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154화 (124/125)

< VS 바르셀로나 - 6 >

로마의 날씨는 아주 화창하면서 맑았다. 

비가 온지 좀 됐는지라 습도도 적당했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주 기분 좋은 날씨. 

알렉스 퍼거슨은 맨체스터 선수단에게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마치 물가에 내 놓은 아이처럼 신경을 썼던 퍼거슨. 

하지만 지금은 '이제는 알려주지 않아도 너희들 스스로 할 수 있지?' 이런 분위기였다. 

선수단 사이에서도 왠지 모르게 경험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이래서 돈 주고도 못사는 우승 경험이 중요한 거다. 

“다만... 그렇다고 경기에서 졌을 때, 내가 뚜껑 열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 이겨라. 결승전에 오른 이상 무조건 이겨! 지면 절대로 가만 안 놔둘 테니까.” 

늘 똑같은 레퍼토리, 하지만 늘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퍼거슨 식 라커룸 대화. 

호날두는 여기에 호응해주면서 그 효과를 증폭시키기로 했다. 

“질 생각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준우승은 패배자들 중에서 첫 번째일 뿐이니까요. 우승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없습니다.” 

“...이 짜식.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릴 하는구나! 명언이다, 준우승도 패배자라.” 

“주제(무리뉴) 밑에서 뛰던 시절, 그에게 들었던 말이죠.” 

“...쓰읍, 명언 취소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지는데?” 

하하하하! 

라커룸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호날두에게 주먹을 꽉 쥐어 보이는 것이 '인터뷰 그딴 식으로 했는데 지기만 해라!' 라고 말을 하는 퍼거슨. 

선수단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확실히 조일 때와 풀어줘야 할 때를 기가막히게 캐치하는 양반이다. 

호날두도 웃으면서 퍼거슨의 주먹을 펴주었다. 

박치성-루니-호날두 

긱스-캐릭-안데르손 

에브라-비디치-퍼디난드-오셔 

드디어 선발명단에 든 박치성! 

퍼거슨에게 결승전 선발 출전에 확인받고 환호하던 모습이 선연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증명하겠다며 다짐하던 박치성. 

지금은 투철한 프로의식으로 잘 다듬은, 날카로운 칼날 같은 모습. 

박치성은 큰 경기에서 누구보다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더욱 기대된다. 

테베즈냐, 루니냐를 두고 끝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루니를 선택한 퍼거슨. 

2004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루니를 봤을 때, 그는 정말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 같았다. 

폭발적인 움직임과 드리블, 그리고 수많은 투쟁과 난투를 즐겼던 웨인 루니. 

세월이 흘러서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고 모난 부분이 다듬어진 루니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월드 클래스 선수가 되었다. 

엄청난 기세로 골을 넣고 있는 테베즈를 제치고 루니를 뽑을 정도로, 퍼거슨의 루니에 대한 신뢰는 대단히 높았다. 

“잘 부탁해, 하얀 돼지.” 

“나야 말로 잘 부탁해. 말자ㅈ...” 

“야! 그건 너무 심한 말 아니냐!” 

“뭐가 심해! 남자에겐 칭찬이지. 그러는 너야말로 하얀 돼지라고 했으면서!” 

호날두와 루니가 덤 앤 더머처럼 투닥거렸다. 

그러나 이것은 맨유 선수들 모두가 아는 이들만의 장난.  

정말 살벌하게 싸웠던 때는 호날두의 첼시 시절. 

리그에서 만나기만 하면 싸웠던 호날두와 루니가, 절친한 동료로서 서로에게 농담과 장난을 치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호날두와 루니는 그 어떤 팀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라는 것이다. 

그라운드의 반대편에서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빅토르 발데스, 카를레스 푸욜, 야야 투레, 제라르드 피케, 세르히오 부스케츠,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티에리 앙리, 사무엘 에투... 그리고 리오넬 메시까지! 

역대급 바르셀로나, 가히 절대적인 멤버. 

이들이 바로 바르셀로나를 세계 최강의 팀으로서 군림하게 만들 멤버였다. 

메시가 호날두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피케 역시 미소를 띄우면서 눈인사를 한다. 

첼시 시절 아주 친했던 구드욘센은 보는 눈만 없으면 이곳으로 달려올 기세였다. 

하지만... 그 외 바르셀로나의 모든 선수들은 하나같이 호날두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인터뷰의 여파였다. 

"상황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입을 함부로 놀렸더라? 네가 아무리 세계 최고라도 그러면 쓰나." 

바르셀로나의 주장, 카를레스 푸욜이 호날두와 악수를 하면서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바르셀로나는 오만함에 찌들어있는 유나이티드를 충분히 박살낼 수 있어. 어디 잘난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라고." 

