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의 시대 - 11 >
2009년 4월 29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지는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
아르센 벵거는 아스날 팬들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화려한 맨유의 선수진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7번 유니폼을 입은 한 선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벵거에게는 애증의 이름이다.
그가 첼시에 있었을 때도, 아스날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을 뽑으라면 반드시 호날두의 이름이 들어갔는데, 맨유에서도 그렇게 되었다.
몇 년째 벵거에게 괴로움을 선사하고 있는 이 선수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날렵하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삐이익-!
경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벵거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포르투갈 리그 시절부터 벵거는 호날두를 눈 여겨봤고 그를 영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조르제 멘데스는 신인 선수에게는 너무나도 과한 주급과 계약금을 요구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스날의 주급체계를 지키고자 했던 벵거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그가 아니어도 뛰어나고 어린 선수들은 많으리라 생각하며 벵거는 다른 선수들을 물색했다.
하지만 그런 벵거의 판단을 비웃듯이,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보란 듯이 유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클럽 레코드를 찍으며 무리뉴의 첼시로 이적했다.
호날두는 순식간에 아스날의 재정으로는 영입은 꿈도 못 꿀 거대한 선수로 성장해버렸다.
그저 유망하기만 했던 소년이 어느새 아스날과 벵거의 가장 큰 대적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벵거는 호날두를 보면서 언제나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밑에서 뛰었다면, 과연 어떤 플레이들을 보여주고 또 어떤 커리어를 쌓게 됐을까?
지금의 호날두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아스날은 지금보다 훨씬 희망적이고 강력한 팀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
하지만 호날두가 지금 같은 완벽한 우승 커리어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벵거를 끊임없이 괴롭게 만들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실패와 무능을 헐뜯는 일이었기 때문이기에.
"허...."
미간에 깊은 주름을 그리며, 벵거는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그곳에서는 7번의 백넘버 유니폼을 입은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볼을 잡고 달리는 중이다.
놀라운 스피드, 놀라둔 테크닉, 놀라운 집중력.
키어런 깁스와 콜로 투레가 뒷걸음질 치면서 그를 막으려 했지만 기가 막힌 턴과 발재간 기술을 연이어 터트린 호날두는 간단히 그들을 제쳤다.
저 커다란 신체를 위시한 피지컬은 '피지컬 놀음'이라는 EPL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인데, 거기에 화려하고 완성도 높은 개인기, 그것을 이용한 탈 압박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다.
대인 마크를 줄줄이 달았고 호날두가 주로 애용하는 득점 루트에도 지역 방어와 수비 조직망을 새로 구현, 확실하게 그를 통제하려 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날두를 막을 수 없었다.
정말로 막을 수 없었다.
'마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를 보는 것 같구나.'
모든 수비 장벽을 다 뚫어낸 호날두는 결국 골키퍼마저도 제치면서 득점에 성공했다.
몸을 젖히면서 자신만의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호날두는.
마치 전장의 군주처럼 오만하고 광폭했지만 그것이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자신의 팀이 골을 먹혔음에도 아주 잠시 동안 벵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호날두는 그러한 선수였다.
상대팀 감독으로서도 찬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는 그런 선수.
[고오오오올-! 환상적인 골입니다! 챔피언스 리그 6경기 연속골을 이어가는 크리스티안 호날두!!]
[이것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재림입니다!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또 다시 원하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무리뉴와 퍼거슨은 수많은 영광스러운 트로피(특히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들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벵거는 그들을 단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남들과의 비교를 통한 대리만족보다는 스스로의 전술적 철학의 실현을 꿈꾸는 몽상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 살짝 들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같은 선수를 지도해봤다는 것.
그것은 축구 감독으로서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렵다, 생각하면서도 벵거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호날두를 상대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동원했다.
사자왕의 적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을 펼쳤던 것처럼, 벵거 역시 호날두에 대한 선수들의 강력한 압박, 조직적인 수비망을 새로 깔았는데 그것은 호날두를 막기 위해서가 아닌, 그 주변을 잘라내기 위해서다.
‘호날두를 철저히 고립시킨다. 그가 공을 받을 수 없게 만든다.’
