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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이미 너무 강함-90화 (90/213)

< 전후처리(1) >

회의가 시작되기 전. 자리에 앉은 처칠은 잠시 눈을 감았다.

‘6년 동안의 전쟁 끝에 승전국이 되었지만··· 위태롭군.’

아직 정확하게 집계된 건 아니지만 대략 5천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오고 나서야 끝난 전쟁이다.

그리고 그런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처칠은 승리를 거둔 영국이 불안하다는 걸 느꼈다.

다시 눈을 뜬 처칠은 근처에 있는 미국, 러시아, 대한제국의 대표들을 바라보았다.

‘은인, 그리고 구세주.’

이게 현재 영국과 프랑스의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세 나라였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세 나라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에도. 세상의 평화와 자신들을 돕기 위해 그걸 포기하고 참전한, 고마운 나라들이었다.

‘빚쟁이, 그리고 최강국.’

그에 비해 처칠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저 세 나라를 그 어느 때보다 경계하고 있었다.

원래도 강했던 러시아는 다른 유럽 열강들이 전쟁으로 자멸하며 진정한 패권국이 되었고,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대한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군대를 가졌다는 게 밝혀졌다.

게다가 미국.

불과 몇백 년 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랜드리스 대금이라는, 영국과 프랑스가 갚아야 하는 어마어마한 빚의 채권자가 되었다.

두 나라의 목에 미국이 빚이라는 목줄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두 푼이면 몰라. 식량 같은 생필품은 물론, 온갖 비싼 무기들까지도 랜드리스로 미국에서 대여했다. 고작 1, 2년 고생해서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 세 나라의 친한 모습에 처칠은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세 나라가 뭉쳐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한다면. 전쟁 없이도 두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세 나라가 전쟁에 참전한 타이밍도 수상했다.

마치 유럽이 약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참전한 것만 같았다.

뭔가를 처음부터 노린 것처럼.

유럽이 모든 힘을 소진하고 난 후에야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세 나라 모두 계속된 전쟁을 보다 못해 평화를 되찾기 위해 참전한 것이라 하였지만. 그런 순수한 목적일 리가 없었다.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봐야 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유럽의 것이었던 세계의 주인 자리 같은-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처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너무 길어져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보군.’

그러면서 머릿속에 든 의심과 경계심을 애써 지웠다.

설마 그러겠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러니 부디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윌슨의 발언을 듣는 순간. 그게 맞음을 처칠은 직감했다.

이번 전쟁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것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것도 영국과 프랑스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물자나 팔고, 한참 후에 참전해서 피해도 적은 나라가 뭐? 관대한 처벌을 부탁한다고?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온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기 말대로 하라는 통보처럼 들렸다.

사실 윌슨은 정말로 그저 제안한 것일 뿐이었지만.

채권자가 하는 말이 곱게 들릴 리가 없었다.

처칠은 물론, 다른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들은 저 발언에 분노했다.

“절대 안 됩니다!”

“6년 동안 저희 프랑스에서만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런데 자비라니요!”

“절대 반대입니다!”

격한 거부에 윌슨도 당황하고 더 이상 요구하진 않았다.

처칠은 그런 윌슨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자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왜 저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거지?’

설마 중재자가 되고자 하는 것인가?

중간에서 중재하며 상황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이끌고 가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미국이 이번 전쟁으로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고는 하나.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부족한 힘을 채워 줄 수 있는 나라들이 함께 한다면?

처칠의 시선이 이광과 니콜라이 2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윌슨의 제안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순간 직감했다.

미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대한제국이 물밑에서 서로 손을 잡았다고.

‘빌어먹을 놈들! 뒤늦게 함께 참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나!’

이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대전쟁을 기회로 봤을 것이다.

러시아 제국은 큰 피해 없이 유럽의 패권국이 될 기회로.

미국은 진정한 열강으로 발돋움할 기회로.

대한제국은 뒤늦게 세상 밖으로 나왔음에도 선두에 설 기회로.

이렇게 각자 원하는 게 있는 세 나라는 손을 잡았을 거다.

