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의 시대 - 8 >
촤악!
호날두의 날카로운 키 패스가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바로 카를로스 테베즈.
모든 견제가 공을 들고 뛰고 있는 호날두에게 집중되다 시피 했으니, 상대적으로 다른 맨유 선수들은 느슨한 견제를 받았는데, 그 중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
확실한 득점 찬스를 얻은 테베즈.
퍼거슨을 비롯한 맨유 스탭진들이 모두 기대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슛은 리버풀의 골문 안쪽을 향했지만 리버풀의 골키퍼, 페페 레이나는 확실히 대단한 선수였다는 것이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터억!
몸을 날려서 구석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골키퍼들이 가장 막기 까다로워 한다는 루트의 슛을 막아내는 레이나.
그의 포효가 올드 트래포드에 가득 울렸다.
"괜찮아, 나쁘지 않았어!"
"조금만 더 침착하게 하면 동점골, 넣을 수 있다."
“펄펄 날 정도의 힘은 다들 비축해두었잖아? 흐흐.”
고참 선수들은 살짝 기가 눌린 어린 선수들을 격려하며 다시 일으켰다.
이들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과정.
테베즈의 관리는 언제나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호날두에게 맡겼지만...
‘이들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진정한 저력이 아닐까?’
개리 네빌,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웨스 브라운 같은 맨유에서 십 수 년을 뛴 늙은 생강들은 무수히 많은 참패와 악조건을 겪어봤고 이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축적할 때로 축적한 상태.
테베즈의 득점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라이벌 리버풀에게 한점 뒤져있음에도, 맨유의 분위기는 분명 나쁘지 않은 것은 바로 후배들을 다잡아 줄 수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올드 트래포드.
1점 뒤져있지만 ‘환경’은 우리 편이었고 극복해낼 수 있는 시간은 차고 넘치게 있었다.
맨유의 ‘저력’이라면 역전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충분했지만... 아쉽게도 맨유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존 오셔의 패스가 살짝 미스가 나면서 볼이 흘렸고, 비디치의 바로 앞에 있던 제라드에게 닿은 것이다!
오늘 정말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제라드.
그리고 멀리서 그것을 바라본 호날두는, 과거에 보았던 영상의 어떤 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젠장! 멈춰요, 네마냐!!"
하지만 사태는 벌어졌다.
볼을 놓치면서 흥분한 비디치는 제라드의 발을 거칠게 거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옷을 잡고 끌어당기면서 넘어트리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과거에 보았던 맨유와 리버풀의 어떤 경기가 떠올랐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지금까지 잘 생각나지 않았는데, 저 장면을 보고나서야 그 때의 일을 되새길 수 있었다.
비디치는 레드 카드를 받고 맨유는 1:4로 대패하여, 올드 트래포드의 참사라 불리게 되는 바로 그 경기가 바로 오늘이었다!
비디치와 제라드를 비롯한 각 팀 선수들이 모두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심판에게 달려들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올드 트래포드는 침묵에 휩싸였다.
보통 리버풀 선수들이 넘어지면 엄살 부리지 말라며 거칠게 야유를 뿌리는 게 정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선수들을 진정시킨 심판이 비디치에게 꺼내든 카드는... 바로 레드 카드.
퍼디난드와 함께 맨유 수비의 중핵인 비디치는 그렇게 어이없는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호날두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에 보았던 경기의 장면과 지금 현재의 장면이 오버랩 되어 이어졌다.
[아아-! 주심! 레드 카드입니다! 네마냐 비디치!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당합니다! 이건 아주 치명적입니다!]
[급하게 추격해야하는 맨유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습니다! 수비에 구멍이 뚫리면 공격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 축구계 기본 상식이죠!]
퍼디난드가 빌드업에 집중할 때 그 뒤를 탄탄히 지키는 선수가 바로 비디치였다.
비디치가 없는 퍼디난드는 구멍 뚫린 댐과 같다.
[사실 리버풀의 동점골 상황에서도 비디치 선수의 실수가 굉장히 컸었죠. 이번에도 자신의 팀에 커다란 해를 끼치는 비디치 선수입니다! 퍼거슨 경에게 제대로 한 소리 듣겠는데요.]
[좋은 자리에서 프리킥 찬스까지 얻은 리버풀! 아우렐리우와 제라드 선수가 서 있는데 둘 중 누가 프리킥을 찰지...! 동시에 달려듭니다! 차는 선수는 아우렐리우!]
[오우-! 원더풀-!! 아우렐리우, 환상적인 골입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무려 3골을 기록하는데 성공하는 리버풀!! 이건 이변입니다!]
[다시 봐도 정말 판타스틱한 프리킥이었습니다! 파비오 아우렐리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절망으로 밀어 넣습니다! 리버풀 관중들이 환호가 올드 트래포드를 덮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맨유의 팬들은 아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퇴장에 추가골까지.
