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 2008 - 7 >
독일과 스페인의 유로 2008 결승전은 페르난도 토레스의 결승골에 이은 스페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서 스페인에서 1964년도에 치러진 유럽 선수권 대회 이후, 두 번째 유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스페인의 경기력은 매우 인상 깊었고 많은 전문가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특유의 패스 축구와 압도적인 점유율, 촘촘한 조직력, 톱니바퀴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팀플레이까지.
델 보스케는 지금까지의 스페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페인’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여러 평론가들과 축구팬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부활한 무적함대는 무패로 조별리그, 토너먼트를 모두 뚫고 올라가 당당히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그를 구성하는 선수들이 건재한 이상 계속될 것이다.
분명 우승은 스페인의 차지였고 ‘UEFA 올스타’ 팀에 속한 선수들의 명단을 살펴보더라도 스페인 선수들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유로 대회 내내 가장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에게 주어지는 ‘UEFA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와 대회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득점을 성공시킨 ‘골든 부츠’를 수상한 선수는, 우승한 스페인 팀에서 나오지 않았다.
UEFA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 : 크리스티안 호날두
골든 부츠 : 크리스티안 호날두
최우수 선수의 경우, 대부분 우승팀에서도 가장 잘한 선수에게 주어지게 된다.
하지만 결승전에도 오르지 못한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그 상을 받은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태클을 걸지 못했고 이변이라 말하지 않았다.
호날두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이번 대회 내내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특히 독일전에서 보여준, 0:2 상황에서 3골에 모두 관여. 3:2를 만들어낸 그의 퍼포먼스는, 왜 그가 이 시대 최고의 선수라 불리며 펠레, 마라도나 등과 비교되는지를 여실히 증명했으니까.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물론 좋은 선수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내가 호날두보다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최우수 선수상을 그의 인기에 밀려 강탈당한 기분이다.'
스페인의 플레이메이커 사비 에르난데스.
그의 인터뷰는 많은 논란을 만들어냈다.
- 어이, 에르난데스! 괜히 우승팀 분위기 망치지 말고 눈치껏 행동해. 멍청하긴!
- 이번 대회 사비의 폼은 굉장히 훌륭했지만, 호날두와 비비는 건 아니지. 피구도 없는 자기 원맨팀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게 호날두인데.
- 에르난데스와 스페인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ㄴ 나도 스페니쉬인데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호날두가 더 잘했어.
ㄴ 바르셀로나 팬들도 그렇게 생각 안할 것 같아.
- 호날두가 본다면 정말로 어이가 없겠군! 병실에서 벌떡 일어나겠어?
- 뭐, 나는 저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 최우수 선수에 더 적합한 것은 아무리 봐도 크리스티안지만.
- 호날두가 부상당하지 않았으면 결승전은 분명히 스페인 VS 포르투갈이었을 텐데. 이베리아 반도 국가끼리의 대결이라 더 치열했을 것이고.
ㄴ 롤페스인가? 진짜 테러 조심해야겠는 걸? 난 포르투갈인이 아니지만 내 친구인 포르투갈 친구는 롤페스 가만 안둘 것 같은 표정이던데.
ㄴ 포르투갈이 마피아가 많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롤페스는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거야.
- 역시 스페인 사람이라 그런지 포르투갈 인을 싫어하네~
- 인터뷰와는 상관 없는 말이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결승에서 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ㄴ '만약'은 의미가 없지만 나는 포르투갈이 이겼을 것 같아.
ㄴ 어이, 스페인의 경기는 정말 장난 아니었다고. 이들은 심지어 무패 우승이야.
ㄴ 포르투갈도 무패 행진 달리는 중이었지. 호날두였다면 이들에 대한 공략법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 스페인은 포르투갈 촌놈들이라면서 절대 인정 안하던데ㅋㅋ
ㄴ 지난 유로와 월드컵 우승한 팀인데 지들만 인정 안하는 건 뭐지.
[스페인 대표팀의 우승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선수를 뽑으라면 아마도 사비 에르난데스가 첫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중원 장악력과 탈 압박, 패싱 플레이로 무적함대를 우승으로 이끌었죠. 분명 그는 최우수 선수에 선정될 만한 자격이 있을 겁
니다. 상대가 크리스티안 호날두만 아니었다면요.]
[이번 대회에서 5경기를 뛴 호날두는 총 5골을 넣고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죠. 더 놀라운 것은 8강, 4강 토너먼트 단 2경기에서만 3골 1어시스트를 폭격하며 특히 더 맹활약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경기에서 더욱 강한 호날두 답죠. 만약 그가 불행한 부
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분명 결승전 한 자리는 포르투갈의 차지였을 겁니다.]
