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꽃 (51)화 (51/522)

* * *

‘소 교위님의 혼례 이후로 이상하게 서류가 많아진 기분이란 말이지.’

진진은 투덜거렸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자신의 머리까지 올라선 서류의 더미는 시야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무겁기까지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진진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휘적휘적, 다리 사이를 휘감는 옷자락이 안 그래도 힘든 진로를 더 방해했다.

누군가가 뒤에서 본다면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모습에 폭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복도에 진진의 꼴을 보며 웃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동시에 그의 짐을 거들어 줄 사람 또한 없었다.

진진은 소처럼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쥐가 갑자기 튀어나올 줄이야. 서류에 가려 쥐의 등장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진진은 그대로 쥐를 발로 차 버렸다.

“찍!”

“젠장! 이게 뭐야!”

발끝에 챈 쥐 때문에 다리가 꼬인 진진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앞에 삐죽이 나온 옷자락을 밟고 와당탕 크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으악!”

탕, 탕, 탕…….

서류가 나무 바닥에 떨어지며 나는 청명한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좀 조용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마치 콩 한 됫박이 쏟아져 내리는 듯 시끄러웠다.

“으구구……. 빌어먹을 쥐 새끼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고양이처럼 굽은 허리를 부여잡은 진진은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진진은 부디 아무도 안 보았기를 기원하며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무참히 박살 났다. 복도 저 멀찍이서 걸어오던 병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입을 한일자로 다문 채 번뜩이는 눈이 인상적인 병사는 작은 체구임에도 단단한 근육이 두드러졌다. 진진을 향해 가까이 다가온 병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서류 뭉치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민망해진 진진은 헛기침을 했다. 원래 약한 개일수록 잘 짖기 마련. 부끄러워진 진진은 오히려 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허세를 부렸다.

“흐, 흠, 소 교위님께 올라갈 중요한 서류니 혹여나 펼쳐지지 않게 조심해서 줍게!”

병사는 진진의 쓸데없는 허세에 비웃음 짓거나 화를 내는 대신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서류들을 묵묵히 주웠다. 어지간히도 말이 없는 이었다.

서류는 나무 판에 차곡차곡 쌓여 산을 이루었다. 복도 저 멀리까지 굴러갔던 마지막 서류까지 나무 판에 올려놓고 나서야 병사는 큰 눈동자를 굴려 진진을 바라보았다.

“다 주웠으면 들고 따라오게! 흠흠.”

직시하는 곧은 눈길에 머쓱해진 진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상대적으로 커다란 검은 눈망울은 흔들림 없이 잔잔하여 묵직한 느낌을 줬다. 일개 병사일 뿐인데, 진진은 도저히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진진은 서둘러 교위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이놈이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진진은 병사를 재촉했다.

“어서!”

그제야 병사가 발을 뗐다. 그는 진진의 뒤를 따라 말없이 교위실로 발을 옮겼다.

* * *

“교위님, 저 진진입니다.”

“아, 그래. 들라.”

동백의 바로 이어지는 허락에 허리를 곧추세운 진진은 없는 뱃살을 거드름 피우듯 내세웠다.

‘흠흠, 나는 소 교위님과 친하다고. 이렇게 바로 집무실에 들이는 사이란 말이지.’

진진은 뒤에 서 있는 병사에게 동백과의 친분을 과시하였으나, 정작 병사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였다.

오히려 놀란 것은 동백이었다.

진진만 들어설 거라 생각했는데 뒤따라온 낯익은 모습이란! 노리고 있던 사냥감이 제 발로 다가왔다. 웃음을 애써 참는 동백의 오른쪽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동백의 그 모습을 잘 훈련하는 병사를 끌고 와 짐꾼으로 쓴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오해한 진진은 황급히 변명했다.

“오, 오다 보니 마주쳤을 뿐입니다. 같이 오는 길이었습죠. 헤…… 헤헤…….”

어딘지 모르게 비굴해 보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뒤의 병사에게 얕보이든 말든 일단 동백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들고 오다 넘어져 병사의 손을 빌렸다고 솔직히 말하면 동백도 이해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니 칠칠치 못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영 싫었다.

‘차라리 아랫것들을 부려먹는 악독한 상관이라 오해당하는 게 낫지……!’

진진은 비굴함 속에 마지막 허세를 숨겼다. 하지만 동백은 오른쪽 눈썹을 올린 그대로 피식 웃으며 진진이 애써 감춘 허세를 고스란히 끄집어내었다.

“넘어졌나 보군.”

“아니,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동백을 바라보았다. 동백은 낮게 웃음 지었다.

“자네 무릎을 보게. 옷이 해진 데다 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

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릴 뿐인 진진의 모습은 아까 이상으로 퍽 우스웠다.