이제 이곳은 올드 트래포드가 아닌 안필드였다.
경기장과 그라운드에는 오로지 광기 섞인 리버풀 서포터들의 함성들만 가득 찼다.
맨유는 이미 교체카드를 다 사용했다.
박치성을 빼고 베르바토프를 집어넣었고, 캐릭과 안데르손을 긱스와 스콜스로 교체하면서 역전 의지를 드러냈었다.
하지만 비디치의 퇴장, 그리고 추가골까지 터지면서 그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은 시간은 15분, 그 퍼거슨마저 승리를 포기한 듯, 호통조차 치지 않고 감독 석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
후배들을 잘 다독였던 고참 선수들마저도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나도 경기를 포기할까?'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압도적으로 절망스러운 상황.
경기 종료까지 남아있는 시간은 고작 15분.
2골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10 대 11로 싸워야 하는, 호날두의 축구 일생에 이 정도까지 팀이 핀치에 몰린 상황은 없었다.
호날두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되기로 해놓고서, 이런 경기를 그냥 포기한다고? 네가 그러고도 크리스티안 호날두라는 이름을 달 자격이 있냐!'
이곳에는 케슬린과 레오가 와 있다.
그들이 자신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눈을 감았던 호날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호날두가 걱정되어서 다가왔던 에브라가 움찔할 정도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
“최후의 최후까지 싸워야 해.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저지를 입은 이유니까.”
=
툭!
스콜스의 롱 패스를 헤딩으로 받아낸 호날두.
스크르텔과의 공중 볼 경합에서 승리한 호날두는 리버풀 수비진들의 몸싸움을 견뎌내면서 라 크로게타를 펼치며 돌진한다.
오직 리버풀의 응원가만 울려 퍼지고 있는 올드 트래포드 속에서도 호날두 만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투쟁했다.
도무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호날두를 막을 수 없다 생각한 것인지 히피아가 파울로 그의 드리블을 끊어냈다.
"잘했어, 히피아!"
"저런 놈은 파울로라도 끊어야 해!"
파울을 하지 않으면 호날두를 막을 수 없다, 그들도 판단한 모양이다.
두 점이나 앞서 있는 상황에서도 리버풀 선수들은 호날두를 극도로 경계했다.
첼시 시절부터 그에게 몇 번이고 당했던 과거는, 상처 입은 맹수에게 결코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격언이 새겨지도록 했다.
프리킥 찬스를 앞두고 마음을 다스린 호날두.
아직 추가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경기 종료까지 약 10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만약에 이 프리킥이 성공한다면... 역전은 몰라도 무승부는 불가능이 아니다.
'이 골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심판의 휘슬 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렸다.
미친 듯이 날 뛰던 리버풀 팬들도 지금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지켜보고 있는 상황.
숨을 고르며 계산을 마친 호날두는 도움닫기를 통해 멈춰있는 볼에 달려들었다.
뻐엉-!
시원스러운 감각과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공은 날아갔다.
이제 결과는 신에게 맡길 뿐.
호날두의 프리킥은 리버풀 선수들의 머리를 뛰어넘어서 레이나 골키퍼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동체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공이 빨라도 궤적이 너무 정직하다.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막힐 킥.
하지만 이는 호날두 특유의 프리킥 굴절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공은 골문 앞에서 급격히, 급격히 휘어졌고 기겁한 레이나가 반응할 시간도 없이 골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날두의 UFO 슛은 이렇게 두 번 휘어진다.
우와아아아아아-!!!
설마설마 하면서도 호날두였기 때문에 기대했고 기다렸다.
맨유 팬들은 마치 억눌려있던 무언가를 풀어내듯 단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열렬히 쏟아냈다.
호날두에 대한 찬사!
맨유 선수들이 환상적인 프리킥 득점을 성공시킨 축하를 위해 다가왔지만, 세레머니도 하지 않은 호날두는 공을 들고 중앙선을 향해 뛰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맨유 선수들도 호날두의 의지를 알아채고 서둘러 복귀한다.
자신들의 얼굴 마담이라 할 수 있는 선수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찌 박자를 맞춰주지 않을쏘냐.
선수 숫자는 10명이었지만 꺼졌던 투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까짓 한 골, 충분히 넣을 수 있어, X발!’
맨유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와아아아우-! 언블리버블! 그야말로 환상적인 골입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말도 안 되는 프리킥을 성공시킵니다! 이게 각도가 이런 식으로 나올 수가 있나요!?]
[절대적으로(absolutely) 판타스틱한 골입니다! 호날두의 프리킥 지점은 아우렐리우의 프리킥보다 더 골을 넣기 어려운 위치였거든요! 그걸 보란 듯이 성공시키는군요! 세레머니도 하지 않는 호날두!]
