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25)

< 투쟁의 시대 - 3 >

"거스 히딩크는 치성의 은사이기도 하지?" 

모르는 척 물어보는 호날두. 

그런 호날두에게 박치성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뿌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맞아. 그리고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지. 또 클럽 축구에서는 내가 뛰었던 PSV를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올려놓기도 하셨어. 정말 대단한 분이야." 

“와, 코리아를 월드컵 4강에 놀려놓은 감독이 바로 히딩크였구나!” 

“그렇다면 절대 방심할 수 없겠네!” 

동료들의 호들갑에 박치성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여전히 히딩크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은 채. 

그런 박치성을 보며 호날두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지금은 적이잖아? 그의 약점이나 뭐 이런 거 뭐 없어?" 

"어, 그...그건..."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빨리 말해줘.” 

“치성 놀리기 타임이야? 우리도 껴줘!” 

“히딩크랑 우리 영감남이랑 비교하면 어때? 누가 더 좋은 감독 같아?” 

호날두와 반 데 사르 등이 얼굴 빨개진 박치성을 놀려먹을 때, 퍼거슨이 헛기침을 하면서 들어왔다. 

순식간에 라커룸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오늘 첼시만 꺾으면 우리는 확실하게 2위다. 남은 경기와 득실차를 계산하면 실질적으로는 1위고. 이제 저 꼴도 보기 싫은 리버풀 놈들이 우리 위에서 설치는 걸 더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지금 첼시는 감독이 몇 번이고 교체 당하면서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반면 우리는 최고 전성기고! 때마침 이곳은 올드 트래포드. 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 

“긴 말 안한다. 이겨라. 그리고 우리가 거꾸러지기만을 바라는 리버풀 놈들에게 제대로 엿을 먹여주는 거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리버풀이 우승하는 꼴 못 본다.” 

인터뷰에서는 '우리의 경쟁 팀은 여전히 첼시다. 나는 리버풀을 우리의 경쟁상대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뒤쳐진 팀이다.' 라고까지 발언하면서 베니테즈와 리버풀 팬들의 속을 박박 긁었던 퍼거슨.  

하지만 사실 그는 리버풀을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었다. 

괜히 퍼거슨이 첼시 전을 앞두고 오히려 리버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다. 

이 때의 리버풀은 퍼거슨조차도 위협을 느낄 만큼 대단했다는 뜻. 

하지만 호날두는 자신과 맨유가 이런 대단한 리버풀이라도 충분히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셀로나가 아니면 올 시즌 우리의 앞길을 막을 팀은 없어!’ 

아직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윤곽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호날두는 리버풀, 첼시를 넘어서 바르셀로나와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바르셀로나. 

지금은 다를 것이다. 

분명히 다를 것이다. 

[맨유와 첼시의 프리미어 리그 20라운드 경기입니다. 박싱데이 일정에서 ‘빅 4’ 가운데 유일하게 전승 행진을 이어나갔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런 만큼 분위기는 상당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스톤 빌라와의 무승부 이후 5연승을, 아스날 전의 패배 

이후 7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고 있는 맨유입니다.] 

[첼시의 11월 중순까지의 성적은 무려 10승 2무 1패였죠. 현재 리그 테이블 1위인 리버풀마저도 제쳤을 정도로 굉장한 기세를 보여줬지만 이후 급격히 페이스를 잃었습니다. 최근 7경기 성적이 2승 4무 1패에 불과합니다. 우승후보답지 않은 성적이죠. 만

약 이번 경기에도 패배한다면 당연히 3위로 주저앉게 됩니다. 첼시 입장에서는 상상도 하기 싫은 결과겠죠.] 

[어쨌거나 양 팀 모두 우승후보이며, 저희가 늘 말하지만 우승후보끼리의 경기는 단지 승점 3점짜리 경기가 아닙니다. 6점이 걸려있는 커다란 판이죠!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절박함이 좋은 경기를 만들어내기를 바랍니다.] 

그라운드에서 페트르 체흐, 존 테리, 애슐리 콜, 디디에 드록바 등과 인사를 나누는 호날두. 

스콜라리 감독이 잘리게 된 배후에는 드록바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호날두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루이스(스콜라리)가 그렇게 디디에와 잘 맞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크리스와 그도 인연이 있었지.” 

“무려 같이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린 사이였죠. 그는 좋은 감독입니다.” 

“그래... 하지만 넌 이제 첼시 선수가 아니잖아.” 

이쪽 사정도 자세히 모르면서 함부로 참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드록바는 뼈 있는 말을 내뱉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나돌고 있는 상황이니 많이 예민해지긴 한가보다. 

호날두는 이해하면서 살짝 물러나줬다. 

