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 2008 - 4 >
회전이 걸리지 않은 불규칙적인 궤적을 보이며 휘어지는 무회전 슛.
호날두가 자주, 그리고 잘 사용하는 장기와도 같은 기술이다.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의 슛이지만 체흐는 다시 한 번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냈다.
가까스로 내뻗은 손으로 공을 쳐내는데 성공한 것.
눈이 조금 커진 호날두를 보면서 체흐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른손 중지의 인대가 다쳤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첩첩산중이구나.'
또 다시 호날두에게 공이 갔다.
체흐는 한숨을 쉬었다.
부상으로 교체될 수도 없다.
자신의 백업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호날두와 포르투갈 공격진을 상대한다면... 처참한 결과가 예상되었다.
그의 어깨에 돌덩이 같은 부담감이 드리워졌다.
턱이 빠질 정도로 뛰고 악다구니를 쓰는 동료 선수들의 분전을 체흐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잘 좀 해줬으면...
‘그는 막으려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긴 하지...’
재해(災害)는 인간의 손으로 막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호날두가 한번 드리블을 치고 개인기를 펼치면, 반드시 최소 한 명 이상의 체코 선수들이 제쳐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은 자동문, 삼류 선수들이 아니다.
나름대로 체코 최고의 선수들이고 그 중에서는 유벤투스와 AC 밀란, 올랭피크 리옹 같은 클럽에서 뛰는 선수들도 소수나마 있었다.
그런 선수들조차 크리스티안 호날두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역시 너는 너무나도 큰 선수야.”
방금 전 장면의 재현.
결국 호날두를 막아야 하는 것은 페트르 체흐, 자신이었다.
호날두와 체흐의 시선이 마주했다.
서로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순간.
뻐엉-!
육중한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체흐가 몸을 날렸다.
제발 아까와 같은 기적이 만들어지기를!
하지만 호날두의 강한 파워로 때려진 공은, 체흐의 반응속도를 넘어서고야 말았다.
0.2초의 차이.
체흐의 손에서 벗어난 공이 체코의 골 망을 갈랐다.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가득한 지금, 스코어는 2:0.
모두 호날두의 발에서 이루어진 득점이었다.
오른쪽 중지가 더 쑤셔오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체흐.
분하고 무력했다.
예상은 했지만 적은 너무나도 강했고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호날두와의 경기는 언제나 두근대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한 없이 울고 싶었다.
“페트르...”
“미안. 우리들이 못나서...”
이런 동료들을 질책할 수도 없다.
그저 웃어보였다.
최선을 다하자, 지켜보는 국민들이 이 이상 가슴아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도 구르고 험한 꼴을 많이 당해서 유니폼까지 걸레짝이 되었지만 그의 두 손은 멈추지 않았다.
=
삑! 삐이이익-!
와아아아아-!
경기 스코어는 2:0, 포르투갈의 승리.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는 결과.
모든 사람들의 예상답게 포르투갈은 체코를 격파하고 준결승 진출을 결정지었다.
포르투갈의 국기를 흔들면서 열광하는 포르투갈 관중들과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체코의 관중들.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 경기장 속,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페트르 체흐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헤드기어를 벗지도 않은 채, 그는 골대를 붙잡고 끝끝내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패배했을 때도 끝내 울지 않았던 그 체흐가.
축구 선수들에게 국가대표란 바로 이런 의미였다.
"...지금은 너를 보고 싶지 않아. 그냥 가줘."
"기집애 같은 소리하고 있네."
호날두의 비웃음에 울컥하는 체흐였지만 끝내 그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쭈그리고 있는 체흐 옆에 호날두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네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내 슈팅을 몇 번이나 막아낸 것도, 데쿠와 시망, 누누, 콰레스마의 슛을 전부 막아낸 것은 다름 아닌 페르트, 너야.“
네가 없었으면 우리 포르투갈은 더 큰 점수 차이로 승리했겠지.
하지만 호날두의 말은 체흐에게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나보다.
"이기지 못하는 경기는, 아무리... 아무리 잘하더라도 쓸모가 없어. 지난 3년간 함께 뛰었던 세월 속에서 네가 나에게 알려준 거야, 크리스."
"그렇다면 내가 틀렸던 거야."
호날두의 말에 고개를 드는 체흐.
호날두는 그에게 저기를 쳐다보라며 관중석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체코의 국기를 흔들면서 체흐에게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내고 있는 체코 축구팬들이 있었다.