그리고 다들 모든 힘을 소진해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가기 불가능해졌을 때쯤 참전해, 승전국이라는 명분 또한 얻으려 한 것이겠지. 그러면서 이득은 모두 독식하고.

‘설마 랜드리스도?’

이런 흐름 속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함부로 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미리 목줄을 채워 넣으려고 한 제안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동안 세상의 왕이었던 유럽의 왕좌를 빼앗으려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처칠은 뒷목이 싸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당했다. 대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세 나라는 유럽의 전장을 체스판마냥 자신들의 멋대로 주물렀다.

그리고 그 세 나라가 힘을 합치고 유럽을 무릎 꿇리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도 프랑스도, 이에 대항할 힘도, 돈도 없다.

힘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모두 소모했고, 돈은커녕 빚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처칠은 세 나라의 대표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당신들의 계획대로는 절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유럽은 언제나 세상의 왕일 것이라고.

당신들의 도전도, 결국에는 헛된 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 * *

“···미쳤군.”

회의가 끝난 후. 호텔 방으로 돌아온 니콜라이 2세가 코트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유럽 전체가 미국을 적대하기 시작했어.”

윌슨의 발언 이후. 회의장의 분위기는 눈치 없는 사람도 느낄 정도로 확연히 변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 대한제국에 대한 적대감이 눈에 띌 정도로 높아졌다.

잘하면 배상금을 적게 낼 수 있었던 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윌슨의 발언은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으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모욕당했다며 이를 악무는 독일인도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마치 독일을 보는 것처럼 미국을 보더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유럽은 미국을 적대하게 될 거라고.”

“아네. 그래서 더 무서워.”

내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차르가 내게 물었다.

“윌슨 대통령과 미리 말을 맞춘 건가?”

“아닙니다. 그라면 당연히 그런 말을 할 거라 예상했을 뿐입니다.”

“···그런 걸 예상했다고?”

니콜라이 2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윌슨이 이상주의자처럼 보여도, 멍청이는 아니거든요. 패전국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강하면 전쟁의 재발 우려가 높아지는 걸 알 정도로 똑똑한 편입니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은 오히려 멍청이보다 예측이 쉽습니다.

예상이 힘든 판단을 내리는 멍청이와 달리, 똑똑한 사람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만 하거든요. 그리고 그런 윌슨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거라 판단했죠.”

실제론 미래의 지식 덕분이었지만.

하지만 이를 모르는 차르는 너무 놀라서 허탈해했다.

“짐도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자네와는 비교도 할 수 없군.”

날 바라보는 차르의 눈빛에는 옅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미국의 참전이 미뤄진 것도, 전쟁이 더 길어진 것도 그렇고. 영국과 프랑스가 엄청난 빚을 지게 만든 랜드리스도 사실은 자네 작품이라지? 이 모든 걸 계획 하다니. 정말 대단해.”

“하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걸로 유럽은 미국을 ‘오해’하게 되었다.

그동안 미국의 행동들이 모두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 오해하게 됐다.

그리고 이 오해는 시간이 지나도 풀리기는커녕 더 커질 거다.

딱히 내가 뭘 할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렇게 될 테니까.

난 그저 그동안 대한제국을 더 강하게 만들면 될 뿐이었다.

빈 잔에 와인을 따르고, 내게 그 잔을 건네주며 차르가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유럽의 경우는 그냥 방치하면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요구할 테고, 그 돈은 채권자인 미국이 모두 가지게 되겠죠. 그리고 유럽 내부에선 갈등이 더욱 커져갈 테고요.”

이런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게 될 테고. 이건 몇몇 사람들에게 기회로 다가올 거다.

아니,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라 해야 할까.

그들은 자신들을 영웅으로 포장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권력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을 지옥으로 만들겠지.

와인을 병째로 마시던 니콜라이 2세가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어째 자네는 누구보다 유럽을 증오하는 것 같군.”

“하하. 그런가요?”

“유럽을 인세의 지옥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당연히 증오에서 나온 행동이라 봐야 하지 않겠는가?”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유럽은.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몇 개의 나라가 전부인 땅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등. 현대에서도 강대국으로 유명한 나라들도 파시스트로 물든 세상이었다.

