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의 몰락(3) >
독일 제국이 패배했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쳤고, 그 후 공화국이 선포된 뒤 항복하며 6년 동안 이어진 대전쟁이 끝이 났다.
그리고 이 소식은 최전선의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어째서! 어째서어어어!!!”
한 병사가 괴성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걸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싸우면 이길 수 있었는데!”
독특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병사는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분노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주변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선임도, 장교들도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자신들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지난 6년 동안 싸우며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런데도 승리하지 못하고 이렇게 패배하다니. 자신들 또한 분노했다.
게다가 저 녀석은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하고 뛰어난 군인이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인 만큼 항복은 너무나도 괴롭겠지. 그렇기에 저 병사가 계속 날뛰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진정하겠지 하며.
“후우··· 후우···.”
막사가 난장판이 되고 난 후에는 어느 정도 진정한 것처럼 보였고.
“말도 안 돼. 이렇게 질 리가 없잖아.”
하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던 분노가 안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아냐··· 독일 제국이 이렇게 질 리가 없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이성을 마비시킨 분노는 망상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연락병이 되어 최전방이 어떤 곳인지 경험하고, 부상을 입은 뒤 후방으로 후송되어 후방도 경험해 본 자신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본 이번 전쟁은 독일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럼 왜 그런 독일이 진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병사의 머릿속이 번쩍하며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전선의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도록 후방에서 방해한 존재가 있다?”
후방으로 후송되었을 때 후방이 어떤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대, 꾀병을 부리고 후송된 병사들까지.
전쟁을 방해하는 놈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자들을 본 병사는 당시에도 분노했었다.
최전선의 병사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놈들은 그런 병사들의 희생도 알아주지 않고 방해나 하다니.
하지만 당시만 해도 화만 났을 뿐. 그 이상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런 나약한 정신을 가진 자들 때문에 승기를 잡지 못하는 것이라며 분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다 뒤에서 누군가 조종한 것이라면?
“그래. 그게 아니면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 게 말도 안 되지!”
그럼 그 존재는 도대체 누구일까?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런 조직적인 방해를 할 수 있었던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조건 찾아낼 것이었다.
그들을 모두 찾아낸 뒤, 이번 전쟁의 패배와, 헛되이 죽어간 독일인들의 핏값을 받아낼 것이다.
바이에른 왕국 육군 리스트 연대 소속 연락병,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다짐했다.
* * *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 군인이 아닌, 정치인들이 전면에 나설 차례였다.
난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대한제국의 황태자이자 황제의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승전국인 대한제국의 대표로서 곧 있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곤룡포를 입어도 좋겠지만. 굳이 튈 필요는 없으니 평범하게 양복을 입었다.
“때깔 죽이네.”
자도 일어났는지 머리에 까치들이 아파트를 세운 이검이 휘파람을 불었다.
“파리에 가면 우리 막내가 제일 잘생겼겠구나.”
“딱히 그렇지도 않을 겁니다.”
“왜? 이번에 열릴 회의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늙다리 정치인들이잖아?”
이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이번에 파리 강화 회의에 참여하는 정치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젊고 키도 큰 내가 있다면 제일 돋보이겠지. 하지만-
“러시아의 차르도 옵니다.”
“아. 그럼 그냥 젊은 오징어 정도가 되겠구나.”
이검은 자신은 안 가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검도 니콜라이 2세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곤 옆에 서는 건 절대 싫다면서 도망쳤었지.
그런데 형님? 젊은 오징어라뇨? 그렇다고 내가 그 정도로 못난 건 아닌데, 그건 좀 심한 것 아니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나 하십쇼. 형수님이랑 조카들이 기다릴 텐데.”
“쩝.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순서가 밀려서 말이다.”
자신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며 이검이 혀를 찼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달이 지나 6월이 되었지만. 대한제국의 유럽 원정군은 대부분이 아직 유럽에 주둔 중이었다.
20만에 달하는 병력의 철수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함께 돌아가야 하는 러시아의 백만 대군까지. 총합 120만 명의 병력을 한 번에 철수시키기에는 기차도, 철도도 부족했다.
동시에 점령지의 안정화를 위해서 얼마 동안 군대의 주둔이 필요했고.
그러니 천천히 부상병부터 차례대로 귀국하는 중이었다.
아마 내가 파리에 갔다 돌아오고 난 후에야 이검도 돌아갈 수 있을 테고.
“갈 때 호위 확실한 놈들로 데려가라. 동유럽은 확실히 우리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 서유럽 쪽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최고들만 데려갈 생각이니까요.”
파리에 가려면 기차를 타고 독일을 건너가야 한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뒤통수를 친 대한제국을 독일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만약의 상황을 생각하고 호위를 확실히 준비해야 했다.
평소라면 안중근을 비롯한 시위대에게 맡겼겠지만. 황제와 황실을 지키는 안중근과 시위대는 한양에 있다.
군복을 입는 동안은 황족이 아닌 군인이기에 시위대의 호위를 따로 받을 수가 없거든.
그래서 유럽 원정군 중에 호위 병력을 따로 뽑아야 했다.
호위로 누굴 데려갈까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다 정해져 있었으니까.
“갈 준비는 다 했냐?”
“옛!”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손이 베일 것 같이 날카롭게 각 잡힌 군복은 입은 채 김좌진과 김상옥이 경례했다.
“밤새 다림질만 했냐?”
“흐흐. 군인은 각이 생명 아니겠습니까?”
