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
1장. 서막(序幕)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평범한 대학생 소동백은 돌연 삼국지 세계로 떨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어려진 채로.
살아남기에 최악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 * *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동백의 앞에 펼쳐진 것은 평소의 자신의 방 천장과 어딘가 다른 생소한 광경이었다. 흘끔 보이는 시선 끝에 있을 리 없는 침대 커튼이 보였다.
어제 간만에 타 지역으로 대학을 간 친구와 만나 부어라 마셔라 죽어라 하며 술을 마셨다. 몇 병 마셨더라? 1병, 2병, 3병……. 동백은 15병까지 세고는 포기했다.
원래 숙취는 없는 체질인데, 이상하게도 어제 기억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들이부은 거야. 필름이 끊겼을 정도면 아주 말로 갖다 놓고 마셨다는 건데.’
말똥말똥한 눈이 연신 사방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그대로다.
언제까지고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동백은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떨어지는 이불은 요즘에도 이런 걸 쓰나 싶을 정도로 조악했다. 딱히 감촉이 좋지도 않고……. 게다가 일반 가정집이라면 이러한 악취미적인 침대 커튼은 어지간해서 안 달아 놓을 텐데.
‘뭐야, 모텔인가?’
동백은 혀를 찼다. 바보같이 자기가 어디로 기어들어 와서 잤는지도 모르다니. 게다가 요즘 원체 흉흉한 세상 아닌가. 자신이 술에 취한 새 위험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동백은 순간 느껴지는 괴리감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서서히 머리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피아노 건반을 도에서 레까지 누를 수 있을 만큼 길쭉했던 손가락은 어디로 가고, 동백의 생각에 따라 까닥이는 손가락은 과장 좀 보태 원래의 반 토막 정도로 변해 있었다.
“뭐, 뭐야, 이거.”
당황한 동백은 커튼을 젖히며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낮아진 시점이 불쾌했다. 가운같이 대충 끈으로 매듭지어 놓은 옷이 펄럭펄럭하니 다리 아래가 서늘했다.
완전히 일어서고 나서야 동백은 방 안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자신이 있는 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까지 그다지 많은 사고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동백은 성큼성큼 방 안을 가로질렀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이국적인 탁자, 향로, 장식, 그 모든 것이 전부 불쾌했다. 썩은 악취 같은 지독한 향내가 동백의 코를 찔렀다.
사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저 생소할 정도로 짙은 나무의 냄새에 속이 좀 울렁거릴 뿐이었다.
동백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연 그녀는 어이없어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단 동백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흙으로 지어 놓은 담과 그 위로 펼쳐진 푸르른 하늘이었다.
동백은 여린 발바닥에 흙이 묻는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에서 빠져나가도 보이는 것은 다른 건물. 그리고 담. 그리고 하늘.
더 높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았다. 자신이 술을 마신 장소는 집 근처 술집이다. 거기서 아무리 멀리 걸어 나왔다 해도 이렇게 아파트 하나 보이지 않을 오지에 왔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몸이 작아진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 몸은 맞나?’
동백은 황급히 오른 손등을 보았다. 원래 점이 하나 있던 위치에 똑같이 점이 있었다. 제 몸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참나, 코X도 아니고……. 꿈인가?’
하지만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동백 안의 육감이 지금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마, 차원 이동?’
그리 떠올리기가 무섭게 동백은 몸서리쳤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동백이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은 탓이 아니었다.
나름 평범하다면 평범한 대학생이던 동백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비밀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까마귀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사람 말을 하는 까마귀를 알고 있는 거지만.
그것도 허구한 날 옆에서 차원 이동 하자고 부르짖는 까마귀를 말이다.
* * *
“이봐, 너. 이세계에 갈 생각 없냐.”
고등학생이던 시절, 평소보다 일찍 등교하던 동백은 우연히 한 마리의 까마귀와 조우했다.
다짜고짜 말을 거는 까마귀의 모습에 동백은 당황했다. 당연했다. 까마귀가 말을 하는데! 그것도 차원 이동 하자고 꼬시고 있어!
처음에는 기가 허해져서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까마귀는 다시 한번 동백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 너 말이야. 너. 차원 이동 시켜 줄까?”
애초에 말을 섞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시 너무 놀랐던 나머지 동백은 저도 모르게 답해 버렸다.
“아니, 싫어.”
