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동백이 수하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백이 수저를 들어 입으로 옮기기까지, 근처 수하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동백이 평소에도 같은 식단으로 들이라 했던 만큼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참 신기했다.
생각해 보아라, 자기들과 같은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미인인 동백이었다. 언제나 차림새는 멋들어진 고급품. ‘그’ 십상시 장양의 외동아들. 솔직히 동백이 그들과 같은 희멀건 죽 따위를 먹는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백은 덥석덥석 잘도 먹었다. 동백은 천지 구분 못 하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다. 굶어 죽는 사람이 밖에 널려 있는 만큼, 동백은 한 끼 한 끼 굶지 않는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하고 있었다.
동백이 숟가락을 들고 나서야 병사들 또한 수저를 들었다. 동백의 편하게들 먹으라는 말에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왁자지껄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입을 열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동백의 바로 좌측에 있는 악진이었다.
악진은 기계적으로 밥을 먹을 뿐이었다. 언제 봐도 참으로 말이 없는 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에, 동백의 바로 앞에 앉은 백부장은 속으로 절규하였다.
‘아니, 악진! 밥만 먹지 말고 옆에 우군사마님께 말도 좀 걸어 보고 그러라고! 그래야 눈도장을 쾅쾅 찍지!’
아니, 솔직히 백부장의 입장에 사심을 섞어서 보면 악진은 참 좋은 사내였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동백에게 꼬박꼬박 악진의 이름을 언급하려 노력했는데, 정작 당사자 놈이 저렇게 무뚝뚝해서야…….
동백 또한 무뚝뚝하니 뚱한 악진이 어려워 선뜻 말을 못 걸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물론 그건 백부장의 착각이었다. 사실 동백과 악진은 전혀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오고 가며 인사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관계가 진척된 건 전적으로 동백의 의지 덕분이었다. 예전 리리의 생일날 악진이 당과를 선물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동백은 한 발짝 한 발짝 그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물론 동백은 리리에게 선물을 챙겨 준 이들 모두를 기억했을뿐더러 일일이 따로 포상을 챙겨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악진은 특별했다. 악진은 모르게. 그리고 다른 이들은 더욱더 모르게. 우연과 필연을 적절히 섞어서 동백은 악진에게 미끼를 드리웠다.
동백이 그리 비밀로 한 데다, 백부장 또한 자신이 흘린 이름을 동백이 기억해 줄 거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동백과 악진의 관계가 데면데면하다 착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동백은 악진이 말이 없는 이인 것도 알았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에 더 능한 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랬기에 악진과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동백에게 있어 나쁠 것이 없었다. 원래 그런 이이니까. 딱히 자신을 피하여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아니까.
동백은 밥 먹던 도중 대뜸 직구를 던졌다.
“아, 어제 고기 맛있게 먹었네. 백부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주라 했건만 그래도 내가 직접 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리 오게 되었네.”
식사는 온 김에 하는 거고. 동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백부장 말로는 지나가던 토끼를 잡았다고는 했지만, 이 근처에 군대가 주둔하며 사람이 득실득실하게 된 만큼 토끼들이 경계 없이 뛰어다닐 리가 없었다. 일부러 사냥을 나선 게 분명했다.
‘뭐, 진짜였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악진이 자신을 위해 애써 발품을 팔았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악진은 그냥 그리 말하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 하지만 조금 부끄러워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동백만 그리 생각했다. 사실 동백도 잘 몰랐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자기 자신을 세뇌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동백의 말을 들은 이들의 눈초리가 악진에게 내리꽂혔다.
‘이 사태의 원흉이 너였구나!’
하지만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식사를 하는 철면남 악진에게 그런 원망 아닌 원망이 먹힐 리가 없었다.
악진에게 눈총을 쏘아 보내는 다른 이들과 달리, 7대 백부장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동백에게 그저 악진의 이름만 말했는데, 우군사마님께서 정확히 악진을 찾아와 이렇게 말을 걸다니! 자신이 거듭 말을 올린 게 영 효과가 없진 않았던 모양이다.
7대 백부장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동백이 악진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다른 병사 중 편협한 이들은 악진이 동백의 눈에 들었다는 걸 질투할 수도 있다.
백부장은 과장스럽게 손을 휘두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설마 제가 악진에게 그 말을 안 전했을까 봐서 이리 오신 건 아니지요? 흑흑, 우군사마님께서 절 믿지 못하시다니 이 백부장, 서운합니다.”
큰 덩치에 털이 숭숭 나, 자칫 보면 산적 두목 같아 보이는 그가 우는 시늉을 하자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백부장님, 거참 꼴 보기 안 좋습니다. 우군사마님도 계시는데 그만하십시오.”
“저희 아직 식사 안 끝났습니다.”
낄낄대며 다른 이들이 농을 걸었다. 그만큼 백부장이 친근하고 인망이 있다는 증거였다.