토너먼트에서 조국이 탈락하며 체코의 응원단들의 어깨는 축 쳐져있었지만 오직 체흐에게만큼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비록 2골을 먹혔지만 체흐가 아니었다면, 그가 없었다면.
그 이상의 스코어로 포르투갈에게 박살났을 것이라고.
포르투갈 팬들 역시 체흐의 놀라운 투혼과 경기력에, 존중과 경의를 보내는 의미로 박수를 쳐줄 정도였으니까.
이 모든 것이 그의 활약에 대한 칭찬, 대단한 경기를 보여준 선수에 대한 찬사였다.
"지는 경기도 어떻게 지느냐에 따라서 다르다고 봐. 페트르, 너는 체코의 축구 팬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준 거야. 스포츠는 결국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것이니까. 너는 틀리지 않았어."
너는 저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성공했어, 페트르.
호날두의 말에 체흐는 웃었다.
울면서 웃을 수 있었다.
"이러니까 꼭, 오늘 경기의 주인공이 네가 아닌 나인 것 같잖아. 날 착각하게 만들지 말아줘, 크리스."
호날두는 웃으면서 그런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오른손을 강하게 맞잡자 인상을 찡그리는 체흐의 모습을 호날두는 보았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받으라고 조언하는 호날두.
골을 넣으려는 자로서,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으로서.
이 두 선수는 누구보다 깊은 친분이 있음에도, 오늘 경기 내내 가장 많이 부딪쳤고 대결했다.
그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었다.
경기를 지켜 본 수많은 축구팬들에게 그것은 감동으로 다가오기 충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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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를 꺾은 포르투갈은 숙명적으로 독일과 마주하게 되었다.
반면 러시아가 네덜란드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한 자리를 차지했고, 스페인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이탈리아를 깨트리고 준결승전에 올랐다.
마침내 준결승전의 대진표가 정해졌다.
포르투갈 VS 독일
러시아 VS 스페인
유로 사상 최초로 2회 연속 우승을 노리는 포르투갈.
독기를 잔뜩 품고 지옥에서 다시 살아올라온 전차 군단 독일.
'히딩크 매직'으로 20년 만에 유로 준결승전의 무대를 밟게 된 러시아.
놀라운 조직력과 팀플레이로 화제를 모은 무적함대 스페인까지.
최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될 팀을 가릴 남은 경기는 단 세 경기.
모든 축구 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6월 25일, 바젤에서의 독일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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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날두가 기억하기에, 이 당시 스페인의 감독은 루이스 아라고네스였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선수로써, 또는 감독으로써 수많은 성공 신화를 써내려온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한창 지역갈등으로 홍역을 치렀던 스페인 국대를 통합하고 2008 유로 우승컵을 선물한 채 팀을 떠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후 전성기에 이를 무적함대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라 할 수 있었는데, 지금 스페인의 감독은 그 루이스 아라고네스가 아니었다.
비센테 델 보스케.
그가 원래의 흐름보다 1년 먼저 스페인 국가대표 감독직에 부임함으로서 역사가 비틀어졌다.
아라고네스 감독의 해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호날두의 지분이 컸다.
잉글랜드-독일, 네덜란드-독일만큼이나 라이벌리가 심한 나라가 바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라이벌이긴 하지만 국제대회 성적이나 위상 등에서 스페인은 언제나 포르투갈보다 몇 수는 위였고 스페인 국민들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호날두의 등장 이후 양상은 180도로 뒤바뀌었다.
2004 유로 우승컵을 들어 올린 포르투갈은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자가 되었고, A매치 성적과 피파 랭킹도 스페인을 넘어서게 된다.
스페인도 못해본 월드컵 우승을 포르투갈이 먼저 하게 된 것은 화룡정점.
라이벌 팀의 승승장구에 인내심이 바닥난 스페인 축구 협회는 결국 아라고네스를 해임시키고 델 보스케를 감독으로 선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라고네스가 아닌 델 보스케가 지금 이 순간, 스페인 감독 자리에 앉아있는 비화였고, 호날두는 이것에 대한 내막을 나중에나 알게 된다.
어쨌거나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독일과의 리턴 매치.
포르투갈에게 패배함으로서 끔찍한 탈락 위기를 겪었던 독일 대표팀은 아마 제대로 이를 갈고 나왔을 것이다.
뢰브 감독의 전술적인 능력과 성향을 따져봤을 때, 포르투갈 선수 한명 한명을 낱낱이 분석하고 쪼개놓았을 것이 분명한 일.
핵심 선수인 호날두 자신은 아예 분자단위의 분석을 당했겠지.
