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25)

< 종이 한 장 차이 - 5 >

‘정지우’가 본격적으로 해외축구 중계를 보게 된 것은 08-09 시즌부터. 

그 전에도 보육원의 형들을 따라서 보긴 했지만 깊게 빠져서 매 경기를 꼼꼼히 찾아본 것은 08-09 시즌부터였다. 

호날두와 박치성을 응원하며 매주 축구 경기를 보게 될 생각에 들떠있던 ‘정지우’의 눈에, 들어온 놀라운 팀이 하나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패싱 플레이와 전방위적인 압박, 유기적으로 맞아 들어가는 팀워크, 환상적인 테크닉 등으로 유럽을 정복한 팀의 이름은 FC 바르셀로나. 

누구를 만나도 지지 않을 것 같던 퍼거슨의 맨유를 박살내고, ‘정지우’의 우상인 호날두를 처참하게, 그것도 연이어서 패퇴시킨 무적의 팀. 

그렇기 때문에 ‘정지우’ 기억 속에 가장 크고 깊게 임팩트를 남긴 팀은 바로 이 때의 바르셀로나였다. 

"저는 리오넬과 친합니다. 그리고 그를 잘 알죠. 리오넬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선수입니다. 최근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몇 번 봤는데, 저는 그가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개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리오넬은 나와 '동류'입니다. 반드시 

내가 있는 자리까지 올라올 것입니다." 

"호날두 선수와 동류라는 말의 뜻은..."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지만 저는 저 혼자서 경기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해설위원 분들은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누가 그런 말을 한다면 재수 없다하겠지만 호날두 선수에게만큼은 반박할 수 없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는 언제나 호날두 선수를 경기를 지배하는 선수, 아니 그 이상의 선수로 평가하고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저는 리오넬 역시, 그가 가세함에 따라서 경기 결과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그런 잠재력을 지닌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바르셀로나에 있다는 것은, 바르셀로나에게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 

"또한 바르셀로나에는 리오넬을 제외하고라도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발데스, 푸욜, 이니에스타, 피케, 티에리, 사무엘 그리고 에르난데스까지. 이미 이들은 리오넬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정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가장 경계가 됩니다. 지금의 놀라운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아마 반드시 챔피언스 리그의 높은 단계까지 진출하겠죠. 우리는 어쩌면 그들과 우승컵을 놓고 싸워야할지도 모르겠네요." 

호날두가 이렇게 잘난 척 말할 수 있던 것은 결국 확실한 미래를 알기 때문. 

다른 사람들이 미래를 예상할 때는 마치 맹인과 같아서, 주변을 더듬으며 앞에 있는 것을 어렵게 어렵게 유추해나간다. 

하지만 ‘정지우’의 기억이 있는 호날두는, 직관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고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호날두가 언론 앞에서 천기누설(?)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의 생각이 들어맞는다면 대단한 주목과 찬사를 받겠지만... 

'주식투자도 그렇고 영화투자도 이렇게 해왔잖아? 뭘 새삼스럽게 죄책감을 느껴?' 

이미 내딛은 발걸음, 멈출 수는 없다.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제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선수라 할지라도, 그라운드에서 위대한 축구를 하는 것과 의자에 앉아 팀을 평론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다. 

뛰어난 선수가 꼭 뛰어난 감독이 되리란 법은 없듯, 다이먼과 버클란드, 포먼은 평론가의 입장에서 호날두의 주장을 완전히 개소리 취급해버려도 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고 호날두의 말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호날두 선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정말로... 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맞붙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한편의 영화와 같은 스토리가 되겠군요!” 

이들 사이에서 호날두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저희 보스는 정말 제멋대로이며 아주 변덕스럽죠. 그래서 본인이 지시한 훈련도 기분에 따라 마구잡이로 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트레이닝은 반드시 실전경기에서 도움이 됩니다. 즉흥적으로 바꾼 트레이닝에서 배운 팀플레이로 득점에 

성공한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는 유능한 독재자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보스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퍼거슨 경이 대단한 양반이라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좋은 말은 그쯤 해두고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호날두 선수가 퍼거슨 경에게 가장 많이 대드는 선수라는 정보가 이미 제게 들어와 있습니다. 순순히 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 입으

로 직접 말할까요? 충성하는 것 치고는 너무 반항적인 것 아닌가요?" 