영국, 프랑스가 파시스트가 되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나치 독일과 손을 잡는 유럽이라니. 정말 지옥 같겠지.

차르는 유럽을 그런 지옥으로 만들고자 하는 내가 유럽을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증오가 아닌 이상 이런 짓을 하긴 힘드니까.

“하지만 전 유럽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실제론 난 그런 감정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시간이 지나, 대한제국의 경쟁자가 되거나 적이 될 나라들을 미리 치울 뿐이었다. 경쟁자는 커지기 전에 미리미리 제거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명분 없이 공격하면 욕만 먹고 악당이 된다. 그러니 아군에게 유리한 명분이 생기도록, 유럽을 파시즘으로 물들여 지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럼 전쟁이 일어나도 국제 여론은 우리에게 유리하겠지.

내 말을 들은 차르는 황당하단 반응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럽을 지옥으로 만든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인데?”

“대한제국이란 나라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거든요.”

대한제국은 그 어떤 나라들보다 뛰어난 기술력과 강한 힘을 가진 나라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난 후 대한제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거다.

또한 남들보다 발전된 기술로 만들어진 대한제국의 제품들은 언제나 시장을 지배하게 되겠지.

당연히 다른 강대국들은 그런 대한제국의 행보에 불만을 품을 거고.

그럼 강대국들은 무력이 아닌, 각종 규제와 외교적 압박으로 대한제국을 무릎 꿇리고자 할 거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가며.

이렇게 되면 아무리 강한 대한제국이라도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거다.

“그러기 전에 그 일에 앞장설 유럽을 멸망시키고, 멸망시키기 힘든 미국과 러시아는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유럽이 먼저 두 나라를 적대하게 만들어서요.”

“······.”

“그럼 대한제국은 두 나라의 든든한 혈맹이 되어, 함께 선의의 경쟁을 하며 공존해갈 수 있겠죠.”

적이 많을수록 같은 적을 둔 나라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법이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니콜라이 2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곤 이내 새로운 와인병을 꺼내 마개를 뽑고 그대로 쉬지 않고 들이켰다.

“크으··· 와인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는군.”

입가에 흐르는 와인을 소매로 닦은 차르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넨 정말 미친놈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아니고 욕 맞네. 나중에 위협이 될 거란 이유만으로 유럽을 멸망시키려는 미친놈.”

“참고로 유럽 전체를 멸망시킨다는 게 아닙니다. 영국, 프랑스같이 열강을 넘어, ‘선진국’이 될만한 나라들만 멸망시킬 겁니다. 저희의 뜻에 따르는 작은 나라들은 남겨둘 생각이고요.”

“그게 그거지.”

유럽의 중심인 나라들이 멸망하는데 그게 유럽의 멸망이 아니면 뭐냐며 차르가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자네는 유럽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 또한 멸망시킬 생각이지.”

한숨을 쉰 차르는 또다시 새로운 와인병의 마개를 뽑았다.

“그것 또한 같은 이유인가?”

“예. 유럽보다도 대한제국에 더 위협이 되는 나라가 그 두 나라거든요.”

현대에서도 세계 경제 2, 3위를 차지하며 툭하면 한국을 괴롭히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인 만큼 대한제국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미리 그놈들을 멸망시키고, 대한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식민지들로 만들어야 했다.

“···미친놈.”

니콜라이 2세는 그런 내가 진짜 미쳤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미친놈이 하는 미친 소리가 너무 끌린다는 거야.”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얻을 이득 또한 크니까요. 러시아 또한 세상의 3분의 1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젠장.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날 희대의 악당이나, 아니면 역사에 길이 남을 명군으로 기록하겠군. 나 또한 이런 자네의 계획에 동의했으니.”

이게 자신이 한 최고의 선택이자 최악의 선택이 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일본은 지금 대한제국에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나? 굳이 그런 나라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있나?”

“그놈들 종특이 배신이거든요.”

그러니 배신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배신한다!

< 전후처리(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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