“어, 어째서? 왜? 이, 이세계라고. 요즘 인간들이 좋아하는 차원 이동이란 말이야!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회귀도, 빙의도 아니고 언제적 차원 이동이야? 그리고 난 지금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즐기고 있어서. 그럼 이만, 안녕.”
“잠깐, 잠깐!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즐거울 리가 없잖아! 그런고로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코트가 더러워지잖아. 저리 비켜.”
아무리 말을 하는 까마귀라 해도 야생 조류. 위생 면에서 신경 쓰였다. 동백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선 까마귀를 향해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까마귀는 푸득푸득, 보복성이 짙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더니 곧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았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동백에게 졸랐다.
“차원 이동 하자. 응? 넌 딱 봐도 차원 이동 해야 팔자가 필 상이야. 응응. 관상이 그러네.”
쉽게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던 동백은 차원 이동 하기 싫은 이유를 차근차근 일러 주었다.
“난 성적 스트레스도 없고, 현실 도피 성향도 없고, 가족 관계 인간관계 전부 무난해. 집도 적당히 살고. 가치관 맞는 이 세계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 수 있는데, 뭣 하러 다른 세계로 가? 난 지금 팔자에 만족하니까, 정 차원 이동 시켜 주고 싶거든 다른 애들이나 찾아봐.”
“아, 안 돼! 난 너만 차원 이동 시켜 줄 수 있단 말이야!”
까마귀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까마귀에게 발목 잡힌 사이 등교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다가왔다. 마음이 급했던 동백은 까마귀의 말을 흘려들었다.
“나 간다. 잘 있어.”
“아악! 어떻게 찾은 앨리스인데! 너, 명심해 둬. 평생 쫓아다닐 거야!”
까마귀는 집착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당시의 동백은 까마귀 주제에 평생 쫓아다녀 봤자라고 치부해 넘겼다. 당장 코앞에 닥친 지각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때는 정말 몰랐다……. 정말 저 까마귀가 동백 자신을 평생 쫓아다닐 줄은!
* * *
그 뒤로 까마귀는 계속해서 동백을 뒤 따라다녔다.
등·하교 할 때나,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있을 때나, 어디 놀러 갈 때나……. 어떨 때는 나무에 앉아서 창가로 동백이 수업하는 모습을 감시하고 있기까지도 했다.
얼마나 집요했는지, 동백의 주변인들은 모두 까마귀의 존재를 알게 됐을 정도였다.
심지어 동백이 수능 보는 날까지 따라온 까마귀는 운동장 위를 빙글빙글 돌며 그 긴 시간을 기다렸다. 마치 즐거운 소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마 내가 수능 망치면 자포자기해서 따라간다고 할 줄 아나.’
까마귀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동백은 수능을 썩 잘 쳤다. 평소 실력 그대로 나와서 예상하던 대학에 원서를 넣고 합격.
너무나도 순탄하게 흘러가는 동백의 인생에 까마귀는 이를 갈았다.
기어코 널 차원 이동 하게 만들 것이다 염불, 아니, 저주를 입에 달고 살면서.
그리고 그 저주는 정말 현실이 되었다.
‘정작 차원 이동 하고 나니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군.’
동백은 까마귀가 있을 만한 곳을 살폈지만,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살펴보기 위해 발을 옮기던 동백의 뒷덜미를 문득 누군가가 낚아챘다.
“아니, 너, 언제 일어난 게야? 이렇게 살금살금…….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어딜 쏘다니려고!”
여기서 있는 힘껏 저항하여 딱히 좋을 것이 없다. 정황을 살피기 위해 동백은 온몸의 힘을 뺀 채 자신을 끌고 가는 이를 흘끔흘끔 보았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사극에서 뛰쳐나오기라도 한 듯 옷차림이 괴이쩍었다.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혼잣말이라고는 하지만 어딜 보아도 동백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리지를 않나, 일어나자마자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를 않나. 영락없는 도둑고양이구나! 우리 아가씨는 이런 걸 무엇 하러 입히고, 재워 주었는지……. 그냥 집 밖에 버려두어도 될 걸 가지고 말이야.”
여자의 말에서 동백은 자신이 어떻게 이 저택에 있게 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차원 이동 해서 말부터 배워야 했다면 정말 갑갑했을 텐데, 언어 정도는 자동 해결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백은 여자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눈을 떠 보니 모르는 곳에 있어서 놀랐을 뿐이에요. 이거 놔주시면 제 발로 따라갈게요.”
자신의 입 밖으로 낯선 외국어가 자연스레 흘러나갔다. 여자는 툴툴대며 손을 풀었다.