"와우! MNF MC들은 탐정을 고용해서 게스트 뒷조사를 하는 것이 기본 소양인가요?“ 

“하하하하!” 

호날두의 너스레에 스튜디오는 폭소로 가득 찼다. 

“맞습니다. 아마도 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보스와 가장 많이 다투고 대립하는 사람일 겁니다. 다만 이것은 성격적으로 어긋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보스와 저는 언제나 ‘축구’에 대해서 논쟁합니다. 더 나은 플레이, 더 나은 팀, 더 나은 선수와 감독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의견을 나눌 뿐이죠. 저는 이것이 매우 발전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만 제외한다면 저는 보스에게 충성하는 성실한 기사일 뿐이죠.” 

마치 중세의 기사처럼 자리에 일어나서 포즈를 취하는 호날두를 보며 청중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호날두 선수의 올해 발롱도르 수상은 거의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뭐, 기념비적인 트레블의 주인공이니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우리가 궁금한 것은 호날두 선수의 생각이겠죠. 본인에게 묻겠습니다. 호날두 선수는 자신의 올해 발롱도르 수상을 몇 퍼센트 

확신합니까?" 

"솔직하게 말하죠. 100%입니다. 아무리 봐도 저 말고 발롱도르 탈 선수는 없어 보이네요.“ 

오오오-! 

“그만큼 지난 시즌, 그리고 올해 상반기에 저는 굉장히 의미 있는 경기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부상으로 몇 경기 빠지긴 했지만... 설마 이게 큰 변수로 다가오진 않겠죠?”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호날두 선수의 이런 오만한 발언이 기자단 분들의 심기를 거르시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죠." 

하하하하! 

“호날두 선수! 당황하지 마시고 여기 있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으세요. 자.” 

예능인 뺨치는 평론가들의 티키타카에 호날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요한 크루이프도, 미셸 플라티니도, 마르코 반 바스텐도 모두 3번의 발롱도르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의 발롱도르를 호날두 선수가 수상하게 된다면, 호날두 선수는 발롱도르라는 상이 만들어진 이후, 최초로 4번의 발롱도르를 얻어낸 선수가 될 

전망입니다. 명실상부한 역대 최고의 발롱도르 위너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죠. 이 기록은 제 생각에 호날두 선수 본인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이번 시즌에 집중하는 것이 첫 번째지만요." 

"호날두 선수는 정말 위대한 왕도를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퍼포먼스만 보더라도 분명 EPL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기억될 만 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단언한대로 역대 최고의 선수로 거듭날 지도 모릅니다. 이런 대단한 위업을 남긴 사람들은 종종 과거

에 대한 회고를 하기도 합니다. 한번 호날두 선수의 회고를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포먼의 말에 호날두는 거의 잊혀져있던 사람의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라이카 제이오라는 사람이 있었죠. 저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어쩌면 최고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이카 제이오, 저희는 들어 본 적이 없군요. 그는 누구인가요?" 

"벤피카 구단의 스카우트였습니다. 제가 벤피카 입단테스트를 치렀을 때, 저를 보자마자 키가 작다고 내쫓았던 사람이었죠." 

"그게 정말입니까? 와우...! 호날두 선수를 내쫓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을 저지른 사람이군요!"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는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군요.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예, 하지만 그는 이미 축구계를 떠난 사람이니 그에 대한 비난은 삼가주세요." 

웃으면서 호날두는 말을 이었다. 

"저희 집은 무척이나 가난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와 형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현실이 궁핍했기에 제 마음이 나약했다면, 라이카 제이오의 말에 자신감을 잃고, 축구선수의 길을 포기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를 악물고 뛰었습니다. 더 가혹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그래서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죠. 만약 그 때의 실패와 시련이 없었으면 저는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 때의 절박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다시 되새기곤 합니다. 그 과정은 저를 채찍질하여 더 지독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죠. 저에게 회고란 그런 의미입니다. 현재의 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원동력에 불과하죠." 

"나중에 진정한 의미의 회고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 충분히 젊으며 발전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고 있다 생각합니다. 과거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추억을 음미하는 것은 그 이후에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정상을 향해 달

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시기이니까요." 

