께 뛰어보거나, 맞대결을 한다면 낭중지추처럼 드러나는 그의 실력을 모를 수가 없다.
독일 대표팀의 차기 주장으로도 점 찍혀진 람은, 그 호날두에게도 관심을 자아낼 만큼 훌륭한 선수인 것이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 결국 저희는 졌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호날두와 유니폼을 교환했죠. 보면서 팬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지는 않을 거야. 네가 교환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크리스가 와서 바꿔간 거잖아. 팬들도 이해해 주겠지. 흠... 뭐, 우리는 이대로 독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대표팀 주장인 미하엘 발락의 씁쓸한 말에 독일 선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기력이 어떻고 간에 독일은 포르투갈에게 패배했다.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언론의 평가까지 겹치면서, 독일 축구팬들은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메이저대회 우승을 꿈꿨다.
만약 이대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한 채 탈락한다면 정말 그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폴란드와 크로아티아! 결과가 나왔어! 크로아티아가 이겼다!"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 요아힘 뢰브의 외침에 독일 선수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독일이 졌고 크로아티아가 폴란드를 꺾었다.
최악의 상황, 이제는 골득실을 따져 봐야한다.
만약 2:0 스코어 이상으로 폴란드를 꺾었으면 독일은 여기서 탈락이다.
"스코어는 1:0! 따라서 우리는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휴우-! 천만다행입니다. 신이 우릴 도왔군요."
"예쓰! 그럼 그렇지! 우리 전차 군단이 겨우 조별 리그에서 탈락할 리가 없지!"
"폴란드 녀석들이 우리 엿 먹이려고 일부러 크게 져줄 것 같았는데!“
“그 녀석들도 축구 선수로서 최소의 자존심은 있었던 모양이지!"
죽다 살아난 주제에 열심히 허세를 부리는 독일의 전차들.
독일 현지에서는 ‘우리는 8강 진출 성공아 아닌, 8강 진출을 당했다!’, ‘다른 팀의 부진으로 겨우 턱걸이 진출에 성공한 독일 팀, 무엇이 문제인가?’ 등으로 실컷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어찌됐건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셈.
토너먼트에서 좋은 활약으로 그들의 실망을 풀어줘야 할 것이다.
"8강 진출 성공했으니... 차근차근 올라가서 들어보자고, 우리의 우승컵을."
주장 발락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선수들이 없었다.
원래 한번 위기를 겪어야 더 불타오르는 법이 아니던가.
"토너먼트에 올라간 이상, 우리 전차 군단은 절대 지지 않는다. 이 빚을 반드시 갚아주자고!"
===
유로 2008 8강 진출 팀이 모두 정해졌다.
A조 : 1위 : 터키, 2위 : 체코
B조 : 1위 : 포르투갈, 2위 : 독일
C조 : 1위 : 네덜란드, 2위 : 이탈리아
D조 : 1위 : 스페인, 2위 : 러시아
A조 1위는 B조 2위와 붙고, A조 2위는 B조 1위와 경기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8강 토너먼트의 대진.
터키 VS 독일
포르투갈 VS 체코
네덜란드 VS 러시아
스페인 VS 이탈리아
많은 전문가들은 독일과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비교적 쉽게 4강에 진출할 것이라 예상했고,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유럽에서도 내로라하는 강팀끼리 만난만큼 치열한 경합을 벌일 것이라 평했다.
과연 그들의 예측이 맞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펼쳐진 8강전.
독일이 터키와의 치열한 승부 끝에 결국 그들을 꺾고 준결승전 진출을 확정지었다.
조별리그 이후 ‘대표팀의 위기’, ‘뢰브 감독 경질 임박!?’ 등의 기사들로 홍역을 겪었던 독일 대표팀.
하지만 이래나 저래나 독일은 ‘독일’이다.
이로써 포르투갈이 체코를 꺾고 준결승전에 오르더라도, 독일과 리턴 매치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포르투갈 대표팀 선수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쓴 웃음을 보이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역시 독일, 질기고 강하다.