사비 에르난데스는 호날두의 악수를 받지도 않고 스쳐지나갔다. 

"오만하고 저열한 포르투갈 촌놈. 네가 카탈루냐와 그 정신에 대해서 뭘 알아?" 

눈을 치켜뜨는 세르히오 부스케츠. 

"크리스티안, 난 널 선수로서 존경하고 있지만, 네가 했던 인터뷰는 너무 공격적이었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까지. 

이들이 흘리는 적의의 중심에서 호날두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유지했다. 

재밌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오직 자신만을 노려보고 의식하는 그 모습이. 

EPL에서 인연이 있었던 앙리는 악수를 하면서 그런 호날두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또 만나게 되었어, 친구." 

"그래요. 지금 티에리, 제 2의 전성기죠?" 

티에리 앙리의 바르셀로나 첫 시즌, 그것은 ‘앙리’라는 이름값에 크게 못 미쳤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스페인 생활에 적응한 앙리는, 실망스러웠던 이전의 폼에서 벗어나서, 아스날 시절의 품격을 찾았다는 평가를 듣는 중. 

경기 전, 퍼거슨도 그런 앙리를 크게 의식했지만 앙리는 앓는 소리만 해댈 뿐이다. 

"그래봤자 이제 나는 너무 늙었어. 부상으로 찌든 몸도 예전만 못하고." 

“당신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고 있군요. EPL의 ‘킹‘이잖아요?” 

“하하, 날 놀리는 거야, 크리스? 내가 킹이면, 그 킹의 전성기 시절을 훌쩍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벌써 몇 시즌째 보여주고 있는 너는 뭔데?” 

“그냥 부상에 굽히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저야 뭐...” 

서로를 보면서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앙리와 호날두. 

그를 위로해주는 말을 건넸지만, 사실 앙리의 등부상은 고질적인 것이었다. 

수없이 재발하는 부상은 선수의 몸을 갉아먹고 선수 수명을 줄여버린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질 그의 폼 저하가 아쉬웠다. 

"열심히 싸워보자. 크리스. 너를 만나면 언제나 패배해서 꼬랑지를 말기 바빴지만, 이번에는 정말 쉽지 않을 거야. 지금의 바르셀로나는 아주 강한 팀이거든." 

"좋습니다. 티에리. 우리 멋진 승부 해봐요." 

앙리가 유일하게 들어보지 못한 트로피,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 

그것에 대한 집착과 염원이 얼마나 클지 호날두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적으로 만난 이상, 자신과 그의 목표가 같은 이상. 

결코 내줄 수 없었다. 

뒤이어 만난 피케, 메시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대신 손을 위아래로 튕기면서 살짝 장난을 쳤다. 

"사비와 카를레스가 크리스의 인터뷰를 보고 아주 많이 화를 냈습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그들을 조심하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야? 적한테 너무 친절한데?" 

"푸하! 그렇게 생각하려면 그렇게 하세요. 아무튼 저는 오늘 반드시 골을 넣을 겁니다. 당신을 제치고 넣는다면 더 기쁘겠죠." 

"좋아. 물론 나도 골을 넣을 거야. 대신 너를 제치지 않고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도록 압도적인 스피드를 보여주지.“ 

장난과 도발이 섞인 호날두와 메시의 말을 끝으로 선수들끼리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던 시간이 끝났다. 

이제는 정말, 숨겨왔던 칼을 꺼내 진검 승부하는 일만 남았다. 

삐이이익-! 

휘슬소리와 함께 챔피언스 리그 08-09시즌의 챔피언을 뽑는 마지막 경기. 

맨유와 바르셀로나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과 함께 그 경기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기량을 만개시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다니엘 알베스가 경고 누적 징계로 오늘 경기 나오지 못한 것은 맨유에게 있어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 언론이나 평론가들, 축구팬들의 평가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탑독’이었지만, 호날두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진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자신과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바르셀로나에게 밀린다고 생각하는 호날두.  

여기에 훗날 세계 최고의 풀백으로 뽑히던 다니엘 알베스까지 있었다면 경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겠지?' 

호날두 자체를 경계해서인지 아니면 호날두가 했던 인터뷰에 대한 악감정 때문인지. 

자신이 공을 잡으니 다른 맨유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견제와 압박, 태클 등이 들어왔다. 

바르셀로나답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방해. 

특히 센터백인 야야 투레는 가히 싸움꾼이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호날두에게 싸움을 걸었다. 

삐익! 

