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는 일단 가진 패가 많을수록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가 좋았다. 기마병은 이 세계에서 쏟아부을 수 있는 최고의 화력이었고, 궁병은 최고의 견제기였다. 실제로도 그럴듯한 궁병과 기마병을 육성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궁병과 기마병이 육성될 때까지 남은 보병들이라 하여 놀고먹게 둘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동백의 지시 하에 체계적인 진과 창술에 대해 끊임없이 익혀야만 했다.
백부장들은 그래도 백부장의 자리에 오른 만큼 일반 병사들보다야 말이나 활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었다. 하지만 체계적인 교육 계획을 짜라 하면 당황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르칠 내용의 열 배는 더 알아야 했으니까.
그런 백부장들의 교육을 맡은 것은 동백이었다. 동백은 그들에게 일반 병사 훈련의 열 배는 될만큼 고된 훈련을 요구했다. 동백은 백부장들을 상당한 수준까지 훈련한 뒤, 그들에게 십부장과 일반 병사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십부장은 훈련의 우두머리, 조장의 역할이었다.
백부장의 일은 고되었다. 매일같이 병사들을 훈련하기 위한 교육을 전부 소화해 내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고된 것이 동백이었다. 동백은 기마 담당 백부장들에게 기마를, 궁술 담당 백부장들에게 궁술을, 보병 담당 백부장들에게 진법을 가르쳐야 했다. 고되고 자시고를 떠나서 눈 돌아갈 것처럼 바쁜 동백의 일상에 주위 사람들은 동백을 괴물 보듯 하였다.
동백의 뒤를 늘 쫓아다니는 진진의 동백에 대한 존경심은 커져만 갔다. 처음에는 ‘아니, 나이도 어린데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다니, 기특한 아이다!’였다면 지금은 ‘소 교위님 대단해! 소 교위님 멋있어!’로 바뀐 그의 시선. 그리고 그렇게 동백을 호의로 바라보는 이는 진진뿐만이 아니었다.
동백에게 가르침을 받은 백부장 모두 동백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에는 아이라고, 아는 게 무에 있겠으며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을까 그리도 무시했던 상대다. 하지만 실상은 문무 양쪽에 있어 어지간한 관료들보다도 능통하며, 공무 또한 냉철하게 처리하는 날카로운 상관이었다.
그들은 점점 동백을 믿게 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면에 신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동백의 완벽에 가까운 일 처리와 그의 능력을 믿었을 뿐이었다.
전란의 시대에서 그럭저럭 믿음직한 상관의 부류라 하면 다양하게 나눌 수 있지만, 목숨에 관하여 단 2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 다른 하나는 이 사람 밑에서라면 죽지 않을 거라는 안심.
전자는 상대의 포부라든가 인성 등이 너무나 가슴에 벅차게 다가와, 상대의 커다란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목숨 정도야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인생을 뒤흔들 만큼, 그 심장을 빼앗을 만큼 강렬한 호소력이 필요했다.
반면 후자는 상대방의 능력을 믿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있을 생존욕구를 자극하여 휘어잡는, 가슴이 아닌 이성을 설득한다는 표현이 정확한 관계.
동백의 카리스마는 나이에 비해 월등하였으나, 아직 어린 나이와 더불어 이 세계에 녹아들지 못한 현생의 건조함, 그리고 숨기고 있는 성별로 인한 거리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아직 동백의 말이 백부장들의 심장까지 닿기 부족했던 만큼, 그들 사이의 신뢰는 전자라기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후자라 하더라도 여러 조건상 열악한 동백이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동백 또한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동백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에게 목숨을 맡길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동백은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 * *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하늘을 메웠으나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찔러 내리는 햇빛의 따가움에 병사들 모두 땀을 뻘뻘 흘렸다.
다가닥다가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뿌연 흙먼지가 연무장을 뒤덮었다. 흙먼지 속에서 고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표정은 좋았다. 지금까지 지루했던 일상과 달리, 무언가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보람찬 일이었다.
그들이 말을 모는 모습을 보고 있던 백부장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사령관, 소 교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 교위는 저 멀리에 있는 궁병 쪽에서 사격 시범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커다란 대궁이 소 교위의 손에 넘겨졌다. 소 교위의 키만 한 커다란 대궁의 현은 단단하여 장정들도 제대로 당기기 어려워하는데, 동백은 무척이나 손쉽게 해내었다.
화살을 대고 어려움 없이 현을 팽팽할 정도로 당기는 그 과정이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워, 주변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동백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탁, 소 교위의 손가락이 가볍게 현을 놓았다. 날아간 화살촉은 사람 모양 과녁의 심장에 박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화살 하나를 더 메겼다. 또다시 날아간 화살은 이번엔 과녁의 목을 꿰뚫었다.
동백이 쏘아 올린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환호하였으나, 그 화살이 몇십 개가 되고 나니 다들 기가 질려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동백이 활을 넘기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나서야 궁병들은 동백이 놓고 간 활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와, 이걸 당겼단 말이지?”
