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장양을 배웅하며 방을 떠날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있던 조조는 장양이 없어지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휴으, 취기가 싹 달아났네그려.”
조조는 냉큼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워 냈다. 조조가 침대에서 빠져나온 것과 장양을 배웅한 동백이 돌아온 것은 동시였다. 동백이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은 이만 파하는 게 좋을 듯싶군요. 아버지가 신경 쓰여서 뭐 마음 편히 마시겠습니까.”
“핫, 장양이 한 번 왔다 갔으니 두 번 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더 마시자고, 더.”
하지만 조조가 그리 쉽게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자신을 부추기는 조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동백은 다시 술자리에 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좀 더 시간이 느지막해져 달이 머리 위로 뜰 정도의 시간이 되었다. 집 안 모든 이들이 잠이 들어 조용한 가운데, 조조는 결국 마지막 한 동이를 비우지 못하고 그대로 탁자에 쓰러졌다.
“쯧쯧.”
동백은 혀를 차며 탁자에 엎어진 조조를 일으켜 세웠다. 취해서 몸이 늘어지다 보니 아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끙차.”
동백은 조조의 한 팔을 어깨로 넘긴 채 조조를 안아 올렸다.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크지만 그래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조조의 손이 축 늘어지고 발이 흔들렸다.
동백은 아까 전 조조가 숨었던 침대에 도로 조조를 뉘였다. 툭. 딱히 섬세함 없는 배려에 조조의 머리가 가벼이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동백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발밑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불을 펼쳐 조조에게 덮어주었다.
술자리로 탁자가 어지럽혀진 것 정도야 내일 시녀들이 다 치울 테지. 동백은 뿌드득, 좌우로 목을 꺾으며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자신도 이제 잘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동이 터오기 전의 이른 시간.
새벽녘에나 잠이 들었지만 습관적으로 눈이 일찍 떠진 동백은 눈만 꿈뻑꿈뻑 떴다. 동백의 품속에 웅크리듯 잠자고 있는 리리가 동백의 움직임에 체온을 탐하듯 더 파고들었다.
동백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떠올려 보았다.
‘……그래. 어제 조조와 술자리를 가졌지. 장양이 들이닥쳤고…….’
그제야 동백은 조조를 별채에 버려 두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 하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내보내야 한다. 동백은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리리가 좀 더 잘 수 있게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주고는, 흰 속옷 위에 웃옷을 하나 걸치고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자르륵. 발을 넘기며 방 안으로 들어서 보니 조조는 여전히 취침 중이었다. 어지러이 뒹구는 술병과 술잔은 어제의 행적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동백은 조조에게 다가갔다. 잠버릇이 썩 나쁘지는 않은지, 어제 동백이 눕힌 그대로 자고 있는 조조의 모습에 동백은 기가 찬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빠진 건지, 대범한 건지. 여기가 어디라고.”
적진이라면 적진인 곳에서 곯아떨어져서 늦잠까지 자는 조조의 모습에 동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 의랑. 아니, 맹덕. 일어나십시오.”
동백이 조조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백의 손이 조조의 등에 닿기 전, 조조가 동백의 손을 낚아챘다. 뒤늦게 동백의 얼굴을 확인한 조조는 그제야 동백의 손을 풀어주며 눈을 비볐다.
“……뭐야, 자네인가.”
“그럼 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일어났으면 누워서 뒹굴거리지 말고 어서 나갈 채비나 할 것이지. 지금 이럴 여유가 있습니까?”
“지금 일어났네, 지금 일어났어. 자네 기척에 잠이 깼어.”
조조는 졸음기 어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 아주 느긋해 보였다. 동백은 그런 조조를 흘겨보았다.
“입궁해야 하지 않습니까. 집에 가서 의관 좀 정돈하고 가려면 지금도 늦을 텐데. 서두르십시오.”
“내 참 이리도 매정할 수가. 빈속에 내보내다니, 참 정 없어. 꿀물이라도 한잔…….”
“꿀물은 연분 난 처자들에게 가서 달라고 하고, 어서 일어나십시오.”
동백은 계속해서 조조를 재촉했다. 조조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었으나, 동백이 따가운 채찍질처럼 쏘아붙이니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침상에서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가면 되지 않아.”
조조는 잔뜩 구김이 간 옷을 탈탈 털어 내었다. 확실히 복장도 문제거니와 꼴도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턱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나 있었다. 조조는 까칠해진 턱을 매만졌다. 아침에 일어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타고 웅웅대었다.
“꼴이 우습구만.”
“그러게 제가 자라고 할 때 잤으면 옷도 그리 엉망이 되지 않고, 일찍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침대로는 자네가 옮겼나?”
“그럼 누가 옮깁니까?”
동백에게 뒷정리까지 맡겨 버리다니, 이번에 신세를 져도 단단히 졌다. 미안해진 조조는 느슨해진 허리띠를 다시 묶어 내며 답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뭐가 미안합니까. 맹덕이 그리도 바라는 꿀물 하나 못 타 주는 내가 더 미안하지요.”
“또 또, 비꼬긴.”