“서류는 이리 주게.”

동백이 손짓했다. 병사는 동백의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렸다. 동백은 제일 위에 있던 서류를 묶은 끈을 끌러 내며 진진에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보아하니 뒤의 병사가 도와준 듯한데, 고맙다는 인사는 했나?”

“물론이죠! 음……. 고맙네.”

진진은 서둘러 덧붙였다. 병사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가 어려운 법이지.”

심드렁히 대꾸한 동백은 건네받은 서류 중 시급한 것만 일단 결재하여 진진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도장을 들었다.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팔뚝이 가녀렸다. 단칼에 병사의 목을 베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병사, 악진은 사람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단정하는 소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내였으나, 낙양의 유명인사인 동백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레 흘러들어 왔다.

어린 나이지만 어른 뺨친다, 이쁘장한 외모와 달리 성정이 잔학하고 냉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피가 차갑다 못해 푸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실제로 본 소동백은 생각보다 잘 웃었다. 지금 이 순간만 본다면 잔학함이나 냉정함은 털끝만큼도 찾아낼 수 없었다.

물론 소 교위가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입가에 걸린 장난스런 미소는 동백 나이 또래 아이들이 지을 만한 치기 어림이라기보다, 손윗사람으로서 어린이를 놀리는 여유로움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백은 서류에 도장을 내리찍었다. 일에 열심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건성인 듯한 모습이 시선을 잡아챘다. 그렇게 악진이 저도 모르게 동백을 살피는 찰나, 서류에 몰두하는 줄 알았던 동백이 급작스레 말을 걸었다.

“자네, 악진 맞지?”

동백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악진은 퍼드득 놀랐다. 게다가 동백을 몰래 훔쳐보던 도중이었다. 평소였다면 한 점 부끄러운 것이 없었을 터지만 지금은 몸이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렇다 하여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할 악진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그는 빳빳이 고개를 천장으로 향하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옛, 제7소대 악진이라 합니다.”

작은 키에 비해 중량감 있는 목소리는 쩌렁쩌렁 교위실을 울렸다. 그런 악진의 모습에 동백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군.’

7대 백부장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기로는 입이 무겁다더니만, 딱 보기에도 악진은 말수가 적어 보였다. 자고로 부하로서 그 또한 매력 요소였다. 적응하기까지 속이 몇 번이고 터질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수다스러운 것보다 저렇게 답답할 정도로 침묵하는 상대가 기꺼울 때가 있었다. 수다스럽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자오를 떠올린 동백은 속으로 킥킥대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침착하기 그지없다. 동백은 서류 결재를 이어 가며 악진에게 계속해서 찌를 드리웠다.

“그래, 내 자네에 대해 7대 백부장에게 많이 들었지. 훌륭한 인재라고 말이야.”

“과찬이옵니다.”

“아니네, 백부장 말이 사실이었군. 말을 허투루 하는 이는 아니었어.”

관심이 있는 듯도 없는 듯도, 그저 판에 박힌 말을 하는 것도 같지만 속에 뼈가 있었다. 악진은 왠지 모를 무게감을 눈앞의 소년으로부터 느꼈다. 하지만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 어쩌다 보니 바쁜 사람을 오래 잡아 두고 있었군. 이만 가 보게나.”

“옛!”

악진은 바로 발걸음을 돌려 교위실을 나섰다. 그런 악진의 뒷모습을 동백은 굳이 바라보지 않았다.

‘아, 직접 만나 보니까 더 탐나네.’

동백은 맑고 강직해 보이는 악진의 눈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고지식해 보일 정도로 한일자로 다문 입과, 작은 키에도 느껴지는 단단한 풍채. 삼국지 속의 악진이 확실히 맞는 것 같았다.

‘이런 인재를 빼앗기게 된다니, 조조도 참으로 안타깝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조는 그 시절 인재란 인재는 모조리 데려가 버린 인재 콜렉터였다. 동백이 앞으로 얻으려는 인재 중 태반이 원전 속 조조의 부하로 내재하여 있던 이들일 게 틀림없었다.

악진은 그 첫 타자일 뿐이다.

‘알 게 뭐야.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지.’

동백은 조조에 대해 품고 있던 미안함을 바로 싸서 버려 버렸다.

그런 동백마저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현재 동백을 열과 성의를 다해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는 진진이 본디 유비의 부하가 될 이였다는 것이었다.

진진, 자는 효기(孝起)인 그는 유비가 형주목일 당시부터 그에게 충실하였고, 훗날 촉나라의 삼공구경 중 하나인 위위(衞尉)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어 오나라와의 중요한 연락을 도맡았다.

삼국지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백이었으니 진진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몰랐다. 동백이 어떤 행로로 걷게 될지 또한 동백이 결정한 대로 쉽사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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