그들이 정말 무서운 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호날두와 포르투갈 대표팀 선수들은 약간의 불안감을 가진 채 그라운드를 밟았다.
이번에도 이길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사상 최초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노리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의 모습이 보입니다. 영원한 캡틴, 루이스 피구 선수가 대표팀에 없다는 것은 분명 정신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 일이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결승전까지 진출한 우리 대표팀이 정말 자
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결승까지 마지막 한 경기만이 남았습니다!]
[호날두 선수의 득점포가 토너먼트에 들어서 제대로 가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벌써 5골을 넣으면서 유로 득점왕, 최우수 선수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이 선수를 중심으로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조별리그에서처럼 충
분히 전차 군단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양 팀의 스쿼드입니다.]
독일
포돌스키-클로제
히츨슈페르거-발락-롤페스-슈바인슈타이거
람-메첼더-메르테자커-프리드리히
옌스 레만
포르투갈
고메스
시망-데쿠-호날두
무티뉴-프티
페레이라-카르발류-페페-보싱와
히카르도
[조별리그에서 경기를 치렀을 때와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이라고는, 독일 대표팀이 4-2-3-1 포메이션을 사용하지 않고 4-4-2를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롤페스 선수를 선발 멤버로 기용했다는 점입니다. 그 외의 선수단 스쿼드는 동일합니다.]
[저희 포르투갈은 4-3-3이 아닌 4-2-3-1을 구성하였습니다. 메이렐레스 선수가 빠지고 프티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외는 역시 동일합니다. 세부적인 전술은 차이를 보이겠지만요.]
'독일도 우리처럼 이전의 전술을 수정했다고 봐야겠네.'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독일 선수들을 노려보며 몸을 푸는 호날두.
조별리그에서 독일을 잠재웠던 것은 결국 호날두의 프리킥 한방이었다.
그 외의 모든 공격들을 그들은 철저히 막아내면서 실점을 최소화시켰다.
그만큼 어렵고 단단한 팀.
프리킥 득점이 아니었으면 아마 절대 승리하지는 못했겠지.
“후우-”
“웬 한숨? 너도 긴장이란 것을 하니, 크리스?”
“상대가 상대이니까요.”
“흐흐, 네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느껴지네.”
최고참 고메스의 넉살좋은 말에 호날두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누누 고메스와 호날두의 인연은 꽤 길다.
호날두의 1부 리그 데뷔전 경기는 '우 클라시쿠' 즉, 리스본 더비.
스포트팅의 교체 선수로 출전한 호날두는 벤피카를 상대로 골을 집어넣으면서 스포르팅의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 때, 벤피카의 원톱 공격수가 바로 누누 고메스다.
이게 벌써 8년도 더 된 이야기.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호날두의 등장을 가장 먼저 보고 느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 꼬맹이의 재능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줄은 몰랐지. 그것도 이렇게 빨리.”
“그 때 고메스는 제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었던 위치에 있던 선수였죠... 옛날 생각하시나요?”
“물론. 사람은 과거를 떠올리며 살 때,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들 하지. 내가 지금 그래. 그래서 이게 내 대표팀 경력의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
“아직 정정... 어감이 이상하군요. 팔팔하신데 무슨 은퇴입니까?”
“하하하. 수많은 월드 클래스 선수들조차도 하지 못한 유로 우승과 월드컵 우승을 해봤어. 너나 루이스(피구) 같은 최고의 선수들과도 함께 뛰어봤지.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설령 이 대회에서 탈락한다고 해도 그저 하나의 ‘실패’일 뿐, 아쉬움은 없을 거야.”
이런 마인드에 대해서 무책임하다며 욕먹어도 괜찮아. 이게 나인걸.
웃으면서 말하는 누누 고메스.
“어차피 이 경기 역시 하나의 과정이야. 너의 축구 일생 속의 얇디얇은 선 하나밖에 안 돼. 비록 여기서 패배한다 해도, 너에게는 수많은 대회, 수많은 경기들이 남아 있어. 후회는 우리 같은 나이 든 선수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너는 그냥 너의 플레이를 하
길 바래. 호날두스럽게.”
물론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지만.
고메스의 말에 호날두는 망설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니면 안 돼.’ 라는 마인드는 결국 비극을 초래하기 마련.
덜어낼수록 채워진다는 것인가.
“고마워요, 누누.”
고메스는 웃으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과 고메스가 나눈 대화 내용이 궁금한 듯, 중계카메라가 계속 이곳을 비췄다.
주심의 휘슬과 함께 2008 유럽 선수권 대회 준결승전이 시작되었다.
< 유로 2008 - 4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