조조는 낄낄 웃으며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어제 그들이 들어선 곳으로 향했다.
“…….”
조조는 멍하니 담벼락 끝만 올려다보았다. 이내 조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동백을 돌아보았다.
“내가 어제 이 담을 어떻게 넘었더라?”
“제가 옆구리에 끼고 같이 넘었지요.”
“……오늘도 부탁하네.”
동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깍지 껴 앞으로 내밀었다.
“밟고 뛰십시오.”
소년의 옆구리에 달랑달랑 매달려서 옮겨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조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실례 좀 하지.”
타다닥, 조금 멀찍이에서부터 달려온 조조가 힘차게 땅을 박찼다. 동백의 손에 다른 발을 얹음과 동시에, 동백은 힘껏 조조를 위로 던져 올렸다.
까마득히 높아 보였던 담이었지만, 도움닫기를 하고나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조조는 가까스로 담장에 팔을 얹은 채 낑낑대며 담 위에 올라앉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땅이 저 멀리쯤에나 있었다. 아래에서는 동백이 여전히 웃옷 안으로 팔짱을 낀 채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가라고 재촉하는 표정에 조조는 씩 웃었다.
“그럼 궁에서 보세나!”
쾌활히 외친 조조는 반대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담 너머에서 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발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동백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발을 돌렸다.
* * *
간만에 궁에 입궐한 동백은 머리를 단정히 넘겨 올리고 관모를 썼다. 질질 끌릴 정도로 기다란 관복은 무겁고 거동이 불편하여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관복을 입지 않고 입궐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동백은 조금 일찍 나가 마구간에서 비단을 끌어내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검은 털이 좋은 혈통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평소처럼 쉽게 안장에 올라앉았으나 옷 길이 때문인지 조금 기우뚱했다.
‘등자를 만들든가 해야지.’
동백은 혀를 찼다. 등자가 없어서인지 승마를 하면서도 영 옛날 그 기분이 나지 않았다. 물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최고지만.
동백이 비단을 타고 대문 앞으로 향하니 이제 막 준비를 마친 장양이 황 노인과 함께 나왔다. 장양이 탈 가마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장양은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바로 가마에 탔다.
조례가 있어 궁에 입궐하는 날은 언제나 장양과 함께 나가곤 하였다. 장양은 가마를 타고, 동백은 그 옆에서 느릿하니 말의 보폭을 맞추어 같이 담소나 나누며 가는 것이었다.
“어제 그 부하인가는 잘 보냈느냐? 아침이라도 먹여 보내지, 뭘 그리 일찍 보냈어?”
“하하, 굳이 집에 꼭 들어가 봐야 한다 그래서 말입니다.”
조조는 꽤나 유명 인사였고, 하인들 또한 그의 외모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헐레벌떡 내보낸 것이었는데, 그러길 참 잘했다 싶었다.
조조에게 한 방 먹일 생각으로 데려온 건데, 막상 그 상황이 되자 동백 자신이 마음을 졸이며 조마조마하게 되다니 참으로 수지타산 안 맞는 일이었다.
그나마 장양에게는 들키지 않아 다행이네……. 동백이 그리 안도한 순간, 장양이 말을 툭 내뱉었다.
“하긴, 나와 얼굴을 마주해서 좋을 사이는 아니니까.”
비단의 허리를 옥죄는 동백의 발끝에서부터 전기가 찌르르르 올라왔다. 심장이 쿵덕쿵덕 울리면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알아챘다. 알아챈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리 없으니까.
속으로는 미치고 팔짝 뛰다가 꼬꾸라질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동백은 천연덕스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고수했다. 동백이 그러거나 말거나, 장양은 계속해서 앞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남들 앞에서 큰소리로 혼이 나서야 사내대장부 체면이 영 안 서지 않겠느냐.”
그 장양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유하고도 너그러운 처사였다. 줄곧 모르는 체하던 동백의 얼굴에 죄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동백의 표정이 바뀜과 동시에 장양은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
가마를 끌던 이도 움찔할 정도의 큰 호령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줄곧 저 멀리 보이던 황궁만을 응시하던 장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동백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동백은 장양의 눈동자 안에서 아직 누그러지지 않은 노염을 보았다.
“두 번은 없다.”
짧은 말은 그만큼 강렬하게 동백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동백은 살벌할 정도로 조조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장양의 말을 마냥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저렇게 증오함에도 어제는 내 사정을 보아 그냥 넘어가 주었다는 거지.’
장양이 동백의 사정을 봐준 만큼, 동백 또한 장양의 체면을 신경 써 줘야 했다. 동백은 당해 낼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그닥, 다그닥. 비단과 장양의 가마를 끄는 말들의 말발굽 소리만이 거리를 울렸다.
궁에서 보자며 사라진 조조의 모습이 퍼뜩 동백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앞이라 말을 안 하고 넘어간 것일 뿐, 장양이 궁에 가서 저 뾰족한 눈초리로 하루 종일 조조를 노려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뭐, 알아서 잘 헤쳐 나가겠지.’
동백은 그렇게 조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