“색목인이라 말이 안 통할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입은 뚫려 있었구먼! 그나마 다행이네.”
“……색목인? 제가요?”
동백은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동백은 전체적으로 색소가 엷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는데, 그 때문에 오해받은 듯싶었다.
“그래. 생긴 게 딱 그쪽인데. 어딜 봐도 한족(漢族)은 아니지.”
“어…… 여기가 무슨 나라죠?”
혹시나 싶었던 동백은 되물었다. 여기가 가상 세계라면 전혀 쓸데없는 질문일 테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는 세계이기를 바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잡고.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차원 이동 했더니 어떤 소설 속 세계나 만화 속 세계더라고. 이곳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이기를 동백은 진심으로 기원했다.
“한(漢)나라지, 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있었던 게냐?”
뭔가 불안함이 스쳤다. 설마 그 한나라일까……. 동백은 차라리 가상 시대이기를 바랐다.
여자는 그렇게 이 세계를 가늠해 보며 잘근잘근 입술을 깨무는 동백을 향해 눈을 흘기더니, 이내 동백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어서 가자꾸나. 아가씨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셔.”
이야기를 듣자 하니 여자가 아까부터 염불 외듯 입에 달고 있는 그 ‘아가씨’가 자신을 살린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려진 데다 오갈 데 없어진 동백으로서는 그녀에게 최대한 잘 보여야만 했다.
동백은 상념을 고이 접고 최대한 불쌍하고 고분고분한 인상을 주기 위해 애썼다. 안타깝게도 삐죽이 올라간 눈매로 인해 썩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 * *
오래지 않아 난각(暖閣)에 다다랐다. 여자는 동백에게 건네던 억센 말투와는 달리 조곤조곤히 말을 올렸다.
“아가씨, 아이가 정신을 차렸기에 데려왔습니다.”
“들이거라.”
동백은 쭈뼛쭈뼛하면서도 곧은 자세로 방 안에 들어섰다.
방 안에서 동백을 맞이한 이는 아가씨라고 불리기엔 조금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주름은 젊었을 적의 싱그러움을 시들게 하였을지라도 아름다웠을 그 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그녀는 기품 있는 자태로 무심히 차를 따랐다.
자신의 자리로 보이는 의자를 발견한 동백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거라.”
‘아가씨’의 허락이 나자 동백은 자리에 앉았다. 현대에서 자란 동백은 나름 눈치를 본다고 본 것이었으나, 세 번은 거절해야 예의를 차렸다고 보는 이 세계 기준으로는 시원시원하다 못해 건방지게 보이기 십상인 태도였다.
하지만 이 집의 주인, 금(錦) 부인이라 불리는 금단요는 그런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금단요는 동백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얼굴이 하얗고 매끄러웠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미색이 확연히 뛰어났다.
그 이상으로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엷은 잿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였다.
금단요의 유일한 하인인 왕 어멈이 옷을 갈아입히면서 소녀임을 확인하여 알려 주지 않았다면 어딜 보아도 미동이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시원스러운 외모였다.
금단요의 시선이 잠시 동백의 손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희고 고운 손이다. 험한 일 하나 해 보지 않은 손과 잡티 없는 허연 피부는 소녀가 제법 귀하게 컸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왕 어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소녀가 자객이나 요괴가 분명하다 하였지만, 금단요의 눈에는 그렇게 삿된 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계의 존재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하늘에서 똑 떨어진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왜 그런 귀인이 하필 자신의 집 연못에 떨어져 내린 것일까.
‘어쩌면 하늘에서 자식이 없는 날 안타까이 여겨 내려 주신 선물일지도…….’
이내 금단요는 자신이 한 허황한 상상에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고작 그녀 따위에게 선물을 내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우연이 겹친 것이리라.
정체를 캐물어 봐야 알려 주지 않을 테고, 금단요 역시 남의 과거에 그리 관심을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아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동백입니다. 동백꽃 할 때의 동백으로 씁니다.”
“소동백이라…….”
꽃 이름이니 부드러울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소녀의 이름에서는 대장부로서의 기개가 느껴졌다.
소녀는 그 이름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금단요는 소녀가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 사람은 이름값을 한다지.’
금단요는 소녀를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십여 년간 외로웠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이, 왕 어멈과 둘이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진 않아도 제법 쓸쓸함을 불러일으켰다.
“갈 곳은 있느냐?”
그렇게 금단요는 동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갈 데 없이 이세계에 떨어져 버린 동백이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금단요의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