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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이미 너무 강함-46화 (46/213)

< 마더 러시아(5) >

니콜라이 2세는 내 제안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생각해보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걱정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는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까.

대답만 들으면 바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에서 쉬던 중이었다.

철컥!

방문 옆 의자에 앉아있던 안중근이 돌연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뻥긋거렸다.

‘뭔데?’

‘누군가 문 앞에서 저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뭐?’

그 말에 내 눈이 부릅떠졌다.

문 앞에 누가 우릴 감시하고 있다고? 설마 암살자?

날 침대 뒤에 숨게 한 안중근은 문에 총을 겨눈 채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벌컥!

그리고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린 순간, 순간 보인 건 꺄르르 웃으며 도망치는 꼬마들이었다.

“잉?”

“···러시아 제국의 황자와 황녀전하들이시군요.”

어느새 권총을 다시 집어넣은 안중근이 괜찮다고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복도 저 멀리에서 꼬마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날 보고 있었다.

“황자와 황녀라고?”

“예. 어젯밤에 전하께서 취하셨을 때 같이 뛰어다니셨습니다.”

“······.”

아, 차르와 내가 복도를 뛰어다닐 때 같이 뛰어다녔다는 차르의 자식들이구나.

벽 뒤에 숨은 채 고개만 내민 꼬마들이 저들끼리 뭐라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 보자. 하나둘셋넷다섯, 육 남매네.

원 역사의 니콜라이 2세는 5명의 자식을 낳았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여섯 명을 낳았나 보았다.

아들은 병약한 막내뿐이던 것과도 달리 첫째와 막내가 아들이네. 그래도 딸 부잣집인 건 여전하군.

“안녕.”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그리고 육 남매 중에서 중간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복도로 나왔다.

그건 그렇고 미소녀의 표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쁘네.

몇 년 지나면 러시아의 모든 남자들이 상사병에 걸리겠어.

복도로 나온 소녀는 제 형제자매들과 뭐라고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러시아어는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라.”

“저도 일어와 중국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배워둘 걸 그랬네.

대화를 하던 소녀가 말을 멈추고 내게 다가왔다.

‘···예쁘네.’

멀러시 볼 때도 예뻤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하지만 그런 소녀를 봐도 드는 감정은 그뿐.

정신 나이가 서른 이상인, 정상적인 성벽을 가진 나는 그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덥석.

“음?”

“같이 놀자.”

소녀가 불현듯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발음은 이상하지만 분명히 한국말이었다.

그 말을 듣자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오랜만에 보는 또래인 건가?’

황자와 황녀들은 신분상 안전을 위해서라도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고, 외출하기도 힘들다. 그러니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만나기도 힘들다.

이런 생활이라면 아무리 형제자매가 많고 풍족해도 쓸쓸하겠지.

그런 와중에 또래인 내가, 첫 등장부터 웃긴 짓을 하며 나타났다.

차르인 자신의 아버지랑 술에 취해 웃긴 술주정을 부리면서.

저들은 아마 같이 놀 수 있는 새로운 친구가 나타났다고 여겼나 보았다.

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쩝. 내가 또 이런 꼬마들한테는 또 약하지.

피식 웃곤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알았다 알았어. 뭐 하고 놀 건데?”

“빵야! 빵야!”

“······.”

사격하러 가자는 소리인가? 불곰국의 공주님답네.

* * *

다음 날. 니콜라이 2세가 날 다시 불렀다.

내가 집무실에 들어오자 니콜라이 2세가 입을 열었다.

“우리 러시아가 왜 전쟁을 피하는지 아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난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저 크림 전쟁 이후에 갑자기 평화적인 노선으로 변경했다고 들었을 뿐입니다.”

“바로 전염병 때문이라네.”

예상치 못한 답에 코로나가 생각나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크리미안콩고출혈열 때문이군.’

크림 전쟁에서 처음 등장한 이 전염병은 원 역사에서도 전쟁으로 죽은 병사의 숫자보다 이 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을 정도로 끔찍한 병이었다.

독감과 비슷한 증상으로 시작하여 혈뇨, 토혈, 혈변 등 심각한 출혈 증상으로 심화된다.

이런 증상으로 인해 치명률 또한 높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었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짐의 할아버지께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었지. 적군들의 앞에서도 당당했던 병사들이 전염병 앞에서 너무나 쉽게 죽어갔다고.”

다행히 대한제국에서 배운 의학 지식들을 동원하고 위생을 철저히 한 덕분에 피해가 더 커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그 후 러시아는 전쟁을 기피하게 되었네. 언제 또 그런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허무하게 죽게 될지 모르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라서 위협은 해도,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는 건 최대한 피했었고.”

그 말을 하면 벽에 걸린 세계 지도에 그려진 아프리카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전염병이 아프리카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듣자마자 식민지 쟁탈전도 포기했지. 자칫 잘못하면 그런 전염병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지도 모르니까.”

니콜라이 2세의 말은 변명도, 핑계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런 일을 막기 위해 그동안 전쟁을 피했던 것이었다.

‘사실 이런 반응이 오히려 정상이긴 하지.’

원 역사에서 전염병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던 러시아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긴 했다.

사람의, 백성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고 해야 할까.