옛 동료들과는 여전히 웃으면서 포옹할 수 있고 가끔 연락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 

괜한 신경전으로 의가 상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물론 오늘의 경기만큼은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다짐을 했기에, 경기 중의 신경전이라면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는 호날두였다. 

사실 져도 되는 경기가 어디 있겠냐마는... 

첼시의 감독인 거스 히딩크의 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겨우 5살이었던 '정지우'는 그 대단했다는 월드컵에 대해서 실감을 거의 못하는 세대였다. 

크리스티안 호날두로 다시 태어나서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장면을 라이브로 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큰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은 한국 선수가 아니었기에, 그쪽에 대한 감정이 많이도 무뎌져 있었다. 

지우와 박치성, 그리고 옛 선배들 몇 명을 제외한다면 어떻게 되던 별 상관없다 정도? 

그래서 히딩크를 보더라도 대단한 감상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히딩크의 날카로운 눈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렀다. 

그의 경계섞인 눈빛을 느끼면서 호날두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이제 뛸 시간이다. 

경기는 매우매우 치열했고, 또 뜨거웠다. 

양 팀 모두 1위로의 도약을 꿈 꿀 기대와 역량이 있는 팀. 

그러기 위해선 이번 경기를 필히 이겨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간절함은 플레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거친 몸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려서 그라운드를 뒹굴었다. 

물론 호날두는 최우선 척결... 아니 견제대상. 

삐익! 

램파드의 위협적인 태클에 다리를 걷어차인 호날두는 바로 나지막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맨유의 사생팬으로도 유명한 하워드 웹은 바로 옐로우 카드를 꺼내면서 첼시 팬들과 선수들의 빈축을 샀지만. 

그래도 공이 나간 다음에 다리를 걷어찬 태클이니 반칙이 맞았다. 

이번에는 옳은 판정을 내린 하워드 웹. 

“이제는 사과도 안합니까, 프랭크? 내가 뭐 당신들한테 잘못한 거 있어요?” 

"...미안, 크리스. 어쩔 수 없었어." 

"알면 좀 살살 합시다. 이러다 또 다치겠어요." 

"흐흐, 그럴 수는 없지. 네가 어떤 녀석인데 우리가 살살할 수 있겠어?" 

램파드가 호날두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호날두는 첼시 선수들을 돌아보았는데 램파드 뿐만 아니라 다들 눈빛들이 성성했다. 

그들이 정말 작정하고 나왔다는 걸 깨달은 호날두는, 이럴 때 오히려 몸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널 담글 생각인 것 같은데. 태클의 강도를 보라고.” 

“하! 경기 앞에서는 옛 동료고 뭐고 없구나? 잔인한 놈들.” 

동료들의 말에 호날두는 유니폼에 묻은 잔디를 털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특히 조심 해야겠네요. 의도치 않은 부상이 나올 수도 있으니.” 

아무리 승부욕 강한 첼시 선수들이라 해도 적잖은 친분이 있는 자신을 고의적으로 담그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상이 어디 고의로만 발생하는가? 

“오늘 경기의 승리보다도 크리스, 네가 다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 

                                                                                                                   

                                                                                                            

퍼거슨은 터치라인 바깥에서 호날두에게 사인을 보냈다. 

뜻은 조심성 있는 플레이를 하라는 것. 

                                                                                                   

                                                              

“봐봐. 영감님도 네가 ‘호날두 더비’의 승리보다 중요하다고 하시잖아. 우리는 시즌 초반의 그 끔찍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대런의 말에 호날두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사이드로 깊게 내려간 호날두는 전방을 향해 바로 채찍같은 크로스를 올렸다. 

그걸 받아낸 테베즈가 반 박자 빠른 슈팅을 쏘아보냈지만 체흐의 선방에 막혔다.  

실패했지만 굉장히 날카로운 공격 전개라 할 수 있었는데 호날두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이거 참... 내가 중앙으로 갈 틈을 도무지 내주지를 않네.' 

피지컬로는 수비수 최고를 다투는 존 테리와 애슐리 콜이 호날두를, 그것도 아주 거칠게 가로막으면서 사이드로만 내몰고 있는 중이다. 

또한 호날두가 공만 잡으면 다른 수비수들까지 전부 위치를 잡고, 정확한 크로스나 패스를 보내기 불편하게 만들었다. 

몸이 작은 메시라면 그 사이 틈을 파고들어서 드리블로 돌파하는 시도를 해봄직 하지만, 키가 190에 이른 호날두는 신체구조상 그런 민첩함을 보일 수가 없다. 

맨유의 공격전개 상황. 

이번에도 이들의 터프한 수비에 사이드로 내몰린 호날두. 

공을 몰고도 제대로 패스할 곳을 찾지 못하여 살짝 입술을 깨문 호날두.  

