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의 시대 - 4 >
“알아요, 아니까 이 손 좀...!”
“네가 그러고도 발롱도르 4개 처먹은 역대급 선수라고 할 수 있어? 그 놈들은 뭐 발롱도르 10개씩 탄 놈들이냐고? 엉!?"
"아니, 펠레나 마라도나 같은 양반들도 가끔씩 못할 때가 있는 것이 축구인데..."
변명하는 호날두에게 버럭 호통 치는 퍼거슨.
"이 놈의 자식이 그래도 말대꾸하네? 야 이 너구리같은 새끼야! 네가 받아 처먹는 주급과 초상권 가치가 얼마인 줄 알아? 그런데 다른 경기도 아니고 첼시 전에서 똥을 싸! 내가 조심스럽게 플레이하랬지 아예 잠수 타라 했냐고, 이 등신 같은 놈!“
“......”
솔직히 똥 쌌다 할 만큼 못한 건 아닌데...
불만이 살짝 있었지만 호날두는 대꾸하지 않았다.
얼굴 벌게진 퍼거슨 앞에서는 개기지 말라.
맨유 선수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야, 임마! 오늘 경기 보기 위해서 누가 왔는지 아냐? 너, 와이프랑 아들 놈 앞에서 이런 형편없는 모습 보여줄 거야!? 케슬린과 레오가 참 좋아라 하겠다, 쯧쯧쯧..."
호날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방금 뭐라고...?
"케슬린과 레오가 왔다고요? 아니, 제가 분명히 경기장에는 절대 오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가족들이 가족의 일터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임마. 올드 트래포드 안전요원들이 특별관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는 말고."
딱 두 마디로 호날두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퍼거슨.
씩씩거리던 화를 억누른 퍼거슨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크리스, 너는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고 널 신으로 생각하는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케슬린은 그렇다 치더라도 레오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한심한 플레이, 계속 할 거야?”
“......”
“오늘 그들에게 최고의 추억을 안겨줘야지. 가장답게, 부끄럽지 않도록!"
그 말에 호날두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 스위치가 달칵하고 켜진 기분이 들었다.
퍼거슨이 떠났음에도 호날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일어선 호날두의 눈에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붉은 투쟁심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서포터들은 변함없이 한 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러댔다.
저 응원가 속에 케슬린과 레오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호날두는 조금 흥분상태가 된 자신을 느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냉철하게.’
이 좌우명을 항상 머리에 새겼던 호날두는, 동료들과 상대팀 선수들이 흥분하여 날뛸 때도 냉철한 판단력으로 실리를 취해 많은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더 뜨겁게!
온 몸이 마치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긱스의 패스를 유려한 볼 터치로 이어받은 호날두.
그리고 곧바로, 전반전동안 자신을 가로막고 통제했던 두 개의 벽, 존 테리와 애슐리 콜에게 덤벼들었다.
‘또 막히려고?’
애슐리 콜이 입모양으로 호날두를 조롱했지만, 호날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이 두 선수가 아니었다.
타악! 탁, 탁!
마르세유 턴이 존 테리의 거친 부딪침을 측면으로 흘려보냈고, 한쪽 발로 무게중심을 바꾸면서 공중으로 볼을 띄우는 사포가 애슐리 콜의 시야에서 공을 앗아갔다.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뜬 두 사람을 제치면서 호날두는 더욱 뜨거워진 가슴을 열어젖히고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첼시 선수들의 거친 몸싸움에도 굴하지 않고 호날두는 탱크처럼 자신의 피지컬로 밀어붙였다.
단단한 체격과 완벽한 바디밸런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될 수 있으면 몸싸움을 피하면서 테크닉과 심리전으로 승부했던 호날두.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마치 전반전 첼시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움츠러들었던 시간을 되갚아주듯, 그는 가로막는 모든 것들에게 완력으로 부딪쳤고 쳐부수며 나아갔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지경.
하지만 케슬린과 레오가 보는 앞에서, 호날두는 절대 쓰러질 수 없었다.
퍽! 퍼억!
"크윽!"
"억!"
거칠게 물고 늘어지던 보싱와와 카르발류까지 나가떨어졌다.
이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전력질주하여 달려든 존 테리와 애슐리 콜.
이들의 협공을 다시 견뎌내면서도 끝끝내 버티는 호날두.
이를 악물고 버텨내던 호날두는 존 테리를 보는 척 하면서 정반대 측면으로 공을 흘렸는데.
그곳에서는 노마크 상태로 있던 루니가 슛을 찰 만반의 준비하고 끝마치고 있었다.
뻐엉-!