[추가 골을 넣겠다는 아주 강력한 의지입니다! 축구 선수로서 존중받아 마땅할 훌륭한 프로의식!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호날두의 프리킥 골을 기점으로 다시 불타오릅니다! 이 경기 이젠 모릅니다!]
선축을 해야 할 리버풀 선수들이 살짝 주저하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들이 이기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그 중에서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티안 호날두의 존재.
포식자 앞에 놓인 초식동물처럼 리버풀 선수들은 그의 눈빛 아래 기가 죽었다.
‘이게 뭐냐고!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도대체 왜 쫄아있는 거야?’
페르난도 토레스는 동료 선수들을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축구는 기세싸움이다.
기세에서 밀리면 지는 거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그 증오스러운 맨유를 침몰시킬 찬스인데 이런 기회를 자각하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토레스는 속으로 불만을 표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맨유는 맨유야! 우리는 아까 너무 방심했다! 다시는 이런 실수가 나와서는 안 돼!"
"호날두를 너무 의식하지 마! 그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선수니까! 잊지 마라! 우리가 버티기만 해도 이긴다!"
주장인 제라드와 알론소가 동료들을 다독였다.
그제서야 토레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역시 제라드와 알론소.
리버풀 내에서 자신이 ‘유이하게’ 인정하는 선수들다웠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맨유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호날두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공식과도 같다.
그만큼 호날두는 대단한 선수였고 이런 상황에서 특히 강하다는 것을 토레스는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어떻게 이기던... 이기면 장땡이지!’
“볼을 돌리면서 최대한 시간 끌죠.”
“...매너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
“더럽게 하더라도 이해 부탁해요. 일단 이기는 게 중요하잖아요?”
토레스의 말에 제라드는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알론소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승리가 깨끗한 패배보다 백배 낫다는 것은 스포츠 세계에서는 당연한 소리였다.
볼을 돌리면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리버풀.
짧은 패스로 자기 진영에만 볼을 돌렸고, 턴 오버 위험이 있는 행동을 최대한 삼갔다.
스로인 상황이 주어졌을 때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은 백미.
주심이 뭐라하던 리버풀 선수들은 많은 시간을 소모시켰다.
당연히 이를 가만 볼 맨유 선수들이 아니었다.
“이건 고의적인 경기지연행위야! 주심! 저 놈들은 경기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고!”
“카드를 꺼내야지! 네마냐에게는 다이렉트로 레드 카드를 꺼내놓고 왜 저 놈들에게는 봐주는 거야!!”
리버풀 선수들은 항변했다.
“워워, 진정해! 운동화 끈이 풀어져서 묶고 있었을 뿐이라고.”
“어차피 너희들에게는 ‘퍼기 타임’이 있잖아?”
“오히려 이런 식으로 시간 끄는 것이 경기지연행위일 텐데.”
“뭐야!? 이 쓰레기 자식들이!”
다혈질인 루니와 테베즈가 달려들었다.
리버풀 선수들도 험악한 표정으로 맞섰다.
상황은 일촉즉발로 흘러갔다.
“빨리 경기 진행이나 하시죠, 주심.”
“하지만 크리스!”
“우리가 복수할 수 있는 길은, 하루빨리 상황을 원점으로 만드는 거야. 진다면 결국 패배자의 항변은 변명거리밖에 안 된다고.”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리버풀 선수들을 쏘아보는 호날두.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는 그 눈빛에 담 큰 선수들마저도 시선을 피했다.
“너희들도 추접한 짓 그만하고 제대로 붙어.”
“추접한 짓? 우리가 무슨 추접한 짓을 했지?”
이죽이는 토레스에게 호날두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게 좋을 거다. 과거와는 달리 네 행적들은 전부 영상으로 기록되고 있을 테니까.”
“아하, 그렇다면 발려놓고 억지 부리고 있는 네 모습도 기록되고 있겠네? '세계 최고의 선수가 초조해서 떠는 꼴' 이라고 말이야.”
“그거 알고 있어? 천박하게 볼 차는 놈은 결국 한계가 보인다는 거. 네가 그 자리에서 우승도 못하고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너 같이 어중간한 놈들 앞길 막는거 전문이지.
마테라치나 가투소 같은 놈들처럼.
눈에 불꽃이 튀긴 토레스가 호날두에게 달려들었다.
제라드가 몸으로 막아서지 않았으면 사건이 터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이들 사이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후배가 많이 사납네요, 스티븐. 길들이기 쉽지 않겠어.”
“너야말로 더 이상 페르난도를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런 놈과 진흙탕 싸움을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어요. 그니까... 제대로 경기합시다, 스티븐. 리버풀과 당신의 명예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는 솔직히 좀 아니었잖아요.”
“...그래. 알았다. 너도 진정하고.”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호날두와 토레스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경기는 재개됐다.
< 투쟁의 시대 - 8 > 끝
ⓒ 아이시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