유교 문화가 강한 동양 같았으면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이라도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던 러시아는 백성들의 목숨을 소모품처럼 사용했다.

그런 러시아였으니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차르와 그 가족들이 처형당하고 소련이 탄생한 것이겠지.

그렇게 새워진 소련은 인명 경시 풍조가 더 심했지만.

하지만 성리학을 받아들인 이 세상의 러시아 제국은 아니었다.

백성의 목숨을 귀중하게 여기며 그들을 지키고자 하고 있었다.

‘스페인 독감에 대해 알게 되면 기겁하겠군.’

크리미안콩고출혈열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죽게 만든 스페인 독감이다.

그걸 알게 된다면 아예 쇄국을 하지 않을까?

잠시 세계 지도를 바라보던 니콜라이 2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이제 소용없어졌군. 우리가 뭘 하든 결국 전쟁은 일어날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이기고 많은 이익을 얻어야겠죠.”

“그렇지. 그래야겠지.”

또다시 한숨을 내뱉은 니콜라이 2세가 손을 내밀었다.

“자네 계획대로 하지.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해준다는데, 손을 잡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도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이 밀약으로 러시아 제국은 이번 전쟁에서 선두에 나서지 않을 거다.

후방에서 물자만 팔아먹으며 돈을 벌다가 전쟁 마지막에 독일의 뒤통수를 치며 전쟁을 끝내겠지.

악수를 한 뒤 의자에 앉은 니콜라이 2세가 술병을 꺼내며 물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 끌어들일 생각인가? 자네 계획에서 미국도 중요한 역할이던데? 혹시 이미 미국과 이야기가 끝난 상태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직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겁니다.”

니콜라이 2세가 궁금해했지만 난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짧게 혀를 찬 니콜라이 2세가 어깨를 으쓱했다.

“허어··· 자신감을 보면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쩝,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잔에 술을 따른 니콜라이 2세가 술잔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정해진 약혼자가 있나?”

“하하. 전 아직 15살밖에 안 됐습니다. 당연히 없죠.”

“그래? 그럼 굳이 결혼을 한다면 언제쯤 하고 싶나?”

“아마 전쟁이 끝난 후가 되지 않겠습니까? 전쟁 중에 결혼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좋군!”

니콜라이 2세는 껄껄 웃으며 병뚜껑을 열었다.

‘···뭐가 좋다는 거지?’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난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왔을 때처럼 조용히 대한제국으로 돌아갔다.

* * *

“아이고···.”

기차에 타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엎드려 누웠다.

대한제국의 경복궁에 있는 내 침대보다는 훨씬 못한 침대지만. 그래도 누우니까 편하긴 했다.

“세상에서 나만큼 열심히 일하는 황태자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일이 끝나자마자 관광은커녕 바로 돌아가야 하다니.

이 정도면 블랙기업 말단 사원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노동부에 아동 노동 착취로 신고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 모두가 어쩌다 보니 내가 자발적으로 하게 된 거라 신고하기도 힘들었다.

“···전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답을 안 해줘도 또 물어볼 생각이겠지?”

“예. 그게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물어보게나.”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눈치를 보던 안중근이 입을 열었다.

“전하의 계획이란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고 보니 안중근은 내 계획을 모르는구나.

니콜라이 2세에게 설명해줄 때도 밖에 있느라 듣지 못했고.

현재 아는 사람은 황제와 니콜라이 2세가 전부였다.

“간단히 말해서 대한제국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질서를 만드는 거지.”

“어떻게 말입니까?”

“전쟁으로 유럽이 힘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 틈을 타고 미국과 러시아 제국을 세계의 왕으로 만들어서.”

일명 킹메이커 작전이랄까.

두 나라를 그 어떤 나라들도 넘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나라로 만들고, 대한제국은 그런 두 나라가 믿을 수 있는 혈맹이 되어 이득을 본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니 왕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나라들을 치워야겠지. 열강들이나 열강이 될 가능성이 높은 나라들 말이야.”

그리고 앞으로 있을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그 나라들을 모두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앞으로 있을 전쟁을 통해.

내 이야기를 들은 안중근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두 나라끼리 싸우지 않겠습니까? 왕이 두 명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노노. 꼭 그런 법은 아니라고.”

서로 힘을 합치는 게 더 이득이라면 왕들도 손을 잡고 힘을 합치는 법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잘하면 앙숙으로 유명해질 미국과 러시아가 친구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쩝. 그 중재자가 내가 될 거란 게 문제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대한제국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겠군요. 다른 나라들은 멸망을 피하지 못하겠지만요.”

이제 안중근도 내 계획이 괜찮다고 여겼는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더욱 비상할 수 있도록. 전하를 잘 지켜드려야겠군요.”

“흐흐. 열심히 하게나.”

잠시 후 경적과 함께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후. 기차는 해삼시에 도착하며 우리는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오랜 기차 여행 동안 뻣뻣해진 몸을 스트레칭하며 풀었다.

“어우씨. 궁으로 돌아가면 일주일은 푹 쉬어야겠어.”

그러면서도 내 눈은 주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기가 넘쳤던 해삼시건만.

지금의 해삼시는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두웠다.

짐을 챙기고 돌아온 안중근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전하.”

안중근의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익현 총리님께서··· 위독하시다고 합니다.”

< 마더 러시아(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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