대포알처럼 쏘아진 웨인 루니의 강력한 슛!
체흐가 몸을 날렸지만 첼시의 골망을 흔들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0:0 스코어의 균형을 깨는 한방 슛.
숨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낼 만큼 긴장에 떨었던 올드 트래포드가,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들썩이게 만든, 갈증 속의 사이다 같은 골이었다.
[크리스티안! 환상적인 개인기와 화끈한 돌파! 전반전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존 테리와 애슐리 콜을 제칩니다! 날카로운 패스...! 들어갔습니다! 골을 넣은 선수는 백넘버 10! 웨인~ 루우니-!!]
[루니의 골 결정력은 점점 더 향상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호날두의 움직임에 대한 칭찬도 빠질 수 없겠네요! 첼시가 거칠게 나오니 오히려 화끈한 피지컬로 밀어붙여 모든 수비 집중을 자신에게 몰아넣었거든요! 그 상태에서 루니에게 노룩 패스까지 날
리니 아무리 첼시 수비진이 탄탄해도 어쩔 수가 없었죠!]
[전반전에 호날두 선수는 답지 않게 참 잠잠했죠. 하지만 후반전, 색다른 모습으로 드디어 첼시의 골네트를 찢었습니다. 호날두 선수가 이런 터프한 플레이도 할 줄 아는 선수였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을 보니 완전 불도저네요!]
[호날두가 상당히 기술적인 선수라는 평가가 많지만, 사실 우월한 피지컬과 완벽한 바디밸런스도 같이 지닌 선수입니다. 속도가 올라온 상태에서 밀어붙이면 웬만큼 떡대 좋은 선수들은 감당해낼 수 없죠! 호날두의 돌파, 시선분산과 루니의 슈팅! 정말 맨
유 다운 팀플레이입니다!]
방금 전의 돌파와 패스까지.
화면 빨 받게 잘 나왔으려나?
경기장 어디 구석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레오와 케슬린을 생각하면서.
호날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히 웃을 수 있었다.
그들이 있기에 호날두는 멈출 수 없다.
호날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개의 어시스트를 더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주어진 프리킥 찬스.
충분히 직접 프리킥 득점을 노릴 수 있는 거리임에도 공을 살짝 띄운 호날두.
목표는 바로 교체로 들어온 베르바토프의 발 아래!
볼 기술만큼은 월드 클래스,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인 베르바토프답게 멀리서 날아온 호날두의 프리킥에도 찰떡같이 받아냈다.
이어서 터진 그의 슈팅은 골로 선언될 것이 분명했던 슈팅이었지만, 체흐의 놀라운 선방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체흐는 공을 잡는데는 실패했기에, 맨유와 첼시 선수들이 페널티 안쪽에서 드잡이 질을 하며 슛을 차기 위해, 슛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결국 카르발류의 발에 걸려서 밖으로 걷어내진 공.
하지만 그 궤적을 향해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뛰어가는 선수는 바로 호날두였다.
뻐엉-!
속도를 이기지 못해 균형이 무너져 그라운드에 자빠지면서도 공을 차내서 전방, 그것도 첼시 수비진들이 가장 넓게 퍼져있는 장소로 보내는 호날두.
빠르게 날아온 공은 이번에도 디미트리 베르바토프의 발에 정확히 닿았고.
골문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핵심적인 위치에서 찬 그의 슛은 골대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두 번째 득점이었다.
올드 트래포드의 붉은 물결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알렉스 퍼거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치며 환호했고, 거스 히딩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
현재 시각, 후반전 80분.
사실상 치열했던 경기는 끝났다.
10분 안에 2골을 넣는 것은 산술적으로도, 통계학적으로도 매우 힘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올드 트래포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상대라면 더더욱.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휘몰아쳤던 첼시 선수들도 상황이 이 정도까지 몰렸으니 오히려 힘을 뺐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도 프로 선수의 주요 덕목이지만, 리그 같은 경우는 뒷날 일정도 생각해야 하기에 영리한 체력 분배가 필요하다.
매우 희박한 동점 가능성, 역전 가능성에 진력을 빼느니, 차라리 그것을 비축해서 다음 경기에 쏟아내는 것이 훨씬 나음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네마냐 비디치의 깜짝 헤딩골이 첼시의 골망을 다시 한 번 흔들면서 쐐기를 박았다.
이번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총 9골 밖에 실점하지 않았던 최강의 방패 첼시를 상대로, 후반전에만 연이어 3골을 몰아넣은 것이다.
올드 트래포드 참사의 한을, 오늘 올드 트래포드 대첩으로 풀어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삑-! 삐이익-!
와아아아아아아-!!