[축구에 만약은 없지만 저도 그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부정할 수가 없군요. 실제로도 호날두가 빠지기 전, 분명 포르투갈은 독일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인지해야할 명확한 사실은, 스탯상으로 총 4골을 넣은 다비드 비야를 제친 것은 물론, 스페인의 우승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비 에르난데스 역시 호날두에게는 ‘명백히’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죠. 경기당 영향력이든, 임팩트든. UEFA에서도 만장일치
로 호날두를 꼽았을 정도니까요.]
[저흰 에르난데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군요. ‘누가 봐도 당신보다 호날두가 더 잘했으니, 올바른 선정에 투덜대지 말고 실력으로 보여 달라.’ 라고요. 아, 그의 우승은 물론 축하받을 일입니다.]
유럽 선수권 대회를 중계했던 BBC에서는 대회 종료 후 짧은 만평에서 사비의 말을 이런 식으로 비꼬기도 했다.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
심지어 우승 직후 스페인에서조차 의견이 반반으로 갈릴 정도였으니...
어쨌거나 사비의 인터뷰는 그의 이미지만 더럽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호날두는 치료와 재활훈련을 전념하느라 시즌이 시작하고 나서 이 사건에 대해서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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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표팀과 호날두를 부상시킨 장본인, 시몬 롤페스.
이들은 포르투갈에게 둘도 없는 역적이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 같은 행동!'
'스포츠 정신을 팔아먹은 독일 대표팀!'
'사과조차 없는 독일의 횡포! 이것은 나치의 부활인가?'
‘시몬 롤페스는 포르투갈 관광을 영원히 포기해야.’
포르투갈의 보물이자 영웅, 크리스티안 호날두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그것도 모자라 호날두가 빠진 포르투갈 팀을 어거지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들이 포르투갈의 악마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독일 대표팀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기사와 글들은 어디에서건 찾아볼 수 있었다.
도시냐 촌이냐, 남자냐 여자냐, 노인이냐 어린아이냐를 가리지 않고 온 포르투갈이 독일과 시몬 롤페스를 맹비난했다.
식사를 하다가 나이프를 떨어트려도 '이건 독일과 롤페스 때문이야! 빌어먹을 나치 새끼들!'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비난 여론이 너무나도 거세지자,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으니 과한 비난은 자제해 달라.’는 한 포르투갈 국회의원의 발언도 있었지만, 국민들이 어마어마한 원성과 지탄 속에서 바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오죽 독일이 미웠으면 유로 결승전에서 라이벌 스페인을, 스페인 국민 못지않게 열렬히 응원했을까.
어쨌든 호날두를 부상 입힌 장본인인 시몬 롤페스는 살해 협박이 담긴 이메일을 수천 통이나 받았다면서, 자신은 호날두를 누구보다 존경하고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며 자비를 호소하는 인터뷰를 수십 번이나 해야 했다.
그나마 독일이 준우승에 머물러서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조금은 분풀이가 되었기에 이 정도에 끝난 것이지.
만약 끝끝내 독일이 우승했으면 포르투갈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더 거세졌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이들 이상으로 열 받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바로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트레블의 1등 공신이고 다음 시즌에도 지금의 영광을 이어나갈 맨유의 대체할 수 없는 핵심자원이다.
그런 호날두가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랜 재활기간이 필요한 부상을 입었다.
과연 여기에 눈이 돌아가지 않은 서포터들이 있을까?
[알렉스 퍼거슨, ‘전근대를 통틀어도 볼 수 없었던 가장 추악하고 저질스러운 태클. 우리는 더없이 큰 재앙을 겪게 되었다.’]
퍼거슨의 강경발언을 따라서 그들의 분노는 시몬 롤페스와 소속 구단인 레버쿠젠을 향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의 물량 공세는, 레버쿠젠의 여러 팬 포럼들 공식 홈페이지를 뒤덮어버리기 충분했다.
얼마나 이들이 유난을 떨었는지 레버쿠젠은 자신들의 공식 홈페이지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단 관계자들과 서포터들에게 사과의 말을 올려야 했다.
포르투갈과 맨유의 팬들만 존재하는가?
호날두의 개인 팬들도 있다.
2006 독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폭발하다시피 증가하게 된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팬덤은 현역 축구 선수들 중에서도 거의 독보적인 위치.
전 세계 방방곡곡 펼쳐져 있는 호날두 개인 팬들의 분노 표출은, 어쩌면 포르투갈 국민들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보다 더 길고 지독할 수 있었다.
박치성과 유달리 친하게 지낸 것과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의 인상적인 인터뷰를 기억하는 한국 팬들의 보은 겸 복수도 단단히 한몫 했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인터넷을 무기로 나선 이들 덕분에, 롤페스의 SNS 페이지에 한글로 된 욕이 도배되기도 했었다고.
