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3 >
섬세하면서도 신속한 드리블로 바쁘게 그의 발밑에서 움직이는 공은, 감히 토트넘 수비진들이 건들 수 없는 것.
전반이나 후반이나, 0:0이나 1:0이나 끌려가는 것은 결국 토트넘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겐 호날두 같은 선수가 없으니까.
한 명, 한 명 제칠 때마다 토트넘의 선수들 표정에 새겨지는 절망, 자괴, 분노 그리고 경외심.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또 하나의 쾌감.
특히 레들리 킹과의 은원을 잊지 않은 호날두는, 다리 사이로 공을 집어넣고 제끼는, 굴욕적인 알까기까지 보여주며 사소한 복수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제대로 발동 걸린 호날두는 마치 전성기의 마라도나를 방불케 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전부’ 드리블로 해결했다.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마중 나온 골키퍼 고메스까지 라 크로게타로 제치는데 성공.
마지막으로 비어있는 골문에 공을 살짝 밀어 넣으며 마무리.
모든 과정이 끝난 후, 그라운드는 아주 잠시 동안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게 했다.
=
발악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달려 호날두를 잡기 위해 뛰어온 토트넘 수비수들은 일련의 과정과 결과를 목격하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축하는 맨유 선수들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이들의 표정에는 허망함만이 깃들었다.
“최고의 골이었다, 크리스. 아주아주 환상적이었어.”
"역시 크리스한테 공만 주면 알아서 다 해결한다니까!"
"크하하하! 저 얼빠진 표정들 좀 보라지! 야유 보낼 생각도 못한 채 입 닥치고 있는 걸!“
“크리스가 오심 피해를 입을 때, 그렇게 지랄발광 하던 놈들이 지금은 기가 죽었나봐!?”
서포터들을 욕하는 그들의 행동에 울컥한 토트넘 선수들이었지만, 이내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당했던 부당한 경고와 판정 등을 생각하며 화를 참았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이들 역시 맹렬하게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
아니, 그보다는 방금 먹힌 골이 너무 허탈하고 허무해서 진이 빠졌다고 보아야 했다.
저 플레이를 도대체 어떻게 막아야 한단 말인가?
“...미안하다. 내가 마지막에 호날두를 끊었어야 했는데...”
호날두에게 연속으로 털린 충격은 컸다.
래들리 킹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흐린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게 팀을 이끌고 주도하던 주장이 처음 보여주는 약한 모습에 동료들은 당황스러웠다.
“아니에요, 캡틴. 캡틴도 이래저래 힘들었을 텐데...”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후우-”
그제서야 아차한 래들리 킹과 고참 선수들이 다시 동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말들을 꺼냈지만, 그저 상황에 혼란만이 더해졌을 뿐.
끝내 토트넘은 경기 종료 전까지 맨유에게 복수하지 못했다.
치열했던 전반전, 허무했던 후반전이었다.
=
삑! 삐이익!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마자 맨유의 원정 팬들은 입고 있던 저지와 레플리카를 벗어던지면서 환호했고 팀의 승리, 팀의 순항을 자축했다.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의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연승을 쌓아나가 어느새 선두권인 첼시, 리버풀의 턱밑까지 쫓게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옛 영광을 기억하는 엄격한 팬들에게도 지금의 맨유는 장했고 기특했다.
정말 이런 팀은 응원할 맛이 나는 팀이다!
“꽉 막혔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맛이 있는 경기였어.”
“대책 없는 베르바토프와 엿 같은 오심, 그리고 결국 해결해주는 우리의 영웅 크리스티안!”
"흐흐흐! 난 이런 경기가 너무 좋아. 비디오로 녹화해놓고 평생 돌려봐야지!“
모든 맨유 팬들의 공통적인 생각.
오늘 정말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경기였다는 것.
그리고 크리스티안 호날두에 대한 경탄은 빠질 수가 없다.
“나는 이 선수의 플레이를 라이브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이라고 생각해.”
“나도 그래. 흐흐... 그것도 우리 팀에 있다는 게 아직도 믿겨지지 않을 때가 많아.”
"절대 뺏기지 말아야지. 그는 무조건 맨유에서 종신하도록 해야 해. 40살까지 계약을 잡아야지."
"당연한 소리! 레알 마드리드가 호날두에게 군침을 흘린다는데 아예 NFS를 선언을 해야 한다고!"