야야 투레는 거친 몸싸움과 진로방해로 호날두를 막아 세웠고, 대놓고 태클을 걸거나 다리를 걸고넘어지기도 했다. 

얼마나 심했는지 웬만한 반칙이나 파울에도 유순히 넘어가는 호날두가 '이건 반칙이잖아!' 라는 제스쳐로 주심에게 항의할 정도였으니까. 

“적당히 하지? 이건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지 상대의 앞길을 막는 게임이 아니라고.”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카드가 하나 뽑혀야지 이해가 되려나?” 

“네가 만약 주심이었다면 조금 이해를 해주겠는데 말이지.” 

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신경전을 벌이는 호날두와 야야 투레. 

주심은 이들을 말렸고 바로 휘슬을 불어 프리킥을 선언했다. 

“이게 파울이라뇨? 정당한 경합 과정이었습니다!” 

“호날두가 오버해서 넘어진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양심도 없이 항의하는 사비와 부스케츠를 보며 호날두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방금 상황에서 카드가 나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쯧...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다. 

[경기 시작 초반부터 맨유가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습니다. 거리가 조금 멀지만 호날두 선수의 정확하고 강력한 프리킥이라면 얼마든지 골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저렇게 경계하는 것이고요.] 

[찹니다! 호날두 슛! 막았습니다! 빅토르 발데스의 기가 막힌 선방! 막기 어려운 위치로 빨려 들어가는 공이었는데 발데스! 놀라운 반사 신경입니다!] 

'햐... 저 인간. 그걸 막네.' 

오른손잡이인 빅토르 발데스가 가장 막기 어려운 위치인 왼쪽 골대 구석. 

그 구석을 향해 강하게 걷어찬 슛이었는데 이것을 용케 막아내는 발데스였다. 

과연 월드 클래스 골키퍼는 이 정도는 할 수 잇다는 건가? 

튕겨나간 세컨 볼을 향해서 달려들었던 박치성이지만 공이 생각보다 더 많이 공중으로 뜨면서 아웃되었다. 

"크리스, 괜찮아! 나쁘지 않은 슛이었어!" 

"너야말로 나이스 플레이였어, 치성." 

서로에게 격려하며 중앙선 쪽으로 내려가는 호날두와 박치성. 

바르셀로나는 이쪽의 공격력을 경계한 것인지 초반 탐색전을 신중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호날두는 처음 바르셀로나와의 경기를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걱정을 했다.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 식 패싱 플레이, 일명 '티키타가'가 얼마나 상대팀에게 얼만큼 깊은 절망을 선사해왔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정말 상대할 팀이 없었다. 

하지만... 

탁, 탁, 탁! 

터억! 

'이거 뭔가 좀... 어설픈데?' 

이니에스타가 앙리에게 패스하는 공을, 달려들어서 끊어낸 호날두는 그리 생각했다. 

아직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가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화제가 될 정도로 임팩트 있었던 10-11시즌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전성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쳐도 오늘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호날두가 분석해왔던 지난 경기들에 비해서는 뭔가 조금 어색했다. 

톱니바퀴가 조금씩 어긋나서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그런 호날두는, 옆에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긱스와 눈이 마주쳤다. 

                                                         

"너도 ‘그렇게’ 느꼈니?" 

"라이언도 ‘그렇게’ 느꼈나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말했다. 

                                                                                                

"그래, 이놈들...." 

"결승전이라서 잔뜩 쫀 모양이네요. 귀여운 녀석들." 

                                                                        

호날두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그래, 네놈들도 사람이었구나. 

푸욜이나 사비처럼 경험 많은 선수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겪어봤던 선수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니에스타나 부스케츠, 피케, 투레 등 어린 축에 속하는 선수들은 확실히 플레이가 조금 얼어있었다. 

결승전도 결승전이지만 자신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아무리 멘탈 좋은 선수라도 힘든 일이라는 것. 

그게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들이 빈틈을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네. 예전에 보았던 08-09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정지우'는 08-09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축구를 챙겨보았다. 

당연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빼놓았을 리가 없다. 

비록 바르셀로나의 2:0 승리로 끝이 나고야 말았지만, 경기 초반 바르셀로나는 공격 전개나 패싱 플레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었다. 

엉성하고 서툴러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사무엘 에투의 운 좋은, 빠른 선제골이 터지고 나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바르셀로나는 본격적으로 맨유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08-09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전말. 

'그렇다면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무조건 골을 넣고 상승세를 타야해! 그래야 역사를 바꿀 수 있어.' 

무수히 많은 흐름들을 꺾고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냈던 호날두. 

호날두는 이번에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 VS 바르셀로나 - 6 > 끝

ⓒ 아이시루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