첼시의 원정 팬들은 분노를 감추면서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황급히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올드 트래포드 안에서는 맨유의 팬들만 남아서 오늘 경기의 대승을 이끈 선수들을 칭송하며 자축했다.
첼시를 제쳤으니 이제 이들에게 남은 목표는 숙적 리버풀이었다.
호날두는 자신을 보며 환호하고 좋아하는 관중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해주면서 아내와 아들을 찾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퍼거슨이 알 정도면 당연히 구단에서도 알 테고, VIP 좌석으로 안내해줬을 것이다.
안전요원까지 붙였다면 눈에 확 띌 텐데.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케슬린과 레오의 모습이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단박에 찾을 수 있을 텐데.
난감해하고 있는 호날두에게 퍼거슨이 다가왔다.
애제자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그가 말했다.
"저번에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악마라도 될 수 있다. 이곳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내 안의 악마가 말한 것이지 내 진심이 아니다. 맨유의 선수는 라커룸에서 들은 말로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
"서...설마!?"
"그래. 뻥이야."
호날두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망할 영감탱이. 진짜 망할 영감탱이다.
"아니, 어떻게 가족까지 이용합니까? 그들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뻔히 아시면서!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너무하긴, 이 자식아. 내 말 듣고 너도 각성해서 잘했으니 그걸로 된 거지! 너는 경기 잘하고 팬들에게 욕 안 먹어서 이득이고, 경기 이기고 승점도 채운 나도 이득이고. 어쨌거나 TV로 네 경기를 지켜봤을 것 아니냐?"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 내가 이런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게 하란 말이야.
호날두 앞에서 대놓고 웃지는 않았지만, 입 꼬리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100% 웃음을 참고 있는 품새였다.
호날두는 그저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하, 진짜 내가 맨유 구단주였으면... 어휴!’
왠지 호날두가 구단주였어도 맨유의 ‘상왕’이라 불리는 퍼거슨에게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지만...
퍼거슨을 째려보는 것밖에 호날두가 할 수 있는 복수는 없었다.
08-09 시즌 프리미어 리그 20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3 VS 0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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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올드 트래포드에서 위건 애슬래틱 격파! 리그 7연승 질주!]
[맨유, 볼턴 원더러스 원정 경기에서 진땀 승! 하지만 리그 8연승에 1위 테이블 탈환!]
[알렉스 퍼거슨, ‘맨유가 1위에 올라서는 것은 절대 깨질 수 없는 법칙.’]
[리그 17위에서 리그 1위로... 퍼거슨 매직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
[일심동체로 단결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목표는 3회 연속 우승!]
리버풀이 열심히 ‘의적질’을 하는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꾸준히 승리했다.
어쩔 때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상대를 학살했고, 또 어쩔 때는 끔찍한 경기력이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골을 넣어 승리하면서 착실하게 승점을 챙겼다.
그리고 볼턴 원더러스를 꺾으면서 리버풀을 끌어내리고 다시 리그 테이블 정상에 복귀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잉글랜드 전 스포츠 언론은 1위 순위가 뒤바뀐 순간을 대서특필하며 주목했다.
맨유는 언제나 우승후보였고 맨유가 1위하는 것은 더 이상 기사거리가 아닐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번 골든 크로스는 매우 특별했는데...
바로 시즌 초, 극심한 부진으로 강등권까지 내려앉았던 맨유가 그 어려운 일정을 헤쳐 나가며 끝끝내 1위 자리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흔들려도, 아무리 위기설이 감돌아도... ‘맨유는 맨유다.’를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맨유의 연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아티드! 웨스트 브롬위치 원정 경기에서 압도적인 5:0 대승! 크리스티안 호날두 해트트릭!]
[에버튼까지 꺾으면서 리그 10연승 고지를 밟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누가 이들을 막을 것인가!?]
[맨유가 또 이겼다! 웨스트 햄의 원정 경기 진땀 승! 리그 11연승! 구단 최다 연승기록과 타이!]
[호날두 2골! 홈에서 3:0으로 풀햄을 격파한 맨유! 리그 12연승, 구단 최다 연승기록을 달성하다!]
[도무지 꺾일 줄 모르는 맨유의 기세! 이번엔 블랙번까지 격파! 13연승!]
12월부터 2월까지.
단 한 번의 경기도 패배하지 않고, 심지어 무승부도 거두지 않고.
무조건 승리한 맨유는 13연승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웠다.
시즌 초, 그 빌빌거렸던 맨유는 없다.
다시 돌아온 ‘EPL의 제왕’만이 있을 뿐이다.
< 투쟁의 시대 - 4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