"오늘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방송 초짜인 사람을 데리고 이야기를 정말 잘 뽑아내시더군요." 

"하하하! 제가 보기에는 호날두 선수가 완전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잘 뽑아낸 것이 아니라 호날두 선수가 이쪽하고 적성이 맞는 겁니다. 어떻게... 은퇴하시고 이쪽으로 적성을 돌려보심이?" 

“에이, 은퇴는 너무 먼 이야기입니다.” 

녹화가 끝나고 포먼, 다이먼, 버클란드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호날두. 

이런 자리가 처음인지라 조금 버벅거리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것은 색다르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왜 케슬린이 방송출연을 극구 권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호날두 선수가 말씀하신 각 팀에 대한 평가와 전망 등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직접 경기를 뛰는 월드 클래스 선수의 눈과 제 3자의 눈으로 지켜보는 저희들의 눈이 얼마나 다른 지도 알 수 있었고요. 특히 바르셀로나에 대한 호날두 선수의 의견은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저희는 팀 전술이 어떻고, 감독의 성향이 어떻고, 팀의 스쿼드나 이적 등을 분석하는데 호날두 선수는 선수 개개인의 기량과 조합을 본다고 해야 할까요?" 

"제 짧은 소견으로는, 두 개의 관점이 합쳐진 것이 바로 감독들이 ‘축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매니저’인거죠." 

"평론가와 선수의 관점이 합쳐지면 감독의 관점이 된다라... 그것 역시도 공감 가는 말씀이시군요. 동의합니다." 

방송에서나 깐족거리고 짓궂게 놀릴 뿐이지, 사실 이들은 굉장히 젠틀하고 차분한 사람들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다이먼이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은 호날두 선수는 저희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캐치해냈고 그것이 썩 틀린 이야기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희가 보지 못했던 바르셀로나의 잠재 가능성을 엿봤다는 점에서 저는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바

르셀로나는 하락세, 그러니까 지금의 성공은 그저 요행에 불과’ 라고 생각했던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도록 만들었죠. 어쩌면 호날두 선수는 ‘매니저’로서의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축구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있다고요?" 

호날두는 화들짝 놀랐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호날두 선수는 과거 요한 크루이프의 선수 때 모습을 정말 많이 닮아있습니다. 크루이프는 그라운드를 주파하면서도 상대 팀을 분석할 수 있는 눈을 갖추었고, 그 때 그 때 자신의 플레이스타일을 바꾸며 경기를 지배했었죠. 전술적인 이해도의 우수성, 선

수 개개인에 대한 분석능력, 상대의 약점과 빈틈을 공략할 수 있는 직관력을 모두 갖추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는 감독으로서도 대단한 역량을 드러냈죠. 똑 닮은 두 사람은 어쩌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분과는 다릅니다. 그 정도의 축구 지능과 통찰력은 제겐 없어요. 감독이 되는 것은 상상으로도 해본 적 없고요." 

                                          

엄연히 말하면 자신은 미래를 통해서 현재를 설명하는 예언자 흉내에 불과하다. 

크루이프와는 그 궤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호날두였다. 

                                                                                                      

"회고에 대한 생각을 말씀하실 때의 그 당당한 모습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 이유를 제가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호날두 선수는 분명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있어 보였습니다. 특히 호날두 선수는 세계 최고의 감독이면서 성향은 전혀 다른 

무리뉴와 퍼거슨 경 밑에서 모두 뛰어본 유일한 선수죠. 그들의 장점을 배우면서 연륜과 경험을 쌓아나간다면 충분히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호날두 선수가 지금껏 보여준 영리한 플레이와 오늘의 모습을 본 제 소견입니다." 

“하하, 다이먼의 말을 잘 생각해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다이먼은 위르겐 클롭을 감독으로 이끈 사람이거든요.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마인츠를 성공적으로 이끈 다음, 지금은 도르트문트 감독을 맡고 있죠.” 

“클롭!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도르트문트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나중에는 리버풀로도 가게 되는 독일 국적의 명장의 이름. 

호날두가 이를 모를 리가. 

그런 클롭이 다이먼의 조언을 받아들고 감독직에 도전했다고? 

다이먼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 종이 한 장 차이 - 5 > 끝

ⓒ 아이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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