“다른 열강놈들이 저흴 무시하지 못하도록 신경 좀 썼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전차를 타고 가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난 못 말린다며 피식 웃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전생에 병사로 있을 때는 저렇게 각 잡힌 군복이 더 멋있어 보였지.
이 둘을 포함한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 한 대가 도착했다.
“부상이라도 입을까 걱정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군.”
기차에 올라타자 먼저 타고 있던 니콜라이 2세가 날 발겼다.
“이야기는 들었네. 공을 꽤 세웠다지?”
“그저 조금 거들었을 뿐입니다.”
차르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하자 차르가 피식 웃었다.
“아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시를 점령하고, 비행 서커스단을 전멸시킨 함정을 만든 게 공이 아니면 다른 병사들에게는 훈장을 줄 필요도 없겠군.”
겸손도 과하면 재수 없는 법이라며 차르가 킥킥거렸다.
잠시 후 기적 소리가 들려오며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 기분 좋군.”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며 니콜라이 2세가 눈을 감았다.
“피도 별로 흘리지 않고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동안 러시아가 경계할 만한 나라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오-헝 제국 정도였다.
한 나라와 싸우면 러시아가 이길 수 있지만. 이들 네 나라가 연합이라도 하면 러시아도 위태로울 정도로 이들은 강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나라들이 자신들끼리 싸우다 엄청난 피해을 입으면서. 러시아는 큰 피해 없이 유럽의 진정한 패자가 되었다.
“패권국이 된 게 그렇게 좋으십니까.”
“당연하지! 수천 년이 넘도록 수많은 나라들이 그토록 원했던 게 바로 이 자리인데! 자네는 대한제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패권국으로 만들고 싶지 않나?”
“딱히요. 전 이득이 없다면 1등이 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요.”
그럼 나라 발전에 쓸 수 있는 돈을 그 자리를 지키는 데 써야 하잖아.
그럴 바에야 1등 안 하고 말지. 1등이 이득이 없으면 할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긴다며, 오히려 내가 이상한거라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하자 차르는 고개를 젓곤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얼마나 남았나.”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차르가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짐과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해준, 이번 전쟁은 장난으로 만들어 버릴 두 번째 대전쟁.”
내가 황태자가 된 직후 니콜라이 2세와 만났을 때. 난 그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차르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대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제외하곤.
유럽만이 아닌, 정말 전 세계가 서로 싸우며 수백만 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전쟁이라니.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나?
하지만 실제로 내 말 대로 전쟁이 흘러가며차르는 내 예측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2차 세계 대전에 두려움과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대략 20년 정도 남았을 겁니다. 실제로는 더 짧을지도 모르고요.”
“20년이라··· 준비를 많이 해야겠군.”
차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자네는 그 전쟁이 유럽 대 러시아, 미국, 그리고 대한제국이 싸우는 전쟁이 될 거라 했지. 그로 인해 유럽이 완전히 몰락하며, 세 나라가 세상을 지배할 거라 했고.”
“그랬죠.”
“도대체 어떻게 서로 수백만 명이나 죽인 유럽이 하나로 뭉친다는 건가? 그리고 우리는 그렇다 쳐도 왜 미국까지 적대한다는 건가?”
아, 그게 궁금하시구나.
당연히 궁금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될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답해주지 않았다.
“이번에 파리에 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쯧.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만들고 싶은가 보군.”
니콜라이 2세도 더 물어봤자 내가 안 가르쳐주겠다 싶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파리에 가기 위해 독일을 거쳐 가는 길은 생각보다 위험하진 않았다.
독일인들도 전쟁에 지쳐 더 싸우고 싶지 않아 했고, 여기서 더 싸웠다간 독일이 진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김좌진이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김상옥은 쌍권총으로 무장한 채 눈을 부라려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우리가 탄 게 러시아제 장갑열차이기 때문일지도 몰랐고.
어쨌든 우리는 별문제 없이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파리역에 도착하자, 우리를 기다리는 건 태극기와 백청적 삼색기를 든 무수한 군중들이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다!”
“대한제국의 황태자도 왔다!”
“유럽의 구원자!”
“카이저를 물리쳐줘서 고맙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우리의 방문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이 중 나온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왔던지 파리 시민 전체가 온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은 인파에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 프랑스 헌병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호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대통령인 윌슨 또한 파리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통령 각하. 이쪽은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 차르 폐하십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평화를 위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주어 감사합니다.”
“짐 또한 만나서 반갑소. 니콜라이 로마노프요.”
진정한 평화를 위한 회의가 이제 곧 열린다는 기대 때문일까.
윌슨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 후 우리는 다른 유럽의 대표들 또한 만났다.
특이한 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원 역사에서는 실각한 처칠이 영국 대표 중 하나로 왔다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지도, 크게 패하지도 않은 오스만 제국이 협상국으로 함께 싸운 덕분에 갈리폴리가 없는 일이 되었거든.
그래서인지 처칠은 희대의 졸장이 아닌, 전차를 처음 만들어낸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승승장구하겠군.’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
윌슨이 먼저 발언을 시작하려 하자 옆에 있던 니콜라이 2세의 팔을 툭 쳤다.
“기차에서 물으신, 유럽이 미국을 적대하게 되는 첫 이유입니다.”
“그래?”
그 직후 윌슨이 발언을 시작했다.
“···그러니 과한 처벌과 보상금을 요구할 경우, 독일의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 혼란으로 이로 전쟁 재발이 우려됩니다.”
그 말에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이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 부디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부탁드립니다.”
빠득-!
처칠이 이를 갈며 윌슨을 노려보았다.
< 제국의 몰락(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