속세의 인연을 끊고 오직 치료와 휴식에만 전념하던 호날두가 가히 ‘광기’라 불릴 만큼 심각한 이 사건들에 대해 알아차린 것은 열흘이 지난 7월 5일이었다.
병문안을 온 지우가 자신을 둘러싼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몰랐던 호날두.
상황을 파악하고 부랴부랴 자신의 페이스북에게 글을 올려야 했다.
[롤페스 선수의 태클은 절대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경험한 나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행한 사고일 뿐입니다. 그도 저도 어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제 입장을 이렇게 늦게 밝힌 것에 대해 롤페스 선수에게 미안합니다. 여타 언론에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그는 부상 직후에도 나에게 정중히 사과했고, 수술 이후에는 병문안도 왔었습니다. 병문안 당시에도 자신이 비난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꺼내
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축구 대표팀들도 모두 프로의식이 투철하고 열정적인, 좋은 선수들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이 패배하게 된 것은 여러 불운이 겹쳤고, 저희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을 멈춰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조르제는 왜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될 때까지 나에게 말을 안했을까?"
"음... 아마도 그만큼 크리스가 소중하기 때문 아닐까요?"
"소중해?"
"네. 그 선수가 잘못했건 안했건, 결국 크리스를 부상 입힌 것은 사실이잖아요. 또 재활치료에만 100% 전념할 수 있으리란 배려가 아닌지..."
어른스러운 지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호날두.
뭐, 자신이 소중하긴 할 거다.
에이전트는 선수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퍼센테이지를 수수료로 떼어가기 때문에, 선수의 수입이 올라갈수록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도 커진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호나우지뉴, 카카 등과 비교가 됐던 호날두는, 현재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스탯으로 경쟁자들을 전부 찍어 누르면서 이 시대 최고의 스타 자리를 독점하고 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독보적인 1등이 된다는 것은, 그 이상 자본의 수혜를 누릴 수 있는 일.
호날두는 축구 선수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중이고, 멘데스 역시 천문학적인 금액을 수수료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멘데스가 호날두의 편의를 과하게 봐주는 것은 이렇듯 다 이유가 있는 법.
물론 저것들은 미국에 있는 호날두의 진짜배기 자산들을 제외한 수치였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너무 나갔어. 내가 세상 소식들을 끊고 병원에만 틀어박혀있다는 것을 그도 알 텐데. 롤페스는 올바른 선수야. 그는 지금까지 부당하게 욕을 먹고 있었다고."
"......"
"내가 병원에서 나가면 조르제와 한번 언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가만, 설마 케슬린도 알고 있었는데 내게 감춘건가?"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나중에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참았다.
만약 케슬린까지 한통속이었다면 정말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지우의 나지막한 말소리에 깨졌다.
"저도 나중에 그런 부상을 당하거나, 또는 당하도록 만들게 될까요? 선수 생명을 걸고 뛰는 경기라니... 왠지 조금 두렵네요."
"...축구 선수는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할 수 있고, 또 입힐 수 있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게 된 것이 죄라면 죄겠지.“
“다만 최소한 나는, 고의로 입힌 부상과 고의가 아닌 부상은 다르다고 생각해."
호날두도 다른 선수를 부상 입힌 적이 없지는 않다.
물론 바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마음이 절대 편하지 못했다.
호날두는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경기의 승패와 트로피,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선수들을 부상 입히면서까지 얻은 것이 과연 진정 가치 있는 일일까.
그런 면에서 일부러 공이 아닌 상대 선수 다리를 노리는 정신병자들은 축구 선수가 아니라 아예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호날두였다.
정지우가 올바른 선수가 되길 바랐다.
정지우가 호날두고, 호날두가 정지우였지만, 눈앞에 있는 지우는 지금 자신과 다른 사람.
멘데스의 대처에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상황에서도 친동생 같은 지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지우, 축구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서 아쉽네."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오늘도 선생님들과 코치분들께 칭찬을 잔뜩 들었으니까요."
“정말 기대되는 걸?”
지우의 보호자는 호날두였다.
그는 현재 맨유의 유소년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라고.
벌써부터 관심을 보이는 유소년 클럽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는 당연히 맨유도 있었다.
하지만 호날두는 무조건 지우의 의사에 맞춰줄 것이다.
'그나저나 걱정이네. 맨유의 초반 일정은 결코 만만치 않은데. 나 없이도 잘 할 수 있으려나.'
퍼거슨이라서 믿고 기다릴 수 있지만 호날두가 기억하기로 08-009 시즌의 리버풀은, 프리미어 리그 개막 이후 역대 리버풀 팀 중에서도 첫 손에 꼽을 만큼 위협적인 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자신 없이 원정 경기를 떠나게 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솔직히 말해서 불안했다.
'내가 아니면 불안해!' 라는 마인드를 경계하면서도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와 같은 선수들의 일상이리라.
< 유로 2008 -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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