"맨유에 남아서 한 번 더 위대한 트레블을 도전하는 것이 호날두에게도 기쁜 일이 될 거야. 솔직히 말로만 스타군단이다 뭐다 떠들어대지만 최근 10년간 팀 커리어는 우리가 훨씬 위잖아?"
길이 남을 오심 때문에 아름다운 패배도 아닌 추악한 패배를 당하게 된 토트넘의 팬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저 조용히 다수의 군중 속에서 숨어있는 사이, 의기양양한 맨유의 팬들만 신나서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레드 데빌즈는 이미 호날두라는 마약에 빠져들었다.
계속 그를 갈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호날두가 이런 플레이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이상, 이 마약에서 벗어날 방법은 결코 없을 것이다.
[90년대, 2000년대 초반의 맨유는 데이비드 베컴과 라이언 긱스라는 두 날개를 이용한 먼 거리에서 뿌려대는 롱 패스로 역습하는 전형적인 잉글랜드 롱볼 축구의 정석이라 할 만했죠. 지금의 맨유는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포지션 별 선수들의 유기
적인 스위칭 플레이와 함께, 빠르고 강한 패스와 기동전 위주의 축구 플레이의 정점을 보여주는 중이죠. 훨씬 동적이며 다이나믹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맨유에서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핵심 중의 핵심,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자동차의 구동엔진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있어야 맨유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끔 이렇게 지지부진 할 때도 공격을 풀어나가 어떻게
든 골을 우겨 박는 것이 가능한 선수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팀을 상승세로 이끕니다. 이런 선수는 억만금의 가치도 부족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경기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는 시간, 중계위원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가끔씩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무패를 달릴 수 있게 만든 원동력, 일등공신을 호날두라고 평가하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찬양했다.
오늘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부정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저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이 젊은 선수를 지켜보는 일 밖에는.
"응? 저거 뭐야!"
“어!?”
맨유 팬 중 한명이 지른 소리가 왁자지껄 떠드는 이들의 소음을 뚫고 사람들의 귀에 닿았다.
그쪽으로 쏠린 모두의 시선, 이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토트넘의 주장이자 오늘 호날두와 '악연'의 주인공인 레들리 킹.
그가 팀 동료들과 함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호날두에게 다가간 것이다.
"뭐야! 저 개자식! 왜 우리 크리스티안에게 다가오는 거지!?"
"설마 경기에서 졌다고 화풀이하는 거 아니야?"
"그런 미친 짓을 한다면 바로 제명이야! 물론 잉글랜드 FA가 영구제명을 때린다 해도 우리가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 거지만.“
호날두의 캐리로 값진 승리를 따낸 만큼 그에 대한 애정과 흥분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
만약 래들리 킹이 호날두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정말 살인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맨유 팬들은 매의 눈으로 호날두에게 접근하는 레들리 킹을 주시했다.
=
경기 내내 호날두와 대립각을 세웠던 레들리 킹이 호날두에게 다가오자, 맨유 선수들은 물론이고 토트넘 선수들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경기 내내 거칠게 부딪치고 도발했으며 굴욕감을 주었다.
승자는 명백히 호날두였지만, 그래서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혹시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걱정과 의심이 실리는 가운데, 레들리 킹이 취한 행동은 화해.
그는 망설임 없이 호날두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다, 호날두. 아까는 내가 너무 비신사적이었어. 좀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괜찮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승부니까요. 저도 승부로 대해드렸고."
때리는 시어머니를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상황처럼, 래들리 킹의 행동은 분명 호날두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충전시켰다.
하지만 일단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데다, 시간이 지나 머리가 차게 식은 지금, 그의 행동이 살짝 이해가 가기도 했다.
상대 선수를 격동시키는 것은 일부 더티 플레이어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술의 일부‘.
특히 호날두는 빼놓을 수 없는 맨유의 핵심인데다 때마침 억울한 상황에까지 처해졌으니, 레들리 킹의 심리전은 팀을 이끄는 주장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게 결국 역효과를 내긴 했지만 말이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사실 속으로 많이 걱정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레드 데빌즈의 살해협박은 한 번 당해본 전례가 있어서...."
그러고 보니 래들리 킹이 맨유의 슈퍼 스타였던 데이비드 베컴에게 부상을 입힌 전력이 있었지.