벵거의 전략은 분명 통했다.
일명 ‘확장성 압박’ 이라는 이 실용전술은 위협적인 선수를 되려 놔두면서 그 주변 패스 루트들을 끊어내는 것으로 맨유의 공격 전개 자체를 무디게 만들었다.
하지만 호날두는 혼자가 아니었고 맨유와 퍼거슨은 고립된 호날두를 도와줄 능력이 충분했다.
퍼거슨이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치자 맨유의 움직임이 변했다.
벵거가 철저히 준비한 만큼 퍼거스도 철저히 준비한 것이다.
짧은 원투패스와 창조적인 크로스는 결국 호날두에게 닿았다.
아스날의 수비진을 끝끝내 찢어발기는데 돌파하는 호날두에게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이 넘쳤다.
그가 볼을 몰고, 치고, 달린다.
벵거의 침이 바짝 말랐다.
뻐엉-!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공을 차버리는 호날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공은 급격한 각도로 휘면서 아스날의 골 망을 다시 한 번 가르는데 성공했다.
크리스티안 호날두, 두 번째 골이었다.
벵거는 고개를 설레 저으면서 이 한 마디만을 덧붙였다고 한다.
"God is on the side of the big battalions.(신은 결국 강자의 편이다.)"
===
아스날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결로도 주목을 끌었던 챔스 준결승 1차전은 호날두의 멀티 골에 의한 2:0 맨유의 승리로 끝이 났다.
호날두에 대한 찬사가 또 다시 잉글랜드를 적셨다.
정말 이 선수가 세계 최고를 넘어 펠레와 마라도나의 위상까지 뚫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말들이 쉴 새 없이 나돌았을 정도.
호날두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위대해지고 있었다.
반드시 3점차 이상의 득점을 기록해야 아스날은 05-06 시즌 이후부터 몇 번이고 꿈 꿔왔던 그 무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2차전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아스날의 홈.
역전은 충분한 가능성이었고 거너스들은 그 가능성을 버릴 수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더욱 철저하게, 더욱 치밀하게 준비해왔을 아르센 벵거와 2연속 결승 진출이라는 위업을 목전에 둔 알렉스 퍼거슨의 맞대결이 곧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하기 앞서 조금 특별한 사람이 에미레츠 스타디움을 방문했다.
짙은 선글라스와 검은색 바탕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이번 경기 관람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격력은 역시 명불허전이구만. 짧고 선 굵은 패스에 아스날의 수비진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저런 식의 플레이를 하는 팀은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클럽 감독으로 뛰었던 내가 볼 때, 너의 7번 유니폼을 물려받은 크리스티안 호날두는 아주 특별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데이비드?"
"...확실히 그렇군요. 그는 저희들 사이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하죠."
최고의 축구 스타라고 불렸던 데이비드 베컴.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기도 한 파비오 카펠로였다.
"한 때 나도 크리스티안 호날두를 영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적이 있었지. 그는 모든 축구 감독들의 워너비 같은 선수였거든."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이었죠. 저와 감독님, 둘 다 결국 떠나야 했던."
"허허허, 아프고도 섬칫한 기억이었지."
지금 카펠로와 베컴은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지만 당시 둘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닥쳤었다.
베컴은 카펠로의 중용을 받지 못했고 결국 LA 갤럭시로 쫓겨나듯 이적했다.
카펠로는 레알에게 리그 우승을 선물해줬음에도 시즌 종료 이후 경질을 당했다.
그 당시 베컴과 카펠로의 사이는 최악을 달렸었고 언론을 통해서 서로에게 막말을 퍼부었지만, 지금은 다 화해하고 옛일이 되었다.
그런 이들이 이렇게 경기장을 방문하게 된 것은 조금 특별한 이유 때문.
아스날의 홈에서 치러지는 경기임에도, 벵거가 정말 열심히 준비해온 것이 보임에도.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경기시작 8분 만에 들어간 박치성의 선제골, 그리고 전반 11분에는 호날두의 추가골이 터지면서 승부는 완전히 기울고야 말았다.