[체코와 저희 포르투갈의 경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예측이 있었습니다. 한결 같았죠. 포르투갈이 체코를 무난히 꺾을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선수진의 수준이나 감독의 전술적인 역량이나 우리 포르투갈 대표팀이 뒤질 이유가 없거든요. 하지만 독일도 터키와 힘겨운 싸움을 치른 후에야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탈락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죠. 그만큼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방심은 금물이겠죠.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지난 경기와는 달리, 이번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를 배치한, 4-2-3-1 진형을 들고 나온 포르투갈 대표팀.
호날두는 오른쪽 윙어로 출전, 데쿠-시망과 함께 2선 라인을 맡게 되었다.
"우리의 영원한 캡틴(피구)은 항해사 군단을 떠났지만, 분명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캡틴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고요. 우리는 유로와 월드컵을 연이어 우승한 챔피언, 포르투갈입니다."
주장 완장을 찬 호날두의 말에 포르투갈 선수들은 다함께 구호를 외치며 전의를 다졌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
그 정도 포부를 실현시키려면, 관문을 막고 있는 격벽쯤은 깨트리고 나갈 수 있어야 했다.
체코의 수문장은 페트르 체흐.
첼시에서 오랜 기간을 같이 뛰었던 만큼 가서 친목질을 할 수도 있었지만 호날두는 결코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의 전의를 다지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체흐 역시 같은 마음인 것을 알았기 때문.
친한 옛 동료가 아닌 적과 적으로 마주한다는 생각을 두 사람은 경기 전부터 품고 있었다.
“낭만은 없어. 승패만 있을 뿐.”
=
슈우욱-!
툭! 툭, 툭, 툭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공을 향한 포르투갈 선수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시작됐다.
전체적인 선수들의 기량이 우세한 포르투갈 대표팀의 전술 테마는, 적극적인 전방 압박을 통하여 공을 잡는 체코 선수들의 실수와 턴 오버를 유도하는 것.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축구 전술 역시 진보를 거듭해왔고, 그 중에서도 특히 압박 전술이 발전을 맞이했다.
마치 클롭의 게겐 프레싱 열화판을 보는 듯한 전방 압박이 포르투갈 대표팀으로부터 구현되었다.
결국 체코는 공을 잃었다.
순식간에 턴이 뒤바뀌었고 노련한 포르투갈 선수들은 역습을 전개했다.
최전방 공격수인 누누 고메스는 반 박자 빠른 슛을 뿜어내며 경기 시작 4분 만에 첫 유효슈팅을 만들었다.
허나 체코의 수문장, 페트르 체흐가 건재했다.
날아오는 공의 방향을 향해서 정확히 몸을 날린 그는 체코의 실점 위기를 막아냈다.
“계속 몰아쳐!”
하지만 문제는 이와 같은 장면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선수들의 파워풀한 전방압박에 체코 선수들은 힘을 쓰지 못했고, 제대로 된 볼 배급도 이뤄지지 않았다.
중원 라인을 넘지 못해서 번번이 턴 오버 상황이 만들어지기 일쑤.
한마디로 지금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포르투갈이었고, 체코는 볼 소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포르투갈은 신이 나서 몰아쳤다.
"여기에요, 데쿠!"
"오케이!"
체코 선수들의 최고 요주의 인물, 호날두와 데쿠가 콤비 플레이를 펼칠 준비를 했다.
데쿠는 호날두가 달려가는 공간을 향해서 높은 패스를 날렸고, 호날두는 스퍼트를 올리며 간단히 그 공을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며 페널티 에어리어에 다다른 크리스티안 호날두.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던 체코 선수들에게 호날두는 악몽이 되었다.
“저거, 인간 맞아!?”
"아, 안 돼!"
"제기랄! 페트르, 꼭 막아줘!"
이번에도 믿을만한 것은 역시 체흐밖에 없다.
제발 이번에도 그가 막아주길 기도했지만 호날두는 훨씬 더 무자비했다.
슛 페인팅 모션에 잠시 동안 움찔거린 체흐를 비웃듯, 모션 이후 반 박자 빠른 타이밍에 나온 다이렉트 슛은.
아무리 체흐가 월드 클래스 골키퍼라 한들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출렁-!
우와아아아아!!
포르투갈 축구 팬들의 함성과 함께 1:0으로 앞서나가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가볍게 호우-! 세레머니를 펼치면서 선제골의 짜릿함을 즐기는 크리스티안 호날두.