당시 베컴은 맨유의 자랑이었기에 살해협박 받은 것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터프한 당신이 겨우 그런 거에 무서워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리고 만약 오늘 살해협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킹이 아니라 폴슨 주심이 받아야겠죠."
호날두의 살벌한 말에 레들리 킹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둘은 서로 유니폼을 교환하면서 카메라를 향해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다.
뻔한 이미지메이킹, 불똥을 피해가려는 수작임이 눈에 보였지만, 호날두는 기꺼이 해줬다.
물론 오늘 경기 졌다면 절대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
잉글랜드 FA에서는 호날두에게 주어진 옐로우 카드를 취소하기로 했다.
당연한 일이다.
호날두는 잘못하지 않았기에.
문제는 이날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던 폴슨 심판에게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않은 것.
당연히 맨유 팬들은 거칠게 반발했다.
팬 포럼에서는 하루 종일 FA와 폴슨 심판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고 항의 메일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보냈지만 당연히 바뀌는 건 없었다.
FA는 이런 식으로 바꿀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판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철회하지 않았던 폴슨 심판의 사과도 없었다.
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맨체스터 이브닝, ‘오만하고 뻔뻔스러우며 자기 멋대로인 FA와 최소한의 양심과 자책조차 없는 폴슨 심판. 역대 최고의 콤비!’]
[언제까지 이런 수준 낮은 집단의 병폐에 시달려야 할까? EPL의 방만한 운영에 경종을 울려야.]
맨체스터 언론 쪽에서 대놓고 저격기사에는 FA와 심판에 대한 고강도의 비판과 조롱, 풍자가 곁들여 있었다.
맨유를 싫어하는 타팀 팬들까지도 맞는 말 했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니, 잉글랜드 축구팬들에게 FA와 심판진이 얼마나 신뢰를 못 얻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심판들과 친하게 잘 지내면서 좋은 판정들을 얻어내는 선수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호날두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생각했다.
심판은 공정해야 심판이 아닌가?
그렇게 공정해야 하는 심판이 왜 사적인 영역을 끌어들여 판정에 영향을 주고, 자신이 잘못된 판정을 내렸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이해가 안 갔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맨유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오심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팀 중 하나다.
지고 있을 때 가장 많은 추가 시간을 받았고, 이기고 있을 때는 가장 적은 추가 시간을 받는 등 일명 '퍼기 타임'도 그 중 일부.
특히 하워드 웹 같은 심판은 아주 대놓고 맨유를 편애하기도 했다.
첼시 소속일 때 자신을 여러 번 엿 먹였던 하워드 웹은. 지금 호날두에게 가장 관대한 판정을 내리는 심판 중에 하나다.
물론 호날두는 그것이 너무, 끔찍이도 싫어했다.
호날두는 그저 공정한 위치에서 스포츠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은 바람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선수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무리 인기 있는, 세계 최고의 선수라도 호날두는 '일개' 선수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런 풍토를 바꾸고 싶었다.
오심을 당연하게 여기는 협회들을 새로 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VR 등록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미래의 지식만큼 속 시원한 것이 없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부진의 늪에서 벗어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벌써 시즌의 반환점을 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싱데이 기간, 스토크시티와 미들즈브러와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한 맨유는 2경기를 덜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선두 리버풀과 승점 6점차, 첼시와는 승점 3점차를 유지중이다.
정말 많이 따라왔다.
리그 초중반에 정말 잘 나갔던 스콜라리 체제의 첼시.
하지만 지금은 살짝 삐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맨유가 앞으로 한 경기만 이긴다면 첼시를 제치고 2위에 올라설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서 퍼거슨은 연말부터 1월 5일까지 특별 ‘합숙’ 훈련 메뉴를 신설했다고 한다.
...올 연말도 가족들을 놔두고 땀내 나는 동료들과 함께 보내게 생겼다.
“오오! 드디어 나왔다! 나왔어!”
“??”
“뭐가 나와?”
트레이닝 룸에서 열심히 몸을 단련하던 맨유 선수들은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 비디치의 말에 속속 모여들었다.
“타임지에서 ‘역대 최고의 감독들’을 선정하겠다고 했잖아. 오늘 그게 드디어 나왔어!”
“오, 진짜? 어디!”
“우리 성질 드러운 영감님은 역대 몇 위 일까?”
“아! 땀내 나는 몸으로 밀지 좀 마!”
호날두는 철없는 동료 선수들은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다들 애다 애.
<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3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