그 이후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총 5골을 넣어야 결승 진출이 가능한 아스날의 선수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맨유... 강하군, 정말 강하군. 왜 이 팀이 우승후보 1순위인지 알 것 같아.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아. 내가 감독이었어도 답이 없을 것 같군."
"크리스티안 호날두도 대단하군요. 저런 식의 플레이와 움직임이 가능한 선수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역시 이 시대 최고의 선수답군요."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것이 없나? 너도 한 때 최고의 선수였던 적이 있지 않나."
"농담이시죠? 단 한 순간도 실력에 있어서 제가 최고였던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최고는 지네딘(지단)이었죠."
"확실히 그라면 호날두의 옆에 설 수 있는 선수지. 내가 레알 마드리드를 지휘할 때 지네딘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었어."
두 사람은 추억에 젖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경기를 보면서 과거를 보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7경기 연속골이라는 타이틀도 그에겐 부족했나보다.
또 다시 골을 넣는 크리스티안 호날두.
이번에는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이었다.
무섭게 포효하는 크리스티안 호날두에게 카펠로와 베컴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날두를 보면 과거 엘 페노메노(Il Fenomeno : 경이로운 존재)라고 불렸던 호나우두의 전성기 모습이 떠올라. 슈팅, 드리블, 피지컬, 개인기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지."
"거기에 놀라운 공중 볼 능력까지 갖추었죠. 제 동료 선수이긴 했지만 호나우두의 전성기보다 지금의 호날두가 더 강력하고 진보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호나우두는 스트라이커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골 결정력과 드리블, 민첩성, 테크닉, 과감함까지.
하지만 그는 제공권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헤딩을 거의 할 줄 모르는 선수였다.
크로스 마스터인 베컴과 헤딩을 모르는 호나우두의 상성은 극악.
뭐,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문제가 그것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허허, 후배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걸?"
"제가 부정해도 남들이 다 인정하는 사실인걸요, 뭐. 그와 함께 뛰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직접 같은 공간 속 공기를 마시면서 겪고 싶었거든요."
베컴은 어깨를 으쓱였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티안 호날두와 자신을, 현 7번과 전 7번으로 비교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베컴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현재의 호날두는 자신과 비교될 레벨의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 혼자만의 힘으로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고, 팀의 순위와 트로피의 개수까지 바꾸는 선수와 동 시대에도 견줄만한 선수가 여럿 있었던 선수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맨유의 7번 유니폼을 입고 뛰는 그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추한 질투심 따위 들지 않아요. 그가 저보다 잘해서 다행이고 맨유가 상승하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카펠로는 말없이 베컴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
경기가 종료되었다.
승자는 당연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나마 한 골을 넣으면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한 아스날이지만 그것으로 위안삼기에는 너무 비참한 패배였다.
특히 이곳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EPL에서 가장 비싼 티켓 값을 내주면서도 팀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방문해준 팬들의 마음, 탈락하더라도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무승부 이상의 결과를 바랬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아스날의 감독, 벵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 경기도 끝났으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앉아있는 베컴을 웃으면서 일으켜 세우는 파비오 카펠로.
"너도 그와 화해하고 싶잖니. 그래서 어려운 이렇게 발걸음을 한 거잖아. 앙금은 오래 남겨둘수록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법이란다."
카펠로는 베컴과 함께 스타디움 내 선수 이동 통로로 향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감독과 선수의 얼굴을 알아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관계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의 시야에, 알렉스 퍼거슨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다가올수록 베컴의 심장이 점점 더 거친 두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사과해야하지? 내가 잘못했다고 먼저 말해야 하나?
"파비오, 나의 오랜 친구."
"오랜만이네, 알렉스. 경기 잘 봤어. 역시 자네의 솜씨는 명불허전이더군!"
"고맙구만. 사실 자네가 온다고 하길래 준비를 조금 더 철저히 해봤지."
활짝 웃으면서 카펠로와 대화하는 퍼거슨.
하지만 분명 베컴을 봤을 텐데 그에게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베컴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 굳어졌다.
보다 못한 카펠로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려 했지만 퍼거슨은 웃으면서 단호하게 끊어냈다.
완전히 베컴을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 투쟁의 시대 - 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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