체코 선수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그가 거대해 보였다.
=
"한 골로는 만족할 수 없다! 무조건 더 넣어! 빠샤!"
골을 넣은 자신보다 더 크게, 열정적으로 소리 지르는 이 선수는 바로 조제 보싱와, 첼시 팬들의 영원한 레전드(...)로 남을 선수다.
호날두의 시선을 느꼈는지 머쓱해하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보싱와.
호날두는 웃으면서 그와 어깨동무하며 같이 즐거워했다.
아무렴 어떠랴?
자신은 첼시 팬도 아니었고, 중요한 무대에서 넣은 골로 기분까지 최고인데!
[‘헤코르드’지의 돌케스 평론위원이 한 말이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말 그것이 딱 맞는 말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호날두 선수입니다! 우리 포르투갈의 보물인 호날두 선수가 이번에도 선제골을 집어넣습니
다!]
[이 선수만 보면 참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선수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듭니다! 포르투갈의 영웅이자 심장, 크리스티안 호날두! 이번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4번째 골을 쏘아 올립니다!]
유로 2008에서 총 4골을 집어넣으며 3골을 넣은 하칸 야킨을 제치고 다비드 비야의 기록과 동률을 이뤄낸 호날두.
아예 이 기회에 득점 선두로 치고 나갈 생각인지, 훨씬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체코의 골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체코의 수비진은 급격히 기울면서 약점을 드러냈다.
그들의 주의력, 집중력 하락이 불러온 빈틈을 놓칠 호날두가 아니다.
체코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갈라세크와의 경합에서 공을 따낸 호날두는, 바로 드리블 돌파 이후 강력한 슈팅을 날리며 체흐가 식은땀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역시 단단하군, 페트르. 좋은 선방이었어."
"...너도 여전히 무시무시해, 크리스."
헤드기어를 착용한 체흐.
비록 한골은 먹혔지만 그 다음 골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드러냈다.
뭐,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체코를 완전히 침몰시킬 것이다.
=
스스로의 재능만을 믿고 자기 관리를 게을리 하는 선수들도 있다.
만약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그런 선수였다면, 체흐는 그를 동료로서 좋아했을지언정 선수로서는 존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든 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바로 크리스티안 호날두입니다. 이유요? 그는 누구보다도 축구를 진지하게 대하고 있거든요.’
언젠가 했었던 최고의 선수를 묻는 인터뷰에서의 체흐의 답이었다.
호날두는 자신보다 어린 선수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철저한 프로의식과 그 흔한 취미 생활도 없이 축구에만 매진하는 끝없는 열정이 그에게는 있었다.
많은 언론들이 호날두를 '신이 내린 재능', '신이 축복한 재능' 이라면서 찬탄한다.
하지만 체흐는 알고 있다.
저렇게 되기까지 뼈를 깎으며 노력했던 보이지 않는 그 시간들을 말이다.
그와 동료가 되어 세 시즌을 같이 보냈고, 적으로서 마주하여 한 시즌을 뛰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존재만으로도, 그가 출전 명단에 있는 것만으로도 동료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였다.
'아, 그가 있으니까 오늘은 절대로 지지 않겠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호날두는 해결해주겠지!'
더없이 든든한 첼시의 수호신이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최고의 에이스였다.
그런 호날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고, 자신은 첼시의 선수로서 맨유 선수인 그를 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맨유의 유니폼을 입은 호날두를 상대하면서 체흐는 그의 진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시즌 맨유와 총 세 번 만난 첼시는, 세 번 다 호날두에게 득점을 허락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멀티골을 먹힌 것은 덤.
더없이 든든한 첼시의 수호신은, 악마가 되어 나타났다.
치욕스러운 패배의 중심에는 호날두의 슛을 막지 못한 체흐도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의 패배 이후, 체흐는 가진 눈물을 전부 쏟아냈었고 가슴 속에 아픔을 새겼다.
그 눈물과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말이다.
'너를 진심으로 존경해, 크리스티안. 그리고 우리가 너희 팀을 꺾기란 요원하겠지.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맞설 거야. 설령 네게 연속으로 박살난 골키퍼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다 하더라도!‘
체흐가 몸을 날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이윽고 어느 함성이 터져나왔다.
< 유로 2008 - 3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