어쩔 수 없이 애슐리 콜의 발에 공을 맞춰 아웃을 유도함으로서 코너킥을 상황을 만들었다. 

“우리도 지금껏 놀지만은 않았다고.” 

“......” 

“지난 시즌 그렇게 당했는데 한 번쯤은 되갚아줄 때가 되지 않았어?” 

애슐리 콜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날두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날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너킥 상황, 이번에는 반드시 헤딩골을 만들어 내리라 다짐해봤지만 첼시는 EPL, 아니 유럽 전체를 따져도 세트피스 상황에서 정말 강하다고 소문난 팀이었다. 

이들이 작정하고 최우선 견제대상인 호날두를 꽁꽁 묶어놓으니, 아무리 호날두가 대단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주심의 눈을 피해 위에서 내리 누르고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존 테리, 드록바 같은 이들의 방해로 호날두는 헤더 슛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후 찾아온 프리킥 상황에서도 주먹을 꽉 쥐고 제대로 슛을 때린 호날두. 

하지만 조제 보싱와의 머리에 맞고 튕겨져 나가면서 골 아웃이 되었다. 

"오늘은 좀... 뭔가 안 풀리네요. 제가 너무 소극적으로 나선 건가요?" 

"아니아, 아니야. 오늘 경기 하나보다 네 몸이 더 중요하다고 했잖아.“ 

“운이 없었을 뿐인데, 너무 신경쓰지 말어. 아까도 슛 각도도 기가 막혔다고." 

대런 플레쳐를 비롯한 동료들의 위로를 받는 호날두. 

이런 위로를 해주는 입장이었는데 오히려... 쩝. 

여러 가지 이유로 첼시 전 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맞게 운이든 뭐든 잘 따라주지 않자 절로 입이 삐죽 나왔다.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참고로 첼시 쪽에는 옐로우 카드가 3장, 맨유 쪽에는 1장이 나왔다. 

퍼거슨에게 칭찬을 듣는 것이 거의 일상과 같던 호날두. 

호날두는 분발하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적어도 경기력적인 측면에서 퍼거슨에게 까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영감한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했다. 

운이 안 따라주기도 했고, 첼시의 거친 플레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슐리 콜, 존 테리의 수비에 막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것, 그리고 여러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잠수를 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아예 똥을 싼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주급 20만 파운드를 받는 선수는 그 이상의 가치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시험 망친 수험생의 표정으로 죽치고 앉아 있는데 퍼거슨이 쿵쾅거리면서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이후 당할 호통에 한숨을 쉬려는 찰나였다. 

“야 이 멍청한 자식들아! 이딴 식으로 밖에 공을 못 차!? 여기는 올드 트래포드라고! 버스비 경의 동상 앞에서 나 답답해 뒤지는 꼴 보고 싶냐?” 

“......” 

“크리스가 이렇게까지 많은 기회를 줬는데 어떻게 단 한 명도 골을 못 넣어!? 그러고도 네놈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이냐? 엉!?” 

전혀 기대치 않았던 퍼거슨의 말에 숙여졌던 호날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퍼거슨은 그런 호날두의 어깨를 주물렀다. 

“첼시 놈들이 크리스 하나만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모든 견제와 압박이 크리스에게만 집중되고 있어! 그러면 너희들이 그 압박을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먹이 떠먹여주는 걸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입만 벌리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냐!?” 

“다들 똑바로 해라. ‘호날두 원맨팀’ 소리 듣기 싫으면 뭔가를 보여주라고!” 

“”“예! 알겠습니다!”“” 

퍼거슨의 말에 라커룸의 맨유 선수들은 크게 대답했다. 

무뚝뚝한 호날두도 이 때는 살짝 감동을 받았다. 

누가 봐도 살짝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을 감싸면서 다른 선수들을 혼내는 퍼거슨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시... 이 영감도 완전 냉혈한은 아니었구나. 

이래서 그 성격 드센 맨유의 옛 선수들도 퍼거슨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구나 라고 깨달았다. 

선수들에게 개별적인 전술과 플레이를 지시하는 코치들을 뒤로한 채, 퍼거슨은 호날두를 따로 불렀다. 

감동이 아직까지 남아있던 호날두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퍼거슨의 살인 미소. 

말 그대로 ‘살인’ 미소였다. 

다정하게 주무르던 손에 손톱이 세워지면서 호날두의 어깨를 사정없이 쥐어뜯었다. 

"아! 아아! 아파요, 감독님! 아, 진짜 아프다니까!" 

"이 양아치 새끼야. 너 오늘 존 테리, 애슐리 콜을 한 번도 못 뚫은 거 아냐? 알아 몰라!?“ 

그러면 그렇지, 젠장!

< 투쟁의 시대 - 3 > 끝

ⓒ 아이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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