“겉보기로는 영락없는 어린애인데 힘이 대단해. 저런 팔뚝으로 어떻게 이걸 쭉쭉 당기지?”
“쏘는 족족 다 맞추는 거 봤어? 신궁이 따로 없더구만!”
감탄이 끝없이 이어졌다. 동백은 어린 나이와 낙하산이라는 선입견을 벗겨 내고 보니 한없이 매력적인 이였다. 동백의 결정은 항상 명쾌했고 중언부언하는 일이 없었다. 칼과 같이 단호하였으며 추진력도 좋았고, 특히 예산을 얻어 오는 재주가 엄청났다. 물론 그 돈은 전부 동백의 양부 주머니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모로 가도 목적지로만 가면 되는 일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백은 겉으로는 엄한 상관이었으나, 자신 휘하 천여 명의 경조사를 일일이 신경 쓰는 등 배려심 또한 넘쳤다. 병사 누구누구의 결혼식에 소 교위가 고운 비단을 내려 줬다더라, 누구누구의 어머니가 아프신데 약값이 없어 고민 중에 소 교위가 넌지시 불러 약 한 첩을 내려 주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곤 했다.
그렇게 그의 뛰어난 능력과 섬세한 성품을 알고 나니, 뒤늦게 그 아름다운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기생오라비 같다며 비꼼의 대상이었던 외모가 이제는 동경과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연병장에서 훈련하는 자신들에게는 괴롭기만 한 햇살이었지만, 그것이 동백에게 닿으니 그것은 천상의 빛이 되었다. 엷은 잿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으며, 하얀 피부는 아무리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듯 도자기 인형처럼 여전히 매끄럽고 하얬다.
선계에 사는 동자들이 저러할까. 도저히 지저분하고 얼룩덜룩한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나님도, 그들의 딸자식들도 저리 생기지는 않았다.
귀족 나리라 그런 것일까 싶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전 상관을 떠올려 보면 그건 또 아닌 듯싶었다. 귀족이었던 전 상관은 뒤룩뒤룩한 돼지였으니까. 그자도 살결이 허옇긴 했지만, 동백과는 달리 단지 햇볕 아래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동백은 서류 작업을 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을 연무장에서 그들을 감시하며 보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부분을 발견하면 불호령이 떨어져 내렸다.
“지금까지 쇠뇌(발사 장치가 달린 활)만 믿고 궁술 훈련을 안 한 것이 자세에서부터 티가 나는구나! 다리는 좀 더 벌리고! 가슴은 펴고 팔은 수평이 되게 하고!”
“시, 시정하겠습니다!”
동백의 약간 탁한 목소리가 연무장 저쪽에서 울렸다.
먼지를 너무 먹었는지 목소리가 꺼슬꺼슬하게 들렸다. 동백이 궁병들을 호되게 질책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진진이 물 한 컵 떠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그 모습은 종사(從事)가 아니라 종자(從者)라 이름 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진진, 그는 종사라는 직책이 울 정도로 새 교위님의 종자 노릇을 잘하고 있었다.
동백의 불호령이 이쪽으로 튈까 두려웠던 백부장들은 부하들을 재촉했다.
“어서 뛰어넘지 못해! 뭘 그리 꾸물거려?”
애꿎은 백부장의 질책에 안 그래도 막 뛰어넘을 준비를 하던 병사는 억울함에 울상 지었다. 하지만 짬밥으로도 직책으로도 택도 안 되는 고로, 그는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어 후딱 장애물을 향해 말을 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백을 흘끔흘끔 지켜보던 이는 백부장들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훈련장 입구 쪽에서 작은 그림자가 기웃거렸다. 훈련장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지만, 흔들거리는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이 풀숲 위로 튀어나와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드러나는 얼굴은 오밀조밀한 매력이 있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10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슬픔과 처량함을 간직한 편도의 씨앗과 같은 눈매가 깜빡깜빡 움직이며 동백의 모습을 담았다.
우연에 더 이상 기댈 수 없었던 그녀는 이제 이런 식으로밖에 소 공자를 만날 수 없다. 소녀, 리리의 눈가에 울음이 차올랐다. 하지만 동백의 모습이 눈물에 흐려지자 냉큼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동백의 당당하고도 기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보고 싶었다.
리리는 그 하진이라는 사내와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만약 동백과 자신이 정인 관계이기라도 했더라면 동백에게 구해 달라 애원했을 것이다. 혹은 아버지에게 자신은 정인이 있다며 호소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단 두 번의 인연이 스쳐 지나갔을 뿐인, 리리가 동백에게 일방적인 짝사랑을 품고 있는 관계였다. 그러니 소 공자에게 기댈 수도 없고, 자신을 구해 달라는 파렴치한 부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혹여나 동백의 앞에 서면 그런 제 속마음이라도 내비칠까, 그에게 폐가 될까 싶어 더 이상 그의 앞에 나설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리리는 손 마디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자신의 치맛단을 움켜쥐고 울음을 참은 채, 반짝반짝 빛나는 동백의 모습만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