동백 또한 백부장이 일부러 이목을 백부장 자신에게로 돌린 의도를 알았다. 정작 악진은 신경 안 쓰는데, 은근히 세심하단 말이지. 동백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7대의 모습을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여기저기서 제법 소란스레 식사가 진행되었다. 동백의 오른쪽에서 두어 칸 정도 옆에 있는 이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동백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교위님 연치만 한 병사도 있는 것을 봤지 말입니다. 어디까지 징병을 한 건지, 원…….”
“어허, 이 사람 보게나. 교위님이라니! 이제 우군사마님이신데!”
“어이쿠, 실, 실수입니다. 입에 붙어서. 하하하…….”
다른 장군이었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테지만, 동백은 그런 사소한 호칭 실수 따위로 한 소리 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병사가 꺼낸 말이 더 궁금했다.
“내 또래라 함은 한 열대여섯쯤일 텐데, 그리 어린 이도 있단 말인가?”
동백 또한 자신의 나이가 특출하게 어리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관한 화제도 동백군 사이에선 꽤 자유로웠다. 동백의 놀라는 듯한 어조에 흥이 난 병사는 이야기를 더 풀었다.
“예, 예. 원 교위님 쪽 일반 병사던데요. 처음엔 키가 훤칠해서 그렇게 어린 줄 몰랐는데, 투구 벗은 얼굴을 보니까 아직 애티가 절절하더라 말이죠. 이번에 황건적 놈들이 날뛰니까 괜한 정의감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것 같더만요.”
“하하, 젊은이가 정의감이 투철하면 좋은 것 아닌가.”
“그래도 괜스레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린 애도 참전해야 하는 전투라는 게 말이죠……. 아, 물론 교위, 아니, 우군사마님께서는 논외입니다!”
뒤늦게 병사는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근데 막상 말을 하고 보니 동백은 전장에서 굴러도 상관없다는 말이 된 것 같아 더 당황하여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아니, 제가 말하려는 건 그건 아니고, 우군사마님은 참으로 훌륭하시고…….”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네. 진정하게나.”
동백은 당황하는 부하를 진정시켰다. 왠지 동백의 촉이 섰다. 열여섯쯤 되는 소년병. 딱 듣기만 해도 네임드일 것 같은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동백의 귀에 들어오게 된 것 또한 예사 인연은 아니겠지. 동백은 혹시나 해 물었다.
“정확한 나이나 이름에 대해 들은 바는 없는가?”
“그냥 얼굴만 보고 제가 어림짐작한 바라서……. 헤헤……. 잘은 모릅니다요. 아, 다시 한번 보게 되면 꼭! 꼭! 꼭!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제가 아주 그쪽으로 가서 정보를 얻어 오겠습니다!”
꼭, 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스타카토로 붙인 일반병의 말에 당황한 동백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말을 할까 머뭇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그 소년병이 신경 쓰였다. 동백은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그러면, 부탁하도록 할까. 수고스럽겠지만 힘써 주게.”
“믿어 주십시오!”
동백이 웃으며 부탁하는 말에 병사는 식사하던 그릇을 밀어 두고 연신 허리를 숙이며 믿어 달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덕분에 동백과 그 병사 사이에 있던 이의 식사가 방해받았지만, 어찌 동백 앞에서 불평하겠는가……. 나중에 제 옆 놈이나 열심히 옆구리를 찔러 대는 수밖에.
* * *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언제까지 기다리란 소리인지!’
동백이 광종에 온 지도 몇 달이 지났다. 처음엔 노식의 신중함 또한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쯤 되니 천하의 동백이라 해도 기어코 지치고야 말았다.
동백이 그러하니 진작부터 노식과 함께했던 원소는 어떻겠는가. 원소는 몇 차례나 적을 급습하자 주장했지만 노식은 매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분기를 견딜 수 없었던 원소의 잘생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동백은 막사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했지만 속은 원소와 마찬가지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막사를 나서기가 무섭게 동백은 화풀이하듯 멀쩡한 땅을 박찼다.
동백이 소규모로 군을 이동시키는 것에 대해 노식이 별말 안 하니 그나마 견디는 것이지, 만약 사사건건 간섭하려 했다면 진즉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노식의 막사 근처에 잠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 동백은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며 성큼성큼 걸었다. 발걸음이 거침없었다.
낙양의 북쪽에 있는 광종은 아직이었지만, 시기상으로 보았을 때 지금쯤 낙양에 봄이 가고 더운 여름이 찾아왔을 터였다.
이제 여름이 가면 가을, 가을이 가면 겨울. 그리고 돌아오는 봄.
리리와 반드시 1년 내로 돌아가겠다 약조했던 만큼, 그 말을 꼭 지키고 싶었다. 동백은 리리가 1년 내로 무탈히 돌아오라며 얼굴을 붉힌 채 입을 맞췄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기대를 차마 꺾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상관이 저렇게 초를 치니……. 동백은 급한 맘을 쉽사리 다독일 수 없었다.